고양시일산노인종합복지관 식당에서는 날마다 노인 천여 명이 점심밥을 먹는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면 복지관 회원증이 있어야 한다. 회원증은 고양시에 주민으로 등록된 노인이라는 신분 증명이다. 밥값은 삼천오백원인데, 가난한 노인 사십여 명은 무료로 먹는다. 밥값 삼천오백원은 식자재비로 쓰이고 나머지 관리・운영비는 시 예산으로 충당한다. 국과 밥, 반찬 네 가지가 나온다. 밥과 김치는 더 먹을 수 있지만 제육볶음이나 어묵조림 같은 반찬은 더 주지 않는다. 메뉴는 선택할 수 없고, 식당에서 정한 대로 먹어야 한다.
노인복지관 식당은 일산 호수공원 안에 있다. 식당 맞은편 작은 동물원에 두루미 한 쌍이 있었는데, 2026년 3월에 광주 동물원으로 옮겨갔다. 두루미들은 그 삼대조가 흑룡강 언저리 숲에서 사람에게 붙잡힌 이래 인공부화기에서 태어나 바깥 구경도 못한 채 철망 안에서 늙었다.
일산 두루미 부부는 불임으로 새끼를 두지 못했다. 늙은 두루미 부부는 나무 상자에 갇혀서 트럭에 실려 광주로 갔다. 갈 때 두루미는 상자 속에서 높은 옥타브로 울었다. 두루미가 살던 철망은 지금 비어 있는데, 두루미가 미꾸라지를 잡아먹던 수조는 철망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두루미는 양어장에서 사육된 미꾸라지를 먹으며 철망 안에서 사육되었다. 빈 철망을 들여다보노라면 두루미가 먹이를 삼킬 때, 목안의 긴 식도를 따라 미꾸라지가 꿈틀거리면서 내려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미꾸라지는 산 채로 잡아먹힌다. 사육된 미꾸라지는 사육된 두루미에게 먹힘으로써 사육된 삶을 마감하고 두루미는 사육되는 삶을 연장해왔다. 이 철망 안에서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운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
복지관 식당은 내 작업실에서 걸어서 십 분 걸린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 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는 빈 두루미 철망 앞을 지나서 식당으로 들어간다. 두루미 철망 안에는 잡초가 돋았고 미꾸라지가 퍼덕이던 수조는 말라 있다.
점심시간은 낮 열두시부터 한시 삼십분까지이다. 열두시가 가까워지면 공원 안 여기저기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고, 모여 수다 떨고, 혼자 햇볕 쪼이던 노인들이 식당으로 모여들어서 배식구 앞에 긴 줄을 이룬다. 나는 무료 식객이 아니다. 나는 삼천오백원을 내고 먹는다.
‘노인밥’의 맛은 밍밍하고 무덤덤하다. 반찬은 맵거나 짜거나 싱겁지 않다. 아무런 중뿔난 맛이 없어서 넘기기에 편하다. ‘맛이 없다’는 말은 맛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맛’이라고 할 만한 감각이 돌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맛은 맛의 그림자나 흔적처럼 식재료의 식감 속에 숨어 있다. ‘노인밥’을 먹을 때 나는 가끔씩 동물원의 늙은 두루미가 미꾸라지를 먹을 때의 목 넘김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진도가 나아가지 않아서 생각이라기보다는 미망(迷妄)에 가깝다.
노인들은 식판 한 개씩을 앞에 놓고 ‘혼밥’을 먹는다. 지인과 함께 온 노인들도 대화 없이 조용히 먹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나란히, 또 마주앉아 말없이 먹는다. 노인 천여 명이 모여서 각자 먹는 혼밥은 ‘떼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식판을 반납하고 흩어져 돌아갈 때는 결국 ‘혼밥’이다.
‘노인밥’은 고양시청의 복지 정책에 따른 시혜일 테지만 이 식당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아무런 사회문화적 장식을 거느리지 않는다. 노인 식당의 점심시간은 생로병사의 질서 속에서 고요하고 삼엄하다. 이 밥 먹기를 비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노인은 활력이 없어서 우중충하고 걸을 때 어기적거리고, 등이 굽었고 말이 굼뜨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늙은이가 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젊었을 때, ‘늙음’은 나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고, ‘노인’이라는 구부정한 인종이 따로 있다고 느꼈다.
인간 사회가 경로(敬老)를 도덕의 항목으로 강조해온 까닭은 일상 속에서 그 덕목을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늙은이에 대한 젊은이의 위화감보다도 젊은이에 대한 늙은이의 위화감이 덜한 까닭은 젊은이는 늙음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늙은이는 젊음을 지나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태어남이 축복이고 죽음이 재앙인 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젊음과 늙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과 더불어 생로병사하지만 객관화된 시간을 인식할 수는 없다. 시간을 계량화할수록 시간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멀어진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인지, 흘러오는 것인지, 오지도 가지도 않는 절대적 현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식 너머에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전개되어 있는 사태를 신성히 여긴다. 나는 인식 바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무속이나 초능력이 아니고, 나의 생명이다. 시간은 내비게이션이 없는 바다처럼 막무가내로 전개되어 있고 그 위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는 가없는 물위에 뜬 파편과 같은데, 방향은 모두 한 방향이다.
노자(老子)는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추구로 삼는다(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라는 글을 남겼다. ‘추구(芻狗)’는 짚으로 만든 개의 모형이다. 제사 때 희생물의 대용으로 쓰고 제사가 끝나면 태워버린다. 추구는 불에 타서 재가 되고, 만물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자리로 돌아간다.
노자의 문장은 무정하다. 노자는 주어와 술어를 가차없이 박치기시켜서 벼락을 친다. 노자는 말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쟁여져 있던 말들 중 겨우 두어 마디가 밖으로 새어나오는 듯한 어조로 말하지만, 그 두어 마디 말은 가벼워서 자유롭고 늙어서 지혜로운 노인의 마음을 보여준다.
노자는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이미 늙어서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노인복지관 식당에서 ‘노인밥’을 먹고 있으면 노자의 이 말은 언어를 떠나, 언어를 구사하는 늙은이가 지어낸 멋진 아포리즘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 식당에서 불인(不仁)한 시간은 무한대로 전개되고 내 동료 ‘추구’들이 그 위에 떠 있다. 이 식당에서는 끼니때마다 무얼 먹어야 하는가 하는, 짬뽕, 짜장면, 육개장, 곰탕 사이를 부대끼는 번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동료 추구들과 따로 또 같이 흘러가는 장엄한 운명의 풍경을 나의 생애 속에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다. 생, 노, 병, 사는 네 개의 분리된 범주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엉켜서 밀거니 끌거니 하면서 가고 있다.
이 식당은 메뉴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계절마다 푸성귀가 바뀌고 육류와 해물도 두어 점씩 나온다. 먹기를 마친 노인들은 공원으로 나가서 여름에는 나무 그늘로 겨울에는 햇볕 바른 자리로 간다.
오늘(2026년 4월 20일) 아침 아홉시 삼십분쯤에 일산동부경찰서 옆 간선도로에서 배달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나는 작업실로 출근하다가 현장을 목격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허공으로 떴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온몸이 부서졌다. 피가 흘러서 고랑을 이루었고 배달중이던 음식이 길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밥을 배달해서 밥을 버는 사람이었다. 119 대원이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갔다. 그가 쓰러졌던 자리에 피와 음식물이 섞여 있었다.
낮에 ‘노인밥’을 먹는데, 아침의 사고 현장이 떠올랐다. 몸이 부서진 배달원은 한동안 밥을 못 먹고,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면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늘은 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노자는 연민이나 위안과는 거리가 멀지만 천지가 본래 불인하다고 해서 추구의 슬픔이 덜해지지는 않는다. 추구 노릇도 쉽지 않다는 걸 노자는 모르리.
‘노인밥’을 먹고 나서 꽃 핀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백제 무령왕(武寧王, 462~523년) 무덤 속의 밥숟가락이 생각난다. 국립공주박물관에는 1971년에 발굴된 이 무덤의 내부가 전시되어 있다. 벽돌로 쌓은 현실(玄室) 입구에 동전 꾸러미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석수(石獸) 한 개, 그 뒤에 왕과 왕비의 숟가락 젓가락 두 세트와 밥그릇이 놓여 있다. 현실 안에 안치된 왕 내외의 목관 한 쌍은 칠이 두껍고 금붙이로 장식을 박아서 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세가 등등하다. 이 웅장한 관 앞에 숟가락 젓가락 세트와 밥그릇이 소반에 받쳐져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무령왕릉은 발굴 당시 절차와 관리가 혼란스러워서 내부가 많이 헝클어졌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무덤 내부가 매장 당시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 참가자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재구성했으므로 큰 윤곽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남진하는 고구려 세력에 밀려서 한성에서 공주로 도읍을 물리기는 했으나 무령왕은 다시 고구려와 말갈을 군사력으로 제압해서 고토를 회복하고 국위를 떨쳤다. 무령왕은 죽기 십일 년 전부터 무덤을 짓기 시작해서 무덤 내부를 휘황찬란한 보물과 중국제 명품으로 꾸몄다. 녹슨 숟가락과 젓가락 세트가 그 관 앞에 놓여 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눈물겹고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생김새가 과장된 이 숟가락은 왕 내외가 생시에 쓰던 것은 아니고, 죽어서도 먹기는 먹어야 하니까 내세용(來世用)으로 만든 상징적인 물건이다. 젓가락은 단순한 막대기 두 개로, 디자인을 과장하지 않았다. 이 무덤에는 금이나 보석이나 명품이 아니면 얼씬거릴 수가 없는데, 숟가락과 젓가락은 웬일인지 청동으로 만들어서 검푸른 녹이 슬어 있다.
무령왕 내외는 생시에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많이 먹었겠지만 어제의 밥으로 오늘의 허기를 견딜 수 없는 것은 무령왕과 내가 다르지 않다. 무령왕이 생시에 자신의 무덤에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을 넣으라고 지시했는지는 역사책에 쓰여 있지 않지만 내세에도 수저가 필요하다는 것은 군신 간 무언중에 공감하고 있었을 터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추구’의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모든 욕망과 기획이 전쟁과 문명과 역사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무령왕의 녹슨 청동 숟가락은 이 호화스러운 무덤 속에서 숟가락으로서 있어야 할 제자리에 정확히 놓여 있다.
이 숟가락은 고양시 노인종합복지관 식당의 숟가락과 다르지 않다.
무령왕릉에서 요강은 나오지 않았는데, 내세에서는 똥 눌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