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진 신신이발소 ―김애란의 글에 기대서 쓴다

 

소설가 김애란의 산문집 『그랬다고 적었다』가 나왔다(문학동네, 2026년 8월).

이 산문집의 앞쪽에 실린 산문 네 편을 읽고, 나는 김애란의 성장 과정과 어머니, 아버지, 세 자매의 삶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 김애란은 말을 감추면서 말을 하고 있지만, 읽는 사람은 조금 읽어도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지금부터 쓰려는 글의 사실관계는 김애란이 이 산문집에 써놓은 글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김애란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끝 무렵에 태어났다고 하니, 지금(2026년)은 70대 중후반쯤 되었을 터이다. 이 아버지는 충남 서산군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이용(理容) 기술을 배워서 평생을 지방 소읍의 이발사로 일하면서 가족을 건사했다. 젊었을 때는 남의 가게에 고용되어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자신의 가게를 차렸고, 내 집도 마련했다. 늙어가면서 아버지는 ‘가족과 이발소’를 더욱 각별히 여겼다. 이 아버지가 이제 몸이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여러 병원을 옮겨다니다가 지금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평생 이발 일을 해온 이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서도 병 수발을 들고 있는 가족들의 헤어스타일을 품평하고 또 머리통과 얼굴을 쓰다듬는다.

김애란은 아버지가 헤어스타일을 품평을 하자

 

―안 그래도 아빠가 뭐라 할까봐 앞머리 좀 자르고 왔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43쪽)

 

이 문장으로 봐서, 김애란의 아버지는 막내딸(김애란은 쌍둥이 자매의 동생이다. 그 위로 연년생인 언니가 있다)의 앞머리가 너무 길다 싶어서 평소에 잔소리를 좀 했던 모양이다.

 

……애란아 너, 앞머리 좀 잘라야겠다.

 

이번에 나온 책 앞날개에 실린 사진을 보니까 과연 김애란의 앞머리는 너무 길다! 길어서 이마를 완전히 덮고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김애란의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이 딸의 이 같은 헤어스타일을 본다면 마땅히 잔소리를 할 것이다.

 

……너 앞머리 좀 잘라라.

 

김애란은 아버지를 뵈러 갈 때만 앞머리를 조금 자르고, 평소에는 이 사진처럼 길게 기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김애란을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 어쨌거나, 김애란의 앞머리는 너무 길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새카만 눈동자 두 개가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 눈동자는 세상을 안 보는 듯이 보고 있고, 세상을 향한 연민을 안으로 밀어넣어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어느 날 요양병원에서 면회시간이 끝나갈 무렵에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갑자기 두 팔을 들어 지휘자처럼 움직이는 거였다. 처음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곧 아버지가 두 손을 떨며 허공에 대고 가위질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정성스럽게. 진짜 손님 머리라도 만지듯이. 그 모습을 보자 결국 그때까지 참아온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48쪽)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김애란이 우나 안 우나 조마조마했다. 결국 문장 서너 개를 더 쓰고 나서 김애란의 눈물이 터졌다. 거봐라, 김애란이 결국 우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울 때는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는데, 머리를 숙이면 머리카락은 더욱 늘어진다. 이마를 덮고 눈썹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이 떨어져내려왔겠구나, 사진을 보니 김애란은 눈동자가 크니까, 눈물도 씨알이 굵어서 고드름 녹은 물처럼 뚝뚝 떨어졌겠구나, 연민을 숨기는 것도 괴롭고 드러내는 것도 괴롭구나. ‘애란아, 너 앞머리 좀 잘라야겠다’라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라서 김애란은 진짜로 슬펐겠구나.

 

아버지의 ‘헛이발’을 쓴 김애란의 글을 읽다보니까 53년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는 젊어서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일전쟁 시절에 동북아시아, 극동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방랑하다가 광복 후에 서울에 돌아와서 나를 낳았다(1948년).

아버지의 생애를 요약하자면, 밥을 벌어서 처자식을 건사해야 한다는 운명과 가정과 혈연의 속박(당신의 표현으로는 마구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운명이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파탄을 이루는, 한바탕의 희비극이었다. 나의 글이 다소 관념적으로 되었지만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현실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고 시대의 질곡에 몸을 갈면서 좌충우돌했다. 그는 북만주의 유랑지에서부터 시작해서 해방 후 좌우 투쟁의 서울 거리, 피난지 부산의 남포동, 전쟁 후 명동의 잿더미에 이르는 당대의 폐허 위에서 거친 술을 마셨다. 그의 술은 목가적일 수가 없었고 늘 쟁투적이었다.

아버지는 늘 울분에 차 있었고 눈에 핏발이 서 있었고 머리카락은 부스스했다. 아버지는 어디를 다니는지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와 다투었다. 나는 아버지가 불쌍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툴 때는 심정적으로 아버지의 편이었다. 어머니는 방바닥을 치면서 울었다.

 

―너는 왜 늘 니 아비 편이냐! 너도 자라서 니 아비처럼 되겠구나. 아이고 사내 놈들은 다 한통속이다!

 

내가 아버지 편을 들더라도 어머니의 설움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머니에게 거기까지 이해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육군 병장의 계급장을 달고 휴가 나와서 아픈 아버지의 아래를 보살펴드렸다. 아버지는 이미 부끄러움도 없이 벗은 몸을 아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말기 암이었는데, 말년에는 진통제도 듣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은 병과 한몸이 되어서 누워 있었다. 몸의 외부에 병이라는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몸안에서 스스로 병을 키워서 병을 동반으로 삼아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몸이 있음으로 병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수발들 수는 있지만, 나의 몸은 아버지의 몸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서 나는 다만 아버지의 곁에 있을 뿐 고통은 오로지 아버지 혼자만의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가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당신의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미안허다.

 

라고 말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마지막 음성이었다. ‘미안허다’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애를 한마디로 정리해서 아들에게 말해준 유언이었다. 그것은 잘 간추려진 요점이었다.

휴가가 끝나고 다시 부대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미안허다’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휴가병의 눈물.

 

김애란 아버지의 ‘헛이발’은 오래 아파 누운 사람이 돌아갈 수 없는 생활을 향해서 보내는 헛된 몸짓이라 해도 거기에는 ‘이발’이라는 삶의 실체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안쓰러운 몸짓은 생활의 그림자로서 여전히 생활에 근거하고 있지만, 내 아버지의 ‘미안허다’는 삶을 거머쥐려고 애쓰던 자가 마침내 잡지 못하고 절벽 앞에서 주저앉는 쓰라림이었고, 생의 마감을 앞두고 육군 병장인 아들에게 네 음절로 토로해야 하는 슬픔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시는 편이 당신을 위해서나 아들을 위해서나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미안허다’는 이미 내 가슴에 와서 박혀 있다. 알게 모르게 상처는 일상의 곳곳에 널려 있다. 내가 내 아픈 아버지의 몸으로 건너갈 수 없었듯이 김애란이 아버지의 ‘헛이발’에 눈물을 흘려도 아픈 아버지의 아픈 몸으로 건너갈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나온 산문집을 보니까, 김애란은 어머니, 아버지를 장시간에 걸쳐서 인터뷰했다. 두 분을 한자리에 모셔놓고 한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했다니까, 객관적 진술을 받아내려 했던 것 같은데 딸로서는 좀 모질구나 싶다. 그 인터뷰에서 얻은 정보와 이야기의 파편들은 「달려라, 아비」 같은 작품 속에서 소설화되어 있고, 이번 산문집 속에도 흩어져 있다.

김애란의 아버지는 인천시 도화동에 자신의 소유인 첫 이발소를 차렸다. 상호는 ‘신신이발소’. 인천 도화동에서 김애란의 다섯 식구(어머니, 아버지, 세 자매)는 단칸방에서 살았다.(67쪽) 그로부터 몇 년 후 김애란 일가는 서산시 대산읍(서산의 가장 북쪽. 김애란은 대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의 신축 빌라에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집안에 책 놓을 자리가 생기자 아버지는 우선 서른두 권짜리 『大望』 전집을 사와서 한 번에 다 읽었다.(66쪽)

연도를 따져보니까 김애란의 아버지가 『대망』을 읽던 시절과 내가 『대망』을 읽던 시절은 대충 비슷할 것 같다. 그 무렵에 나는 결혼해서 박봉으로 아이 둘을 기르느라고 마소처럼 일하면서 허덕지덕하고 있었다. 나도 그때 『대망』을 서너 번쯤 읽었다. 『삼국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열 번도 더 읽었다. 『대망』과 『삼국지』는 내 또래 한국 남자들이 열광했던 책이다. 지혜와 경륜이 가득찬 처세의 교과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지금 돌아보니 경륜이고 지혜고 자시고 할 것은 없었고, 국가의 정당한 물리력이라는 의미의 무(武)도 없었고, 도덕적 권위를 갖는 룰(rule)도 없었다. 신출귀몰하는 권모술수와 끝없는 욕망의 분출, 의리와 이익이 뒤엉키는 패거리 작당, 음모와 야합과 배신, 뒤통수 때리기와 등 치고 간 빼기 같은 드라마 요소들이 재미있게 짜여 있었다.

그 곤고한 시절에 대망(!)은 있을 수가 없고 영웅도 뭣도 아니고 다만 의식주에 허덕이던 나는 왜, 무슨 심정으로 『대망』 서른 몇 권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가. 김애란의 아버지는 어째서 내 집 한 칸이 생기자마자 『대망』 전집부터 들여놓고 단숨에 읽은 것인가.

김애란은 아버지에게 『대망』을 읽은 독후감을 묻고 싶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82쪽)

나는 이 대답 없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나나 김애란의 아버지가 왜 『대망』을 그처럼 탐독했던지는, 웬만큼 부대끼며 살아본 사람은 다들 알 것이다. 다들 아는 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

김애란의 아버지가 『대망』 독후감을 묻는 딸의 질문에 대답을 했더라면 그 대답은 아마도 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미안허다’와 비슷하거나 그 계통에 속하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전 김애란의 자매들은 아버지의 이발소를 정리했다. 이발소 벽에는 1976년에 발급된 이용사 면허증이 붙어 있었고, 옷장에는 아버지의 흰색 가운 두 벌이 걸려 있었다. 이발 용구들과 검은색 염색약이 말라붙은 그릇도 있었다. 벽시계는 시간이 멈추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용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요금표를 옮겨 적는다.

 

조발 15,000원

세발 10,000원

소아 및 학생 조발 10,000원

드라이 7,000원

면도 12,000원

염색 15,000원

특제품 염색 30,000원

……(45~46쪽)

 

이 대목에서 김애란은 건조한 문장 두어 개를 쓰고 있는데, 내 눈에는 이 각박한 문장 안쪽에서 억눌린 것들이 보이는 듯싶다.

이 요금표의 아라비아숫자들은 삶의 하중을 모두 짊어지면서도 표정이 없다. 김애란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숫자들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누추한 골목의 여러 식당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 설렁탕 1만 2천원, 설렁탕 특 1만 5천원, 자장면 8천원, 삼선자장면 1만원, 라면 5천원, 떡라면, 계란라면, 어묵라면 5천 5백원의 엄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 요금표 속의 숫자들은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김애란 자신도

 

―모두 내가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라고 썼다.(47쪽)

알면서 말하지 않은 것도 있을 터이다.

 

지금 김애란은 아픈 아버지를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바깥쪽으로 바래다드리고 있다. 누구나 다 겪는 일이지만 다들 제가끔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내 몸과 아버지의 몸 사이를 몸으로 메울 수는 없다. 김애란은 그 광막한 무인지경에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으면서 겨우 건너가고 있다. 긴 앞 머리카락 틈새로 내다보면서 조심조심 가고 있다. 식구들이 나란히 누운 단칸방에 선풍기 돌아가는 희미한 소리(34쪽)가 그 공간에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