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소녀시대도 아닌데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질 수 있을까요……

소녀시대도 아닌데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질 수 있을까요……

―렛, <선생님의 세계>(Archive of Our Own, 2025)

 

 

 

수정의 말

 

 

 

초고를 완성한 지난 목요일 ‘책임을 진다’라는 문장을 적었을 때만 해도 그 일이 하룻밤 사이 일어날 줄 몰랐다.

본래 원작의 가치/의미를 훼손하려는 고의적인 의도가 있지 않은 이상, 작품을 비평/분석의 텍스트로 삼는 일은 쓰는 이의 자유다. 단행본으로 간행할 시 저작권료 지불 등의 문제로 원저자와 사후적으로 소통을 하고, 나 역시 지금껏 내 작품이 그렇게 다뤄지는 것을 문제 삼은 적 없다.

그러나 이런 통상적인 절차를 팬픽에 적용하는 건 수월치 않은 문제였다. 이 세계에는 그만의 내적 논리가 있었고, 작가들이 자기 작품이 언급되는 걸 껄끄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를 깨고 싶었고, 여전히 그렇다. 그럼에도 기존 메인 텍스트의 저자와 합의한 끝에 텍스트를 교체하게 되었다. 이런 선택을 내린 데엔 다른 누구도 아닌 저자의 뜻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밝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또 이 문화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이 과정에서 바닥없는 슬픔을 느꼈지만 언젠가 변화가 오리라 믿는다. 그 밖에 인용구를 게재해 불편을 끼친 저자에게도 재차 양해 구한다.

그 모든 일에도 여전히 당신들의 작품을 사랑한다.

 

작가 본인 외의 이견 중엔 이런 게 있었다.

첫째. 특정 팬픽을 비평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가?

이 문제에 관해 떠오르는 질문 하나. 얼마 전 모 아이돌의 뮤직비디오가 팬픽의 서사를 따왔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우스갯소리처럼 다뤄졌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최근 한 기획사의 문건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팬픽의 존재를 분명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그래서 작가는 대가를 받았는가? 그게 아니라면 팬덤의 자생적인 문화로 탄생한 이야기가 기획사의 손으로 넘어가 수익 창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뜻인데 괜찮은 걸까?

과거 동방신기의 팬픽 공모전이 열린 적이 있다.[1] 기획문엔 당선작 중 일부는 향후 동방신기가 출연할 드라마의 소재로도 사용될 예정임을 밝힘과 동시에 저작권이 기획사에 귀속됨을 표기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는 기획사에서도 권리를 불공정하게 이양받을망정, 최소한 작품을 저작물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써방명’이 점점 난해해지는 ‘음지’ 시대가 되고 모든 게 불명확해졌다. 유사성이 발견되어도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이 농담으로만 넘기게 됐다.

작품명과 작가명, 게재 사이트를 적고 공적으로 해설한 건 그 이유다. 모 드라마와 BL소설의 표절 논란 당시 이 부분이 쟁점 아니었던가? 당시 BL소설 팬들은 해당 작품이 ‘음지’ 작품이라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고, 그래서 패소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난 이 취약한 세계에 힘을 싣고 싶었다. 이게 저작물을 원 저작자에게 돌려주는 일이라고 믿었고, 매우 보수적인 판단을 내린 건데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듯하여 안타깝다. 그렇기에 굳이 풀어 설명하며, 다시 한번 ‘우리만의 세계’에 숨는 일이 어쩌면 우리를 더 취약하게 만드는 일 아닌지 재고하길 요청하는 바다.

 

둘째. 인물명을 언급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인지했으나 원 텍스트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세계의 시작과 끝이 모든 문장의 주인, 모든 사랑의 주인인 그애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팬픽은 아주 이상한 경계에 걸쳐 있다.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그애들에게 한없이 가까워지다가 또 멀어지는 경험을 한다. 생생했던 얼굴이 이야기의 힘에 밀리기도 하고, 몰랐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히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혼란한 경험 속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가장 원천적인 이유는 ‘그애’가 ‘그애’이기 때문이다. 이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다.

덧붙여 작품을 ‘감히’ 이름이 담겨서는 안 되는 텍스트처럼 대하기 싫었다는 것도 전한다. 어떤 예술분과든 옥석이 뒤섞여 있다. 그중 빼어난 것의 힘을 믿고 존중하는 게 옳다고 봤다. (영화를, 혹은 소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할 때 당신 마음속엔 가장 쓰레기 같은 작품이 떠오르는가? 아니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떠오르는가? 내 경우엔 교 마치코의 미의 화신 같은 얼굴과 아버지 미시마의 칼날 같은 문장이 떠오르는데.) 분명 내 마음을 뒤흔든 텍스트를 적의 논리대로 ‘미혼·저출생의 원흉’인 ‘음란물’처럼 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만일 이 텍스트가 문제가 된다면 책임지고 끝까지 싸우겠다. 이게 내 사랑의 방식이니까.

 

비평문 전체가 원문의 내적 논리에 따라 구성되었으니 당연히 글이 바뀌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작품 소개를 했기에 후회 없지만, 혹 짜임새가 헐거운 부분이 있다면 독자분들에게 양해 구한다. 더불어 새로 리뷰한 작품도 본래 다루려 했던 텍스트였으며, 작품을 우열 없이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도 전한다.

내가 이 문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기회가 되는 한 좋은 작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얘기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그렇다. 그리고 구체적인 텍스트를 다루지 않더라도 이 문화에 대해 좀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서브 컬처에 관해선 수용자 모두가 전문가임을 알고 있으니, 생산적인 지혜와 생각을 나눠주길 바란다. 더불어 함께 이런 고민도 해보고 싶다.

일테면 팬픽과 문학의 경계가 있다면 어디인지, 만약 있다면 문학은, 또 팬픽은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가까워지고 또 얼마나 멀어지며 실험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이것이 정말 음지/양지로 구분되는 일이라면 공개적으로 인물들이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퀴어링되며 일어나는 일들은 무언지, 동료 퀴어 시민들과 이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수용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뭐가 되었든 난 우리(그렇다. 난 여전히 이 판에 연루된 모두를 ‘우리’라고 생각한다)가 유의미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 이건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니, 머지않은 미래에 이룰 수 있길 소망한다.

원고에도 적었듯 주목이라는 건 흙탕물 같다. 절반이 물이라고 해서 갈증 난 사람에게 함부로 권할 수는 없다. 그걸 알기에 흔쾌히 자신의 작품을 비평하는 걸 허가한 렛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작품 내에서 인물이 사랑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접속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자기 세계에 스스로 금을 내는 걸 보았을 때 내게도 용기가 생겨났고, 그걸 떠올리며 글을 고쳤다. 덕분에 좋은 글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뻔한 수사가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녀시대 언니들이 옳았다. 어떤 사랑은 정말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지’게 만든다.

소설도, 산문도 모두 내 이야기라지마는 입력값도, 결과물도 천차만별이다. 이럭저럭 지면에 글을 발표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이 연재를 하며 매회 새로운 마음을 배우는 중이고, 이를 통해 일어나는 일 모두가 내겐 세상과 접하는 기쁨이다. 그래서 ‘문제적인’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고, 또 공격받지 않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 주제를 유지했다. 앞으로도 나는 작가로서, 독자로서,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서 세계와 만날 것이다. 뜻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 만남이 더 기대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이게 내 몫이다.

 

*

 

미상이 감정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냐는 지혜를 나에게 토스했을 적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엔시티 위시 콘서트 가면 되는데……였다. 물론 농담이다. 표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티케팅을 생각하면 배가 아프고 이건 농담이 아니다.) 또 이건 지혜라기보다는 사랑 못 참는 십덕의 말이죠? 질문엔 질문을 던진 사람의 의도가 있고 배경 파악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미상에 대해 적어보았다.

 

1. 얼마 전 「셀붕이의 도」라는 걸출한 단편을 발표함.

2. 얼마 전 「잠보의 사랑」이라는 걸출한 로맨스 단편을 간행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감정에 대한 질문을 던질 법한 일들이지.

1부터 얘기하자. 최근 도서전에서 한 우샤오러 작가와의 대담에서 ‘N번방 사건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예방 차원에서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걸 자기 몸 바깥의 세계를 감각하지 못하는 무감한 인간들을 어떻게 이 땅으로 끌어내릴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했고, 답으로 요리를 제시했다. 방에만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인간들. 그렇기에 도무지 살아 있는 실감을 못 느끼는 인간들이 썰고, 볶고, 찌면서 자기 몸을 구성하는 것이 무언지 오감을 써서 확인할 필요가 있단 거였다.

이건 다정한 버전이고, 미상이 「셀붕이의 도」에서 보여준 답은 냉정한 버전이다. 할머니 집에서 주는 밥이나 받아먹고 술이나 축낼 줄 아는 셀붕이에게 어느 날 집 앞에 찾아온 중학생은 칼로 자기 배를 저미면서(가를 용기는 없음) 고통을 통한 현실세계와의 접속을 보여준다. 만화 <시구루이>의 천국에서 할복해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싸구려 막과자 버전으로 번안한 명장면인데…… 그러나 미친 중딩에게 자기 배를 얇게 포 뜨는 촌극 속에서도 고통을 감하고 밀어붙이는 소박한(?) 우파미학적 태도가 있다면 셀붕이에게는 최소한의 근성이랄지, 그런 것도 없다. 이들은 당장 코앞에 무언가가 다가와도 현실세계와 링크하지 못한다. 조주빈이 체포 당시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 운운한 말은 유치한 반영웅 놀이에 빠졌다는 증빙인 동시에 약간의 진실을 담보한다. 제 손으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폭주하는 꼴이랄까.

때론 이 사람들이 생존이라는 기본적인 욕구조차 저버리고 있는 듯 보일 때가 있다. 성범죄 가해자들의 너무 빠르고 확실한 죽음이 그렇다. 그들의 발자취가 꽤 추잡스러운 것과 별개로 삶은 한 번뿐인데? 그렇게 죽어도 되나? 싶어 좀 어이가 없는 거다.

이렇게 죽음과 탈출을 같은 선상에 두는 건 제 손으로 밥 한 번 차려 먹거나 남을 돌본 적이 없기에 그런 듯하다. 삶에도, 죽음에도 무게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남의 것도 내 것도 우습게 여기는 거다. 그들이 자기 삶을 진짜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변호사 십수 명을 쓰는 대신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죗값을 치렀겠지?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나 또한 발이 절반쯤 떠 있는 공중세계의 주민이니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미상이 마지막을 장식한 로맨스 시리즈 작업을 했을 때도 그게 문제였다. 좋은 로맨스를 쓰려면 감정이 솜털 위에 입바람을 부는 것처럼 섬세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참 쉽지 않은 거다. 중학생의 마음을 회복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미상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섹시 아주머니의 길로 걸어가는 중이라 뻔뻔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지혜계의 가면을 쓰고 (안경 척!) 미상에게 한 수 알려주는 거다. 큼큼. 감정을 느끼는 방법 말입니다만.

 

(1) 주소창에 https://archiveofourown.org/를 친다.

(2) <선생님의 세계>를 검색해서 읽는다.

 

*

 

토쿠노 군은 사전에 적힌 뜻 그대로의 명쾌한 감정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넘지 못할 거라 의심한 적이 없기에 한 번도 뜀틀 넘기에 실패한 적이 없던 열아홉. 문제가 있을 땐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외골수 소년은 어느 겨울, 축구부의 아침 연습을 나갔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남자를 맞힐 뻔하고 그와 통성명을 한다. 추워 보인다며 토쿠노 군의 주머니에 핫팩을 넣어준 그는 다음 학기에 보자며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겨울 지나 봄. 벚꽃이 만개한 4월의 교정에서 우연성을 바라며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던 토쿠노 군은 첫날부터 땡땡이칠 거냐며 와락 어깨동무를 해오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오시온…… 선생님. 그리고 수업시간, 일본어로 문장을 적어 내면 한국어로 번역해주겠다는 선생님을 물끄러미 보다 ‘써야만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선생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손만 움직여 글을’ 쓴다.

 

선생님이 오셔서 기뻐요.

 

<선생님의 세계>는 모든 감정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던 토쿠노 군이 ‘들어갈수록 나의 단순했던 세계가 이상해져’가는 선생님의 세계와 만나 ‘깨끗한 유리잔이 마주치듯 마음과 마음이 청아하게 공명’하는 과정을 담았다. 선생님은 초임 교사고, 외국인이고, 쉬는 시간에도 교무실에 들어가는 대신 학생들과 어울리는 인기인이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토쿠노 군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학생이 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연장자를 향한 우정, 혹은 호기심처럼 그려지지만 독자는 안다. 그 마음의 동력이 사랑이라는 걸. 그렇게 우리는 최초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고 기쁘던 마음이 슬픈 마음으로, 질투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 사이에 가라앉게 되기까지를 섬세하게 좇게 된다. 바스러지는 걸 막기 위해 조심조심. 발아래 살얼음이 무게를 알아채는 순간 깨어지듯, 한여름의 현기증 아래에서 사랑이 피맛을 내며 녹아버리는 순간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 체험을 한다.

 

이것이 대략적 작품 소개이다. 권하려고 소개하지만, 미상이 재미를 100퍼센트 느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히 미상의 독해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이건 팬픽이니까. 작품의 질을 떠나 이미 인물에 대한 애정이 뚜껑 밑에서 넘실대는 나와 읽는 방식이 같다면 외려 문제다.

노파심에 설명하자면 팬픽은 아이돌 팬들이 좋아하는 그룹 멤버 둘을 짝짓기하는 글이다. 한국의 경우 기원은 1세대 아이돌인 H.O.T.로 거슬러 가는데,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성시원이 쓴 우혁이 승호의 입술을 어쩌고 하던 걸 떠올리면 된다. 극 중 성시원은 팬픽을 고쳐 쓴 글로 상을 받고, 이를 계기로 훗날 프로 작가가 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진화’했다는 뜻은 아니고, 창작/게재가 손쉬운 환경이 창작자의 삶의 어느 단계에서 실험장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훌륭한 작품도 많고, 이 작품 역시 굉장히 섬세한, 발군의 묘사가 인상적인 드라마다.

드라마가 훌륭하려면 캐릭터가 훌륭해야 한다. 팬픽 속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참조 대상은 실존 인물이다. 현역 아이돌이라는 선명한 직업적 표상을 뒤로하고 그의 인물됨만 재조립하여 캐릭터를 만들 적에 말투와 에피소드는 중요한 소스로 사용되고 <선생님의 세계>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일인칭 화자인 토쿠노 군은 연습생이 되기 이전 진지하게 축구 교습을 받았다. 이는 핍진성을 만들어내는 중요 설정이지만, 눈에 보이는 표상만큼 중요한 건 인물의 행동 양식이다. 이는 ‘캐릭터 해석’이라고 칭해지며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곤 하는데(같은 행동을 보여도 정반대의 결론이 도출될 때가 많다), 그의 말수가 적은, 그렇지만 한번 말할 때는 냅다 진심을 내미는 모습이나 자기 관심사 밖의 것엔 기이할 정도로 무심한 모습, 판단의 준거가 바깥이 아닌 자기 안에 있어 어떨 때는 심지가 곧은 건지, 고집스러운 건지 헷갈리는 모습은 어떤 팬-독자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도록 유려하게 그려진다.

그 결과 독자는 이게 저자가 창조해낸 ‘가능세계’임을 알면서도 작품 속의 그를 실존 인물처럼 사랑하게 된다. 비에 젖은 사람이 마른 사람을 끌어안을 때 습기가 ‘전염’되듯, 읽다보면 저자가 생략한 외모 묘사 등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축구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온 토쿠노 군의 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또다른 주인공인 한국어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그는 팀의 맏형이자 멤버들을 이끄는 리더다. 요즘은 별도의 리더 없이 팀 구성이 짜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 팀은 다르다. 대부분이 외국인, 또 연습생 기간이 짧은 멤버로 구성되어 있어 멤버들은 연장자이자 장기 연습생인 리더를 크게 의지한다. 작가는 이 모습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밝히는데, 이런 개인의 특징은 심플하고, 또 섬세하다는 두 가지 상반된 수식을 모두 쟁취하며 매끄럽게 묘사된다. 요컨대 다음과 같다.

 

1학년들이 새끼 새처럼 주장을 바라보았다. 주장은 중키였지만, 그 사이에 있으니 혼자 어른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시온 선생님도 어떤 학생과 있든 어른인 것이 보였다. (……) 어른임은 외모가 아니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쳐다보는 사람이 어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쳐다보는 사람’과 ‘응시 받는 사람’의 거리는 둘만의 점심시간, 우등생으로 뽑힌 학생에게 주어지는 선생님과의 외식 기회 등으로 서서히 좁혀지다가 서로의 세계가 닿기 직전 정지하게 된다. 토쿠노 군이 선생님의 가장 아끼는 학생이 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던 순간 전학생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토쿠노 군이 다른 과목도 그렇게 공부하면 도쿄대에 가겠다는 소리를 들으며 넘으려 했던 언어의 벽을 원어민이라는 이유로 가뿐하게 넘는다. 게다가 그는 ‘막학년에 전학 와 적응하지 못하는 전학생이 아니라 선생님보다도 이곳을 잘 아는 운동부 학생’인 토쿠노 군과 다르게 선생님과 하나의 감정으로 맞붙어 있다. 그건 자기 세계에만 있는 토쿠노 군, 너무 순진한 나머지 ‘가끔 적의를 못 느끼는 사람처럼 군’다는 토쿠노 군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로 고독이다.

 

아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 선생님은 김군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 반에서 겉도는 김군의 모습에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교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학생들과 어울리는 시온 선생님과 반에 적응하지 못하고 선생님에게 의존하는 김군.

 

뜀틀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몸의 균형이 무너져서다. 그리고 이제까진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자라던 토쿠노 군. 자신에 대한 의심도, 타인에 대한 의심도 없이 어디까지나 떨어진 자리에서 선생님을 관찰하던 토쿠노 군은 그가 자신이 아는 초임 교사고, 외국인이고, 쉬는 시간에도 교무실에 들어가는 대신 학생들과 어울리는 인기인인 ‘선생님’이 아닐 수도 있음을, 서툴고, 낯선 곳에서 혼자 삶을 꾸렸고, 동료들에게 배척받으며 외로움을 느끼는 하나의 ‘인간’일 수도 있음을 가슴 아프게 깨닫는다.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선생님을 직시하는 일은 곧 두 사람 사이의 종말을 가져온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해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토쿠노 군은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 그와 친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선생님은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성격이고, ‘이 성격이 선생님이 교사가 되도록 이끌어 지금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선생님도 자신을 알아주길 원한다. 이 혼란을 선생님의 이 사이로 밀어넣었을 때 두 사람이 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억지로 토쿠노 군의 입술을 떼어내고 자신의 셔츠를 벗어 얼굴을 가려준 뒤 피가 나는 입술로 말한다.

 

“달리기 잘하지? 뒤돌아보지 말고 집까지 달려. 가장 빠른 속도로. 골목 벗어날 때까지 이거 벗지 말고.”

 

혼돈 속에서도 토쿠노 군은 선생님의 말을 따라 달려 나가지만, 머잖아 학교의 여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며 선생님을 눈엣가시 취급하던 일본어 선생이 그 장면을 보았음을 알게 된다. 선생님은 이 일을 책임지기 위해 학교를 떠난다. 아마도 자신과 키스한 학생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걸고, 변명도 않은 채 그만둔다. 너무나 순식간의 성장통을 겪어 훌쩍 자란 만큼 아픈 토쿠노 군을 둔 채 두 세계는 짧게 공명하는 소리만 남기고 멀어진다. 유리잔은 계속 부딪고 있는 이상 소리 내지 못한다는 아픈 진실을 남기며. 닿았다가 멀어진 둘만이 깨끗해서 서글픈 파장을 남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막을 내린다.

 

이런 모든 과정. 토쿠노 군의 아픈 성장기가 나 역시 열병을 앓게 했다. 왜냐면 나 역시 토쿠노 군처럼 속을 알 수 없다든지, 혹은 변하려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관계를 매듭지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글로 몸부림쳐도 나라는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건 누가 사랑의 작가라는 호칭을 붙여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더듬으며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내겐 가르침을 줄 선생님도 없는데 사랑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그게 팬픽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그렇겠지, 아마.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거다.

내 생각에 팬픽을 즐기는 사람은 좀 올드스쿨이고, 그래서 이미 폐급이 되어버린 “진정성”이 명작과 범작을 가르는 한 끗이 된다. (얼마 전 모 그룹의 팬픽이 과거의 유명 명작을 표절했다는 공론화가 있었는데 그 글의 핵심 문장이 ‘남의 걸 베껴서 쓴 거에 과연 ○○이와 ○○이(멤버 이름)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였다.) 암만 ‘공장포타’가 성행한대도 이 세계에 가장 치욕적인 평가는 인물을 사랑 없이 이용만 한다는 거다. 애초에 팬픽이 본체(아이돌)를 바탕으로 매력적 인물을 창조한 뒤, 인물에 대한 사랑이 다시 본체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그런데…… 아시다시피 욕망의 방향은 직선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파헤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선 다양한 화학작용이 발생한다. 이야기가 우선할 때도, 사랑이 우선할 때도, 욕망이나 개인의 명예가 우선할 때도 있고 이건 뒤엉켜 있어 구분도 조절도 불가능하다.

미조구치 아키코에 따르면 BL은 대다수의 수용자인 이성애자 여성이 가부장제 질서를 떠나 남성 캐릭터에 자신을 자유로이 기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애초에 ‘현실도피가 약속된 장르’다(미조구치 아키코, 『BL진화론』, 길찾기, 2018, 11쪽). 그러나 현실 인물을 모델 삼아 만들어내는 이 세계에는 캐릭터 해석을 잘못 했느니, 부터 저작권 침해니, 음란물이니 하는 딱지가 붙어 거추장스러운 구속구를 만든다. 물론 대범한 사람들이 훌쩍 선을 넘는 명작을 만들지만, 최근엔 점점 영토가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이 아사리판에서 사람들은 왜 쓰는가? BL이 아닌 굳이 팬픽을 써야만 하는 이유, 이걸 읽고 싶은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 마음의 기원을 찾아 ‘포타 작가’로서 나를 되짚어봤다. 지금은 안 쓴 지 좀 되었지만(독자분들 미안합니다), 최초 나의 목적은 최애에게 모든 걸 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다. 지난해 최애는 종종 특정 장소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바쁜 스케줄상 방문은 불가능했다. 돈 잘 벌고, 한창때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해도 그게 싫었다. (예. 저 미친 아들맘이에요.)

그래서 나는 세계를 창조해 최애를 그 장소로 보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그 안에 연애 감정도 불어넣었지만, 시작은 그랬다. 비록 평행세계더라도 좋아하는 아이들을 원하는 장소에 보내는 일은 좋았고, 무엇보다 거기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할 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힘내라는 말이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좋아한다는, 평소에는 미친 아들맘 소리 들을까봐 쑥스러워서 못하는 말을 인물들의 입을 빌려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다.

나는 이렇고, 어쨌든 다른 사람들도 각각의 이유로 이야기를 만드는 번거로운 일을 하고 있는 듯하다. 두고 보면 모두 정직한 욕망인데, 이건 살아 있는 인물을 대상 삼았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를 대상 삼는 건 뒤집어 말해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도저히 모르겠는 사람을, 적어도 내가 아는 틀 안에 집어넣어 애정을 유지하려는 시도다. 왜 그렇게까지 사랑을 유지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삶이 너무 시시해서도 있겠고(내가 아는 분은 팬질을 해보고 싶어서 삼 개월 동안 포타 1600편을 보았다고 한다), 한순간이나마 진실되게 좋아한 사람을 계속 붙잡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누가 되었든, 상대를 향한 강렬한 감정은 잘 오지 않으니까. 이건 미련일까? 그저 너무 지루해서, 갈망하고 싶어서 애를 쓰는 건 사랑이 아닐까?

여기에 대한 답이 될 만한 건 이게 아마추어의 풀뿌리 창작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계 최대의 팬픽 사이트 ‘Archive of Our Own’이 2019년 휴고상을 받았으니, 이 작품 또한 잘 알려지진 않은 휴고상 수상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앨리스 먼로 다음으로 팬픽을 고르는 일에는 분명 거리가 있다. 지혜계 여자와 미친 여자의 거리랄까?

그리고 미친 여자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모든 미친 여자는 삶에서 한 번쯤은 명작을 쓸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한 번은 착취할 수 있으니까. 이건 프로나 아마추어의 기술 차 같은 건 사뿐히 뛰어넘어 사람의 면전에 주먹을 날린다. 팬픽엔 이런 순간들, 삶도 사랑도 못 참아 마구 내지르는 순간이 있고, 이 엉터리 난사에 맞아 얼얼한 뺨을 문지르고 있을 때면 미상이 어느 지면에서 이야기한 ‘때로는 쉽게 지나가 혹시 작가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장면들의 가치를 충분히 모르는 것이 아닐까, 뚜껑만 열어도 바로 아래 출렁이는 이미지들이 (어쩌면 기억들이) 너무 많아 남들의 저장고는 얼마나 휑한지 또는 거기서 거긴지 모르는 것일까 싶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팬픽이 이런 뚜껑 아래 숨어 있기에 귀하다고 생각한다. 목적이 뭐가 되었든 인간이 자기 시간을 투자해 내면의 것을 퍼올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팬픽의 세계를 맴돌다보면 알게 된다. 작가는 자기 말의 가치를 안다. 다만 그것을 낭비하고 싶은 거라고.

이런 상황이니, 지난해부터 아름다운 한국어를 채집하겠다는 야심으로 장만한 다이어리의 한 편에는 이런 대사가 적혀 있게 되었다.

 

선생님이 오셔서 기뻐요.

나도 토쿠노 군을 만나서 기뻐.

 

*

 

문제는 이 작은 해석공동체가 새삼스런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거다.

첫번째 이유. 팬픽을 공들여 쓰거나 읽는 인구가 줄었다. 완결된 형식이 아닌 ‘썰’형태의 등장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오빠들의 노동이 늘어난 게 한몫한다고 본다. 일전엔 공백기는 말 그대로 공백기라서 머릿속의 오빠들을 부풀려서 오병이어처럼 나눠 먹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공백기에도 매일 떡밥이 나온다. 틱톡, 릴스, 자컨.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누가 수도를 깔아줬는데 억지로 우물 팔 일은 없겠지요? 우물 마니아가 아닌 이상.

둘째로는 멤버들의 관계를 연애감정으로 재해석한 알페스보다 나와 멤버의 연애를 그린 ‘나페스’의 증가가 있겠다. 90년대 초 ‘야오이논쟁’ 당시 번역가 쿠리하라 치요는 자신이 ‘게이 문학’을 즐긴 이유를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이걸 인정하고 BL에서 벗어났다고 썼다(미조구치 아키코, 『BL진화론』, 114쪽). 이런 쿠리하라가 보았을 때 오빠들을 짝짓기보단 나와 오빠를 엮는 ‘나페스’의 성행은 고무적인 일일 수 있다.

나는 모든 수용자가 개안 이전 쿠리하라와 같은 방식으로 BL을 애호한다고 볼 순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처음 에세이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반드시 한 편은 우리 풀뿌리 창작문화에 대해 써야지, 마음먹었는데 이게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페스 논쟁 때문이다. 대부분이 원 앤 온리의 짝을 찾는 보수적 구성이라는 내적 특징과 달리, 외부적 상황이 팬픽 쓰기-읽기라는 액션을 도발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성시원이 우혁이 승호의 입술을 어쩌고를 쓴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외로 공적 지면에서 팬픽을 이야기하는 일엔 검열 요구가 있었던 거다.

나는 모 정치인이 자신의 알페스를 출력해 들고 법원에 출두하는 기사를 새삼 보았다. 관련 논문을 읽었고, 사람들의 반응도 찾아봤고…… 좀 황당했다. 논문에서 팬픽-알페스를 음란물로 구분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실 인물이 동성애자로 작품에 등장하면 그가 실제로도 동성애자로 오인받을 수가 있고, 그것이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현실에서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 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누군가 동성애자라는 오인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면 진짜 동성애자건 가짜 동성애자건 피해 입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게 옳지 않나?)

두번째는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영상만큼 글로 전파되는 음란물의 해악이 더 크다는 거였는데, 이건 솔직히 이 사람 마니아네…… 싶기만 했다. 합성 영상의 시대가 와도 텍스트는 굳건하다! 거꾸로 글의 힘을 인정받은 거 같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글의 경우 음화와는 달리 한눈에 음란물임을 알아보기 어려우니 수용자는 처벌하지 말자는 선심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일반 수용자가 음란물인 것과 아닌 걸 구분하기 어렵다면 판사님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합니까? 애초에 성애와 순애를 구분 지을 수 있나요? 어떻게? 포터 스튜어트처럼 ‘보면’ 알아요?

그럼에도 상황이 이러니 작가들은 자기검열을 한다. 암만 배짱 좋은 사람도 고소 운운하는 말에 겁을 먹지 않기란 쉽지 않으니까. 비극적이게도 최근 주변에서 자주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BL 작가들에 대한 단속이 심해졌고, 만화 쪽에서는 아청법의 모호한 조항이 악용되며 내부 검열이 심해졌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그걸 제하고도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조금만 성적인 농담을 던져도 그런 이야기는 양지에서 하지 말라는 호된 가르침이 들어온다. 아니, 아이돌이잖아? 예수님 모시는 것도 아닌데 개인 계정에서 섹시하다 정도의 이야기도 못하나 싶어 황당했지만(심지어 이름을 직접 언급한 건도 아니었는데!)(그리고 예수님도 섹시함), 분명 그런 반응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직접적 외부 압력 없이도 작가들이 자기검열을 하는 시대, 문제적 창작물을 만들게 되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이건 내게 깨끗하거나 안전한 세계가 아닌 두려움의 세계다. 종의 보존은 다양성을 보장해야 이뤄진다는 건 상식 아닌가? 사람들이 성애물을 만들고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그러나 글은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님에도 최근 내 타임라인의 몇몇 작가들이 작품을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상황이 이러니 급하게 테마를 바꿔야 하나 고민되었다. 떠드는 거야 내 자유지만 그걸로 인해 불필요한 주목이 쏠리고 부담을 느낀 작가님이 문화유산을 폭파하면 어떡하나?

그럼에도 말해보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오래전 비평을 넘어 우리(젊은작가상 출신 문단 작가가 감히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있겠으나 내가 상을 탄 건 반년 전의 일이고 빠순이인 건 오백 년 되었으니 이런 표현을 쓰겠음) 독자/수용자에게로 넘어왔다는 걸.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건 대중이라는 긍정적인 표현 아래 감춰진 권력의 오용을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관으로 만들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짓기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 다 같이 좆돼보자, 정신으로 여자애들이 B사감의 길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이 슬프다고 해야 하나? 슬펐다. 현실 성범죄의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여자애들이 성애라고 하면 기겁하고 방문부터 쾅 닫는 걸까? 그거 네 건데. 너한테도 있어서 방문을 닫아봤자 그것과 함께 갇히는 일인데. 절대 외면할 수 없는데……너무 씁쓸했다.

아무튼 비슷한 논쟁이 매번 도돌이표로 찍듯 돌아오는 상황이 피로할 것도 이해하고, 글을 갑자기 프로파간다로 만드는 거 같은 불편함도 있지만 팬픽을 옹호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왜? 좋아하니까. 말했듯 나는 팬픽이 인간의 것이라서 좋다. 창작의 욕구도, 성적인 욕망도, 애정도 가진 복잡한 존재가 써내려가는 글이라서 좋다. 보고 싶은 건 뭐든 AI가 만들어주는 시대에 혼자만의 망상을 글로 써서, 그걸 공유하는 행동의 귀함을 말하고 싶었다. 우연찮게도 오늘 다룬 텍스트를 포함, 내가 좋아하는 글들이 전부 무료 배포중이기에 더 그랬다. 모두가 돈 버는 걸 최고로 알고 어떤 사람은 포타를 써서 억대를 벌었네 어쩌네, 하는 장에서도 이상한 자기 고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못내 좋았다. 소장용 포인트를 걸어달라는 요청에 꼴랑 100원을 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마음을 아주 옹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굳이 문학동네 에세이에서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많이들 시도하듯 팬픽에 문학적 성원권을 주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두 장르는 서로 다른 목적성을 갖고 있다. 문단문학이 핍진성을 통해 널리, 멀리, 인류가 공감할 만한 보편적 작품을 목표 삼는다면 팬픽은 폐쇄성에서 출발해 폐쇄성에 도착한다. 내가 아무리 이건 멤버들을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을 해도 달군 쇠를 내리치듯, 글 하나에 심장의 모양이 마구 변형되는 감동을 느끼는 건 특정 아이돌의 특정 조합을 좋아하는 팬으로 한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밀하고 뾰족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완전해서 이걸 바깥에 설득하기 위해 뭉툭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너무 ‘진짜’인 ‘가짜’인데. ‘진짜’가 되려고 애써 좁은 의미의 ‘문학’을 흉내낼 필요도 당연히 없고, 비평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진지하게’ 임하는 건 팬픽을 시시하게 만드는 일 같다. 따지자면 나는 팬픽을 고급문화로 만들고 싶다기보단 문학을 저급하게 만들고 싶은 입장에 가깝고, 그래서 아쉽다. ‘문단문학적’ 형식으로 이 글을 쓰면 안 됐었는데! 그러고 말아서. 아! 글쓰기 진짜 어렵다. 특히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일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달까. 사랑의 대상을 오해받게 하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게 된다.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 없었는데…….) 어떤 사랑은 나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든다는 말을, 전에는 몰랐는데 이젠 실감하게 되었다. 그애들을 사랑하는 게, 그래서 그애들의 껍질을 벗었다 입었다가 할 수 있는 글을 읽는다는 게 내게는 나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치료의 일환이기도 하기에 더 그렇다.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환자의 일기를 참아달라는 말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이 일에 죄의식이 있다면 쓰는 사람이 가장 잘 알고, 그럼에도 하고 있는 거라는 말도 전한다. 내 친구는 팬픽을 읽을 때면 언제나 무릎을 꿇고 읽는다고 고백했다. 기도하는 자세. 동시에 죄 사함을 원하는 자세. 나는 그 마음을 늦게 알았다. 사랑을 하면 두려워진다는 거. 두려움 앞에 선 글은 높은 확률로 실패한다는 거. 그리고 실패해도 계속 하고 싶게 한다는 것도.

그리고 모든 걸 알아버린 상태로 고민했다. 다른 텍스트가 낫지 않아? 꼭 팬픽이어야 해? 팬픽이면, 시침 뚝 떼고 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게 낫지 않아? 문제 안 생기게? 만약 그랬다면 망설임은 없었을 거다. 훨씬 자유롭게 썼을 테고, 모른 척 흙탕물과 같은 주목도 달게 받아 마셨을 거다. (나중에 자기가 자기 글을 찬사한 게 들통나 민망함에 몸부림치더라도!)

그럼에도 다른 작가의 텍스트를 대상 삼는 게 중요했다. 나 스스로의 논리를 자폐적으로 매듭짓지 않고 다른 작가와 원본-비평이라는 형식으로 얽히고 싶었다. 텍스트의 날실과 씨실을 뜯어 내 글과 다시 엮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고집의 이유를 여기까지 도달해 알게 됐다.

난 책임을 지고 싶었던 거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말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진짜인 가짜에 대한 사랑을 입 밖으로 내고 싶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까지 내 몫으로 하고 싶었다.

이건 내게 놀라운 발견이다. 왜냐면 내게 익숙한 행동방식은 정면돌파가 아닌 회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전체관람가 팬픽만 쓰는 이유를 성애야 문단에서 쓰면 된다고 너스레 떨면서 내심 내 팬픽이 들통났을 때를 대비한 방어막으로 설정했다. 이건 정말 비겁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나로 통합하고 싶으면서, 언제 어디서건 내가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길 누구보다 원하면서 ‘문단 작가’인 나와 ‘포타 작가’인 나를 분리한 것이다. 셀붕이가 배를 가르는 미친 중딩을 핍홀을 통해 내다보기만 한 것처럼.

그런데 셀붕아! 언제까지만 방에만 있을 수는 없단다. 나와야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그걸 찾으러 떠날 수도 있다. 그게 설령 도처에서 쏟아지는 벚꽃잎 같은 것일지라도, 치루치루와 미치루가 세상을 돌고서 방안의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었듯 선생님을 좇아 한여름의 현기증 나는 길을 걸어야 손에 쥘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셀붕이의 머리 꼭대기에서 글을 쓰는 사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미상의 질문에 뻔한 처방을 내리게 됐다.

 

감정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나요?

: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세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세요.

 

책임이라는 닻을 가진 사람만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있다. 하늘을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을 손에 꼭 쥐고 풍부하게, 온전하게, 샅샅이 느낄 수 있다. 그걸 깨닫고 난 차라리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묘한 기쁨을 얻었다. 고통을 걸어 나온 사람만 아는 해방과 안식을 얻었다.

미상은 좋아하는 이들에게 명문을 준다. 그렇게 미상이 최애 오에의 죽음에 바치는 산문은 ‘2023년 퐁퐁짱의 최고의 산문’에 올랐는데, 나는 고작 이런 글을 썼다. 사랑의 작가라는 거 다 거짓이야. 넘어져 망가진 꽃다발을 건네는 심정으로 엉엉 울며 최악의 고백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지. 못난 나도 책임져야 하니. 그리고 이 문장을 쓰다가 사금적사금(思今的思今)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공안이 BL소설 작가들을 단속, 체포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쓰기에 대해 말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계속 써나갈 것이다

 

이런 마음이면 그가 만드는 게 ‘미혼·저출생의 원흉’인 ‘음란물’이어도 의미가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나는 이런 걸 말하는 걸 좋아한다. 이게 지혜계 여자도, 미친 여자도 아닌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미상에게

 

일단 지난주 말도 없이 펑크를 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디엠이라도 한 통 보낼까 하였으나 그편이 더 쑥스러워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 더 미안합니다. 그대가 내 인스타스토리를 읽을 때마다 어찌나 간담이 서늘해지던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커피나 박카스 사진을 올린다든지) 이상하게 제가 최애 얘기를 하며 실없이 굴 때 주로 보시더라고요? 아무튼 최악의 짝꿍짓에 반성하며 은근슬쩍 다음번 지혜를 밀어넣어봅니다.

최근 한 친구와 사랑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의견 충돌을 겪었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사랑이 무어냐?’라는 걸로 싸웠다는 건데요. 먼저 친구는 맑고, 깨끗하고, 상대의 모든 걸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그 밖에 모든 건 가짜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자라도 긍휼하다 했고요.

그러나 나는 사랑 같은 건 도처에 널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더러운 바닥에서 주운 먼지 묻은 것일지라도, 일단 손에 쥐고 삼키고 나면 해석은 오로지 나의 몫이고, 내가 먹은 것이 사랑이라는 진실, 그래서 순간의 허기는 멎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고요. 얼핏 독성 있는 관계를 옹호하는 말이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다퉜는데……

아마 팬픽의 사랑은 친구의 사랑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적어도 인기 있는 글은 그렇죠. 아무리 그들이 야쿠자거나, 삼합회거나, 아픈 비밀을 간직한 대기업의 사생아거나 무엇이 되었든 궁극적으로 주는 사랑은 강하고 진실된 거죠. 심지어 강간을 하는 경우라도요. (요시나가 후미가 대담에서 말했듯[2], 여성향 로맨스에 등장하는 강간은 내가 이 정도로 너를 원한다는 걸 표현하는 행동이죠. 실제 강간과는 다르게요.)

어쨌든 사람들이 원하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수용받는 일이 되어가는 흐름은 시대의 욕망인 듯합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원하는 한편, 나는 여전히 더럽고 먼지 낀 것도 사랑이라고 옹호하고 싶은 마음인데요. 미상은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사랑에 우열이 있나요?

 

 

이희주

 

 

 


[1] https://sports.khan.co.kr/article/200602031330193

[2] https://greybox.tistory.com/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