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사랑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사랑

―나가야마 코조 연출, 사카모토 유지 각본, <그래도, 살아간다>(2011)

※아래는 작품의 결말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박한 제안

 

처음에 작가로 데뷔하고 느꼈던 염려는, 혹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말에 무게 추가 달려 남의 말보다 무겁고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면 어쩌지 하면서도, 바로 그 부담감 때문에 긴장하여 북 토크에서 주책을 부리곤 했다.

이러한 부담은 실제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서가 아니라, 작가가 되면서 어떤 기회들이 주어지는 것과 관련된다. 내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123 불법 비상계엄 당시에 작가 한 줄 성명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성명 전문이 실린 신문 한 귀퉁이에 나의 메시지를 꽂을 수 있겠는가. 여전히 나는 사회 현안에 대한 작가의 말이 (이것도 일부 작가에 국한되는 이야기지만) 어떤 무게와 의미로 자리매김하는지, 그것의 온당함을 따지기에 앞서 내가 그 낯간지러운 이미지를 감당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문예지에 탄핵 일지를 싣는다. 탄핵보다는 일지 쪽에 서서 쓴다는 마음으로.

작가로서 소설을 쓰고 시민으로서 발언하고 싶은 마음이 나 자신에게는 손해 볼 것 없는 치사한 전략일까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나는 내가 정말로 무엇을 더 알지 못하고 사회변혁 운동에 제대로 참여해본 적도 없기에 내 말에 추가 달리면 다소 사기를 치는 기분이 든다. , 내가 뭘 알아, 내가 뭘 아니, 이것이 에세이를 쓰는 지금도 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습관화한 이들은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뭘 많이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알아지거나 몰라지는 신비한 체험을 해본 바 있기에, 그것에 맛 들렸기에, 콘텐츠 후집필이 아니라 쓰고 나서야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 겨우 아는 아둔함에 자족하기에, 일단 쓰고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일에 환장하기에, 우리는 거창할 것 없이 일종의 집필 중독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중독자로서 나는 주변 사람에게 소설을 쓰라고 권하고 다니는데, 주로 듣는 이야기가 작가가 되기에는 자신은 그렇게까지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장된 이야깃거리를 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조형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운이 좋다면 더 낫게 살게 되는 것이 글쓰기의 장점이라고 설득한다.

이런 나로서 지난 희주의 글을 읽고 글쓰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좀…… 책임감이 없나?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 지금도 사랑의 방식으로서 책임 지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저 내 말에 달린/달릴 무게 추를 떨구고 싶을 뿐.

책임까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 먼로를 다룬 이전 글에서 쓰려다 관둔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한다. 자신의 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남편과 평생 해로하고 가해 사실을 묵인한 앨리스 먼로에 대한 글을 주간 문학동네에 실으면서, 먼로의 주요 저작(디어 라이프,거지 소녀)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먼로의 책을 펴낸 출판사가 운영하는 웹진이기에 먼로에 관해 썼다.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 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길 바랐기에 디어 라이프의 한국 출판사가 만든 동명의 공간에 스키너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이런 내용을 원고에 썼다가 최종적으로 지웠는데 출판사를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정도의 자리 마련하기를 용인하지 않을 리 없고, 내부 비판을 수용하는 넉넉함이 가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올해 <뉴요커> 기자 레이첼 아비브가 앨리스 먼로 비판 기사로 저널리즘계의 큰 상을 받았다고 한다. 기사에서 먼로의 작품들을 비판하는데 작품명에 소설 링크가 걸려 있다. 먼로의 많은 소설이 <뉴요커>에 실렸기에 기사가 비판하는 바로 그 소설을 자체 내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작가를 비판하면서 비판의 원천마저 제공할 수 있는 세계가 구축되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나 역시 비판과 저항까지 흡수하여 한곳에서 제공하는 시스템문학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체의 일부인데. 그리고 나는 이것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데 자신을 향한 비판을 수용하든 나쁘게 말하여 활용하든 억누르거나 배제하는 것보다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혜계가 되다니……」(5)에 생략했던 내용을 이번 원고에 되살려놓는다. 지난 희주의 글이 독해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 또한 희주처럼 작가로서 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졌다.

 

*

 

멀리서 아우성이 들린다.

, , 이제 사랑 얘기 좀 하세요.

 

 

해결사 커플

 

일본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이하 <그래도>)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드라마를 집필한 사카모토 유지의 팬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미츠시마 히카리를 무척 좋아한다. 꼬깃꼬깃 구긴 종이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리지만 어쩐지 골밀도 높은 새하얀 뼈처럼 강고하기도 하여 저 사람은 절대 부러지지 않지 하는 인상을 주는 배우.

오래전 <그래도>를 보았을 때 너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감자를 얇게 썰어 냉동고에 넣어놓아야 했을 만큼. 내일 출근해야 하기에 눈이 붓지 않도록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냉동고로 척척 걸어가 차디찬 감자를 눈에 붙였더랬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그때처럼 울 수 있을까? 오랜만에 눈물 바람으로 만족스러운 카타르시스를 느낄 생각을 하니 설레었고 울기는 했지만 감자를 붙일 만큼은 아니었고 역시 감수성 훈련을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했을 사랑의 한 국면을 발견했고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에 가까워서 소개한다.

 

1996, 일곱 살의 아키는 중학생 후미야로부터 살해당한다. 산에서 아이의 머리를 일곱 차례나 쇠망치로 때려죽인 후 호수에 버린 것이다. 15년 후, 아키의 오빠이자 후미야의 친구였던 히로키(에이타)와 후미야의 동생인 후타바(미츠시마 히카리)가 만나서 벌어지는 일이 내용의 큰 줄기다.

첫 회에서 히로키는 후타바가 살인자의 가족인 것을 모르면서 식사 자리에서 살인사건에 대하여 말한다. 초면의 상대에게 레스토랑 티슈에 살해 현장 약도까지 그려가며 담담하기보다는 기계적인 표정으로 참극을 설명하는 것이다. 패닉이 된 후타바가 왜 처음 만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따지자 히로키는 모르겠다면서 말한다. “같은 일을 겪은 느낌. 피해자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말하게 되었다고.

이렇듯 드라마는 처음부터 목표를 분명히 짚으며 시작한다. 가해자의 가족과 피해자의 가족은 함께할 수 있는가? 피해자의 오빠와 가해자의 동생은 사랑에 빠져도 되는가? 두 집안은 15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죽는 날까지 고통이 계속되리라는 점에서 같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같은 피해자라고 불러도 되는가?

이러한 물음이 더욱 무거운 까닭은 <그래도>1997년에 벌어진 소년 A 사건, 중학생이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아이의 머리를 학교 정문에 가져다 놓은 현실 사건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향한 가학성, 살인자의 어린 연령, 쇠망치라는 범행 도구 등이 현실과 작품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렇기에 <그래도>는 픽션이라는 안정망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사고실험을 펼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년 A 사건에 대해 사카모토 유지라는 작가가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놀랄 만큼 그리고 위험할 만큼 용감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작품이 나에게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 같은 피해자일 수 있음을 말해서가 아니라, 두 가족이 함께하려면 중간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세세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타바와 히로키는 본인들도 과거의 사건으로 망가진 채로 망가진 양쪽 가족을 구하러 동분서주한다. 문제를 해결하러 돌아다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 쌍의 탐정이나 심부름센터 직원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가진 무기는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직면과 감정이다.

이 부분이 주목할 만한데 대처 방식으로서 소위 말하는 문제 해결식 접근감정적 접근과 상반되게 취급된다. 문제 해결은 말 그대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중립적인 용어임에도, 합리와 이성을 내세우고 감정은 짐짓 무시한다. 그러나 사카모토 유지는 감정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라며 우리의 해결사 커플을 마구 굴린다.

예를 들어보자. 2화에서 후타바는 히로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다. 두 사람은 아키가 살해된 산에 가는 길이다. 후타바가 말한다. 혹시 자기 오빠가 누명을 썼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우리 오빠 동물도 좋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오빠가 그럴 리 없다고. 그 말에 폭발한 히로키가 후타바의 목을 조른다. 그러자 후타바는 몸에 힘을 쭉 빼고 전혀 저항하지 않은 채 말한다. “도죠.” 하세요, 죽이세요.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후타바는 전 국민으로부터 범인의 가족은 죽음으로 사죄하라, 동반자살로 속죄하라는 말을 들어왔음을,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고백은 영원히 밖으로 꺼내지지 못한 채 후타바의 내면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히로키가 후타바를 구한다.

3화에서는 후타바가 아키의 엄마를 구한다. 그는 우연히 만난 후타바에게 고백한다. 딸이 죽는 날, 왜 딸에게 짧은 치마를 입혔을까. 딸은 죽기 전에 무슨 일을 당했을까.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확인할 수 없다고. 아키의 엄마는 딸이 살해되기 전에 성폭행을 당했을까봐, 그 이유가 자신이 아이에게 짧은 치마를 입혔기 때문일까봐 너무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짓눌려 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타바는 히로키와 함께 검시 조서를 찾아낸다. 만일 정말로 성폭행을 당했을지라도 진실을 평생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고 믿으며. 히로키가 엄마에게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검시관이 조사한 내용을 읽어준다. “7, 여아, 검시 소견, 전두부와 후두부 함몰 좌상, 익사 소견 없음, 검사 요청으로 성폭행 여부 조사, 성폭행 흔적 없음.” 진실이 아키의 엄마를 아주 조금 해방한다.

4화에서는 히로키가 후타바의 아버지를 만난다. 그는 출소한 지 오래인 아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다른 가족을 위하여 아들을 버렸다. 그것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것을 알아챈 히로키는 심지어 자신도 친구였던 후미야와 추억이 있는데, 아버지로서 부자의 정이 사라진 듯 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양 계속해서 내가 당신의 아들을 죽여도 돼? 당신 아들을 만나면 죽일 것 같은데 그래도 정말 상관없어?” 묻는다. 그러한 자극이 싹을 틔워 아버지는 아들을 찾게 된다.

이후에는 양쪽 집안이 자주 부딪히며 서로 진실을 고백한다. 내가 얼마나 너를 죽이고 싶은지, 그러나 내가 어떤 고통 속에서 사는지 너희 집구석이 제일 잘 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자책하게 만드는지, 칼을 들었다 내려놓고, 얼굴을 후려갈기려다 관두면서, 모든 것을 환한 세상에 드러내며, 회복된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죽지 않고 적어도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특히 피해자 가족은 해리에 가까운 감정의 분리를 보인다. 아키의 엄마는 가해자 가족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이웃을 대하듯 차를 내오고 국수를 삶는다. 손님 접대용 간식이 없다며 민망해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사카모토 유지의 전작을 관통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A라는 상황에서 모두가 예상하는, 열이면 아홉이 할 법한 반응을 하지 않고 영 딴소리를 하다가 끝에 가서 감정을 한껏 고조시킨 뒤 그제야 상투적 반응을 쏟아내 효과를 끌어올리는 패턴. 팬의 입장에서는 지겹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맛 아니면 사카모토 유지 꺼 왜 봐, 하게 만드는 작가의 ’. 그러나 이것이 <그래도>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키의 엄마는 마치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가해자 가족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이 당한 일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정신에 암전에 드리운 듯 가해자 가족에게 국수를 삶아주고, 심지어 후타바와 히로키의 사랑을 응원한다. 이러한 감정의 격리 현상을 작품에서 그리는 일은 놀랍지 않다. 익숙하다. 내가 <그래도>에서 좋아하는 점은, 분리된 두 감정 중에서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은 증오가 아니라 상대를 안쓰럽게 여기는 연민을 조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빤하고 낡고 도발적이지 않고 답답하고 촌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사카모토 유지의 선택이 신선하다.

아키의 엄마는 왜 둘로 쪼개지는가. 고통의 연원을 떠올리면 가해자 가족을 죽여버리고 싶다. 저들의 아들이 나의 딸을 죽였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까먹는 순간이 온다.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던 그들이 고통 속에 산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때이다. 히로키도 비슷하다. 그는 후미야의 아버지를 비난하다가 자신들을 알아본 사람이 후미야의 아버지에게 당장 히로키에게 도게자를 하라고, 사죄하라고 소리치고, 그러자 바로 카페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를 보며 착잡해한다. 그럴 때 그들은 고통의 연원을 까먹고 지금 벌어지는 상대의 아픔에 마음이 달라붙는다. 누구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약해진 마음, 원치 않았으나 떠올라버린 연민은 아키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되어 돌아온다.

작품은 끝으로 갈수록 서로가 서로를 정신없이 구한다. 작품 줄거리를 정리한 노트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라. ‘아무리 그래도 히로키가 아키 오빠인데! 자살하려는 살인자의 아버지도 구하고! 자살을 기도해 다 죽어가는 살인자도 인공호흡으로 살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후타바와 히로키는 눈앞에 무너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달려들어 일단 살리고 본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자신들도 회복된다.

아키의 엄마는 후타바에게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둘이 사랑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예비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만나는 분위기다. 그는 분개해 말한다. “행복해지려고 해도 괜찮아. 후타바도 히로키도 행복해질 수 있어.” 그 말을 분개에 차서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하는 아키 엄마의 톤이다. 억울함. 왜 너는 행복해질 수 없는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없는가. 네가 사람을 죽인 게 아닌데. 너의 오빠가 내 딸을 죽였지 네가 죽인 게 아닌데. 너는 죄가 없는데. 그것은 후타바가 꿈에서라도 떠올리지 못한 말이다. 그 말을 아키의 엄마가 대신해준다고, 나는 느꼈다.

행복해지자고 다짐하고는 5분 뒤에 다 죽여버리고 싶다, 아키의 엄마는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후미야의 가족을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순간의 연민, 살인자의 가족은 죽음으로 속죄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깜빡하고 잠시 떠오른 그 마음을, 없는 셈 치지 않고 인정할 뿐이다.

그래서, 후타바와 히로키는 자신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게 되었는가. 여기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후미야는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농장 사장의 딸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피해자에게는 어린 딸이 있다. 히로키가 사랑을 고백하자, 후타바는 자신은 피해자가 깨어날 때까지 피해자 딸의 엄마가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고. 나의 작품 결말 분류법에 따르면, 이것은 존 쿳시의추락더하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9)이다. 대속과 모성의 기분 나쁜 결합이다. 히로키도 당황하며 묻는다. 왜 당신이 피해자 딸의 엄마가 되어야 하느냐고. 2010년대의 사카모토 유지는 후타바 역시 오빠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020년대의 그라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다.

물론 후타바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그가 오빠는 오빠, 나는 나, 하면서 더이상 오빠가 내 인생을 선택하게 둘 수 없다고 각성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후타바가 후미야의 최초의 피해자였음을 분명히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후타바는 가버리고 히로키는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그래도> 시청자들과 함께 34일 동안 토론회를 열고 싶은데, 히로키는 후미야에게 간다. 한때 친구이기도 했던 그를 면회하며 그의 텅 빈 마음을 회복시키기로 다짐한다. 이제 만날 수 없게 된 연인은 한쪽은 피해자를 돌보고, 한쪽은 가해자를 돌보며, 마음속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며 말 그대로 영혼의 짝으로서, 영혼만이 교류하며 함께 살아간다.

(이 역시 로맨스의 장인 사카모토 유지의 인장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 보고 살아야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사랑. 사카모토 유지의 많은 작품이 이별로 끝난다. 심지어 <최고의 이혼>(2013)에서는 주인공 부부를 웬일로 맺어놓고 스페셜 판에서 찢어놓는 만행을 저지른다. <최고의 이혼>의 유카도 비 혈연관계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러 떠난다는 점에서 <그래도>의 한계가 똑같이 드러난다. 어찌 되었든 팬들을 괴롭히는 사카모토 유지의 황홀한 변태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돌고 돌아 지난 글의 질문에 도착했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어떤 사랑이 더 상위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존경하는 사랑은 여린 마음을 회복시키는 사랑이다. 여린 마음이 차오를 수 있도록 그를 가로막는 지옥을 함께 가주는 것이다. 그렇게 겨우 얻은 좋은 마음이 결국 배신당할지라도 (후미야를 돌보는 히로키가 결국 어떤 참담함을 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고 그래도 잘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추신

 

감정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나요?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세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세요.

 

이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역시 이 부분이 막혀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생활에서 제가 느끼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며 냉동실에서 얼린 감자 슬라이스를 꺼내 눈에 붙여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름아닌 그것을 쓸 때만이 발휘되는 강력한 힘과 독자와의 교감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쓰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재현의 문제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미신 때문입니다. 글에 무언가를 써버리는 순간 현실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 소설이 현실에 해를 끼칠 것 같은 비합리적인 예감.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모래 고모가 고모인 까닭은 소설에서 고모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모래 이모일 수 없고 모래 삼촌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러한 감정에 대해 더욱 자세히 쓴다면 글에 강렬한 감정이 깃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어떤 이득이 생기면 자동으로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붙잡아주는 힘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또 불안합니다. 불안의 연속입니다.

질문을 해야 하는데 고백만 늘어놓았네요. 이것이 교환 에세이의 맛인가봅니다. 그런데 당신, 채널 예스에서 돈 덴(2025)의 작가 만리포와 에세이를 교환했지요! 스위밍꿀에서 사랑의 세계(2025)의 개정판을 내면서 작가 정기현과 대담했지요! 에세이계의 바람둥이! 본진은 웁니다. 농담이고요. 괜히 민망해서 질척거려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제와 관련이 있는 농담입니다.

아마도 비 아이돌 팬이 아이돌 팬에게 원초적으로 갖는 질문이자, 팬들을 가장 짜증나게 할 법한 의문인데요. 희주님은 질투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여러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관계의 특성상 저라면 질투에 눈에 멀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자주 보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의 진행자가 남들의 댓글을 잘 읽어주면서 내 댓글은 안 읽어주면 삐쳐서 3일 동안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엄벌을 내리는 속 좁은 인간이거든요. 사랑에서 질투란 무엇일까요?

 

 

이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