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노래가사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모르지만 질투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노래가사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모르지만 질투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에마 클라인, 『더 걸스』(정주연 옮김, arte, 2016)

 

 


최고의 사랑

 

영화파인 내가 드물게 좋아하는 드라마가 사카모토 유지 극본의 <최고의 이혼>이다. 이 작품은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작품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장면도 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 부부인 ‘미츠오’와 ‘유카’는 지진 당시 대중교통수단이 끊긴 거리를 함께 걷고 이를 계기로 결혼한다. 그리고 이혼 보고를 하러 유카의 친정에 갔다가 막차가 중간에 끊겨 밤새 집으로 함께 걸어온 둘은 다시 한번 시작해보기로 한다.
나는 이 모습을 카메라가 보여주는 게 좋았다. 나카메구로의 작은 강을 따라 해가 희붐하게 밝아올 때까지 두 사람을 함께 걷게 하는 게 좋았다. 언제 땅이 흔들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함께 걷는 것. 그리고 걷다보면 어딘가로 도착한다는 거. 다시 말해, 어딘가에 함께 도착하기 위해서는 함께 걸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참고로 난 두 사람이 다시 갈라선다는 <최고의 이혼> 스페셜을 보지 않았다. 작가가 헤어지게 하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한가? 안 보면 영원히 함께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사랑의 시작도 마무리도 그렇다. 혼자서는 할 수 없고 함께 가야 한다. 이걸 꼭 말하고 싶었다. 미상과 내가 교환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글 속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것. 불안 속에 흔들리며. 그러나 결국 우린 어딘가에 도착할 거다. 두 사람이 나약함을 나누며 함께 걷는 일이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게 최고의 사랑이라는 데엔 나도 동의한다. 
그럼, 남은 연재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우젓 이론

 

미상은 지겨운 질문일 거라고 운을 뗐으나 이번 공도 만만찮다고 생각한 건 미상의 첨언과 달리 아무도 내게 질투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대뜸 답부터 던지자. 나는 질투를 모르도록 훈련되었다. 특히 팬으로서 그렇다. 
원인을 찾기 위해선 열일곱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당시 동방신기의 진지한 팬이었던 나는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와 허브 홈이던 ‘동네방네’부터 ‘디시인사이드 동방신기 갤러리’까지 각종 팬 페이지를 이념(?) 구분 없이 섭렵했다. ‘동방갤’엔 당시 ‘디시갤’이 그랬듯 ‘닥눈삼(닥치고 눈팅 삼 개월)’해서 익혀야 하는 기본 어휘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새우젓’이었는데, 어원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신이 난 믹키유천이 공연중 객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끝난 뒤 그 구역에 있던 많은 이들이 그가 자신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각자 눈맞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분위기가 가열되었을 무렵 한 현자가 말했다. 

‘너희가 새우젓 하나하나의 눈을 맞추며 먹지 않듯 오빠도 너희를 보지 않는다. 그저 빠순이라는 거대한 단위의 새우젓을 본 것이다’

이 말은 많은 팬들의 공감을 얻어 대략 201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소멸했다. 추측컨대 근 십 년간 팬덤 문화가 변모하며 지불 비용에 따라 누군가는 새우젓, 누군가는 죽방멸치는 되게끔 팬의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과거에 빠순이들에게 배급되는 사랑은 동량이어야 한다는 주장 혹은 약속은 공감받았다. 누구에게나 그 사랑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사랑은 굶주린 개떼 앞에 던져진 고기 한 덩어리다. 농담으로 포장되었지만 거기엔 먹이 앞에 선 자들의 긴장감, 어쩌면 분노의 전조가 쥐약처럼 발라져 있다. 그걸 ‘새우젓’이라는 단어를 창조함으로써 단번에 무마시킨 유쾌함이 대단해서 나는 종종 이 정확한 비유를 되새긴다. 그걸 맞닥뜨리고 느낀 희미한 안도감을 떠올린다. 다 같이 푹 익어가는 발효의 뜨뜻함. 그걸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다. 질투에 좋은 게 뭐가 있나? 6화에서 소개한 <선생님의 세계>에서도 토쿠노 군이 말하지 않았던가. “선생님, 저는 질투를 했나봐요… 이런 거 하기 싫어요. 이상해져요”라고. 
그래서 질투를 안 하고 있고, 미상이 말한 것처럼 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좀 짜증내며 생각하곤 한다. 
여기까지 와서 이래야 하나? 질투 없는 세상은 없나?

 


질투 없는 세상

 

1969년의 늦여름. 열네 살의 ‘이비’는 2차 성징과 남녀관계라는 전장 속으로 이제 막 발을 디디고 있다. 비달 사순의 충고에 따라 머리카락엔 날달걀을 바르고, 코에 난 검은 피지를 달군 바늘로 빼내는 데 열중하지만 사랑의 승리는 요원하다. 남몰래 좋아하던 친구의 오빠 ‘피터’가 여자친구와 떠나고 친구와도 사이가 멀어진 그때, 이비의 세상에 ‘수전’이 나타난다. 맨발로 다니고 공원의 커다란 쓰레기통에서 쓸 만한 음식을 찾는 수전. “다른 세상의 분위기가 감”(8쪽)도는 수전에게 이비는 매혹되어 수전과 친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농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모든 소녀들의 중심에 있는 러셀이라는 신비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에마 클라인은 <더 걸스>가 허구라고 말하지만 누구나 이 작품이 맨슨 패밀리의 살인사건을 모티프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잘 아는 내용을 굳이 풀어 설명하자면 1960년대, 당대 유행했던 히피문화의 일환인 사랑을 내세워 ‘맨슨 패밀리’라는 추종자 무리를 만든 찰스 맨슨이 추종자를 조종, 로만 폴란스키의 부재 시점에 그의 저택에 침입하여 감독의 아내이자 임신 팔 개월의 배우였던 샤론 테이트와 그 태아를 비롯한 일곱 명을 잔인하게 살인하도록 지시한 사건을 뜻한다. 유명 배우와 얽히기도 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끈 이유는 사건의 주범이 이른바 ‘맨슨 걸스’라고 불린 일련의 젊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맨슨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 그를 재림 예수라고 부르는 이들의 존재는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이 여자들은 어째서 맨슨에게 빠졌는가? 거기엔 단지 히피문화의 융성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있고 에마 클라인은 이를 세상이 여자들에게 잔뜩 주입했지만 결국 모두에게 돌아가진 못한 사랑의 결핍으로 접근한다. 

 

이비는 열네 살에 두 가지 사랑의 실패를 맛본다. 하나는 자신의 실패. 다른 하나는 엄마의 실패. 
이비는 자신을 사랑하기 전 미워하는 법부터 배운다. 지나가는 여자애들만 보면 “바로 훑어보고 등급을 매겨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계속 점수를 계산”(8쪽)하는 이비는 딱히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번뜩이는 탁월함’도 없다. 그런 이비가 사춘기의 전장에서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없다. 맨손으로 부딪는, 일테면 피터와 그의 친구가 멀리 떨어진 시내 극장에서 한다는 포르노 영화에 대해 떠들 때 아는 척한 시도는 처참한 망신으로 끝난다.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부러 가장한 분노는 선을 넘어 친구도 잃는다. 어른으로 들어가는 세계. 마리화나 같은 작은 범죄의 세계. 허세의 세계. 무엇보다 사랑과 소속감의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난 이비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비의 이런 실패는 모계유전인 듯 그려지는데,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69년의 여름으로부터 얼마 전, 이비의 부모는 이혼을 했다. 가진 건 인디언 출신 여배우였던 외할머니가 물려준 돈밖에 없는 엄마는 이비를 집에 두고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러 다닌다. 고기를 끊고, 종아리 운동을 하고, 이상한 향을 피우며 자신을 좀더 낫게 하는 데, 그래서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한다. “내 하얀 양말을 달걀처럼 귀엽게 말아주던 엄마”(35쪽)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금광 사업을 한다는 남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엄마만 있다. 이비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이비가 원하는 건 매크로바이오틱 요리교실에서 만든 된장수프가 아니라 미트볼을 먹던 과거가 지속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이비가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아빠는 이미 떠났는데? 엄마에게 필요한 건 딸이 아닌 남자, 아빠가 앉던 자리에 앉아 식사할 남자인데? 설령 그게 사업자금이 필요해 보이는 수상쩍은 남자라도? 
이 과정을 지켜보며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이비의 믿음은 깨진다. 유년기의 동화들이 여자애들에게 반복 주입한 언령.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주문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가 서글픈 냉소의 대상이 된다.

 

결혼에 대해 단순하게 희망적으로 상상하던 때였다. 누군가 나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하고 내가 슬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냉장고 냄새가 나는 음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봐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던 때였다. 누군가 자신들의 삶이 내 삶과 나란히 달릴 것이라고 약속해줄 것을. (……) 사랑이란 어차피 절대 지켜지지 않을 것이잖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라며 슬퍼하는 노래들의 후렴구처럼.(95쪽)

 

이비는 엄마가 패배한 결정적인 순간으로 엄마가 아빠의 투자자를 위해 연 칵테일파티를 기억한다. 엄마는 종종대며 이 이벤트를 준비한다. ‘래커를 칠한 것처럼’ 광택이 나는 케첩을 넣은 중국식 갈비, ‘귤로 만든 질척질척한 디저트’를 차리고 파티 내내 전전긍긍하며 차려 입은 긴 치마를 매만진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어리지만 모든 걸 알아챌 정도로는 성숙한 이비가 보기에 파티는 모욕의 연속이다. 이비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은 장모의 부에 기생해 살고 있는 걸 비아냥댄다는 걸, 아빠가 훗날 그의 새 아내가 될 젊고 아름다운 타마르와 대화 이상의 그 무언가를 나눈다는 걸 눈치챈다. 그래서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온 엄마에게 타마르와 아빠가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혼란 속에서 전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단순했다. “그래서?”(96쪽) 그런 다음 엄마는 오늘 낸 디저트가 먹기 불편했다고, 다음엔 마카롱을 내야겠다고 혼잣말하듯 뱉으며 자리를 떠난다. 억지로 매듭지어진 대화에 당황하던 이비는 문득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고 실망 속에 깨우친다.

 

나는 신발 자국이 난 붉은 발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버클을 졸랐는지 발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균형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긴 발을 가진 사람을 도대체 누가 사랑해주겠어?(97쪽)


엄마의 실패는 딸의 실패로 전이된다. 젊고 아름다운 타마르를 떠올릴 때면 이비는 언젠가 아빠가 욕실에 두었던 잡지에 나온 여자들을 떠올린다. 개중 나체로 목에 리본을 두른 여자를 떠올리며 타마르의 얼굴을 그 위에 겹친다. 이비가 볼 때 여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태생이 사랑에 빠지게끔 생겨난 여자”(98쪽)와 아닌 여자. 세련된 타마르와 피터의 여자친구인 파멜라는 전자고 ‘수표책을 찾는다며 뒤적거리다가 엄마가 에어트래블 카드를 꺼내자 고마워하던 남자’를 만나는 엄마는 후자다. 이비는 자신이 엄마와 같은 줄에 서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다른 줄로 건너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이비를 괴롭게 한다.
이때 수전이 이분법을 아득히 초월하는 답을 던진다. 그는 사랑이 한정된 이에게만 주어지는 자원이 아니라고 설파한다. 소녀들의 식탁은 쓰레기통에서 주운 녹색 감자와 허연 핫도그 빵, 선물상자의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었을 오래된 브라우니, 남의 주방에서 손가락으로 뼈를 발라 파낸 닭고기, 담배와 마리화나와 무엇보다 평등한 사랑으로 꾸려져 있다. 이는 소녀들의 중심에 있는 러셀이 나누어주는 먹이다.
처음 이비를 데리고 농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들은 사랑은 특별함이 아닌 평등함임을 설파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러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소녀들의 눈빛은 ‘아내처럼 온화’해진다. 

 

아무도 딱히 그랬다고 말은 안 했지만 나는 그애들이 모두 러셀과 잤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달아올랐고,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무도 서로를 시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잖아.” 도나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115쪽)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히 싸우는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 이비는 그 세계에 입구에 서서 수전이 마치 그가 농장의 아이들 중 하나인 양 일을 시킬 때 기쁨을 느낀다. 자신이 쫓겨난 세계와 다른 대안을 줄 것이라고, 분명 더 나을 거라고 부풀려 생각한다.
그리고 하지 파티의 날. 이비는 러셀의 부름으로 그의 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러셀과 대화를 하며 그를 다른 소녀들이 느꼈던 감정의 일부를 느낀다. 러셀은 이비를 진지하게 대해준 드문 사람이다. 이비의 이야기를 가치 있다는 듯 귀기울인다. 열네 살의 이비는 그 안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려고, 사랑받을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마음과 예정된 실패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던 이비는 자기 자신인 채로 존중받는 듯한 경험을 한다. 
   
러셀은 진지하게 말하면서 마치 자신이 내 말을 들으려고 온 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코니 방에서 느낀 것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결코 속한 적이 없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음반을 듣던, 변함없이 비참한 감정을 더해주기만 하는 노래를 듣던 그 느낌. 피터도 이제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139~140쪽)

 

그러나 요시나가 후미가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서 명시했듯 ‘사랑을 한다는 건, 사람을 차별한다는’ 일이다. 평등한 사랑은 당연히 없고, 대화의 끝은 “어쨌든 섹스까진 아니니까”(144쪽) 하고 스스로를 달랠 만한 행위로 끝이 난다. 이 평등 속에서 이비의 몸은 이비가 아닌 그저 육체로 사용된다. 러셀은 음반 발매를 위해 유명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미치’에게 접근하나 미치는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실망스러운 답을 낸다. 그날, 수전은 이비에게 자신과 함께 미치를 집까지 바래다주자고 제안한다. 세 사람은 수전이 운전하는 차에 타 미치의 저택으로 향하고, 수전은 이비를 미치의 침실로 부른다. 거기서 이비는 그냥 몸으로만 존재한다. 미치가 마음껏 쓸 수 있는 육체. 그래서 러셀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에게 음반 발매의 기회를 제공해줄 만한 제물로. 
침대 위에서 수전과 이비는 구분 불가능해진다. 열네 살의 이비가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고 말한 수전마저 미치의 앞에선 그냥 욕망을 해소할 몸뚱어리가 된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하나다. 아름다운 수전. 신문에 실린 범죄 사진에는 누락된, 만나야 보이는 희미한 솜털처럼 두 뺨에 불투명한 아우라가 감도는 수전 역시 그저 결핍으로 몸부림치는 십대 소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누군가의 손길을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 외로움에 상처를 입었다. 수전에게서도 같은 허기가 보였다.(207쪽)

 


질투하기에 사랑?!

 

이비가 농장에 끌린 이유. 소녀들이 농장에 모인 이유. 교회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 모두 그 세계엔 질투가 없기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아이돌 팬으로 사는 이유도 비슷하다. 표면상으로는 누구도 더 손에 꼽게 좋아하지 않는 세계. 사랑의 공산주의가 일어나는 희한한 세계니까. 이건 아이돌 스캔들이 여전히 팬덤의 가장 큰 이슈인 이유일 거다. 사랑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을 것. 그래서 모두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약속이니까. 그리고 거꾸로 이런 생각도 한다. 팬들은 자주 아이돌의 고유성을 주장한다. 매 순간 너의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팬들 역시 공정하게 사랑을 주는 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사랑의 공평함이라는 약속이 깨지는 순간, 질투를 온 사방에 토해내고 다른 자리로 떠나는 거라고.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남자도 모르는 남성에 대하여』(김효진 옮김, 행성B, 2017)에서 일본 남성 특유의 성벽인 롤리타콤플렉스의 근원을 파헤치며 미소녀라는 도상은 남성이 자기 육체를 혐오하기에 갈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남자들이 탐하는 건 소녀 그 자체가 아닌 인간이 두 가지 성별이 분화하기 이전, 더럽고, 털과 체액이 많은 ‘남자’가 되기 이전에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주장인데, 내가 눈여겨본 건 그가 이 과정에서 실재하는 소녀들이 이미지로써 이용되고 버려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피하지 않고 분명히 명시한 지점이었다. (모리오카의 주장은 일본 국내외에서 욕을 좀 먹었다. 그 탓인지 번역서 표지엔 우에노 지즈코의 추천사가 적혀 있지만, 이 책에 ‘페미니즘’적 올바름이 있다면 그건 유명 여성학자의 코멘트가 아닌 저자가 죄책감과 직면했다는 사실이라고 본다.)  
나는 아이돌 팬으로서 모리오카의 반성에 공명한다. 그렇기에 최애를 기호가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한 건, 인간으로서 최애를 사랑해보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래서 설령 매우 ‘짜치는’ 질투가 내 안에 생기더라도 받아들이고 가보기로 했다. 이런 사랑의 실험 대상이 하필 아이돌이라는 것이 우습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나 스스로도 이해 가지 않는 방식이라 나와 상관없는 남자애들의 인생을 매우 구체적으로 염려해버리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다.
기회가 생긴 김에 하는 말이지만 매체에 케이팝 혹은 빠순이 관련 글을 쓰며 언제나 탈락되는 진실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그 아이들에게 가장 바라는 게 ‘영원히 대상으로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대상화됨’은 양자역학과 비슷하다. 내가 관찰할 때만 대상으로써 움직이면 되고, 그 외에 다른 순간엔 어떤 형식으로 존재해도 상관없다는 거다. 나는 그것이 조금 더 고급 대상화가 가능한 조건이라고 믿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종종 아이돌 노동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고백건대 모든 건 이런 끔찍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최애가 진실로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아이돌 노조 따위의 허황된 소리야 얼마든 할 수 있다. 이상은 노래 가사처럼, 나를 위해 그애가 행복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일전에 최애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벌떡 일어나 생각한 거다. 얘가 아이돌 그만뒀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모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 잔혹한 시장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애를 너무 꺼내고 싶어서, 번개 같은 두려움과 마주쳐서, 차라리 그애를 추방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그애를 잃더라도 상관없다고 믿었고, 이젠 그러지 않는다. 내가 그애를 보내야 한다고 믿은 건 삶이 고통스럽기에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말과 같고, 고작 삶의 고통은 ‘수박 먹는 기쁨’을 앗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얘기가 샜다. 다시 돌아가 내가 질투 없는 사랑의 공산주의에 매혹된 건 스스로의 고유성을 끊임없이 부정했던 일과 관련 있다. 
질투는 질투의 대상이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 말하자면 고유성을 갖고 있어야 생겨나는데, 나는 이걸 갖는 게 싫었다. 나는 대체로 뭐가 없는 애로 세상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눈에 띄게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는 어중간한 애. 질투할 만하지 않은 애로 세상에 내 자리를 만들었고 나쁘지 않았다. 내겐 관계가 중요했다. 무언가를 더 가진다면 ‘가진 게 없는 애’라는 내 역할을 벗어나야 했고 그건 세계로부터의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오래 그렇게 살다보니 뭘 더 가져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뺏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 
이건 내 삶을 일부 망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 준비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서류심사에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간 날, 내 또래의 여자들이 득시글한 방에서 나는 웃었다. 이중에 하나만 뽑는다는 게, 나머지 간절한 십수 명을 떨어뜨린다는 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다수파에 속하길 바랐다. (소망은 이뤄져 오랜 시간 백수로 지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순간 내 안에 경고 알람이 울렸다. 난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내게? 싶었다. 그 사람이 나를,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정말 사랑하게 되면 도망쳤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이 또한 내 삶을 일부 망쳤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년기에 잘못 맺은 애착관계, 성장기의 실패 등등.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구호에 빠져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고 외치지만 나는 애초에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뒤따라오는 것들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의 이비가 가졌던 관계. 너는 정말 특별하고, 너의 육체는 빛나고, “네 안엔 아름다움밖에 없어”(215쪽)라는 말이 착취를 위한 주춧돌처럼 놓여 있던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아직 고백하고 싶지 않은 근거가 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나는 오래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내게 특별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나를 받아주는 척하고 조종하려 드는 건 아닌지 눈을 홉뜨고 지켜보았다. 같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산주의적 사랑만 원했다. ‘사랑하는 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잖아’라는 번뜩이는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즈니 여러분 사랑해요’ 같은 말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젠 안 그러고 싶지만.
비슷하게 나는 이런 케이스도 안다. 
1969년의 여름에서 멀어진 어느 현재. 나이든 ‘이비 아줌마’는 아는 사람의 빈 별장에서 생활한다. 어느 날 별장 주인의 십대 아들인 ‘줄리언’이 여자 친구 ‘새셔’를 데려온다. 그리고 다음날 말도 없이 혼자 사라진 뒤, 어디선가 서른 중반 쯤 되는 남자를 친구랍시고 데려온다. 새셔는 자신을 버리고 갔던 줄리언이 돌아온 것만으로 기쁘다. 그래서 줄리언이 모르는 남자에게 가슴을 보여주라고 요구할 때, 이비의 만류에도 머뭇거리다 가슴을 드러낸다. 그걸 보는 이비의 마음은 요동친다.  
이비는 엄마에게서 실패를 물려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모녀는 생물학적인 측면이 아닌, 안드레아 롱 추적 의미로 ‘여자’이기에 닮았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거. 그렇게 상대의 욕망을 채워줄 단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되는 욕망은 혈연을 뛰어넘어 여자들에게 유전되고, 이비는 원치 않으면서 가슴을 내보이는 새셔를 보고 그 사실과 수십 년 만에 조우한다. 러셀이나, 줄리언이나, 그 밖에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여자들을 건드리는 남자들이 요구하는 건 단 하나다. 
“자아를 파괴하고, 우주에 너 자신을 먼지처럼 바쳐라.”(213쪽)
이건 시대를 넘은 여자의 미덕이다. 슬프고, 이비가 그랬듯 내 입을 다물게 하는 모습이지만 나는 ‘여자’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여자들과 그들의 욕망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당신들 실수했다며 더 나은 세계로 전도하려는 바른 마음도 없다. 우리의 꼴이 거울상인데 누가 누구를 지적하겠는가. 감히 누가 누구를 구하겠는가.
그 대신 나는 우리의 슬픔을 껴안고 제대로 나빠지는 일을 제안하고 싶다.
일테면 이런 거다. 레이철 시먼스는 『소녀들의 심리학』(정연희, 양철북, 2011)에서 각각 다른 지역, 인종, 계급의 로우틴에서 하이틴 소녀들 사이에 일어나는 따돌림, 배척 등의 미묘한 정동을 ‘공격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소녀들은 문화적으로 ‘착한 소녀’일 것임을 권장받기에 직접 타인을 공격하는 대신 은밀한 따돌림이나 무시, 탐지하기 어려운 학대를 행하는데 재미난 것은 저자가 통계로 얻어낸 소녀들의 갈등 원인 중 하나가 ‘남자 문제’라는 거다. 한 소녀는 절친한 친구를 손봐준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이 한 경고를 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내 말 잘 들어. 만약 내 남자친구랑 같이 자면 가만 두지 않겠어. 너한테도 똑같이 갚아줄 거야.’(253쪽) 

 

‘여돕여(여자를 돕는 건 여자)’ 시대에 너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90년대의 소녀들에게 MTV 혹은 소프 오페라가 미친 악영향이 컸던 것도 같다. 그러나 무언가의 탓을 하기 이전,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을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소녀들이 따돌리는 대상은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듯 못생기거나, 뚱뚱하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가난한 아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건 남자애들의 이야기고, 소녀들의 관계에서는 진취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휘어잡던 매력적인 아이도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눈에 띄는 존재가 질투받고, 미움을 산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지 주목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할 순 없다. 그렇기에 소녀들은 누군가가 나대거나, 재수없게 구는 순간들을 가슴속에 켜켜이 담아두었다가 상대가 명명백백한 잘못을 저지르면 기다렸다는 듯 폭격을 퍼붓는데, 그게 바로 ‘남자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뒤집어 말해 소녀들은 ‘남자 문제’가 생겼을 때만 누군가에게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왜냐면 그것만이 정당하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로 소프 오페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질투와 공격성을 발휘해도 된다는 허가받은 영역은 이성애 관계뿐이라고 문화가 전파하고 있으니까. 이 틀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감정을 해석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덧붙여 시각문화평론가 리타(이연숙)가 말했듯, 두 여자 사이의 질투 안엔 페미니즘적으로 개안하지 못한 이들의 미숙함, 억압된 레즈비어니즘-즉, 공격적 성욕의 발현이나 ‘여돕여’, 무엇보다 그저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은 인간으로서의 못난 본성도 마구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 구분되지 않고, ‘여자는 착하다’라는 전략적 수식이 진실인 것처럼 다뤄지는 근래엔 의도를 갖고 오독되기도 한다. 그렇게 무시된 날것의 감정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우리를 지키려고 만든 말이 외려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여자짐승들에게 사랑 바깥의 투견장을 허해야 한다. 그래야 질투를 부정하고 수동공격적으로 왜곡해 분출하거나, 자아를 없애고 질투 없는 세상으로 도피하는 대신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 번은 해볼 만 한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도 실컷 코피 터지게 싸운 다음 잔디밭에 드러누워 화해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게 될지. 
새우젓은 생새우에 소금과 술을 부어 발효시켜 만든다. 발효는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코를 찌르는 악취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공격한다. 여자는 여자를 질투한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사랑의 안과 밖에 고인 질투라는 샘이 깊은 늪에서 우리가 손에 쥘 만한 거미줄인지 모른다.

 


미상에게


최초 이 글의 텍스트는 노다 아야코의 <더블>이었습니다. 천재 배우 ‘타카라’와 그를 서포트하는 별 볼 일 없는 배우 ‘유진’이 나오는 만화입니다. 타카라는 우연히 들어간 소극장에서 유진의 연기를 보고 반해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본을 보고는 대사를 외우지 못해, 유진의 연기를 복사하듯 흉내내죠. 문제는 극에 몰입한 타카라가 어느 순간 유진을 배신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연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범재와 천재를 가르는 한끗. 유진은 그런 타카라의 재능에 매혹되고, 질투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 난다고 생각하면서 질투하고, 타카라는 유진을 사랑합니다. 어쩌면 유진도 그렇고요. 
게다가 극 중 둘이 함께 연습중인 극이 쓰카 코헤이의 <초급혁명강좌 비룡전>인 것도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이 작품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반대운동 당시 경찰기동대에 의해 사망한 도쿄대 간바 미치코를 모델 삼아 쓰였는데, 하필 우리가 지지난주 토요일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의 기리시마 사토시의 일생을 다룬 <도주> 상영회에서 우연히 만났잖아요? 그건 저를 무척 신나게 해서 반드시 다뤄야 한다고 했지만, 하필 지난주 토요일 최애를 보러 간 컨벤션센터의 이웃한 홀에서 신흥종교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더 걸스>를 안 다룰 수 없었습니다. 두 개의 우연 중 좀더 최신의 우연을 택한 셈이랄까요. 
우연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내게 글이란 계획적 창조의 영역이었습니다. 전부 내가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고, 말을 다룰 때 미래를 예비하며 망설이고 싶지 않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아니, 겨루다가 내가 메치기해서 눌러버리기를 바라고요. 그런데 두 번의 우연을 통해 미상의 마음, 모래 고모가 고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상을, 그리고 아마도 미상도 나를 만나고 싶어하던 때에 우리가 극장에서 마주쳤다는 게 아주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감자를 얇게 써는 미상의 곁에서 자발떨며 냉동실에 넣어둔 숟가락을 꺼내는 마음으로 문장 하나를 얹어봅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요.
앞으로 우연성은 어디로 우리를 이끌까요? 사랑에서 비껴간 엉뚱한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뻔뻔하게 묻습니다. 모르는 길을 더듬어나갈 용기를 손에 쥐고 오늘의 질문을 던집니다. 질투가 싫다는 이유로 독점적 애정 관계를 외면했던 나로서는 용감하게 사랑에 뛰어든 미상이 대단하기도, 부럽기도 합니다. 대단히 질투합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미상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는지요? 믿음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믿음이라는 건 가능합니까?

 

이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