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질투를 옹호하며

 

 질투를 옹호하며

―김기호 연출, 황성연·최문석 각본, <발리에서 생긴 일>(2003), 퍼트리샤 보스워스,『다이앤 아버스』(김현경 옮김, 세미콜론, 2007), 윌리엄 트레버, 「그의 옛 연인」(『그의 옛 연인』, 민은영 옮김, 한겨레출판, 2018)

 

※ 아래는 작품의 결말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0표 앤, 0표 영주, 0표 나, 0표 당신……

 

최애의 눈에는 우리 모두 한낱 새우젓이라며, 관중의 바다에서 서로가 서로의 손에 떠다니며 사랑의 평등세상을 여는 장관. 그것을 위하여 제거되어야 하는 질투라는 감정.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팬들 사이의 세세한 명시적/암묵적 규칙들. 팬의 세계란 심장이 터지면서도 적당히 터지도록, 너무 터져 소중한 공동체를 해치지 않도록, 규약을 만들고 철저히 지키는 방출과 억제가 교호하는 장인 것일까? 감정의 철문을 능수능란하게 여닫는 프로들의 세계인 것일까? 앞선 희주의 글을 읽고 생각했다.

그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그간 팬의 세계를 상상할 때 나는 주로 ‘흥분의 도가니’로 표현되는 황홀경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떠받치는 것이 질투라는 강력한 감정을 “모르도록 훈련”받은 감정 조절의 대가들이라니. 뚜껑 자국이 손바닥에 빨갛게 찍히도록 병 속 감정을 가두는 손들이라니. 폭발과 억제. 양가적인 구조가 흥미로웠다. 물론 질투를 쉽사리 느끼지 않거나, 느껴도 가볍게 넘기는 데에는 개인 요인이 주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훈련을 받는다고 누구나 질투를 죽이지는 못할 터. 

어쨌든 질투라는 주제를 꺼낸 까닭은 내가 그 감정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재가 절반을 넘긴 시점에서 그간 내가 글에서 너무 잘난 체를 한 게 아닐까, 독자로서 내가 에세이에서 보고 싶은 것은 쓴 사람의 나약함과 저질 근성인데,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질투라……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발표된 2025 이효석문학상에서 에짝(에세이 짝꿍) 희주 대상, 나 우수상. 상금 오천만원 VS 오백만원……

문단 문학계에 내포된 경쟁 시스템과 그것을 추동하는 스타 시스템―각광 받는 소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더욱 많이 받도록 기회와 자원을 몰아주는 일. 그러한 경쟁에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수많은 (비)등단 작가의 고통과, 그것이 불러올 문학 다양성(=소재와 형식)의 축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사랑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는 관두기로 하자. 나도 그 시스템의 혜택을 받았으면서 욕심 그득하게 이런 발언으로 비판자의 포지션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자의식이 꽃피운 자책감에 대해서도 향후 무릎 꿇기로 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시라, 질투가 이렇게 추잡하다!

우수상에 그쳐서 용심 났다고 고백할 듯 굴다가 갑자기 문단 운운하며 도망칠 만큼 수치스러운 감정이다, 질투란 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토쿠노 군(<선생님의 세계>)이 질투를 두고 “이런 거 하기 싫어요. 이상해져요”라고 말할 때, 누군들 그러고 싶겠냐, 연인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몰래 풀며 질투에 눈 먼 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나의 다리가 무너지면, 탁자 전체가 넘어진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음식과 돈 등 모든 것을 공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들 사이에는 숨기는 것도 없고, 배신이나 속이는 일도 없을 거라고.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알렉스는 먼저 자기가 아직도 다이앤과 사랑에 빠져 있다고 밝혔다. 이 사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는, 물론 아내도 사랑한다고 재빨리 덧붙였다. (『다이앤 아버스, 84쪽)

 

옛날 옛적에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남미새 시즌을 뛸 때여서 그런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 중 한 명의 일대기를 읽어놓고 사진 관련 에피소드는 다 까먹고 망한 다자연애 건件만 마음에 남았다. 상황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부부1: 다이앤 & 앨런. 부부2: 알렉스 & 앤. 넷을 가로지르는 사랑의 작대기: 복잡함.

알렉스는 다이앤을 짝사랑한다. 앨런도 다이앤을 사랑한다. 다이앤은 “내가 너와 앨런을 둘 다 원하는 게 나쁜 거야?”(82쪽) 한다. 그렇다면 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앤은? 책에 따르면 “그 사각 우정에서 고통 외에 뭘 얻었는지” 모를 상태다. 네 사람은 자주 어울리다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확장된 가족”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혼인 제도가 전제로 하는 부부 중심의 배타성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인데 그래서 도착한 곳은 모두가 예상한바, 다이앤과 알렉스의 불륜 사태.

 

갑자기 알렉스가 자기와 다이앤은 십대 때부터 사랑하다가 며칠 전에야 서로 그 점을 시인했으며, 그것은 아름다웠다고 선언했다. (……) 그러자 앤 엘리엇이 전혀 아름답지 않게 생각한다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신뢰를, 우정을 저버린 것이라고, 그러면 그 빌어먹을 탁자 다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탁자는 이제 어떻게 된 거냐고? (……) 앤이 벌어진 일에 대해 미안하지 않아?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이앤이 대답했다. 아니. 다이앤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유와 결혼생활의 무소유를 실현하려는 노력에 가치를 두었다. (122쪽)

 

다이앤 아버스에게 저주를.

그녀에는 두 남자를 사랑하는 보다도 답답한 결혼생활에 균열을 내고 자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앨런과 알렉스는 약간은…… 새우젓이었을 것이다. 나는 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0표녀’의 비참함에 마음이 미어진다. 남편과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결혼이라는 낡은 제도의 상징까지 되어야 했다니. 혁파해야 할 낡은 관습의 대변자가 될 위기에 처하다니. 그렇기에 최소한의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하여 앤은 남편에 대한 독점권을 양껏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묵배미의 사랑>(1990) 속 유혜리처럼 바람난 남편의 성기를 꽉 붙잡고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망신 주고 학대하는 한풀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저승에서라도 앤에게 사죄하길 바란다.

사각관계는커녕 삼각관계도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0표자’에게 무조건 마음이 기우는 나는, 당연히 <발리에서 생긴 일> (이하, <발리>)에서도 team 영주다. 전형적인 재벌가 똑단발 ‘얼음 공주’ 캐릭터 최영주. 그는 전 애인 인욱을 잊지 못하고 허구한 날 그의 동네에 찾아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오만방자할지라도 까보면 사랑해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순정녀다. 물론 인욱의 입장에서 영주의 언행은 자존감을 훼손하는 언어폭력에 가깝지만. 게다가 이후에 결혼하게 되는 약혼자 재민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두 남자는 수정을 사랑한다. 사랑의 작대기 판의 꼴찌. 0표 영주.

그는 네 주인공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스포 주의) 재민이 인욱과 수정을 죽이고 자신도 총으로 자살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을 죽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빛을 비추고 싶은 주제다. 질투가 해로운 감정인 까닭은 스스로 멈추지 못하면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파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살인이다. 그렇기에 질투를 옹호하기에 앞서 <발리>의 결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재민이 한 침대에 누운 인욱과 수정을 총으로 쏘고, 수정이 눈물을 흘리며 “사랑해요” 유언하고, 재민이 석양을 바라보며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자살하는 마무리.

그것은 방영 당시나 지금이나 파격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즉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양손을 들고 멀어지며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타인이라는 세계를 다시 자기 통제 아래 두려는 극단적인 폭력이자 권력욕이다. 이수정이 자신에게 왔다면 정재민은 그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수정이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죽였다. ‘나는 000을 원했으나 000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000 안에 무엇이 들어가든 그 허무하리만큼 단순한 구조 외에 나는 정재민의 살해 동기를 고민해줄 의향이 없다.

<발리>를 본 많은 사람이 결말에 대한 판단과 입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4박 5일 워크숍을 열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일단은 각자의 것을 마음 한구석에 잘 쟁인 채, 세 사람을 살릴 방도를 생각해보자. 우리 0표 영주까지 끼워서 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자. 그들이야말로 ‘다리가 하나라도 없으면 무너지는 사각 테이블’이 되어야 했던 게 아닐까. 비독점적 다자연애가 생명을 구하지 않았을까?

 

 

전 애인의 훌륭한 전 애인 군단

 

사생활을 경유하여 잠시 에둘러 가보자. (그런데 당신은 에세이 집필자의 고백을 믿는가? 나는 아니 에르노도 안 믿는 사람이다.) 옛날 옛적에 오래 사귄 애인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진 적이 있다. 애인과 바람을 피운 상대 여성분은 스치듯 한 번 본 게 다인 사람이었다.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만일 사랑의 강도를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의 총량으로 측정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애인이 아니라 상대 여성분이겠구나,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거의 정보가 없는 그분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분석하고 질투하고 홀로 미쳐 돌아갔던 것이다. 나의 마음속 그분은, 전 애인이 사귈 때 들려준 자신이 사귀었던 훌륭한 여자들의 총합이 되어 나를 기죽였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의 잘못인지 불분명하다.

전 애인의 훌륭한 전 애인 군단은 나의 열등감이 투사된 몽글몽글한 구름 같은 것이었다. 그 구름의 절반은 나 자신이 만들었고, 절반은 옛 인연을 끌어들여 나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했던(아…… 너무 좋게 써주네, 그렇게 좋은 인간 아닌데……) 구남의 수동공격성이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기쁜 소식은 질투가 자기 서사 만들기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나에게는 회복의 시작점이 되었다. 전 애인을 뚫고, 전 애인의 새 애인을 뚫고, 결국에는 나 자신에게 가닿았을 때, 그것이 질투의 속성임을 알았을 때, 마음속 ‘산란하게 춤추는 졸라맨’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조인성을 다시 논스톱으로!

 

나 그 사람 정말 사랑하나봐.

최영주, 정재민에게 강인욱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너네 러버냐?

정재민, 강인욱에게 따지며.

 

그람시라고 들어봤어요? 계급은 중세시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야. 그놈들의 헤게모니가 우리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을 뿐이지. 물론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 행복하다면 할말은 없지만.

강인욱, 재벌 2세 정재민을 매력자본으로 꼬셔서 사적으로 소득 재분배하려는 이수정에게 의식화 교육을 실시하며.

 

<발리>는 강인욱(소지섭), 이수정(하지원), 정재민(조인성), 최영주(박예진)(가나다 순)가 서로 교차하며 사각관계를 이루는 드라마다. 계급 차이를 로맨스의 계기로 삼는 데 능한 작품인데 위계 구조는 다음과 같다: 재민, 영주(재벌 2세) → 인욱(흙수저 but 명문대 엘리트) → 수정(흙수저+일찍 부모 여윔 but 미인) → 수정의 방 친구 미희(흙수저+매력자본 부족).

로맨스의 관점에서 보면 네 사람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서로 경쟁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들은 서로에게 단단히 빠져 있다. 사랑을 상대를 생각하는 총 시간으로 정의한다면, 재민은 수정을 사랑하는 만큼 인욱을 사랑하고, 영주는 인욱에게 집착하는 만큼 수정에게 들러붙는다. 예컨대 영주는 무직이 된 수정을 자신의 갤러리에 고용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괴롭히겠다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수정을 하루에 제일 오래 보는 사람은 두 남자가 아니라 직장 상사인 영주다.

특히 두 남자는 자신이 갖지 못한 부분을 가진 상대를 질시하고 동시에 그에게 매혹된다. 처음 재민이 인욱에게 끌린 건 그가 냉랭한 영주의 가면을 깨기 때문이다. 영주는 재민 앞에서 인욱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며 감정적으로 무너진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욱이란 남자의 어른스러움=초연함, 지성과 정신을 질시하지만 그것은 흠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재민이 사랑하는 것은 수정을 만나기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진정한 사랑, 영주와 인욱이 가깝게 도달했던 그 진짜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를 질투하고 동시에 사랑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인욱은 재민의 계급을 부러워한다. 그로 인하여 영주와 수정을 재민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서로는 자신의 치명적 열등함이 극복된 이상화된 자신, 또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퍼즐 조각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수정이 재민을 사랑하게 된 것이 그가 부자여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욱은 재민의 총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민=상류층으로만 보기에 수정이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리라 믿는다.

어쩌면 질투라는 감정은 질투 대상과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질투는 우리가 평생에 걸쳐 써내려가는 자기 서사의 한 국면에서 마주친 보조 교사 같은 게 아닐까. 인정하기에는 너무도 아픈 나의 콤플렉스가 무언지 알리는 작은 깃발이 아닐까. 시간의 연화작용을 통하여 질투는 파괴력을 버리고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조인성을 친밀관계 살인자로 만들지 않고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놀던 <뉴 논스톱>(2000~2002)의 꺼벙이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발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재민은 영주와 인욱이 호텔에 있는 것을 본 뒤 인욱에게 전화한다. 

 

여보세요?

나 정재민인데.

그런데?

너라면 어떡할 거야? 너라면 어떡할 거냐고.

.

너하고 결혼할 사람이 네 눈앞에서 다른 놈하고 호텔방 들어간 거 보면 어떡할 거냐고.

지금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거냐?

그렇다면?

먼저 네 행동부터 똑바로 해.

뭐, 인마?

영주가 왜 그랬겠어?

나 때문에 그랬다는 거야?

나라면 약혼자 눈앞에서 다른 여자 부르진 않아.

앞뒤가 바뀌었잖아!

내가 분명히 얘기하는데 영주하고 나하고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그리고 불쌍한 애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마.

야, 강인욱. 강인욱!

(전화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드라마의 초중반까지 재민은 질투의 파괴성에 이성을 내맡기지 않는다. 비록 치고받을 땐 치고받더라도 연적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가고 심지어 배우려 한다. 물론 위의 대화에서 재민이 침착한 까닭은 약혼자 운운하지만 영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0표 영주에게 관심이 없기에 침착한 마음으로 안으로 오그라들어 폐쇄하려는 사랑의 배타성을 풀어헤칠 수 있다. 이것이 삶에 어떤 힌트를 주는데, 열정의 김이 빠져야 질투가 온순해지고, 그러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태릉선수촌>(2005)이라는 드라마에는, 술집에서 싸움이 붙은 유도 선수들이 일반인을 때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통제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를 해하지 않음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양팔을 올리고 벽에 등을 바짝 붙인다. 그것처럼 질투의 파괴력이 성해지면 일단 외치고 볼 일이다. 팔을 들어. 벽에 붙어. 시간을 벌어.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그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 정도란 것일까. 질투가 소멸하는 소요 시간 말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 「그의 옛 연인」 속 조이 할머니는 말한다. 자기는 삼십구 년이 걸렸다고…… 정말 너무 짧네요…… (사실 이것은 과장 섞인 거짓말이다. 소설 내용만으로는 조이가 언제 남편의 상간 상대를 용서하였는지,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용서를 하긴 한 것인지 알기 어렵고, 그것은 독자의 소중한 해석 영역으로 남아 있다.)

조이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발리>가 여자들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 아쉬움을 표한다. 인물을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의 복잡성이다. 질투라고 다를까. 영주의 질투는 얄팍하다. 한때 좌지우지했던 두 남자가 보잘것없는 수정에게 매달리는 것을 못 견디는 듯 보인다. 단순한 권력의 문제로 그려진다. 상대에게 매혹되지 않은 질투는 재미가 없다. 만일 영주가 수정에게서 가치를 발견했다면 여-여 커플도 훨씬 더 깊어졌을 것이다.

가장 감정을 알기 어려운 사람은 수정이다. “마음을 주지 않은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라는 명대사는 재민뿐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향한다. 술 취한 손님들이 수정을 물에 빠뜨리고 성희롱한다. 수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 왜 그러세요” 하고 만다. 생존에 해가 되는 감정 표출은 일찌감치 꺼둔 눈치. 어떤 모욕을 당해도 눈물을 참는 그는, 밖에 나와서 몰래 우는데 물론 주인공이기에  그 눈물을 알아야 할 정확한 사람에게  비참함이 목격된다. 혼자 울지라도 적어도 시청자인 우리가 보고 있다. 그것이 수정을 외롭지 않게 할까? 그러나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입장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의 고통을 이렇게 쉽게 훔쳐봐도 되는지 꺼림칙해하며 묻게 된다. 

 

 

새우젓 이론 VS 조각보 이론

 

칠십대 부부 조이와 찰스. 찰스는 사십여 년째 불륜중. 상대는 과거 직장 동료 오드리. 두 사람을 젊었을 때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다. 중간에 찰스는 조이에게 고백하지만 결국에는 가정을 선택한다. 조이는 오랫동안 둘의 연애편지를 훔쳐본다. 그래서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 오드리의 성격, 습관, 좋아하는 담배, 기타 등등. 그레이스라는 인물의 존재가 소설의 핵심이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넘어가자.

이제 내기를 붙이자. 누가 오드리를 더 오래 생각하고 이해할까. 오래 사귄 연인일까 아니면 편지 너머의 오드리를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파헤치는 연인의 아내일까. 삶에서 열정이 중요해지지 않은 어느 시점에 조이는 격렬하지 않은 괴로움으로 편지를 읽어나갔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을 읽듯 ‘캐해’하고, 오드리의 눈으로 남편을 한번 봐보며, 오드리가 모르는 부부의 사정을 떠올리고, 남편이 가닿지 못하는 친구를 잃은 오드리의 슬픔을 예상할 것이다.

 

그녀는 홀로 남겨진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그의 동정심이 이제 한 사람만 살기에는 너무 넓어진 바닷가 집으로 뻗어나간다. 하지만 찰스는 상상력이 풍부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멀리 꿰뚫어보지 못한다. 그는 옛 연인의 냉장고 안에 든 구이용 닭고기 일인분을, 내일 먹을 생선 일인분을 보지 못한다. 겨울은 사별을 겪기에 특히나 우울한 계절이며 (……) 오드리는 특히 텔레비전을 볼 때, 이런저런 평을 주고받을 사람이 옆에 없을 때 친구가 그리울 것이다.(235~236쪽)

 

가끔 나는 누군가를 질투하며 으쓱한다. 상대에게 질투할 속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내 눈이 보배라는 뜻이니까. 가끔은 당사자 자신도 모르는 것 같은 귀한 매력을 발견하고 알려줄까 말까 혼자 고민하기도 한다. (문의하세요. 알려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질투 없는 세상을 꿈꾸는 새우젓 이론의 추종자 희주에게 조각보 이론을 넌지시 내민다. 나에게는 내가 만든 조각보 이론이 질투라는 감정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부러워 죽겠었을 때, 나는 내가 그로 대체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다. 그가 되길 바란다고 믿었다.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내가 될 수 없는 그를 주저앉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에 손을 얹고 정말 내가 내 사연, 내 기억, 좋은 거, 나쁜 거, 다 내다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공평한 계약 조건: 내 것 중 가장 좋은 거 버리기 + 상대의 것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 갖기. 인욱은 재민의 계급만 가져올 수 없다. 골프채로 폭행하는 아버지와 그가 높은 확률로 저질렀을 심각한 아동 학대의 기억도 챙겨야 한다. 재민의 패션과 성격도 빼먹지 말고. 나에게 질투는 매혹되는 능력이자, 매혹된 최상의 조각들로 패치워크하여 이상화된 자아를 꾸리고 싶은 욕심이다. 희주의 말대로 이것이 들끓는 세상은 끔찍한데 그 맛이 또 일품이다.

 

 

추신.

 

즐거운 서간체 시간입니다!

가끔 끊는 물 주전자를 들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자는 남편의 몸을 건널 때면 신뢰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한답니다. 신통방통하죠. 어떻게 상대가 자신에게 끓는 물을 붓지 않으리라고 백 퍼센트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질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강선재 옮김, 푸른숲, 2013)가 도달한 지점도 이런 결혼생활의 공포와 신비입니다.  

어쨌든 신뢰 건에서 저에게 문제가 돼왔던 것은 못 믿음이 아니라 너무 믿음 쪽이었습니다. 드러난 행동을 토대로 심플하게 판단해야 하는데 여러 생각을 하다가 엉뚱한 데로 간 것이지요. 작은 것들을 맹렬히 의심하다가 큰 것을 놓치고 어안이 벙벙해져 허허 웃어본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실수일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너무 믿었을 때, 그 과잉 신뢰 밑에는 저의 기대와 두려움 같은 것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귀책사유가 없지 않았어요. 극악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치고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그래도 저는 믿는 쪽이랑 맞는 것 같아요. 그게 마음이 편합니다. 반대인 사람도 있겠죠. 불신에서 평온을 얻는. 성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요. 그래도 하던 것만 하면 심심하니까 다른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 우연에 몸을 맡겨보는 것은 늘 해봄직한 일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신기하고 안전한 우연이 원하는 만큼만 일어나기를 바라봅니다.

글을 마치며 지난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질투에도 여러 색채와 강도가 있을 텐데 희주씨가 접한 건 꽤 크고 무서운 것이었을까 생각했네요. 다들 작게 질투하고 작게 질투당해야 할 텐데…… 그래야 질투가 옹호되는데. 여러분, 질투에게 좀 잘합시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는 질문에는 답도 못했네요.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성향과 그 성향을 형성한 개인의 유전자 및 역사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해보지 않은 것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주 조금 해볼 뿐이죠.

 

이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