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총결산
이미상
너를 뭐라 부를까
연재를 일단락하며 지난 글들을 읽어보았다. 가장 큰 변곡점은 어디였을까? 나에게는 희주가 쓴 4회(「이별택시에 탄 것도 아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다. 왜냐하면 그 글부터 호칭이 ‘미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때의 충격이란……
공동 연재가 처음인데다 겉보기에 까불거리는 모습과 달리 수줍음이 많아서 나는 호칭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 함께 쓰는 작가 이희주를 글에서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느라 고생했다. 왜 이런 일에 시간을 이렇게 많이 쓰는지 시급 깎이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어이가 없었는데 사실 자승자박이었다―원고 매수로 돈을 받는 집필자는 원고를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스스로 시급을 깎아먹는다.
왜 자승자박이냐 하면 공동 연재에는 최소 두 개의 레이어가 있다. 하나는 글 자체. 표면. 또하나는 함께 쓰는 작가끼리의 관계성. 글 아래 흐르는 감정. 독자로서 나는 후자에 좀 반응한다. 징그러운 거 안다. 근데 어쩔 수 없는 것이 후자가 ‘우리’의 픽션 욕구를 더 자극한다.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더 크다. 글이 표면에서 뭐라고 떠들든 이면에 흐르는 쓴 자들끼리의 상호작용을 멋대로 상상하는 일이 어떻게 재미가 없는가. 그것이 나의 상상이라는 것만 단단히 명심하면 무해할 것 없는 창작 활동인데. 얘네 이제 좀 친해졌네, 얘네 지금 글로 몰래 싸우네, 얘가 그릇이 크네, 얘가 양아치네, 점점! 이것들이! 지들끼리 떠드네, 지면 밖에서 따로 만나 둘만의 말버릇을 들였나?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독자인 나를 소외시키나? 등등…… 둘이 쓰는 글을 읽을 때 나는 망상한다.
그래서인지 쓸 때도 머리 한 축에서는 에세이가 돌아가고, 한 축에서는 인간관계가 돌아갔던 것이다. 글의 일차적인 기능이 무엇인가. 의사소통 아닌가. 인사 아닌가. 탐색 아닌가. 감정 교환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현실에서와 똑같이 글에서도 거의 알지 못하는 이희주라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했던 것이다. 연애 초기처럼. 입술을 뜯으며, 부끄러워하며, 거리를 재며, 거리를 조정하며,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칼같이 지켜야지, 죽어도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그러다 튕겨질까 두려워하며.
이러한 변태의 방식으로 『두 심장 꿰매기』를 다시 읽으니 호칭 변화가 눈에 띈다. 서로를 향한 말 걸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변화가 읽힌다. 1회에서 나는 그를 ‘작가 이희주’라 부른다. 글에 다른 사람을 들일 때 주로 ‘직업+이름’이라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이재명, 작가 박완서 하는 식으로. 이후 그는 나를 이미상 작가라 부르고 나는 그를 이희주라 부르고 그러다 네번째 글에서 확, 희주가 확, 나를 미상으로 불러버리고. ‘어디로 가야 하죠, 미상씨……’ 직접 말을 걸어버리고. 아줌마는 그만 기절초풍을 한 것이어요, 그 시원한 걸음에. 그때 뭔가 글인데도, 글에 불과한데도, 확 끌어당겨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존심도 뭣도 없이, 현실이 아니라 글에서는 큰 인물들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기 위해 ‘직업+이름’을 고수하던 원칙도 저버리고 그만 다음 글에서 희주라고 불러버린다. 그래서 뭐, 너희가 그랬는데 뭐, 할지 모르겠다. 나라면 이 문단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가장 중요한 글의 형식이 뒤늦게 결정됐다는 것이다. 각자 건조하게 사랑 에세이를 쓴 후, 친근하게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Q&A, 릴레이, 서간체로. 흔한 구조지만 나에게는 ‘이게 맞아’ 하고 탁 걸리는 기분좋은 결정의 감각이 있었다. 희주 덕분이다.
글의 꽁지에 달리는 서간체 파트의 구분선을 희주는 ‘미상에게’로 붙였고 나는 끝까지 ‘추신’에 머물렀다. 그것이 나에게는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을 떠오르게 한다. “마음을 (다) 주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하고 말하던 수정의 어떤 자기 붙잡음과 일맥상통하는 딱딱한 추신이란 단어. 회피 유형이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보자. 모두는 아니겠지만 연재를 읽은 몇몇 분들에게. 우리 둘만 엮였는가. 당신도 엮이지 않았는가. 에세이와 관련해 잠시 논쟁의 공간이 열린 적이 있다. 그 순간은 사라졌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겼고 앞으로도 다른 의미로 계속 바뀌며 남을 것이다. ‘00에게’를 붙이지 않아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를 향하여 쓴다. 어떤 부분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글의 오고감이 이루어졌던 순간을 향하여 썼다. 모든 글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어떤 글에서 많이 배웠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여기(=지면) 와서 써야 하는데 싶었다. 상처가 된 글도 있다. 내가 오해했을 글이 많다. 더 듣고 싶은 말이 부지기수다. 사실 이 부분은 지울까 계속 고민하게 되는데(깎여나가는 시급이여!) 그래도 남긴다면 여럿이 동참한 그 순간에도 사랑의 몫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고
연재가 끝나도 책으로 묶이기 전까지 우리의 글은 계속된다. 그중 하나가 서로의 소설에 대한 에세이다. 연재를 기획하면서 한 편은 서로의 소설에 바치자고 했다. 주제가 사랑이기에 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머리로 굴리고 있는 제목은 이렇다. ‘아이돌 없이 희주 말하기’.
안녕, 여러분.
반말을 용서해주시길. 나는 늘 헤어짐에 서툴다. 젊은 시절에는 사람들과 놀다가 헤어질 때면 모두의 다리가 부러져 여기 주저앉아버리길 바라며 제일 먼저 집으로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만화책이 완결될 때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를 보고 대성통곡하던 어린이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동률도 아니지만 다시 사랑한다고 말해보겠습니다……
이희주
사회생활을 하며 종종 방어하는 언어를 쓰게 되는데 그때만큼 괴로운 순간이 없다. 안 할 순 없어 하는데 가능하면 지고 꺾이고 좀 우습게 여겨지더라도 진짜를 뱉고 싶다. 나는 거짓을 짊어질 그릇이 아니다. 작은 사람이라 그때그때 비워야 한다. 그러니까…… 마무리하는 글에서도 구토 한 번 하고 가겠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쓰기에서 미상이 충실한 비평으로 지적 독자들의 만족도를 높였다면 나는 소위 말하는 ‘빤스 벗기’의 영역을 맡은바, 마지막까지 내 몫을 하기 위해 고백이라는 양념을 치기로 했다. 꼴같잖은 배설이야말로 에세이의 미덕이니 입에 안 맞더라도 참아달라 요청해본다. 두 심장은 이미 바늘로 꿰어졌다.
자, 그럼 내 무덤을 파볼까? 중반을 넘긴 연재가 급작스레 마무리되게 된 건 순전히 내 탓이다. (마지막 글이 <발리에서 생긴 일>을 다룬 미상의 명비평이었으니 웬만한 분들은 눈치채셨을 거다.) 요약하자면 진이 다 빠졌다. 만화 <심야식당>을 보면 스트리퍼 마릴린이 매일 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춤을 춘 뒤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걸 무척 좋아한다. 맨몸으로 다리를 벌리고 나면 얼마나 뼈가 시리겠는가. 그다음 먹는 밥이라는 건 얼마나 살이 되겠는가. 이런 루틴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다 보여주기, 동시에 연출하기라는 스트립쇼를 마친 다음에도 쫄쫄 굶었다. 아프고 난 뒤에야 이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아픔엔 간행의 영향이 가장 크고(여전히 책 한 권 낼 때마다 왜 이리 벅찬지 모르겠음), 미상이 잠깐 언급한 문제적 사건의 영향도 있다. 쿨하지 못하게 또 토를 하자면 그 일은 내게 상처를 남겼다. 확신하는데, 누구도 아닌 내게 가장 크게 남겼다. 그럼에도 나는 내게 정직한 것을 계속 쓸 예정이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이렇게 고집부리는 게 공동 작업자에게 폐라는 걸 알지만, 미상이 나와 내 글의 존재를 받아들여줄 걸 알기에 좀더 뻗대기로 했다. 이 지점에 대해선 미리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미상은 4화를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 확 좁혀진 순간이라고 했으나 그건 반만 맞는다. 나는 정확히 3회 차부터 미상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가 텍스트로 다룬 <탈옥: 사랑의 도주>를 보던 중, 이 사람이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휘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상의 오독은 의도일 수도, 단순한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제멋대로 영화를 보고, 나 자신이 에세이를 쓰기 위해 텍스트를 오독했던 순간을 미상의 쓰기와 겹쳐 본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내 안에서 미상은 자기 글이 제일 중요한 고집쟁이가 되었다. 나의 소망은 편집자가 쉼표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아주 큰 작가가 되는 일인데, 미상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오에적 쓰기를 동경하고 어느 정도 그리 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나 실은 그의 근간에도 미시마적 쓰기, 그러니까 쓰기를 위한 쓰기가 있다는 비밀을 살짝 엿보게 되며 마음이 훅 열려버렸다. 이미상 작가가 미상이 된 데에는 이런 비하인드가 있다. 먼저 선빵을 날린 건 당신이라는 거. 당신은 모를 테지만.
그러나 이런 일이 없었어도 나는 미상을 좋아했을 거다. 왜? 그러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사랑의 비밀. 하기로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순간엔 때려죽여도 안 될 때가 있는데 내가 수청을 드는 춘향도 아니고, 미상을 사랑하는 건 쉬웠다. 김동률 선생의 말처럼 나에게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아홉 달 동안 내가 아는 이 중 손꼽히게 잘 쓰는 미상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연재 때 다 못한 말을 이젠 할 차례다.
개중엔 반드시 다뤄야지 벌벌 떨며 마음먹은 텍스트도 있고, 에세이로 하기엔 아깝지 않나 싶은 고백도 있고, 미상의 텍스트 하나를 사랑으로 이야기하는 미션도 있다. 쉽진 않겠으나 마지막 미션은 미상에게 글을 뜯어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할 것이다. ‘아이돌 없이 희주 말하기’라니! 희주도 못하는 걸 미상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내가 미상을 어떻게 쓸지도 궁금하고. 이미 미시마 유키오로 사랑 엮어먹는 뻔뻔한 일을 했는데 셀붕이로 사랑 만들기란 쉬운 일 아닐까? 아니어도, 그래도 해보겠다. 만일 그 일이 김동률 선생이 말한 것처럼 나에게 제일 힘든 일이라 생각조차 할 수 없어도 하겠다. 그것이 나를 기다려준 미상을 향한 사랑이니까. 오래 꺼내 본 말. 사랑을 할 때 내가 자주 생각하는 말. “나는 사랑하고 있을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라는 말에 나는 응답할 예정이다. 내게 쓰기의 고통과 즐거움을 되짚어준 이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신심의 우정을 위해. 未詳이 아닌 이미상을 잃지 않기 위해.
처음 만난 사람이 무서울 때면 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한다. 그러면 그가 양팔에 문신이 얼마나 많든, 눈썹이 반 토막이 났든, 내가 쫄아서 도저히 못 들어가는 고급 브랜드의 옷으로 도배를 했든 덜 방어적으로 굴게 된다. 상상이 아닌 말로 듣게 되면 사랑에 빠진다. 일테면 어린 시절 하루종일 버스를 탔다는 말, 가장 예쁜 코트를 입고서 좀처럼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울음을 터뜨렸다는 말이나 만화책에 작은 글씨로 적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를 보고 대성통곡했다는 말을 들으면 넘실, 하고 파도가 밀려온다. 그 움직임에 쓸려 휘청이게 된다.
그럼 나는 어떤 어린아이였을까? 울지 못하는 아이. 이를 앙 깨물고 정면을 노려보는 아이였다고 적다가 눈물을 흘렸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하며 자기소개를 할 때 웃기고 싶은 욕심에 ‘문근영도 아닌데 어느 날 나는 사랑을 아직 모른다는 걸 깨닫고 바닥을 치며 울었다’라고 적었다. 뻥이었다. 거짓으로 시작했으니 매듭은 진실로 짓겠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대성통곡하는 어른이 되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