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내가 지혜계가 되다니……

내가 지혜계가 되다니……
―앨리스 먼로, 「기차」(『디어 라이프』,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2013)

 

 

 

지난 희주의 글은 질문으로 끝난다. 구체적인 사랑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질문을 받고, 사랑에서 환상과 대비되는 구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고민하다가 ‘그런데 이 구도 뭐지? 내가 Q&A에서 A를 맡다니, 지혜계가 되어버렸군……’ 깨달았다. ‘아무래도 영포티니까 어쩔 수 없지.’ 씁쓸한 듯 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그나저나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과연 미친 여자란 무엇인가?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미친 여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느낌은 알고 종종 썼지만 나만의 정의를 확고히 내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단어가 삶, 영혼, 빛과 같은, 마감이 들이닥쳤을 때 급히 꺼내는 치트키 같아서 민망하다. 손안의 단어가 단단한 돌멩이가 아니라 주르륵 흘러내리는 어떤 물질에 머무르는 듯하다. ‘미친’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그렇게 느껴진다. 그게 바로 그 단어의 탓이라고 하기엔 ‘미친’ 존재는 그에 대해 동일시하든 질색하든 성별 무관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 맺기에 중요한 요소 같다.
그러니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거대한 단어의 나무, 내장에 깊이 뿌리박혀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그 나무에 걸린 미친 혹은 미친 여자라는 황홀한 오너먼트를 내려 자세히 뜯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당신에게 미친 여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어 전 국민 대상 『나에게 미친 여자란 사전』을 편찬하고 싶다. 나부터 앙케트에 응하자면 나에게 미친 여자는 어떤 대상과 거리를 너무 가깝게 두는 여자다. 
언제나 내가 동일시하고 동경하는 예술 속 여성 유형은 희주가 말하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여자’였다. 일견 시시해 보이지만, 지혜계 캐릭터의 내면에서는 조용한 불길이 타오른다. 그들의 잔인한 고공의 시선, 예리한 관찰력, 완고한 수동성, 자학적인 체념, 기분 나쁜 우월감을 알아볼 수 있어 자랑스러웠다. 
나에게 미친 여자와 지혜로운 여자는 항상 대극으로서 함께 떠오른다. 그 둘은 대상을 어디에 두고 바라보는가, 로 구분된다. 바라보는 눈과 대상 사이를 연결하는 점선의 주시선이 미친 여자는 너무 짧고, 지혜로운 여자는 너무 길다. 전자는 대상에 코를 박고 있어 그것만 보인다. 시야가 좁아져 주변이 잘 안 보이고, 몰두해 있는 것조차 실은 상이 뒤틀려 있다. 그런가 하면 후자는 너무 멀리서 본다. 조망하는 시선은 사건의 앞뒤 맥락을 함께 보게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죽이고 얻은 포상이다. 침착하게 사고하는 사람은 은밀히 스스로를 대견해하지만 속내를 파보면 어떤 것에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심장에 지쳐 있다.
물론, 그리고 진심으로, 나도 여성을 ‘미친 여자 vs 지혜로운 여자’라는 카테고리 겸 대결 구도에 쑤셔넣는 관념의 폭력이 마뜩잖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흥미로운 역할 놀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알지 않는가. 현실에서 우리는 한 범주에 완전히 속할 수 없고, 실상은 마구 섞여 있다는 것을. 지혜 계열과 광기 계열이 실은 하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시선이 관조 일변도, 밀시密視 일변도일 수 없다. 어떤 것은 멀리서 무감하게 바라보지만, 어떤 것은 달려들어 광분하며 노려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두 개의 시선, 각기 다른 거리 감각이 섞인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현자인 줄 알았는데 은은히 돌아 있어서 ‘아차차,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또 지독히 현명해져 있어서 ‘인간 참 알 수 없다, 알 수가 없어’ 읊조리게 만드는 인물을 사랑한다. 
어떻게 저렇게 세상을 높이서 광범위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고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지 확인하는 경험은 당하고 당해도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면 신비함은 사라지고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인간의 이기심이 찌꺼기처럼 남는다. 앨리스 먼로에 대한 이야기다. 

 

*

 

작년 7월, 앨리스 먼로의 딸 앤드리아 스키너가 계부 제럴드 프렘린의 성적 학대와 어머니 먼로의 묵과를 폭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인 작가가 사망하고 한 달여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976년, 아홉 살 무렵에 시작된 계부의 성적 학대는 스키너가 여름을 맞아 먼로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수년간 반복되었다. 스키너의 친부를 비롯한 가족들은 학대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먼로가 국민적인 작가였고 가족 내에서 대단히 취약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같이 서점 사업도 하고 있었기에 스키너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1992년, 스키너는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학대 사실을 고백하지만 먼로는 불륜 소식을 들은 양 배신당했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 이야기를 너무 늦게 들었다, 그를 너무 사랑한다, 그것은 너와 프렘린 사이의 문제일 뿐이다’라며 방관한다. 폭로 사실을 알게 된 프렘린은 스키너를 롤리타에 비유하면서 성적 모험을 위하여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가정 파괴범’으로 매도하는 협박 편지를 보낸다. 훗날 이 편지가 그로 하여금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2004년, 스키너는 먼로가 인터뷰에서 프렘린을 인생의 행운으로 칭송한 데 충격을 받아 이듬해 경찰에 신고한다. 80세의 나이에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프렘린은 유죄를 인정하고 집행유예 처분을 받는다. 2013년, 프렘린이 사망한 해에 먼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먼로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피해자인 딸 대신 가해자인 남편을 선택한 것이다. 


폭로 소식을 접한 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후 먼로의 소설은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발표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고, 단편소설을 위대하게 만드는 비약과 생략의 빈틈이 개인사에 대한 추측으로 메워졌으며, 이러한 과정이 소설을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현실에서 먼로는 딸을 성적 학대한 사람에게 대단히 의존했고 그의 사랑을 갈구했으며 평생 해로했다. 그러면서 딸이 처음으로 학대를 폭로한 이듬해에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한 소녀가 커서 가해자의 집을 파괴하는 소설을 썼다(“VANDALS”, https://www.newyorker.com/magazine/1993/10/04/vandals). 
「기차」는 2012년에 발표되었다. 가해자가 죽기 한 해 전이다. 소설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참전 군인 잭슨이 귀향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약혼녀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찻길을 따라 계속 고향과 반대로 걷는다. 그러다 우연히 기찻길 옆에 있는 열여섯 살 연상의 벨의 집을 발견하고 그대로 동거하게 된다. 
벨은 잭슨에게 신문 칼럼니스트였던 아빠와 인지장애를 앓는 엄마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한다. 어느 여름, 아빠─먼로는 벨이 “아빠”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을 옅게 짚는다─가 기차 사고로 사망한다. 철로에서 들려온 사고 소리에 벨은 가축이 치였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한 듯 “끔찍한 신음소리를” 낸다. 이후 둘의 동거생활을 잔잔히 조명하던 소설은 갑자기 시간이 비약해 십수년을 건너뛴다. 기차에서 뛰어내린 젊은 군인이었던 잭슨은 중년, 벨은 노년에 가까워지고, 이제 둘은 벨의 종양을 치료하러 토론토로 가는 중이다.. 도시로 가는 차에서도 벨은 유년의 추억, 특히 아버지에 대해 수다하게 떠든다. 잭슨은 벨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대로 멈춰 어른 아이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을 찾은 잭슨에게 벨은 또다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잭슨은 벨이 호칭을 아빠에서 아버지로 바꾸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옛날에는 욕조가 목욕탕이 아니라 방에 있어 데운 물을 직접 날라야 했다는 시시콜콜한 회상이 이어지다가, 아버지가 목욕 중인 벌거벗은 벨을 가만히 응시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야기의 흐름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폭력이 일어났다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한다. 인식은 뒤늦게 찾아온다. 끔찍한 일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흘러 들어 얼떨떨한 채로 문장을 여러 번 읽게 된다. 이러한 독서 경험은 소설 속 벨의 경험과 일치할 것이다. 욕조에서 아버지를 보는 벨도 우리처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알아채며 의심과 경악에 빠질 것이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어. 물론 아빠였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이미 침대에 눕혔을 시간이었어.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발소리가 무겁게 느껴졌어. 평소와는 좀 달랐어. 단단히 벼른 듯한 느낌. 그냥 나중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건을 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잖아. 발소리는 욕실 바로 앞에서 멈췄어.(*밑줄은 인용자)

 

벨은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시에 ‘단단히 벼른 발걸음’에 대하여 ‘사건을 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느낌에 대한 정당성을 다소 밀어내는 태도를 보인다. (인용문에서 호칭이 아빠에서 아버지로 바뀌는 것을 보라. 지극히 사소한 변화인데 읽을 때마다 벨의 기억이 덜컥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날 벨은 아버지에게 평소와 똑같이 대하지만 설거지를 하는 도중 아버지가 뒤로 다가오자 온몸이 얼어붙는다. 아버지는 벨에게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고 집밖으로 나간다. 아버지가 떠난 뒤 벨은 식사하는 어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가 음식을 썰어 먹는 걸 도와주었지만 자꾸만 역겨운 생각들이 떠올랐어. 가장 먼저 이따금 부모님 방에서 들리던 그 소리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곤 했어. 그러자 나는 거기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졌어. 어머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쨌거나 그것에 대해 알고는 있는지.

 

벨은 어머니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설은 이에 대해 명료히 알리지 않고, 바로 다음 문단에서 기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소설의 초입에서 벨은 아빠가 우연히 기차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지만, 십칠 년 후 아버지가 자신을 시선으로 성추행하고 집밖으로 나가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했음을 암시한다.
이제 ‘어머니가 무엇을 아는가’는 여러 가능성을 지닌 질문이 된다. 어머니는 아는가? 어제 아버지가 한 일을? 이전부터 딸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아버지의 시선을 눈치챘는가? 그래서 그의 자살 또한 예감했는가? 벨은 궁금해하지만, 어머니는 인지장애를 앓은 지 오래다. 두 사람은 그에 대해 대화하지 않고 아버지의 가해행위는 침묵 속에 놓인다. 벨은 잭슨에게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살을 인정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 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버지가 작품에 몰두한 채 선로를 따라 걷다가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라고 애써 생각했지.

 

소설 제목이기도 한 기차는 잭슨에게는 회피, 벨에게는 부인을 상징한다. 둘은 비슷한 듯 다른데, 회피가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되 겪지 않으려 피하는 것이라면, 부인은 고통을 아예 인식하지 않고 차단한다. 잭슨은 기차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약혼녀와의 약속을 저버린다. 잭슨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지만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친다. 벨에게 기차는 불완전한 부인을 의미한다. 고통을 원천 차단하는 데 거듭 실패하는 절반의 부인을 그리는 먼로의 재능은 천부적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먼로의 인물들은 외상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르고자 하는 의지와 자꾸만 알아지는 통제 불가능한 인식 사이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지 못하고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벨이 자기부정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노골적이라, 예전에는 「기차」가 『디어 라이프』의 다른 소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고른 까닭은 스키너의 폭로 이후 소설이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특히 뒤이은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처음 읽었을 때에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성性.
이제 나도 알아. 이제는 정말로 이해하게 됐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비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성 때문에 벌어진 잘못이었지. 나는 커가는 중이었고 어머니는 그 모양이었으니 아빠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내 잘못도 아니고, 아빠 잘못도 아니야. 

 

소설과 현실을 겹쳐 읽지 않기가 어려웠다. 먼로는 친족 성폭력을 당한 벨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만든다. 자신의 신체성장과 병으로 인한 어머니의 성적 매력과 능력의 상실과 아버지의 욕구 불만을 이유로 삼아 아버지의 알리바이를 벨이 대신 대게 한다. 그것은 성폭력을 성적 충동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전형적인 가해 논리다. 잔인하고도 슬픈 점은, 이것을 피해자인 벨이 노년이 되어 깨달음과 지혜의 형태로 스스로 말한다는 점이다. 
“이제 나도 알아. 이제는 정말로 이해하게 됐어.” 이 밋밋한 문장이 나에게는 노년의 벨이 어린 벨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편소설의 미학은 돌연한 앎, 즉 통찰의 순간과 관련된다. 괴로운 과거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그에 메여 있다가 갑자기 뿌리 뽑혀 공중으로 날아간듯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늘에서 관조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괴로움은 잦아들고 고통의 맥락과 배경이 보인다. 깨달음을 지렛대 삼은 존재의 도약. 앨리스 먼로를 지혜로운 작가로 여기는 데에는 이러한 단편소설 특유의 미학과 그의 천재성이 작용한다. 그는 우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벨에게는, 아니 스키너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일이 아닌가?
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와 달리 소설의 상황이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단편소설에서 모호함은 해석의 자유와 직결된다. 어디를 얼마만큼 흐리게 만들 것인가.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들은 원하는 투명도를 만들기 위해 수차례 모자이크 픽셀을 조정한다. 벨의 불완전한 부인은 아버지의 가해행위가 애매하다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벨의 신체를 만졌다면 소설은 훨씬 분명해졌을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나도 이것을 성추행이라고 불러야 할지, 성폭력이라고 불러야 할지, 친족 성폭력이라고까지 써도 될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벨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과한 것에 분노한다. 아버지가 사과를 통해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벨은 진실을 알지만 모른 체하며 완전한 부인에 안착했을 것이다. 
벨의 고백 또한 애매하다. 나는 커가는 중, 어머니는 그 모양, 아빠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어머니는 어떤 모양인가? 아버지는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벨은 얼버무리는 듯 보인다. 이것이 소설에 불과할 때라면, 여전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러니가 작동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벨은 진실을 고백한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 같다. 그러나 또다른 부인이 시작된다. 아버지의 가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에 가해자의 논리를 붙여 또다시 현실을 왜곡한다. 피해자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은 일단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잠이 오는 쪽으로, 일상을 이어나가는 쪽으로, 내일 회사에 가고 생을 연장하는 쪽으로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답답해할 이러한 퇴보가 벨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지 않을까. 소설, 특히 단편소설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읽기보다, 문장 아래 흐르는 말 되어지지 않은 말에 주목하길 좋아하는 나는 벨의 잘못된 생각을 그렇게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솔직히 먼로가 「기차」를 집필하며, 훗날 이것을 읽을 딸의 구체적인 모습을 생각해보았을지 궁금하다. 소설이 실린 잡지를 들고 집 어딘가에 서서 천천히 읽어내리는 딸의 표정을 생생하게 그려보았을까. 비록 그 상상이 소설가 특유의 못된 버릇, 사람을 캐릭터로 전환하는 것으로 단계를 이동할지라도, 그에 맹렬히 저항하며 딸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을까. 스키너의 현실을 같이 놓고 보면 소설은 먼로의 고백으로도 읽힌다. 소설에서는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이 반복된다. 스키너 역시 어머니가 성적 학대를 눈치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먼로의 관찰력과 통찰력을 고려하면 몰랐다고 믿기 어렵다. 
뉴요커(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4/12/30/alice-munros-passive-voice)에 따르면 앨리스 먼로는 프렘린이 인근 숲에서 강간 살해된 열두 살 소녀의 범인일지 항상 궁금해했다고 한다(경찰 조사에 따르면 프렘린은 그 범행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먼로는 진실을 알지만 외면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을 그렸다. 그것은 실제 자신과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2년, 프렘린이 죽기 한 해 전에 발표된 소설. 그때 이미 앨리스 먼로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벨의 어머니처럼 먼로도 인지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폭로 이후 「기차」 같은 소설을 읽으면 먼로를 경멸하게 된다. 그러나 당혹스럽기도 한 것이, 소설이 현실을 경멸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현실의 먼로가 소설을 더욱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래도 될까 싶을 만큼. 의도와 상관없이 소설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읽는 일이 피해자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먼로의 소설을 금해야 하지 않을까. 죄로 인하여 소설이 더욱 값져지지 않도록.
그러나 앤드리아 스키너가 우리에게 이러한 읽기를 허용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스키너는 캐나다의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발표한 폭로 에세이에서 계부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품었던 기대와 좌절에 대해 말한다. 

 

이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 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의 현실과 그 진실에 직면한 어머니가 학대자를 보호하고 그와 함께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다루지 않는 어떤 인터뷰, 전기 또는 사건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명성은 침묵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키너가 먼로의 소설을 ‘캔슬’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말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는 먼로의 소설에 대해 이 에세이에서 다룰 수 있었다. 만일 어머니의 소설이 삭제되기를 바랐다면 적어도 나는 먼로의 소설을 소개할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먼로의 소설은 이제 작가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딸의 진실과 함께 분석되고 우리에게 다른 감상을 남긴다. 친족 성폭력과 가족의 침묵, 국민 작가라는 위치와 문학계의 침묵에 대하여 생각하고 더 나은 길을 찾도록 할 것이다. 
스키너의 에세이가 더해짐으로써, 나에게 「기차」는 더욱 특별하고 오랜 여운을 남길 소설이 되었다. 우리는 흔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경우는 그렇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먼로의 위대한 소설은 스키너의 진실이 포함되었을 때 더욱 풍부해지는, 심란하고 부당한 축복을 받은 듯하다. 

 

*

 

이제 Q&A의 A를 주섬주섬 꺼내 에짝이(에세이 짝꿍)에게 건넬 차례다. 아주머니, 구체적인 사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아주머니’는 내가 희주의 질문에 마음대로 붙인 거고 나에게는 줌마 부심이란 게 있지만 어쨌든……) 이 질문을 받아 안고 답을 찾아 헤매다 앨리스 먼로를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당연히 답은 찾지 못했고 생각의 방랑이 즐거웠을 뿐이지만, 그래도 다음의 인용으로 답을 갈음할까 한다. 

 

김태일 감독의 <오월愛>(2010)를 시사회에서 보고 특정 인물을 부각하면 영화가 좋아질 것 같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 같아 김태일 선배에게 제안했더니 선배가, “그러면 다른 분들이 얼마나 섭섭하겠냐. 모임에서도 나서는 사람이 있고 소외된 사람도 있고 거기에서 상처받은 분들인데 영화에서까지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절대적인 분량도 거기에 맞춰 동등하게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이것은 카메라입니다─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 푸른영상의 30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여행지에서 돌아오던 기차에서였다. 위의 구절을 읽고 뜬금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현재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독 김태일의 강고하면서도 사려 깊은 마음 때문이었다. 인물의 매력에 따라 등장 시간을 차등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영화의 시간을 공평하게 나누어준 것이, 건조한 연출의 원칙이었다면 감동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인터뷰한 사람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자신이 어떻게, 얼마만큼 중요하게 표현되는지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바라볼 이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사랑의 중요한 자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나는 항상 상대를 너무 멀리서 보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어 왜곡된 상만을 인식한다.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최대한 초점을 잘 맞추어 상대를 뭉뚱그리지 않고 자세히 상상하고 싶다. 어차피 타인의 마음은 알 수 없고, 모든 것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오해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서운해할 사람의 표정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 내가 쓴 소설을 읽을 딸을 떠올리며 더 나은 소설이 될 요소를 포기하는 것, 그런 것이 구체적인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 두유를 마시며 생각한다. 

 

 

추신.
나도 희주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지혜를 반사하고 싶다! 
갈수록 마음에서 강렬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1인입니다. 감정은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힘들 때 보내주신 ‘매일두유 99.9’에 감사합니다. 그냥 두유 아니고 고유명사로 좁혀진 그 콩물의 시원한 목넘김 감각이 구체적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감히 항변하고 싶습니다.

 

이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