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희 ‘몸과 고통’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통증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라고도 생각되는데요. 가네하라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예를 들면 『뱀에게 피어싱』에서 피어싱과 타투, 거식증 등 몸을 변형해가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이 아니라, 피부나 촉각을 더욱 신뢰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이드라』에서도 청각을 통한 극적인 감각의 묘사가 인상적이었죠. 그것이 놀라운 해방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중독되며 모순에 갇히기도 합니다.
가네하라 확실히 제 초기 작품에는 몸을 두고 어찌할 줄 모르는 주인공이 많았습니다. 머리나 마음 등 내적인 것과 몸의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는 인물들이 고통을 통해 세계와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사부키 작가님의 「금붕어의 낮잠」 속 묘사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그것이 오히려 몰입의 계기가 되어서 고통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힘을 느꼈어요.
아사부키 존경하는 가네하라 작가가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기뻐요. 읽어줘서 고마워요.
강지희 가네하라 작가님은 고통이나 상처에 대해 최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두가 있나요?
가네하라 어릴 때부터 고통을 느끼는 것에 끌리는 아이였어요. 어릴 적, 내가 우주인이나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요. 남들과 다르다는 것, 똑같이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내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고, 고통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고통으로 돌아가면서 안도감을 얻기도 했어요. 최근에도 역시 답답해질 때면 피어싱이나 타투에 끌려 그 시절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같은데요. 하지만 지금은 고통보다는 몸의 불편함이나 신선한 고통보다는 오래된 상처로 인한 통증 등 표현하고 싶은 신체적 표현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강지희 아사부키 작가님의 단편 「금붕어의 낮잠」도 가네하라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고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물집투성이 피부병을 앓는 주인공의 고통, 곤충과 새가 찢기는 고통, 그리고 전쟁터의 헌병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사부키 작가님의 작품에서 고통은 곤충이나 어류가 지닌 색상들과 연결되고,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신앙적 이미지와도 연결되며 어떤 화사함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아사부키 아프다는 감각은 냄새와 비슷해서 타인과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인간에게는 싸라기눈같이 금방 사라져버리는 듯한 선량한 순간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순간이 공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슬프면서도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관심이 있는데, 「금붕어의 낮잠」에 나오는 ‘타로’라는 소년은 B29 폭격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타로는 매우 나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발산해야만 합니다. 특히 아이들은 불덩이 같은 존재지요. 원래라면 큰 소리로 외치거나 놀면서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지만, 전쟁중의 아이들은 밖에서 놀 수도 없었습니다.
놀고 있다는 이유로 헌병이 찾아와 혼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쟁에 관한 구술 자료를 조사할 때 알게 되었어요.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력을 쏟아붓기 때문에, 어린 타로의 폭력은 벌레나 새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폭력을 휘두른 자가 이번에는 폭력을 당하는 쪽으로 가고, 다시 폭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러다 죽고 또다시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타로의 모습이 찾아왔습니다.
강지희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백수린 작가님과 가네하라 작가님께 질문드립니다. 먼저 백수린 작가님의 근작에서는 노년의 시간이 많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노년 하면 보통 지혜와 고독이 결합된 잔잔한 시간이 떠오르지만, 작품 속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되찾고, 숨겨져 있던 욕망과 기억을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반면 가네하라 작가님의 작품에는 젊음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SM처럼 가학과 피학의 관계 속에서 최소한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년이나 청춘이라는 시기가 작가님들에게 지금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또 어떤 고민들 속에서 이 시간들을 그리셨는지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수린 예전에는 청춘에 대해 쓰는 것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발견의 순간으로서의 청춘, 또는 불안이나 충동 같은 것들 말예요. 그러나 최근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노년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가 40대가 되었기 때문이겠죠. 젊었을 때 생각했던 40대와 실제 40대는 전혀 달랐어요. 예전에는 40대가 되면 뭔가를 이뤘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10대, 20대 때 가졌던 불안정함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요. 몸만 40대가 되었을 뿐이죠. 그렇다면 70대, 80대가 되어도 이 모습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노년층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가 ‘나이듦’이라는 것을 지금껏 단순히 재현해왔던 건 아닌가 하는 점에 눈길이 가게 되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이방인에 대해 써왔다고 자주 이야기됩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나아가 요즘의 저는 노인도 이방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사회에서 주체의 자리에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 타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노인도 이방인일 수 있죠. 그렇게 보면 노년이나 나이듦이라는 주제도 제가 지금까지 관심을 가져온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에 대해 쓸 때, 즉 내가 아닌 인물을 상상해서 쓸 때는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러워집니다. 노인을 쓸 때도 마찬가지죠. 제가 다른 국적을 갖게 되거나 다른 성별이 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이른 나이에 죽지만 않는다면 노인이 될 가능성은 아주 높잖아요. 이른 나이에 죽지만 않는다면요. 그래서 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지금 제가 쓴 노인 인물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제 작품을 어떻게 눈으로 보게 될지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가네하라 재미있네요. 저도 막 40대가 된 사람인지라, 그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감각이 잘 이해됩니다. ‘이방인에 노인도 포함된다’는 시각이 굉장히 참신합니다. 저는 지금 위 세대와 아래 세대 사이에 끼인 세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동경해온 세계를 만든 위 세대를 보아왔기 때문에 그 좋은 점을 압니다. 하지만 그 좋은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래 세대도 있어요. 위 세대의 장점을 아래 세대에게 전해야 하는 동시에, 위 세대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을 끊어야 하죠.
작가로서 경력이 쌓이면서 다루는 세대가 점점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늙음을 주제로 한 소설도 쓰고 있지만, 새로 연재하는 작품에서는 중학생이 주인공이에요. 저의 젊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결국,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제가 살아온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결합되어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진다고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중학생이 등장하는 소설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점도 기쁘게 생각해요.
강지희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나요?
가네하라 물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해되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마음을 잊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양쪽의 시점, 즉 어른의 시선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아이의 시선에서 어른을 바라보는 시각, 이 두 가지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항상 일인칭시점을 가진 채 살아가고 싶습니다.
강지희역사에 대해 조해진 작가님과 아사부키 작가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다소 큰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조해진 작가님의 최신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에서는 전쟁과 난민 문제를 깊이 탐구하고 있습니다. 난민에 대한 단순한 혐오뿐만이 아니라, 일상을 지키기 위해 발휘되는 잔인한 무관심, 묘한 죄의식을 지닌 생존자로서 가해자의 자리를 두루 조망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사부키 작가님의 「금붕어의 낮잠」에서는 그 결말이 너무나 전율을 줬는데요. 마지막에 타로라는 인물이 전장에 나가는 장면에서부터 무수한 환생으로 펼쳐지는, 삶과 죽음이 짧게 연속적으로 묘사되는 지점은 압권이더라고요. 역사와 연결된 소설을 쓰며 어떤 고민들을 염두에 두고 계셨는지 두 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조해진 『빛과 멜로디』는 작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작품이라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과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인물들이 연결되는 지점에 카메라, 사진, 다큐멘터리 같은 매체를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시리아 출신 난민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초대하는 서사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확장해갔습니다.
아사부키 작가님의 작품과도 맞닿는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빛과 멜로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개개인에게 남겨진 상처입니다. 전쟁은 국가 간의 싸움이지만 그 싸움에 가담해야 하는 건 개인이고, 가해국이나 승전국의 군인 역시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죠. 사람을 죽였거나 큰 부상을 입힌 적 있다는 트라우마…… 그렇다고 가해국 혹은 승전국의 군인을 합리화하려 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전쟁이라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면 소설로나마 전쟁의 비인간성을 환기시켜주는 것이 의미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썼습니다.
아사부키 사람은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무관심은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행위이기도 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내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습니다. 때때로 자기비판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요. 『단순한 진심』의 주인공은 해외로 입양된 인물인데, 그는 자신이 철로 위에 버려졌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합실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억은 거짓말을 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행복한 형태의 착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지배와 폭력을 멈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강지희 어떤 인물이 잘 드러나는 순간은 행복한 순간보다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이기 마련일 텐데요. 그 어둠은 대개 모종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들께서 자신의 작품 속 인물에게 부여했던 가장 어두운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가네하라 지금 떠오르는 것은 『마더스』라는 소설을 집필했을 때입니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엄마가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의 아이가 죽는 장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서도 무거운 장면이지만, 저에게도 그녀의 죽음이 마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장면을 써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소설의 완성을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과연 허용될 수 있는 일인가. 실제로 쓰고 나서도 며칠 동안을 울었어요. 제 인생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순간이었습니다.
강지희 그 어두움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가네하라 그 장면이 소설에 꼭 필요했다는 확신이에요. 그 경험을 통해 제가 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실감했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쓰고 싶지 않은 장면, 피하고 싶은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술이 있으면 그것을 잘 피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그것과 마주해야 하고, 그 장면을 썼기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백수린 말씀 듣고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제 작품에서도 가족이 죽거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무겁고 어두운 인물을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으니, 아직 번역되지 않은 최신작 「아주 환한 날들」에 등장하는 ‘옥미’라는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 상실감, 고통을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그것을 직시하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가네하라 작가님과 아사부키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은 것은, 상실과 고통은 피해서는 안 되며, 오직 직면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직면하는 것이 유일한 극복 방법이며,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아사부키 작가님이 언급한 ‘무관심이 폭력이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무관심은 결국 타인을 상처 입힐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폭력이 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어요.
강지희 마지막 질문입니다. 소설은 결국 작가가 세상에 품고 있는 질문들을 펼쳐놓는 것일 텐데요. 요즘 골몰하고 있는 질문들, 바라보고 있는 빛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금 무거운 질문이라면, 근래 소설을 쓰는 동안 자신을 비롯해 무언가를 구하고 있다고 느꼈던 충만한 순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조해진 작가의 관심사나 작품을 통해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자신이 써온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확장되는 것이겠죠. 저는 데뷔작부터 데뷔 후 몇 년 동안의 작품까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인물을 많이 써왔습니다. 자신의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소설을 써온 시간이 쌓이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인물, 연대와 공존의 가치를 고민하는 주제로 소설이 확장해온 듯합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글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기존 인물이나 주제에서 확장해가는 연장에 있으리란 건 분명합니다. 제 자신이 누군가를 구하는 그런 큰일은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한 독자이자 작가로서 사람들과 구원의 의미를 찾아가고는 싶습니다.
가네하라 저도 크게 공감합니다.
조해진 아마 작가라면 모두 같은 마음일 겁니다.
가네하라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좋은 작가란 같은 주제로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라 생각하고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얻은 경험과 발상을 꾸준히 담아내며 새로운 곳에 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렇기에 결국 주제는 일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 충만해지는 순간은 독자들이 읽어주고, 공감했다고 말해줄 때도 물론이지만 현실에서는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던 것, 용서할 수 없었던 것, 이해할 수 없었던 것에 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때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의 시점에서 소설을 써보면,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을 알게 되면서 세계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소설을 통해 보이게 되는 순간, 마음이 깊이 채워집니다.
백수린 작가님들이 하신 이야기에 모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제가 제 소설로 감히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까지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시간이 쌓이면서 저 자신은 구해졌다는 생각을 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이에요. 저는 원래 고립되어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소설은 홀로 고립된 채 완성할 수 없는 장르라는 걸 쓰면 쓸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게 되고, 다른 사람 입장을 생각해보게 되면서 제 세계가 자의 반 타의 반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나라는 개인은 도대체 언제 우리로 확장이 되는 건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배타적 의미의 ‘우리’가 아니라 확장적 개념의 ‘우리’를 가리킵니다.
저는 가네하라 작가님과 아사부키 작가님이 작품들에서 신체적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소설의 힘을 다시 실감했어요. 좁은 세계의 사람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을 대리 감각하게 해주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제2차세계대전의 폭력을 어린아이의 가학성 안에서 발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고통은 매우 개별적인 감각이지만,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갖게끔 해주기도 한다는 점이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경험들을 할 때면 꼭 제 소설이 아니더라도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이 쌓이면 결국엔 누군가가 구원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되어요.
아사부키 한 사람의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소설을 쓰는 사람들끼리 만나고, 서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같은 시대에 많은 작품이 탄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빛 같은 일입니다.
소설을 읽고 또 쓰는 일. 옛날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저자와 독자를 만날 수 있고 그 속에 미래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번역된다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이죠. 언어라는 건 금방 이해하기 어려워지니 현대어로 다시 번역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언어는 읽는 사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한, 끊임없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며 새롭게 피어납니다. 읽는 행위로부터 또 다음 글쓰기가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작가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
(번역: 오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