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지.
기억도 안 나는 악몽에 시달리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깨어난 당신은 차가운 한밤의 침대 한가운데. 윗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야, 몇 번이고 뇌며 침대를 떠난다.
식탁 앞에 앉아 찬물을 한 잔 들이켠 당신은 차분히 생각에 잠긴다. 상황이 지금과는 달랐다고 가정해보자. 여자애는 당신 마음에 쏙 드는 애, 한마디로 여자 수호라고 할까 수호랑 수준이 꼭 맞게 예쁘고 키 크고 예의바르고 똑똑한 애, 그야말로 당신을 몰래 울게 만들 만큼 너무 괜찮은 애인데 수호가 그애랑 사귀고서 점프력이 좋아졌다 고백했어도 당신은 시름에 빠졌을까. 아마 그랬을걸. 당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한다. 배부른 고민인 줄도 모르고, 수호가 아무리 괜찮은 애를 만났어도 당장 입시에 도움이 안 되는 애구나 싶으면 바로 내치려 했을걸. 그럼 이 생각을 토대로 지금의 상황을 재평가해보자. 여자애가 충분히 괜찮은 애인가? 아니, 어디 하나 맘에 차는 구석이 없는 애. 그리 길게 본 것도 아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더 볼 것도 없어 뵈는 애. 그애를 만나서 수호의 능력 신장에 유의미한 결과가 있었나? 하물며 그렇지도 않지.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럼 더 고민할 거 있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이 당신의 비장한 결론이다. 사귄 지 겨우 한 달 될까 말까 한 지금이 아니면 늦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들, 우리 애 그만 만나게, 하며 돈봉투를 쓱 내미는 클리셰 그 자체인 여자들이 욕을 먹는 건 주인공들이 결혼을 하니 마니 할 만큼 마음이 깊어진 다음에야 나서기 때문이다. 막 사귀기 시작한 청소년 커플을 두고 부모가 너희 지금은 학업에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하지 않냐고 하는 건 합리적이고 건강한 조언이잖아, 그렇지?
그러게 그 여자애 번호를 꼭 받아뒀어야 하는데, 당신은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힌다. 이제 와서 수호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당신이 수호에게서 그 여자애 번호를 받아간 다음 여자애가 수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면 수호가 당신을 뭐라 생각하겠는가. 시름에 빠진 당신이 만지작거리는 휴대폰 화면 안에선 로로마 키즈팅 알고리즘이 날뛴다. 애들끼리 부모 주선으로 멋모른 채 만났다가 큰 효과를 못 본 채 다음 상대 또 그다음 상대를 만나게 되는 요즘 문화, 키즈팅으로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아 성추행 사건, 키즈팅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싱글 맘과 유부남 사이의 불륜, 세상 무섭기도 하지. 쇼트폼 영상 댓글 난에서 당신 같은 엄마들과 요즘 애들이 뻔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당신이 양손으로 눈자위를 문지르느라 식탁에 내려놓은 휴대폰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영상이 몇 번이나 반복 재생된다. 부모가 맺고 끊는 요즘 연애 풍속도, 당신의 생각은?
물론 당신은 가능한 신속히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 의지는 외부 사정으로 유예된다.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서 학교에 찾아갈 생각, 당신이 원하는 시기는 당연히 바로 다음날이었지만 수호의 담임교사가 그 다음주에나 상담이 가능하다고 답변해왔다는 얘기다. 그사이 수호에게 수상한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속에서 끓어넘치는 걱정을 눌러 담느라 참고 참으며 학교에 찾아간 당신을 담임교사는 환한 얼굴로 맞이한다. 수호 어머니, 정말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학기초에 정규 학부모회 모임차 방문했을 때나 먼발치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눈 수호의 담임은 기억에서보다도 젊고 해사한 여성이다. 당신이 수호를 낳았을 무렵의 나이쯤일까. 수호가요 요즘 남자애들 같지 않게 보기 드문 학생이라, 어머님 어쩜 이런 아이를 키우셨는지 제가 정말 여쭙고 싶었어요. 담임의 그 호들갑이 당신의 마음 어딘가를 울컥 건드린다. 그래 이래야지, 이런 맛이 있어야지. 직업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님이 워낙 예쁘게 잘 키워준 티가 나는 건가, 당신은 담임을 보며 생각한다. 나이를 떠나서 당신이 수호의 상대로 원했던 여성은 바로 이런 느낌이라고. 그런데 오늘 어쩐 일로 상담 요청하셨을까요? 수호는 워낙 나무랄 데 없이 학교생활 잘하고 있는데요. 그래요 다름이 아니라,
“수호가 요즘 여자애를 만나고 있는 모양인데요.”
“아, 맞아요! 예쁘게 잘 사귀는 것 같더라고요.”
웃으며 맞장구를 치던 담임은 당신의 눈치를 잠깐 살피고는 아 이게 아닌가 하듯 입술을 오므린다. 상담 내용이 아들의 연애에 관한 거라면, 이 학부형은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겠거니 감을 잡은 모양이다.
“수호는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어머니. 요즘은 로로마 영향으로 첫사랑 연령도 굉장히 어려지는 추세라고 하고요. 학교에서도 건전한 교제 문화에 대해서 특별 교육도 많이 하거든요? 교육청 차원에서도 이런 부가 지도가 꾸준히 권장되고 해서 학교에서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에요. 그보다도 역시 어머니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수호가 믿음을 못 주는 아이는 아니잖아요.”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고 여자애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서요.”
“아 유나요, 유나는……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예요. 주관도 뚜렷하고 장래에 대한 비전도 확실하고요. 어머니께 걱정 끼칠 일 없을 거라 제가 보증할게요.”
걔 이름이 유나구나. 그래, 이제야 알았네. 그런데 이 여자는 뭘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지, 막말로 자기가 그렇게 믿는다는 두 학생이 지들끼리 몰래 짝짜꿍으로 배라도 불러 오면 어쩌려고. 당신은 속으로 혀를 차며 어렵사리 말을 잇는다.
“그게 아니라요. 여자애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없을까……”
“수호한테 물어보시는 게 편하지 않으세요?”
담임이 아무 악의도 없이 반사적으로 던진 말에 당신은 속을 뜨끔 덴다. 당장 말이 없는 당신에게서 담임은 어떤 기미를 읽어낸 듯하다. 음…… 어머니,
“죄송해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학생 개인정보잖아요. 사후에 문제의 소지가 있거든요. 더구나 어머니는 유나 연락처를 제가 아니라 더 믿을 만한 사람한테 물으셔도 되니까요.”
“제 아이랑 교제중인 아이 연락처 정도는 제가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글쎄요, 확실히 애매한 상황이긴 한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학교폭력 피가해로 연루된 사이다, 그럴 경우엔 중재 차원에서 알려드릴 수 있겠지만요. 그것도 피해 학생 가족이 가해 학생 가족 연락처를 요구할 때만 가능해요. 가해 학생 가족이 요청할 경우엔 피해 학생 가족에 먼저 의사를 여쭙고요. 아시다시피 이 경우엔 학교에서 중재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서요.”
보기보다 보수적인 여자네, 생각하며 당신은 가방을 든다. 가방에서 꺼낸 책을 담임에게 건넨다.
“제가 이것부터 드린다는 걸 깜빡했는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거든요. 국어 교사시니까 꼭 좀 추천드리고 싶어서.”
담임은 건네받은 책을 펼쳐 당신이 한가운데 끼워둔 두툼한 봉투를 확인한 뒤 다시 책을 탁 덮는다.
“어머니. 이건요.”
담임이 긴 한숨을 내쉬고 책을 돌려주며 한 말이 당신을 더할 나위 없는 부끄러움에 몰아넣는다.
“죄송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머니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세상이 아니에요.”
그건 상담이 유예되는 사이에 당신이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고 굴려 최대한 세련된 방식으로 건네려 한 호의였으나, 담임의 반응에 따르면 당신의 호의는 단순히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심지어 트렌드에 뒤처진 것. 당신은 머리를 호되게 맞고 녹아웃된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려 슬며시 링을 빠져나온 권투선수처럼 비척비척 교정으로 나선다. 촌지는 촌스러워서 촌지인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뜻한 소득을 얻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대단한 망신을 당했다는 모멸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언제 나대봤어야 이런 걸 알지, 한 번, 딱 한 번 아들 생각해서 나댄 게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이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걷던 당신이 애처로이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거짓말 같게도 당신의 아들 수호. 체육 시간인가? 체육복 입은 남자애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여자애들은 외곽 스탠드에서 그걸 지켜보는 중이다. 남자애들 중에서도 당신의 아들은 단연 눈에 띈다. 마침 기회를 얻은 당신의 수호가 공을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질러 차버린다. 한마디로 점프력이라고는 했지만 각력이 좋아진 거구나, 당신은 망연히 생각한다. 어쩌라고? 이제 와서 아들을 선수촌에라도 입소시킬 것도 아니고. 수호는 의사가 될 거다. 그건 당신만의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수호도 진작에 동의한 바. 당신의 시아버지가, 또한 당신의 남편이 그랬듯 수호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비인기 과를 가도 좋으니 의사는 꼭.
그렇지, 체육 시간이라면 휴대폰을 따로 어디 두고 뛸 거 아냐, 지금 가서 보면 되겠네. 당신은 여자애들이 모여 있는 스탠드를 향해 걷는다. 그러느라 운동장을 빙 둘러 걷는데 한눈에 수호를 알아본 당신과 달리 수호는 당신이 거기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워낙에 집중력이 좋은 애였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날 못 알아보는 게 나은 상황이니까, 당신은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저려오는 것은 어쩌지 못한다.
얘들아 아줌마는 수호 엄만데, 수호 폰 어디 뒀는지 아는 사람? 스탠드에 다다른 당신이 묻자 앞줄 여자애들이 합창하듯 대꾸한다. 유나요. 유나한테 있어요. 그제야 당신 눈에도 위 줄에 앉아 있는 그 여자애가 들어온다. 그랬지 이런 애였어,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 섞어놨을 때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 애. 그건 그렇고 요즘 애들도 그러는구나, 남자애들이 공놀이하러 갈 때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소지품 맡기고 나가는 거. 이 사실과 그 사실을 굳이 서로 조합하고서 당신은 속 쓰려한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여자애를 내 아들은 좋아하지. 그래서 얘한테 소지품을 맡겼지.
“수호 폰은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여자애를 본 당신의 맥이 탁 풀린다. 그렇지, 당사자가 마침 앞에 있잖아. 굳이 아들 물건을 몰래 뒤져 연락처를 찾아낼 필요도 없이. 당신은 스탠드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 여자애 곁에 앉는다. 다른 여자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조심스럽지만 날은 무덥고 당신은 누가 봐도 지친 모습이어서 당신이 조금 앉아 쉬었다 가는 것쯤 아이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아니 잠깐은 관심이 있었지만 자기들끼리 휴대폰으로 뭘 보며 떠드는 일보다 당신의 존재가 더 중요하거나 흥미롭게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디 갔는지 모를 체육 교사, 상식적으론 수업 수준 미달이나 뭐 학생 보호 소홀 같은 걸로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도 모자랄 일이지만, 지금은 엄연한 외부인인 당신을 발견하고 내쫓을 담당 교사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몹시 다행스럽다.
수업 끝나고 별일 없으면 아줌마랑 잠깐 얘기 좀 할래?
당신은 여자애에게 몸을 기울여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린다. 다른 애들이 듣고 수호한테 야 너네 엄마가 니 여친한테 뭐라고 하더라 일러바치면 곤란하니까.
여자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눈치 없이 걔가 수호까지 끌고 나올까봐 당신은 불안해했으나, 여자애는 다행히 혼자 카페에 들어선다. 당신은 지갑을 열며 카운터 앞까지 나아간다. 케이크 먹을래? 구움과자라도? 여자애는 어른스럽게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문한다. 곧 음료를 받은 여자애가 당신 앞에 와서 앉는다. 당신은 애플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게 자기 거란 생각을 못해선지 여자애는 별 반응이 없다.
“아줌마가, 저…… 수호랑 예쁘게 만나고 있다는데 뭐 하나 해준 게 없는 게 맘에 걸려서. 요즘 애들은 무조건 감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한번 골라봤어.”
수호 담임이 사양한 봉투에서 꺼낸 돈으로 당신은 그걸 샀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급히 애플스토어에 다녀오느라 생각지 못한 수고를 좀 했지만 여자애에게 그걸 줘야겠다는 생각은 꽤 전부터 하던 것이다. 여자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쇼핑백을 민다.
“네? 이런 걸 어떻게 받아요. 수호 주세요.”
“이 정도 여유 있어, 아줌마는. 받아둬.”
여자애는 쇼핑백을 더 밀지도 당기지도 않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린다. 어색한 침묵. 얘 눈치는 있는 편일까 없는 편일까? 벌써 내가 하려는 말을 짐작하고 있진 않을까? 당신은 며칠간 고르고 다듬은 다이얼로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수호 많이 좋아하니?”
“그게 왜 궁금하세요?”
당돌해, 하여간 당돌해. 당신은 속으로 혀를 내두른다. 어른인데도, 그냥 어른도 아니라 명색이 남자친구 엄마인데도 다소 공격적인 태도로 미루어 이미 이 대화의 성격과 목적을 파악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오래 만난 건 아닌 걸로 아는데, 그래도 수호는 유나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유나…… 맞지? 아줌마가 저번엔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안 물어봤네.”
“저도 아줌마 이름 안 물어봤는데 상관없어요.”
그게 그런 문제인가? 잠깐 혼란에 빠졌던 당신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차린다. 어린애 엉뚱한 소리에 말려들면 안 되지. 엄연히 내 아들 앞길이 달린 중요한 대화인데.
“유나는 돌려 말하는 거 안 통하는 사람 같으니까 아줌마 그냥 솔직히 말할게. 아줌마한테 수호는 정말 소중한 아들이거든.”
당신 입 밖에 나온 말이 당신 귀에도 조금 황당하게 들린다. 슬하에 외동아들 둔 어지간한 엄마 중에 자기 아들 소중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고등학교 2학년생 여자애라고 해서 그 황당함을 모를 리 없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한쪽 눈썹은 아래로 늘어뜨려 삐딱한 눈을 하고 있는, 당신과 마주앉아 있는 딱히 예쁘지 않은 여자애는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네 그렇죠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갑죠. 그래서요?
“유나가 밉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이건 물론 거짓말이지만,
“유나랑 만나면서 수호가…… 점프력이 좋아졌다는 거야.”
“네, 그래서 애들 농구 할 때 서로 수호랑 팀 하겠다고 난리예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얘기지만,
“아줌마는 솔직히, 수호가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 덕분에 수호가 공부에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했거든. 학업과 크게 상관없는 능력이 나아지는 것보다.”
여자애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 하고 웃는다.
“그러니까 아줌마는 지금 저를,”
그럴 타이밍인가 싶은 때에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쪽 들이켠 여자애가 마저 말한다.
“아이폰이랑 남자친구를 맞바꾸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거네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지 왜 아니에요. 이거 뭐, 한 백만원 해요?”
넘어. 백만원 넘어.
“그건 그냥 아줌마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지금 얘기랑 상관없이.”
“왜 상관이 없어요, 제가 수호랑 만나는 애가 아니고 그냥 같은 반 여자애들 중 하나여도 이런 거 줄 건 아니잖아요.”
담임 말대로 머리가 나쁘지 않은 애구나. 아니면 내가 이애를 말로 호릴 만큼 똑똑하지 못한 거거나. 당신은 당신 앞에 놓인 음료수 잔에 맺힌 물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하지만 뭐라도 쥐여주어야 맞는 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오는 우리 애 그만 만나게라는 클리셰, 처음으로 그게 그냥 이해가 된다고 당신은 느꼈다. 이별의 대가로 금품을 제공한다는 건 상대가 자기 자녀와 헤어지는 게 그쪽에게 분명한 손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 다시 말해 그 정도로 우리 애가 잘났다는 주장. 또 거꾸로 말하면, 맨손 맨입으로 우리 애랑 헤어져달라 말하는 건 자기 아이가 자기한테도 별것 아니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받아줘, 제발 이거 받고 우리 애랑 헤어져줘. 그 수고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나도 알지만, 너한테는 이게 꽤 탐나는 물건 아니니?
당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애는 기세등등하게 말을 잇는다.
“아줌마 아들은 그러니까 한 백만원 하는 거죠. 아니지 정확히 얼마짜린가는, 이게 설령 일억짜리라고 해도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줌마가 아들을 흥정거리로 생각하는 거 자체가 문제지.”
당신은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얘, 내가 내 아들만한 여자애보고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야 이 미친년아. 계산이 왜 그렇게 되니. 내 아들 값어치가 이깟 휴대폰만한 게 아니라 네가 내 아들하고 사귄 시간에 대한 보상이 그 정도인 걸로 생각해야지. 네가 평생 가도 다시 못 만날 수준 높은 남자애하고 한 달 좀 넘게 알콩달콩 사귄 거, 그것도 좋은 경험인데 거기다 최신형 휴대폰까지 얹어준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공손히 받아갈 일이지 어디 주제도 모르고. 물론 당신은 이런 생각들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이건 애초부터 당신이 지는 싸움. 그러나 전투에서 져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다. 여자애가 이 자리에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아무리 모욕하고 조롱한들 헤어져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자면 당신이 참아줄 수밖에. 애매하게 여자애를 자극했다가는 표독을 부리며 절대 못 헤어진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참자, 참아야지. 당신은 수호를 생각한다. 이게 다 누구를 위해서였나, 모두 그애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당신은 참을 수 있다. 그래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애는 또 얄밉게 아메리카노를 쪽 들이켜고 말한다.
“헤어져드릴게요.”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칠 음절. 당신은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래줄래? 정말 그래줄 수 있겠니? 힘든 일인 거 알아, 내가 내 아들 아니까. 얼마나 아쉽고 아깝겠니, 그래도 정말 그래준다면 고맙겠다. 아주 눈물나게 고마울 거야. 응?
“그게 그렇게 소원이시라는데 뭐 어떡해요. 저도 막 울고불고할 만큼 진지한 건 아니거든요. 근데 그건 아셔야 돼요. 제가 이걸 받아가는 거는요, 이게 너무 갖고 싶어서도 아니고 제가 수호 별로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요. 이게 아줌마가 아들을 팔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라서예요.”
그 순간에야말로 당신은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그 고함과 비명을 속으로 삼키느라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 일어나는 것을 느꼈지만 어쨌든 참는다. 용케 참고야 만다. 여자애의 말이 틀렸으니까. 아주 괘씸하게 글러먹은 소리니까. 당신은 고개를 떨구고 라마즈 호흡으로 후우 하아 긴 숨을 내보낸다. 난로 위 주전자처럼 달아오른 당신에게서 수증기 같은 날숨이 쏟아져나온다.
“너는 뭐가 좋아졌니?”
애플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들고 자리를 뜨려는 여자애를 당신이 붙든다.
“네가 먼저 고백했다고 했지? 너도 수호 좋아했으니까 뭐가 좋아졌을 거 아니야. 그게 뭐였어?”
여자애는 그게 왜 궁금하냐는 듯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꾸한다.
“머리가 좋아졌어요. 연역 추론 능력, 그런 쪽 같아요. 덕분에 기말고사도 좀 괜찮게 봤어요. 뭐…… 감사합니다? 이런 말씀 드려야 하나요?”
여전히 당신은 그 꿈을 꾼다. 진득하고 쫄깃한 빛을 당신의 어둠의 손이 조물조물 주물러 아기 모양으로 만드는 꿈. 그 꿈이 당신에게 주는 감각은 이제 순수한 경이만은 아니다. 뭐랄까 엄마 됨에 뒤따르는 모멸감과 슬픔,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단단한 결의. 어떤 전능한 힘이 시간을 돌려 당신을 임신 전으로 데려가더니 다가올 모든 망신과 패배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이를 낳겠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기꺼이 그러겠다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결의. 당신은 후회하지 않는다. 수호를 낳은 것도 수호의 첫 연애와 결부된 당신의 모든 판단들에 대해서도.
수호에게 미안하진 않은지 자문해본 순간, 물론 있다. 미안하다. 처음 좋아한 여자애와 이유도 모르고 헤어지게 만든 건 입이 열 개라도 할말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미안함과 별개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호는 잘생기고 똑똑하고 다정한 아이라서 앞으로도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몇 시간 안에라도…… 적어도 당신의 믿음 안에서는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당신이 수호의 첫 여자친구를 설득하고 온 직후에 한 걱정은 수호에게 느끼는 죄책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당돌하고 약아빠진 계집애가 당신 앞에서만 헤어지겠다고 큰소리치고 몰래 뒤에서 수호를 만날 계획을 꾸미는 건 아닐까, 그것만이 유일한 위험 요소로 느껴졌다. 충분히 일어나고도 남음 직한 일. 내가 걔라도 수호랑은 못 헤어지지. 그러나 여자애는 약속을 지킨 것 같다. 이 일에 당신이 개입했음을 수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배려였는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대략 이 주 정도의 시차를 둔 모양이다. 먼 나중에야 당신은 당신이 그 여자애를 여러 모로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름방학을 맞이한 수호가 어느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악물고서도 미처 단속하지 못한 울음소리를 흑흑 새어보내고, 마침 악몽을 꾸고 깨어난 김에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왔던 당신은 그 소리에 소스라친다. 세상에, 운다. 내 아들이 울어. 걔 때문인가? 걔가 그렇게 좋았을까?
대체 어디가?
다음날 수호는 눈이 탱탱 부은 얼굴로 아침식사 자리에 나오지만 당신은 그에 대해 묻지 않는다. 수호도 그 여자애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서운해. 당신은 이 생각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역시나 수호는 여전히 다정한 아들이다. 태풍이 지나간 한여름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당신에게 짐을 들어준다며 동행을 자청하는 아들. 요즘 세상에 이런 애가 어디 있냐고, 정말. 당신은 누가 봐도 헌칠한 아들을 쇼핑에 동행시키는 당신을 마트 안의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할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오랜만에 마주친 이웃 여자, 아들이 여자친구를 사귀어 입시 대박을 이루었다는 그 여자만은 확실히 그런 티를 낸다. 어머 수호 오랜만이다, 언제 봐도 이쁘다 너는. 여자친구 없니? 여자애들이 그냥 놔두니 너 같은 애를? 이웃 여자의 입방정에 당신은 수호의 눈치를 살피지만 수호는 배시시 웃기만 할 뿐. 그 웃음이 어딘지 한스러워 보여서 당신은 조금 목이 멘다. 그러는 그쪽은 어떠냐고, 새로 얻은 딸하고 그 댁 아들은 잘 지내느냐고 물으니 이웃 여자는 성을 팩 낸다.
“말도 마, 쌍놈의 새끼 바람피우다 걸려서 지 복을 지가 차버렸잖아. 아니 결혼까진 바라지도 않아, 국시 볼 때까지라도 잘 좀 어떻게 해보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를 했거든요.”
이웃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면 신장되는 능력도 바뀌는지라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설명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익히 아는 사실이기에 당신은 예예하며 대충대충 이웃의 말을 들어 넘긴다.
“엄마는 뭐가 늘었어?”
이웃 여자를 겨우 떨치고 다시 쇼핑에 매진하려던 차에 수호가 문득 묻는다. 에? 뭐? 하고 다시 묻자 수호가 말한다.
“엄마도 아빠를 사랑하니까 뭐가 좋아졌을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내가 누구 사귀어보기 전까진 그 생각을 안 해봤더라고. 엄마랑 아빠도 서로 사랑하니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엄마는 뭐가 늘었어요? 아빠는?”
“로로마 이전에 시작된 사랑에는 로로마 효과가 없대. 엄마가 알기론 그래.”
“그래요?”
“로로마가 한 2017년인가 18년에 공급 시작됐으니까 그 훨씬 전에 만난 엄마랑 아빠는 그 덕 볼 순 없었지. 각자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몰라도. 그건 또 큰일이잖아.”
흐음 그런가, 그렇구나 하고 코너를 꺾어 앞서가는 수호의 뒷모습을 당신은 잠깐 멈춰 서서 바라본다. 당신이 지금이라도 로로마 효과를 볼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남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 수호 때문일 거라고, 그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너는 그게 왜 궁금하니, 혹시 뭐라도 눈치챈 거야? 당신은 조금 불안해하며 걸음을 서둘러 수호와 보조를 맞추지만 수호는 그 얘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
쇼핑을 마치고 나온 당신은 마지막에 고른 아이스크림 포장을 까서 수호의 입에 물려준다. 수호는 양손 가득한 장바구니를 한 손에 모아쥐고 빈손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잡는다. 합쳐서 대충 십오륙 킬로는 됨직한 짐을 한꺼번에 쥔 수호의 손목 안쪽, 뼈인지 근육인지 하여간 손바닥 끝과 손목을 잇는 튼튼한 줄기가 한껏 솟아 있다. 남자구나, 이제. 다 컸구나.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던 당신은 외친다. 수호야 조심, 앞에 물 조심. 머리로는 아들이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무심코 어린애 취급을 하고 마는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선 그 온도 차를 뒤늦게야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서, 당신이 혼자 피식 웃는데, 웃는 당신을 두고 수호는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물웅덩이를 건너버린다. 폴짝. 무거운 짐을 든 사람 같지 않게, 그렇게 키도 크고 어깨도 벌어진 남자 같지 않게. 뛰어서 건넌 폭도 물론 넓지만 워낙에 높이 뛰어올라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 쳐다볼 정도다.
아직도 점프력이 좋구나……
당신은 웅덩이를 둘러 천천히 아이의 뒤를 따른다. 저놈의 점프력은 대체 언제까지 가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