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몸에) 좋은 사람―(1/2)

2. (몸에) 좋은 사람

 

이상형? 어른스러운 사람.

얼굴? 안 봐요. 진짜 안 봐요. 아닌가 조금 보긴 보나? , 그런 말 있잖아요. 수비 범위가 넓다. 덕질 용어인 것 같기도 하고 일본어에서 온 표현인 것 같기도 하고? 머리 짧아도 좋고 장발도 좋고, 피부 하얘도 좋고 좀 탄 색깔이어도 좋고. 무쌍은 무쌍대로 매력 있고 쌍꺼풀 진해도 좋고. 뭐랄까 리치한 매력? 카르보나라 같은 거죠. 무쌍이 한식이면 유쌍은 파스타. 좀 이상한 비유인가?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때요. 한식 양식 다 좋아하는 거.

다 그렇지 않나?

그게 뭐 되게 별나고 특이한 건 아니잖아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타일이 그래요. 이렇게 생겨도 좋고 저렇게 생겨도 나름 괜찮다, 그런 식. ? 키는 진짜 상관없어요. 저보다만 크면 돼요. 이건 어쩔 수 없죠. 제가 작잖아요. 2, 아니 벌써부터 그런 거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냥요. 무슨 2? 제가 이제 스무 살인데요. 키가 나보다 작은데 성격이 진짜 어른스러운 경우요? 밸런스 게임 같은 거 하자는 거예요? 왜 이렇게 짓궂지. 그럼 만나죠, 그쪽도 제가 마음에 든다면 감사하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여자 키가 저만하면 누가 봐도 작은 편이잖아요. 근데 남자 키가 저보다 작은데도 키에 콤플렉스 없이 성숙한 스타일이라는 건요, 인품이 명품이라는 뜻이에요. 세상에 비할 바가 없는 성품. 그런 사람은 놓치면 안 되죠.

그런데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걸요. 저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막상 그런 분이 실제로 저한테 좋다고 하면 아마 고민깨나 하겠죠. 설명할 게 많아질 것 같잖아요. 왜 평범 범주에 들어가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는지, 눈에 확 띄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왜 그 사람과 사귀고 싶었는지, 그러니까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무슨 빚진 사람처럼 변명하고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사귀는 내내. 피곤하지 않을까요. 그야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들이 무례한 거지만. 맡겨놓은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걸 물어볼까요 다들?

몸매 인정. 아무나 다 좋다는 거 당연히 아니죠. 저 좋다는 사람 아무나 반긴다는 뜻, 아니죠 당연히. 확실히 몸은 보는 것 같아요. 제가 좀 통통해서. 지금은 좀 빠진 거예요. 3 때는 뭐 굴러다녔죠. 그래서 상대방 덩치가 좀, 너무 크시다 싶으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둘이 붙어다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짐작이 가서. 경험으로 배웠죠 뭐. 제가 외모 안 본다니까 동기가 그런 분 한번 소개해준 적 있거든요. 그 형 진짜 너무 좋은 사람인데 예선 통과를 해본 적이 없다고, 넌 예선 없다고 했으니까 한번 만나보라고. 나중에 애프터 거절할 때 어찌나 죄송하던지. , 근데요 그것보다 더 싫은 건 마른 남자. 예전에 저보다 종아리 가는 사람 사귄 적 있는데 그때 좀 비참한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저 다리는 좀 자신 있는 편이었거든요. 몸이 좀, 뭐랄까 상체 집중형이라.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거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도 아는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

 

*

 

뒤풀이 갑시다. 뒤풀이.”

여덟 명이 동시에 일어서며 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는 통에 좁지도 않은 강의실이 한껏 소란스러워졌다. 대학 강의실 책걸상이라는 건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일체형 책상의 야박한 틈 한쪽으로 조심스레 엉덩이를 빼내며 유나는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표준 체형을 벗어나는 사람은 여기 앉지도 못하겠다고.

갈 거지?”

묻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건 유나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경영학과 2학년짜리 남자애가 생물…… 뭐라더라 이름이 긴 학과의 새내기, 유나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여학생한테 한 말. 여학생은 자기 눈썹이라도 쳐다보고 싶은 것처럼 눈동자를 위로 또르륵 굴리고 입술을 쭉 내밀며 으음, 콧소리를 냈다. 이따 토마토주스 사주시면 가고요. 유나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뻔하다는 생각은 조금 후에나 든 것이고, 그보다 우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까봐 걱정이 됐다. 그냥 빨리 사귀어라. 누가 봐도 쌍방 개수작인데.

남의 사랑에는 항상 조금 역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세상에 자기만이 아닐 거라고 유나는 믿었다. 거리감의 문제일까. 로맨스 소설이나 멜로 영화 같은 건 큰 거부감 없이 감상할 수 있었지만 직접 마주치는 사람들, 말하자면 화면이나 활자 바깥에 실재하는 사람들이 정분나는 꼬라지를 지켜보는 건 어쩐지 비위가 상했다. 은행 사진을 보는 건 괜찮지만 길에 떨어진 진짜 은행을 보면 냄새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이치라고 할까. 곤란하게도 그것은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욱 예민하게 감지되었다. 오이를 못 먹는 사람이 연두색 비누의 냄새에서 오이의 뉘앙스를 아주 정밀하게 포착하듯, 주변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기미들을 유나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진저리가 나도록 자주 있는 일이었다.

유나 너도 뒤풀이 갈 거지? 하며 같은 과 시영 언니가 붙들지 않았다면 유나는 곧장 기숙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처음 만났던 OT 때부터 유나를 예뻐하던 언니는 붙임성 없는 유나를 이 인문학 독서 모임에 가입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너 재밌어 보인다, 내 옆에 앉아.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유나는 입학한 지 두 달이 다 된 지금까지도 대학에서 만난 누구와도 통성명 한 번 제대로 못해봤을 것이다. 그런 언니가 강의실을 먼저 빠져나간 몇 사람을 코끝으로 가리키며 유나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 나 혼자 저 꼴을 어떻게 감당하냐. 거의 연극 조로 보일 만큼 과장된 표정과 몸짓이었다.

모임 곧 망하게 생겼어, 커플 너무 많이 생겨서.”

시영 언니의 울상 앞에 유나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런 순간이 유나에게는 묘하게도 위로가 되어서였다. 남의 사랑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자기만은 아닌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러니까 그건 특별히 자기가 못돼먹어서가 아니고, 타인의 로맨스 앞에서 누구나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는 것을 승인받는 절차. 유나가 정말로 스스로를 조금 못된 사람이라 믿고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래도 별개로.

뒤풀이는 매번 같은 가게에서 했다. 후문 팔육집. 상호가 왜 팔육집인지는 독서 모임 구성원 중 아무도 몰랐고 상호만큼 메뉴도 종잡을 수 없었다. 부대찌개는 햄과 콩나물이 들어간 김치찌개에 지나지 않았고, 마른안주는 건어물도 맛이 갈 수 있는 거였나 의심하게 할 만큼 질이 떨어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튀김만은 정문 앞과 후문 일대의 그 어느 가게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색이 좋고 바삭했는데, 이 모두가 오래된 메뉴판 한 장에 공평하게 적혀 있다는 점이 정말 의아한 가게였다. 쓸데없는 것 빼고 튀김만 하시라는 충고를 수십 년간 수천 번 들었을 팔육집 할머니는 자기가 메뉴판에 쓴 모든 요리를 빠짐없이 잘한다는 믿음을 결코 꺾지 않았고, 그래서 팔육집에는 늘 자리가 많았다. 그 사실을 잘 모르고 팔육집에 들어간 사람은 십중팔구 튀기지 않은 것을 시켰다가 봉변을 당하고 다신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까. 오래된 기물들이나 낙후된 화장실도 손님을 쫓는 데 한몫했겠지만 술값이 다른 가게들보다 싸다는 무시 못할 장점도 있었다. 그러니까 전세 낸 것처럼 먹고 마실 수 있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 그게 팔육집이었다.

잔 채우고 다 같이 건배 한 번만 한 다음에 자유롭게 마십시다, 테이블 안쪽 가운데 자리에 앉은 모임 리더가 큰 소리로 말하자 곧 모두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소주잔 셋 맥주잔 다섯. 끄트머리에 앉은 유나는 바로 옆자리와 맞은편에 앉은 사람하고만 잔을 부딪칠 수 있었는데, 유나의 잔에서 튄 맥주 거품이 맞은편 사람의 맥주잔에 조금 흘러들어갔다. , 죄송해요, 아직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왜 이러지. 유나는 잔을 내려놓고 휴지를 뽑아 건넸지만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맥주를 마셨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양손을 펼쳐 유나에게 보여주었다. 깨끗했다. 유나의 잔에서 흐른 맥주가 다른 어디에 묻지 않았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였을 터.

이 사람이랑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건 처음이네. 모임 때든 뒤풀이 때든. 반쯤 빈 맥주병을 들어 상대의 잔에 채워주며 유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 이름 아는데 이 사람은 내 이름 알까. 모임도 벌써 몇 주째인데 새삼 자기소개를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려나.

주현우.”

맞은편 사람이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때문에 유나는 조금 웃었다. 이 사람 나랑 똑같은 생각 하고 있었나봐.

알아요. 저랑 두 학번 차이 나시는. 맞죠?”

맞아요. 기억력 좋네요.”

내 기억력이 좋은 건가? 그쪽이 기억에 남는 사람이겠지. 유나는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오며 생각했다.

3월 셋째 주. 첫 모임이고 해서 그날만은 학과와 학번을 갖추어 제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좋아하는 책이나 저자를 발표했다. 유발 하라리, 마이클 샌델, 재레드 다이아몬드 같은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거론되었고 그중 절반쯤을 유나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기와 같은 신입생들마저 그런 낯선 석학들의 이름과 저서 제목을 소꿉친구 부르듯 거리낌없이 읊는 것을 보며 유나는 약간의 열패감을 느꼈다. 반쯤은 허세겠지, 설마. 앞 사람보다 더 있어 보이는 이름을 대야만 하는 묘한 기싸움이 시작되어버린 거지. 기죽지 않으려고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또한 그것은 모임의 성격을 거의 정확하게 간파한 생각이었지만,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유나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수그러졌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좋아합니다.

숙연한 침묵이 잠깐 감도는가 싶더니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인가. 옆에 앉은 시영 언니가 아, 귀여워! 외쳤지만 유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날 맨 마지막으로 자기소개를 한 사람이 그였다. 주현우.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는 이름을 말하면서 모자를 벗었다가 학번을 말하면서 다시 썼다. 사회학과고요. 좋아하는 작가는 후지코 F. 후지오입니다. 그건 또 누구래, 턱을 괸 유나가 심드렁하게 생각할 때 누군가는 소리 내서 물었다. 처음 듣는 작가인데 대표작이 뭐죠? 현우가 되물었다. 도라에몽 모르세요?

다들 현우가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도라에몽 작가 이름 처음 알았어요. 전 포켓몬처럼 여러 작가가 공동 창작한 만화인 줄 알았어요. , 후지코 F.라길래 난 또 일본계 미국인인 줄. 그러게요, 전 브래디 미카코 같은 작가인 줄. 웃으며 툭툭 던지는 말들이 모두 그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 현우는 진지한 태도로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좋아합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입니다.

저는 유나예요. 정유나.”

뭐 더 할말이 없을까 찾다가 조금 머쓱해하며 유나는 덧붙였다.

새내기.”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는 뜻인지 이제 알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할말이 없어서 건배를 나눴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후에 시영 언니가 유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나, 담배 피우러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에 유나는 현우 눈치를 봤다. 이 사람이 내가 담배 피우는 거 신경쓰는지 안 쓰는지를 난 왜 신경쓰지, 그런 생각이 뒤따라 들었고 그게 조금 자존심 상했다. 난 이미 성인이고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뭐랄 사람 여기 아무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조금 후에 현우가 밖으로 나왔다. 뭐야, 담배 피우나. 팔육집 옆 조금 그늘진 골목길에 서 있던 유나는 현우가 머뭇거리지도 허둥거리지도 않고 가로등 불빛이 있는 대로 쪽으로 나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집에 가나, 인사는 하고 가시지. 현우는 금세 돌아왔다. 유나는 별생각도 없이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다. 또 피우게? 나 먼저 들어간다, 시영 언니가 떠난 자리에 현우가 와서 섰다. 가게를 나설 때는 유나가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돌아오는 길에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담배 사러 다녀오신 거예요?”

끊었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잖아요.”

현우는 머쓱한 듯 웃었다.

그렇게 되나요. 그럴까, 그럼.”

담배를 사려던 게 아니면 갑자기 어딜 갔다 온 거지. 그리고 담배 피울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기 서 있지. 유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구심들을 입 밖으로 꺼낼까 말까 계산해보았다. 두번째 질문은 아무래도 시비를 거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 굳이 묻기 애매했고 첫번째 질문의 답은 현우의 얇은 점퍼 주머니 밖으로 비어져나와 있었다. 100% 토마토주스.

…… 그런 건가.

유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생물 어쩌고 학과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런 거지. 취하면 토마토주스가 먹고 싶어진다는 거,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지만 확실히 뇌리에 남는 습관이지. 아이템 색채도 강렬하고. 그걸 떠올리니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린다는 건 그전까지 조금이나마 긴장을 하긴 했다는 의미.

나 이 사람 의식하는구나.

조금 당황스러운 자각이 뒤따랐고 유나는 허겁지겁 담배를 피웠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할말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고 담배가 얼른 타길 바라며 필터를 물고 숨을 길게, 가능한 한 길게 들이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색한 시간을 끝내고 가게로 들어갈 때 유나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누구를, 무엇을 탓하는 아쉬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은 주량보다 조금 더 마셨는데도 유나는 그리 취하지 않았다. 자리가 길어지자 생물…… 뭐라는 학과 새내기 여자애는 상온에 오래 둔 푸딩처럼 흐물흐물하게 무너졌다. 바로 앞에 현우가 사온 토마토주스가 놓여 있었지만 그애는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주스 병에 끝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상대가 사온 게 아니라서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네. 유나는 거의 또렷한 정신으로 토마토주스와 현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속으로 여러 번 혀를 찼다.

 

*

 

유나는 스스로를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너 좀 엉뚱하다, 귀여운 것 같다 그런 말은 종종 들었지만. 딱히 특이해 보이려고도 굳이 귀여움을 사려고도 애쓴 적 없어서 선배나 동기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유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귀엽대. 그런 건 자랑거리가 못 됐고 오히려 입 밖에 내는 순간 푼수가 되어버리는 말이었다. 될 수 있다면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웃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없어도 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갯거리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다음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경청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나중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현우 같은 사람?

지난밤의 술자리를 되새겨보면서 유나는 현우가 생각만큼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주앉아 있던 시간은 한 이십여 분. 그러는 동안에 나눈 대화는 열 마디가 넘을까 말까 했다. 그것도 담배 피울 동안에 주고받은 말까지 합쳐야 겨우. 생각보다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타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고, 의외로 나랑 비슷한 사람 아닌가.

기숙사 계단을 내려가던 유나가 갑자기 하하하 웃어서 같은 방향으로 걷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현우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현우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믿음보다도 더 큰 오해 같았다. 전날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유나는 원래 자리에 앉았고, 따라 들어온 현우는 자기 잔과 수저를 챙겨 반대쪽 끄트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현우도 유나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상대방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저 혼자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것. 그건 스스로는 부끄럽고 상대가 알면 좀 징그러워할 일 같았다.

다음부터는 정말 뒤풀이 가지 말아야지.

술자리라면 싫지 않은 편이었다. 입학하고 한 달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는데도, 대개는 별말도 않고 술만 홀짝이다 오는 자리였는데도 유나는 하과 내의 크고 작은 모든 술자리에 참석했다. 대단한 주량은 못 되었지만 참는 건 자신이 있어서 늘 잠자코 잘 앉아 있었고, 그런 식으로 한 달이 지나자 유나 얘가 소리 없이 강하다며 선배와 동기들이 추켜세워주었다.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술자리는 싫지 않았지만 크게 즐겁지도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약간 허무하기나 했다. 말실수를 저지를 만큼 말을 많이 하지도 못했고 썩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화제라고 해봐야 모두가 아는 동기 선배들 가운데 누가 누구랑 사귀니 마니 하는 소식, 그래서 누가 로로마로 어떤 효과를 봤는지 정도였으니까. 생각해보면 담배를 배운 것도 그래서가 아니었나. 묵묵히 앉아만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답답하게 하려고.

그러니까 이제 뒤풀이 같은 건 정말,

유나 어제 잘 들어갔어?”

종합강의동에 막 들어섰을 때 누군가 말하고 지나갔다. 질문인데 대답은 바라지 않은 것처럼 말 한마디만 뒤에서 툭 던지고 몸은 척척 앞서간 사람, 겉옷 색깔이 눈에 익었다. 현우였다. 선배도 이 건물에서 수업 듣는구나. 나랑 같은 시간에. 유나는 어깨에 남은 남자 스킨 향을 의식했다. 저 선배는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알았지, 뒷모습만 보고?

당연히 수업 같은 것에는 조금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오자마자 유나는 담배를 물었다. 배운 지 한 달 조금 넘은 담배에 완전히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두 시간 조금 안 되는 수업 시간 내내 가슴이, 물론 내내 그러지만은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너무 심하게 뛰어서 얼른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첫 숨을 길게 내뿜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되는 것은 물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을 듯한 마음이 되었다. 왜 이럴까, 고작 하루이틀 사이에.

미쳤나.

유나는 건물 후문으로 나오는 현우를 보며 생각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는 다시 물 생각도 못해서 그저 하얗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두리번대던 현우가 유나를 발견하고 곧장 유나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나도 예전엔 여기서 피웠거든.”

언제요?”

군대 가기 전에.”

그제야 유나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타버린 담배를 털었다. 이 대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아니라 양식이. 어제 처음 말을 섞은 사람들치고는 너무 일상적이라는 느낌이.

시간 있어?”

있으면요?”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내뱉고서야 조금 시비조가 아니었는지 유나는 후회했는데 현우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 도서관 좀 데려가줄래?”

 

*

 

대학생으로서 처음 참석한 술자리는 예비 대학 뒤풀이. 정확히 말해 그때는 아직 대학생이 아니고 갓 스물을 넘긴 때에 불과했지만.

그때 유나를 안심시킨 사실 중 하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로로마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는 점이었다. 전 세계가 로로마 때문에 시끌시끌하다는데 정작 눈앞의 이 많은 또래들은 아무도 로로마 얘기를 안 한다는 게 무슨 괴담처럼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로로마는 평행 우주에서나 발견된 것이고 사실 이 우주엔 그런 망할 미생물이 없는 것처럼. 아무튼 그 자리에서는 로로마 얘기를 꺼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암묵적인 합의마저 있는 듯 느껴졌다. 로로마에 미친 아줌마 덕에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유나에게는 차라리 달가운 현상이었다.

역시 그런 걸 따져가면서 사람과 사귀고 헤어지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겠지. 사랑을 해서 뭐가 나아졌는지를 계산하는 건 너무나 속물적이어서 지성인들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겠지.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로로마는 사랑을 스펙으로 만들었으니까. 종교나 정치나 주식처럼 민감한, 그 얘기만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서나 나눌 법한 화제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 생각이 반쯤 착각이었음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동기들이 그동안 로로마 이야기를 안 한 건 아직 그게 자기 일이 아니어서지, 흥미가 없어서나 속물적이라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로로마의 술자리 화제 점유율은 꾸준히 높아졌다. 아는 누군가가 사랑에 빠진 것도 흥미로운데, 그 때문에 피부가 좋아졌다거나 스피킹 실력이 하루아침에 플루언트해졌다는 이야기 같은 걸 그냥 넘길 순 없는 거였다. 한번 물꼬를 튼 로로마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서, 캠퍼스에 지천으로 벚꽃이 만개할 때쯤 동기들은 숫제 누군가의 변화를 로로마에 연관 지으며 넘겨짚기 시작했다. 누가 살이 좀 빠졌다 싶으면 다이어트를 했나보다 생각하는 대신 기초대사량이 올라간 거 아냐? 소화력이 좋아진 거 아냐? 추측했고, 누가 공통 교양 수업에 결석이라도 하면 헤어져서 컨디션 안 좋아진 거 아냐? 걔가 로로마 때문에 기초체력이 올라갔다고 했던가? 입방아를 찧어댔다.

물론 유나에게는 이 모든 상황과 현상이 징글징글했다. 남의 사랑도 싫은데 로로마는 그보다 두세 배는 더 싫어서. 술자리의 수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꼬박꼬박 얼굴도장을 찍은 내심에는 이 상황에 대한 체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 얘기가 되기 전까지는 모두가 로로마에 관심이 없는 척했다는 사실이 사랑이라는 유행이 이다지도 저물지 않는 이유를 말해주었고, 누군가의 그 어떤 변화든 로로마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목록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그렇구나, 숨길 수 없구나.

숨겨지지 않는구나.

그리하여 유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자기가 현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뭐가 달라진 거지? 내 마음이 내 몸을 어떻게 변화시켰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면 이 마음은 가짜인 걸까?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낸 설렘에 잠깐 속은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