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몸에) 좋은 사람―(2/2)

*

 

도서관 주 출입구에는 지하철처럼 학생증을 터치해야 지나갈 수 있는 개찰가 있었다. 한 사람이 출입 센서에 학생증을 터치하고 다른 한 사람이 그 뒤에 바짝 붙으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편법도 지하철 개찰구와 비슷했다. 종합강의동에서 도서관까지 걷는 오 분여 동안, 현우는 어제 막 초면을 면한 유나에게 바로 그 도움을 원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같은 과 분들은요?”

제대하고 첫 학기라서. 남자 동기들은 제대를 안 했거나 아직 휴학중이고, 여자 동기들은 학년 높아서 다 바쁘고. 후배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누가 출입구 지키고 있진 않아요? 지하철처럼.”

성큼성큼 걷던 현우가 잠깐 멈춰 서더니 웃었다.

도서관 안 가봤구나. 주 출입구에는 근로 장학생 배치 안 돼 있어. 대출 반납 키오스크만 있고.”

유나는 학교 도서관도 안 가본 사람인 걸 들킨 게 조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독서 모임 때문에 가보려곤 했는데,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까 우리 모임 주제 도서는 매번 인기 도서인데다 어차피 늘 대출중이어서 굳이 안 가봐도 되겠다 싶었을 뿐인데…… 떠오른 변명거리는 스스로 생각해도 구차해서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가는 길 내내 아름 굵은 벚나무가 심겨 있어 나무들은 두 사람을 포위라도 하겠다는 듯 꽃그늘을 드리워댔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 잎들 사이에서 유나는 꽃잎이 머리에 앉지 못하게 하려는 척,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이런 계절, 이런 장소, 이런 사람.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뻔한 일 같았다. 이미 현우에게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건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 듯했지만, 먼저 좋아해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오기가 새로 솟기 시작한 참이었다. 적어도 발 뺄 수 있을 만큼만. 상대방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자명해지면, 곧바로 회수할 수 있을 만큼만.

취하려고 술을 마시는 주제에 절대로 과하게 취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기분이었다.

유나와 현우는 미리 이야기한 작전대로 도서관 출입구를 지나갔다. 유나가 학생증을 센서에 갖다댔고 현우가 뒤에 바짝 다가섰다. 순간 현우가 몸으로 일으킨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체취를 싣고 유나에게로 흘렀다. 스킨 냄새가 아직도, 혹시 스킨이 아니라 향수인가. 향수 뿌리는 남자였나. 유나는 그 순간이 길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순식간이었다. 깨닫고 보니 이미 도서관 중층이었고 현우가 뭐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고마워. 더 부탁해도 돼?”

뭔데요, 이번엔.”

같이 와준 김에 책도 좀 빌려도 될까. 학생증 재발급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바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어서.”

그럼 반납할 때도 제 학생증 필요하겠네요. 유나는 곧장 떠오른 대꾸를 내뱉는 대신 얌전히 답했다.

그러세요.”

현우가 빌릴 책을 다 고르길 기다릴 동안 유나는 생물 어쩌고 학과 여자애를 떠올렸다. 가능하면 걔랑 오고 싶었겠지, 걔가 지나가듯 한 말, 그것도 자기한테 한 것도 아닌 말을 듣고 일부러 토마토주스를 사러 갔다 올 정도면.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이러는 건 그저 마침 같은 건물에서 같은 시간대에 수업을 들은 우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이건, 나랑 뭘 더 어떻게 해보자는 수작질 같은 게 아니겠지.

도와줘서 고마워. 조금 늦었지만 점심, 내가 살게. 뭐 먹고 싶어?”

도서관을 나오면서 현우가 말했고 유나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삼십 분 후에 다음 수업 시작이에요.”

큰 보폭으로 걷던 현우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공강 한 시간 중에 삼십 분을 날린 거야? 나 때문에. 점심 먹을 시간을.”

그게 그렇게 되나, 아닌 건 아니지만 듣고 보니.

가다가 학관에서 주먹밥 같은 거 사 먹으면 돼요.”

착하다, .”

?”

너 착하다고.”

제가요?”

.”

내가 그런가.

그러기로 한 것도 아닌데 어느덧 나란히 학생회관 쪽으로 걷고 있었다. 수업 시작 시간 이십 분을 남기고 유나는 학생회관에 도착해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웠고 현우는 유나의 부탁대로 학관 카페에서 딸기바나나주스를 사다주었다. 주먹밥은 됐고? 현우가 묻자 유나는 마음이 바뀌었다고 답했다. 선배도 착하네요. 주스를 받아든 유나가 건넨 농담에 현우는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뭐가 착해. 난 착함에 대한 기준이 엄청 높은 사람이야.

그럼 나는요?

묻고 싶었지만 유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수업 내내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봤다. 시간 될 때 밥 사주겠다고, 꼭 연락해야 한다고 당부하며 현우가 남기고 간 연락처를.

 

*

 

바보야, 전화를 걸어 전화를.”

과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역시 시영 언니였다. OT 때 외톨이가 되지 않게 곁에 앉혀주고, 자기가 다니는 독서 모임에도 같이 가자고 해준 사람. 좋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그게 우리 모임의 주현우라는 사실은 슬쩍 빼고 털어놓자 언니는 숫제 화를 냈다. 유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답답하다, 번호가 있는데 전화를 왜 안 걸어?

인간들이 번호 교환, 번호 교환 노래를 부르는 게 뭐 여름방학 비상 연락망 만들려고 그런 거겠니? 정분이 나려면 통화를 해야 된다, 이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있잖아, 소개로 만난 애들 같은 경우에 특히, 성사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가 거기 있다고 봐. 만나기 전에 메시지만 주고받은 애들은 금방 파투나는데 통화 한 시간 두 시간씩 해본 애들은 결국 만나더라고. 왜인지 알아?”

유나가 고개를 젓자 언니는 또 벌컥 화내듯 말을 이었다.

목소리를 주고받아야 상대를 좀더 상상하게 되는 거야. 상상을 해야 텐션이 생기는 거고. 텐션이 있어야 그쪽하고 나 사이의 가능성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통화가 그래서 중요한 거야, 알아들어? 상대방이 자기를 공략할 최종 병기를 순순히 넘겨줬는데도 안 쓰고 있는 거라고, 너는 지금.”

현우가 정말 그런 의도로 연락처를 알려준 걸까? 그렇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전화를 거는 것 자체가, 나 당신에게 순수하지 않은 마음이 있어요라는 메시지가 된다는 뜻 아닌가.

됐다, 내가 널 데리고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언니가 퉁명스레 말하며 자판기 버튼을 눌렀다. 이온음료가 덜커덩 떨어지는 소리가 유나에게는 꼭 자기 몸안에서 나는 것처럼 들렸다. 언니랑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가 유쾌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야 든 것이었다. 남의 사랑이란 건 항상 조금 역한 데가 있는 법이니까. 근데요, 언니. 유나는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그쪽은 나에 대해 별생각 없는 것 같아요. 그쪽도 나한테 전화 안 걸잖아요. 나도 그날 연락처 받자마자 통화 버튼 눌렀는데도.

연락도, 별일도 없이 며칠이 흘렀다. 유나는 이후로도 술자리가 생기면 꼬박꼬박 참석했고 매번 기숙사 통금 시간보다 훨씬 이른 아홉시쯤 자리를 떴다. 그런 날이면 그리 취하지는 않았으나 술 때문에 조금 달아오른 숨을 찬찬히 가누며 기숙사 휴게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기숙사 4인실은 사적인 통화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니까. 전화를 걸 용기는 아무래도 나지 않았다. 취했다 치고 실수인 척 저질러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들었지만 그러기엔 실질적으로 술기운이 부족했다. 갓 스무 살이 된 참이어서 어른스러운 연애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술의 힘을 빌려 전화를 거는 건 아무래도 너절한 짓거리라 느껴지기도 했다.

며칠을 그러자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수업마다 과제가 있고, 독서 모임 주제 도서도 읽어야 하고, 술자리에선 몇몇 동기들이 공인 영어 점수 준비 얘기를 꺼내고 있었는데, 걸지도 받지도 않을 전화만 붙들고 시간을 허비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가장 짜증나는 점은, 그러다 지쳐 휴대전화를 엎어놓았다가도 진동이 오면 혹시나 하며 얼른 다시 양손으로 집어들게 되는 것. 아무도, 하물며 이 사태의 원흉인 현우조차 딱히 유나를 속이고 있지 않은데도 자진해서 착실히 골탕 먹고 있는 것 같아 짜증이 자꾸 치밀었다.

유나가 짜증을 내건 말건 시간은 흘러 어느덧 독서 모임 다음 회차 날이 왔다. 모처럼 일찍 온 유나는 리더를 도와 강의실 책상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있었는데, 경영학과 2학년생이랑 생물 어쩌고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얄궂게도 그다음에 나타난 사람은 현우였다. 유나는 현우와 그 옆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혼자 전전긍긍했다. 오직 자기만이, 당사자도 아닌 사람만이 그것을 신경쓰고 있다는 점이, 그러니까 오히려 당사자들 중에는 조금이라도 신경쓰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모임이 진행된 한 시간 반 동안 나눈 이야기는 조금도 기억에 남지 않았고 힘이 쭉 빠진 몸으로 유나는 비실비실 기숙사를 향했다.

뒤풀이 정말 안 갈 거야? 중간고사랑 축제 때문에 이제 한 이 주는 못 모일 텐데.”

기숙사와 후문 사이의 갈림길에서 시영 언니가 소매를 붙들었지만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하필 그 핑계를 댈 때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현우는 어디가 안 좋으냐고, 얼마나 안 좋으냐고 묻지도, 그래도 같이 가자고 청하지도 않았다.

기숙사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유나는 정말로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별안간. 감정이 감각으로 변해서 몸에 독처럼 쌓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고 서러웠다. 아무도 먼저 가라, 꺼지라 하지 않았는데 자진해서 떠나온 것이었고, 누군가 다정하게 붙잡아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혼자 돌아와야 했기에 외로웠다. 주로 팔 언저리와 무릎 부근이 무딘 칼날을 대고 비비는 것처럼 아팠고 명치에서부터 왼쪽 가슴까지가 온통 쿡쿡 쑤셨다. 체했나. 몸살인가.

잘 시간이 아닌데도 일찌감치 누운 탓에 잠이 통 오지 않았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생각만 새끼 치듯 늘어갔다. 뒤풀이 같은 건 이제 질린 줄 알았는데, 자기처럼 조용한 사람일수록 그런 자리에 열심히 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조용한 사람이 모임에도 빠지면 정말로 존재감이 없어져버리니까. 하지만 피곤함과 지루함을 참아가면서 그 시간을 견디는 일에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난 대체 뭘 바란 거지.

유나는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나는 막연히 생각해온 것보다 더 별로인 사람이네. 자진해서 혼자가 되려면서도 사실은, 혼자인 게 괜찮지 않은 사람.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내게 필요한 건 뭐였지. 나는 뭘 원한 거였지. 답은 민망할 만큼이나 단순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날 잡아주길 바란 거지.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주길. 내가 소란을 떨지 않아도, 눈에 띄고 싶어 안달내지 않아도 조용히 나를 알아봐주길.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나의 불안을 나보다 먼저 감지하고 잠재워주길.

가능하면 그게 그 사람이길.

물론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유나도 알고는 있었다.

 

*

 

술도 안 마신 몸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던지 유나는 일어나자마자 아, 그냥 오전 수업 자체 휴강 해버릴까 하는 생각부터 했다. 어두운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얼굴은 몰라보게 부어올라 있었다. 룸메이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던 터라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전날 초저녁부터 드러누운 탓에 잠이 더 오지도 않았다. 어렵사리 일어나 찬물 샤워를 길게 하고 자리로 돌아와보니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책 반납하러 같이 도서관 가줄래? 오늘 시간 괜찮으면.

유나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짧은 답장을 보낸 다음 팔다리를 파닥파닥거리며 춤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상한 동작을 이어가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행이다, 룸메이트들이 없는 시간대라서.

너무 신경쓴 티는 안 나게, 그렇지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 만한 옷을 신중하게 고르고 속눈썹 한 올까지 심혈을 기울여 다듬었다. 그러고도 꽤 이른 시각에 기숙사를 나선 탓에 강의실에 지난주보다 십 분은 일찍 도착해버렸다.

수업 끝나고 종합강의동 흡연 구역 근처에 서 있자 현우가 나왔다. 별로 두리번대지도 않고 한 번에 자기를 찾아 조금 웃는 얼굴로, 일직선으로 가까워져오는 현우를 보면서 유나는 생각했다. 좋다.

정말 좋아.

그건 그리 비일상적인 풍경도 대단히 감동적인 모습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눈가에 눈물이 핑 고이는 느낌이었다. 그게 어쩐지 멋쩍기도 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이가 없기도 해서 유나가 고개를 숙이자 불쑥 가까이 온 현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몸 안 좋아?”

아뇨, 얼굴이 좀 부은 것 같아서요.”

유나의 말에 현우는 굳이 허리를 굽혀 유나의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목덜미 언저리에 고여 있었을 남자 스킨 향 같은 것이 유나 쪽으로 피어올랐다.

하나도 안 부었는데.”

그때 유나는 내심 조금 전 자기가 댄 핑계를 후회하고 있었다. 얼굴이 부어서 시선을 피한다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 텐데. 당신에게 나의 덜 예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그야 이렇게 얼굴이 빨개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게 뭐든 자백처럼 들리겠지만. 그런데 유나가 이렇듯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현우는 마치,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 그럼 이건 어때? 하듯 얼굴을 불쑥 내민 것이었다. 아 진짜 놀리지 마세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유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 아래 질끈 감은 눈꺼풀 속에서 작은 섬광들이 팡팡 터져서 눈으로 파핑 캔디를 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설레면 짜증이 날 수도 있구나.

현우를 따라 도서관 쪽으로 걷는 동안에 여러 생각이 유나의 의식을 드나들었다. 가령 고등학생 때 좋아하던 가수의 쇼케이스에서 받았던 종이 슬로건, 받는 순간에는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리라 마음먹었던 그것의 귀퉁이를 제 손으로 콱 구겨버린 순간의 기억. 슬로건이 구겨진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아니었고 다른 누구의 악의 때문도 아니었다. 그걸 손에 넣은 바로 그날 무대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꽉 쥔 탓이었다. , 너무 좋아! 라고 생각한 순간의 흔적. 다시는 펼 수 없는 마음의 주름. 바로 그 순간에도 유나의 마음에는 그런 구김이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고 좋아서 그냥 너무 좋아서 정오의 야외에서 찌푸린 미간처럼 무한한 실선을 그리며 구겨져가는 마음.

마음속은 그런데도 막상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한심하기도 했다. 이 사람 나랑 걷는 거 심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성급하게 꺼내버리면 내 마음이 다 탄로나버리지 않을까. 그러면 내 뻔한 마음이 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지 않을까.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제……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미 말이 튀어나가고 있었다. 유나가 입을 떼자 조금 앞서 걷던 현우가 응? 하고 돌아보았고 유나는 서둘러 말을 마무리지었다.

어제 재미있었어요?”

말하고 보니 이게 무슨 질문이지 싶은 생각이 들어, 유나는 자기 입을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난 왜 매번 이 모양이지, 뭘 물었다 하면 꼭 시비조라니까. 재미있었으면 어쩌고 없었으면 뭐 어쩌게.

어제? 어제 같이 있었잖아. 유나 넌 모임 별로 재미없었어?”

아니, 뒤풀이 말이에요.”

뒤풀이? 나도 안 갔는데.”

? 왜요?”

나 원래 뒤풀이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 여럿이서 마시면 술만 많이 마시고 대화는 잘 못하게 되잖아.”

그런 것치고 당신도 매번 뒤풀이 안 빠지던데. 유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대며 현우를 따라잡으려 종종걸음을 쳤다.

미안, 반납할 땐 학생증 필요 없었나봐.”

조금 후에 현우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도서관 출입구 무인 반납 키오스크에 책을 올려놓자 자동으로 반납이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뜬 것이었다. 이어지는 안내 메시지대로 반납함에 책을 밀어넣은 다음 유나와 현우는 다시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아무튼 고마워, 너 진짜 착하다.”

현우의 말에 유나는 잠시 부끄러움을 잊고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유나의 마음속에는 작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터였다. 이 사람이 정말 도서 반납에 학생증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학교 도서관 이용 방법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고학번이. 혹시 일부러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나하고 잠깐이라도 더 보고 한마디라도 더 나눠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러면 생물 어쩌고 학과 여자애한테 준 토마토주스는 뭐였지, 아니 걔한테 진짜로 마음이 있었다면 경영학과 선배랑 사귀는 게 알려졌던 어제 무슨 티라도 냈겠지, 그럼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이러는 이유는 뭘까?

수업 한 시간 정도 남았지? 오늘은 점심 같이 먹을까?”

손목시계와 유나를 번갈아 보며 현우는 물었고 유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저 그렇게 안 착해요, 착해서 도와준 거 아니에요.

그럼 어쩔 건데요.

정문 쪽으로 가자. 정문 쪽에 맛집 많아. 후문은 가성비, 정문은 맛집.”

사회대에도 그런 말이 있구나. 유나가 속한 단과대 선배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여러 후배들에게 밥을 사줄 때는 밥값이 싼 후문 상권이 유리하고, 일대일로 공들이고 싶은 상대와 만날 때는 가격대가 좀 있지만 퀄리티가 좋은 정문 상권이 적절하다는 이야기. 그걸 유나네 학과에선 한마디로 후문은 양심, 정문은 흑심이라고 표현했다.

죄송한데 점심, 그렇게까지 여유 없을 것 같아요.”

유나의 말에 현우는 약간 놀라고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나는 고개를 조금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점심 말고 저녁 사주세요. 술 사주세요. 여럿이서 마시는 건 싫다면서요.”

 

*

 

연애, 해봤는데요?

왜요? 안 해봤을 것 같았어요? 안 해봤길 바란 거 아닌가.

농담이에요.

증거는 무슨 증거예요, 보통 증거 없지 않나? 사귈 때 찍었던 사진이라도 보여줘야 돼요? 다 삭제했으면요. 금방 헤어져서 지울 것도 별로 없었어요.

걔에 대해선 나쁜 말 안 하고 싶어요. 걔는 크게 잘못한 거 없거든요. 괜찮은 애였어요. 여러모로. 그런 애가 왜 순순히 저랑 사귀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직도 좋아하냐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럼 왜 헤어졌냐고요? 그건 얘기할 수 있죠.

생각해보니까 저 걔랑 사귀었다는 증거가 있어요. 헤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이거요. 이 폰이요. 이거 걔네 엄마가 준 거예요. 이거 받고 자기 애랑 헤어지라고요. 왜냐면 자기 아들이 나랑 사귀면서 쓸데없는 능력치가 늘어나버려서.

이거 받을 때 제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아세요? 솔직히요, 걔가 부럽다는 생각을 좀 했어요. 얘네 엄마는 얘를 얼마나 사랑하길래 이 지랄일까. 나한테는 그런 엄마 없는데. 그게 또 화가 났어요. 내가 엄마 없는 티가 나니까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알량한 물건 하나 먹고 떨어지라면 고분고분 그럴 만한 애로 보여서.

그런데도 이걸 받은 건요. 탐나서가 아니라요, 저주하고 싶어서였어요. 원하신다면 들어드릴게요,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야 할 만큼 바라는 뭔가가 있다면 들어드려야죠, 대신 아줌마 아들은 절대 제대로 된 사랑 같은 건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아줌마 아들은 사람이 아니니까. 아들이랑 어떤 물건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엄마인 이상, 걔가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순 없는 거니까…… 사랑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 그런 저주요.

걔한테 나쁜 말 안 한다 해놓고 별소릴 다 했다, 그쵸.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저주는 걔가 아니라 내가 걸렸던 것 같아요. 그쪽은 줘버리면 땡이지만 난 받아왔잖아요. 이게 계속 내 눈에 보이잖아요. 거래는 쌍방이 합의해야 성립되는 거고 그 아줌마 하자는 대로 해준 나도 똑같은 사람 되었으니까, 나도 저주받는 게 막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럴까요? 저도 정말 저주를 받았을까요?

진짜 사랑 같은 거 저한테는 무리일까요?

 

*

 

막 깨어난 유나는 눈뜨자마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먼저 자기가 현우의 방에서 지난밤을 보냈으며 방금까지 누워 있던 자리도 당연히 현우의 침대라는 점. 침대 왼쪽 바닥에 자리를 잡은 현우는 얇은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만 채 작고 낮은 소리로 코를 골고 있었다.

현 위치와 상황을 깨달은 것과 거의 동시에, 유나는 전날 일어난 일들을 되새길 수 있었다. 현우의 오후 수업이 끝나는 다섯시에 사회대 앞에서 만났고 정문 멕시코 음식점에서 1, 이자카야에서 2, 호프집에서 3차까지 마셨다. 이자카야에 있는 동안 기숙사 입실 마감, 소위 통금 시간이 지났다. 열한시 지났는데 어떡하지? 그때 현우에게 했던 대답을 떠올린 유나는 온몸이 간지러워져서 침대를 펑펑 두드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된 김에 밤새워 마셔보자고 의기투합해서 3차에 간 거였다. 여기서도 유나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더 알아차렸다. 그렇게 마시는 동안에, 재지도 빼지도 않고 마시는 동안에 주고받은 거의 모든 말들을, 자고 일어난 지금도 전혀 잊지 않았다는 것. 1차에서 마르가리타를 마실 때 유나는 일주일쯤 전 처음으로 현우가 자기 앞에 앉았던 날에 대해 얘기했고 현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부러 앞에 앉았는데. 2차에서 유나는 문득 자기가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곧장 그에 대해 현우에게 사과했다. 유나는 원래 말하는 쪽보다 듣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러자 현우도 사과했다, 자기가 궁금한 게 많아서 질문을 너무 많이 했다고. 유나는 약간의 충격과 함께 되물었다.

내가 궁금해요?

호프집에서는 현우가 너무 취해 유나가 부축해 데리고 나와야 했다. 2차까지 얻어먹은 보답 치고 3차 술값을 계산한 유나는 잠깐 시영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가 술 많이 먹이는 남자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런 경우에도,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보다 안 취할 경우에도 그런가. 현우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착하다 유나, 너 진짜 착해, 하고 여러 번 중얼거렸다. 유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 안 착해요. 현우는 이 말에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아냐, 너 착해!

난 착한 사람이 좋아……

원래도 필름이 완전히 끊어진 적은 없었지만, 주량의 한계에 가깝게 혹은 그 이상 마신 날에는 기억이 드문드문 흐릿한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마신 전날의 기억이 오히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도 또렷하다는 사실에 유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맑은 건 정신만이 아니기도 했다. 살면서 몇 번이나 이랬던가 싶을 만큼 개운하고 말끔한 상태였다. 달고 시원한 숙면이었고 그 잠이 저도 모르게 품고 있던 모든 독소를 깨끗이 데리고 달아나준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담배를 배운 후로는 아침이 이토록 개운한 적이 없었기에 그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어떤 직감이 가리키는 대로 유나는 갈비뼈 언저리를 더듬었다.

간이다. 간이 좋아졌나봐.

그것도 엄청.

로로마의 효과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것은 현우에 대한 마음을 더는 부인할 수도 숨길 수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 마음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세상의 어떤 독주도 유나를 완전히 취하게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물론 유나는 술을 이기려는 목적으로 현우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고 애초 현우를 좋아하여 그런 효과를 보게 될 거라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맛보게 된 극도의 상쾌에는 피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야 알겠네, 사람들이 왜 다들 로로마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유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전날 입었던 치마 대신 현우에게 빌린 연푸른색 수면 바지를 입은 다리로 침대를 벗어났다.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 맞지?

그거 정말 이상하다.

현우 앞에 쪼그리고 앉은 유나가 이 사람 자는 거 너무 귀엽다, 고 생각한 순간 현우는 잠든 상태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유나는 조금 당황했다. , 입냄새 나나? 발냄새? 아님 다른 무슨 냄새라도. 현우는 전날 자기에게서 늘 좋은 냄새가 나는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전에 사귀던 사람 때문에 후각이 극도로 발달했었다는 것. 스스로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지 않으면 자기 자신부터가 힘들어 다른 사람보다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헤어진 후에도 그 습관이 남았다는 이야기. 설마 아직도 좋아하나? 그럴 가능성에 대해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 유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유나의 눈물은 아슬아슬하게 현우의 코를 스쳐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현우가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나야, 왜 그래? 나쁜 꿈 꿨어?”

갓 깨어난 현우는 눈도 제대로 못 떴으면서, 몸을 둘둘 만 얇은 여름 이불에 팔이 엉켜 잘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허둥거리며 유나의 이름을 불렀다. 유나는 그러는 현우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현우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자다 깨서도 헷갈려하지 않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예전 사람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뭔지 몰라도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간신히 이불 속에서 벗어난 현우가 유나를 마주 안았다. 그럼 이 사람은 날 좋아해서 뭐가 좋아졌을까. 좋은 냄새가 나는 정수리에 코를 묻고 눈을 감은 채 유나는 오랫동안 궁금해했다. 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