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떤 사랑의 악마가 있어
그때는 모두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다. 차례로 뛰어내린 또래들이 바닥에서 기다리며 내 이름을 외쳤다.
“뭐해, 너도 해.”
“얼른 뛰어내려.”
바닥은 입자가 고운 흙 위에 융단 같은 이끼가 끼어 부드러웠지만, 내려다보면 캄캄하기만 해서 어디까지가 흙이고 어디부터가 이끼인지 알 수 없었다. 빨리. 너만 남았어.
뛰어내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기억은 감각보다 길게 이어진다. 되새기면 추락의 감각을 경유하는 내 귀를 긴 주문이 쓰다듬는 것 같다.
그때는
모두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뛰지 않았다. 다른 무수한 순간에 그랬던 감각과 어떤 기억이 뒤섞여 착란을 일으킬 뿐. 대신에 나는 날아올랐다. 어떤 어른이 내 겨드랑이 밑에 양손을 넣어 나를 불쑥 들어올렸던 것이다.
“너 뭐하니?”
그는 나를 아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런 후에 그는 내가 걸터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토요일 정오였고 나는 작았기에 똑바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그림자 그 자체인 것처럼 어둡고 투명했다. 등지고 선 하늘이 그의 머리를 통과해 비쳐 보이는 듯했고 부슬부슬거리는 더벅머리 언저리로 햇빛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색색으로 흩날렸다.
“위험하니 이런 놀이는 하지 마라.”
그때 나보다 먼저 뛰어내린 또래들은 어두운 벽 앞에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낮의 빛 가운데에 선 그에게는 발밑 그늘 아래 선 작은 아이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는 곧 내게서 등을 돌려 학교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걸어갔고 또래들은 농수 도랑 옆에 쌓인 흙더미를 타고 도랑벽을 기어 길 위로 올라왔다.
그런 후에는 모두 나란히 서서 처음부터 다시,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기억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년 시절 이런 기억이 있다는 사실도 나는 거의 잊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은 바다에 던진 유리병 같아서 어느 날 어떤 메시지가 해변으로 밀려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이 기억을 곱씹고 있는 것이 완전한 무작위, 단호한 무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 무의식은 지금의 나에게 이 기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억과 지금을 연결해 의미를 해독해내는 건 의식의 몫이지만.
기억력은 갑자기 좋아졌다.
암기력이 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보다 나아진 것도 엄연하지만, 새로운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능력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기억들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능력이 강해졌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것은, 바다에 띄운 유리병 편지가 해변은 물론 온 바다를 꽉 채울 만큼 허다해졌다는 말이다. 기억은 설거지통에 넣은 더러운 그릇들이 그러듯 서로를 뒤채지만, 그 낱낱마다 새겨진 선명한 그림과 글씨는 결코 물에 젖어 번지지 않는다.
그 사실이 이따금 나를 당혹시킨다.
좋은 기억력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능력이다. 가령 7 더하기 6, 6 곱하기 9, 1 더하기 11, 4 빼기 3, 8 나누기 2. 그런 일련의 문제들 끝에 기습적으로 두번째 문제와 답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나요? 물었을 때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능력, 많은 사람이 좋은 기억력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기억이라는 건 대체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자기가 쉽게 따라 하지 못할 뭔가를 목격해야만 그것이 진짜 능력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 식의 증명이라면 나에게도 쉽지 않다. 증명하려는 욕망이 있지도 않다. 나의 기억력은 무작위의 기호나 문자열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의 맥락이 서로를 어떤 식으로 견인하는지에 관해 발달했다. 대부분의 기억에는 증거가 없어서 같은 사건을 경유한 복수의 인물들이 내놓는 진술 중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내 기억력이 좋다는 것, ‘그런 식으로’ 좋다는 것은 나만이 아는 영역으로 남겨둘 수 있다.
이 사실에만큼은 작은 안도를 느낀다.
자문, 혹은 자조;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언제부터 기억력이 그렇게 좋아졌는지도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그렇다. 우선은 다른 기억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이들이 낙하산이라는 놀이를 만든 것은 그해 초여름이 몹시 가물어서였다. 원래라면 어른 복숭아뼈에서 정강이 높이의 물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어야 할 농수 도랑이 마른 바닥을 드러냈다. 우리는 주로 하굣길에 그 놀이를 했고 책가방을 멘 채로 뛰어내렸기 때문에 놀이의 이름은 낙하산이 되었다. 도랑은 일 톤 트럭 두어 대 너비의 농로와 농지 사이에 있었고, 삼십에서 오십 미터 간격으로 도랑 위에 뚜껑을 얹듯 만든 작은 다리가 있었으며, 다리 밑에는 지름 일 미터짜리 농수 터널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늘 같은 곳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았지만 매번 다리와 농수 터널이 있는 자리를 놀이터로 골랐다. 터널 옆에 쌓인 흙무더기를 디뎌야 도랑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한 살 신체검사 때 내 키는 120센티미터 남짓. 도랑 바닥을 딛고 서면 그늘에 푹 잠겨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도랑 깊이는 1.5미터가량이었을 것이다. 도랑 깊이보다는 키가 작고 터널 지름보다는 키가 크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느라 나는 자주 주춤거렸고, 뒤에 선 아이가 빨리 올라가라며 등을 떠밀 때도 많았다.
그저 뛰어내릴 뿐이었지만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놀이는 아니었다. 도랑 바닥을 덮은 것은 고운 흙이었지만 도랑은 시멘트로 건조한 것이었고, 그 폭은 일 미터가 조금 넘을 뿐이어서 뛰어내리다가 제 무게를 못 가누고 반대쪽 벽에 이마나 코를 박는, 아예 보디 블로를 해버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상체를 크게 흔들지 않고, 이를테면 커다란 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준 인형이라도 된 듯 가뿐하고 태연하게 뛰어내리는 게 규칙이었다. 규칙을 어긴다고 해서 탈락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사하게 잘 떨어지는 사람이 부러움을 사는 놀이이기는 했다. 당연히 크게 자란 아이들이 유리했는데 그런 애들은 곧 도랑벽 높이를 시시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처럼 작은 애들은 과시적으로 학교 계단 여덟 개, 아홉 개씩을 펄쩍 건너 뛰어내리는 큰 애들을 부러워하며 놀이를 계속했다. 겨우 그 정도 높이도 그때는 짜릿하게 느껴져서.
늦은 장마가 찾아왔을 무렵 낙하산 놀이는 금지되었다. 도랑에 다시 물이 차기 시작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조치였지만 그보다 분명하고 꺼림칙한 이유도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어른이 나를 안아올리며 이런 놀이는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 그것도 물론 아니다. 첫 폭우 다음날 도랑 한쪽에서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아이 모두가 그랬듯 나는 시신을 직접 보지 못했고 장례식에 가지도 않았다. 어른들이 쉬쉬하며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이후 서너 계절에 걸쳐 그게 누구의 죽음이었는지 짐작해볼 뿐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는 해도 말을 섞을 일은 별로 없었던, 오빠라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은 듯하고 아저씨라기에는 약간 어린 듯한 어떤 남자가 언젠가부터 아예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이듬해 장마가 올 즈음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섬에서도 가장 작은 동네였던 우리 마을의 유일한 비행 청소년이라 할까, 이 년을 꿇고도 고등학교 졸업을 못한 채 가출을 일삼으며 육지 건달들과 어울려 다닌다던 사람이었다. 소문을 다는 믿을 수 없겠지만 그는 촌사람치고 깡이 워낙 좋아 무리에서 제법 높은 서열이란 말이 있었고 정말 그래서일까, 마을에는 어쩌다 한번 얼굴을 비칠 뿐 대부분의 시간을 육지에서 보내는 듯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그와 딱 한 번 대화를 나누었는데, 바로 그해 봄 피아노 학원에 가던 길에 남자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때였다. 인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이 두엇 섞여 있었으니 적어도 몇몇, 또는 대부분이 십대였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열한 살짜리, 그것도 평균보다 작은 아이한테서 진지하게 뭔가를 갈취하려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
지금에야 짐작해보건대 그들은 그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말 한마디로도 압도할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한 김에, 정말로 그렇게 되는지를 확인할 뿐인, 단순한 장난.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경험적 근거도 없어서 무리에 둘러싸인 채 꼼짝 못하고 있었다.
“너 예쁘게 생겼다.”
“언니 있어? 이모나 고모는?”
“너, 공부는 좀 하냐?”
“어디 가는데? 야, 어딜 그렇게 가냐고.”
“왜 대답을 안 해. 쥐불알만한 년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시골 양아치들이나 입에 담을 법한, 물론 친절하진 않으나 그다지 악랄할 것도 못 되는 말들이었지만 그때의 내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나보다 몸집이 큰 개와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기분. 그 개의 목을 붙든 굵고 튼튼한 사슬이, 개의 도약과 함께 땅에 단단히 박힌 쇠말뚝째 스르렁 끌려나와 도리어 나를 묶고, 그래서 나는 그 큰 이빨들에 갈기갈기 찢기고 말 듯한 생각에 온몸의 피가 차게 식어버리는.
겁에 질린 나보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쟤 우리 동네 애다, 보내줘라. 애 겁먹었잖아. 병신 새끼들. 쭈그려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에야 나는 그가 마을에서 유명한 골칫덩이인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리 중 가장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나이도 제일 많아 보였다. 반원 모양으로 둘러선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수건돌리기의 술래처럼 나를 끌고 나온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길로는 다니지 마라. 알았어?”
너무 무서워서, 아까까지 나를 윽박지르던 남자들도 무서웠지만 그는 그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무서워서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고, 그게 아니면 오줌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덜덜 떠는 내 어깨를 꽉 붙들고 그는 더욱 무섭게 말했다.
“대답.”
네, 라고, 말이라기보다 실수로 몰아쉰 한숨에 가깝게 빈약한 소리로 간신히 답하고서 나는 달아났다. 땅에 붙은 채 얼어버린 듯했던 발이 움직일 수 있게 그가 날갯죽지 사이를 툭 밀어서, 바로 다음 순간부터 한참 동안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기세로 달렸다.
도랑의 시신이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마을에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렵다기보다 어색한 일이었던 것 같다. 잘 알지 못하는, 그렇지만 기억할 만했던 어떤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열다섯 살 때까지 내가 알던 사람 중 죽은 사람은 그 남자 하나뿐이었다. 죽거나 살거나 나와 크게 상관이 없었을.
생각해보면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낙하산 놀이를 하던 곳에서 비행 청소년이 죽었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좋은 농담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성립 가능한 농담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러고 보면 그 남자 현우와 닮았다.
모두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그 남자 얼굴 어디에 점이 있었는지, 눈썹의 농도가 어땠는지, 코와 턱의 길이와 폭 따위는 얼마였는지 같은 것. 다시,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중학교 3학년 때 교실 커튼 색깔이 민트색이었다는 것. 먼지 알레르기가 심한 아이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그걸 전부 뜯어갔던 것. 불현듯 떠오른 아무래도 좋을 이미지들 사이에서 그 남자는 불쑥 나타났고 잘 잊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나 신기했고, 의외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도록 겁나는 남자인 적도 있었지만 그를 굳이 계속 두려워할 이유는 이제 내게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현우와 사귀기로 한 것도 전혀 뜬금없는 일만은 아니었겠구나.
현우가 입학했을 때 나는 3학년 두번째 학기를 맞이한 참이었다. 이전 학기 휴학의 명분은 그 무렵 입원한 엄마의 건강 문제였지만 그때의 휴식은 엄마보다 나에게 더 필요한 거였다. 두 번의 연애가 모두 처참하게 끝난 후라 거의 죽고 싶었고…… 이상하지. 연애가 끝난 직후였던 그때보다 기억력이 좋아진 지금, 그 연애들을 훨씬 정확하게 회고할 수 있는데도 더는 그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는 건. 그래도 당시에는 확실하고 철저한 고통 속에서 퇴원하는 엄마를 모시고 강화에 갔다. 엄마는 내 손길이 간절할 만큼 노쇠하지 않았지만 함께 내려가겠다는 나를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열다섯 살 때 이후로 처음 돌아가는 고향이었다. 고향이라는 낱말의 예스럽달지 촌스러운 정취가 나이에 맞지 않는 듯해 조금 간지러웠다.
떠날 무렵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던 놀이가 생각난다. 아파치라는 게임. 룰을 따지자면 낙하산 놀이보다도 단순하고 난폭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뤄 어깨와 팔을 감싸는 둥글고 큰 근육 덩어리를 서로 번갈아가며 주먹으로 때리는 게 다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펀치를 날릴 때 아파치! 라는 구호를 넣어야 한다는 게 유일한 주의 사항. 여자애들이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짝지어 서서 서로의 어깨를 빵빵 때렸다. 아파치. 아파치. 먼저 그만두자고 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어깨로 매운 걸 먹은 것처럼 가는 숨을 습습 삼키면서도.
어느 날은 반에서 가장 주먹이 센 남자애와 통통하고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애가 맞붙었다. 말이 안 되는 매치였다. 아파치는 약식 결투라고 할까, 결국엔 누가 더 싸움에 소질이 있을지를 가늠하는 놀이라서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하는 게 보통이었다. 애초에 서열이 낮은 남자애들은 하지 않는 놀이이기도 했다. 누가 더 강한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건 싸움에 자신이 있는 남자애들이나 품을 법한 욕망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내가 누구보다 약한지를 굳이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일방적이고 끝이 뻔한 싸움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주목을 받았다. 힘의 차이가 자명한 폭력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게임이었기 때문일까. 아파치를 자주 하는 남자애들은 물론 평소라면 혀를 차거나 미간을 구긴 채 고개를 돌렸을 여자애들까지 홀린 듯 그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한별, 넌 끝까지 봐야 돼.”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주먹을 쥔 남자애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봐야 된다고. 왜? 이 새끼가 너 좋아한대. 너 덕분에 맷집이 늘었대. 그래서 나는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구경꾼들의 눈은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 끔찍하다. 무엇이; 수준 차이가 뚜렷한 폭력 자체는 물론 그것이 성립된 이유가 그런 어이없는 것이란 사실까지. 내 이름을 부른 남자애가 아파치, 라고 할 때는 뻑 소리가 났고 통통한 남자애의 주먹이 상대의 어깨에 부딪칠 땐 찹 소리가 났다. 냉장고에 고무 자석을 붙일 때 나는 소리 같았다. 통통한 남자애는 울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 콧물을 찔끔찔끔 쏟으며 아픈 어깨를 감싸쥔 채 일부러 살살 때리나 싶을 만큼 느리게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그애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전혀 맷집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착각한 걸지도 모르지, 좋아진 건 통증을 견디는 신체적 역량이 아니라 오기나 끈기 같은 정신적 역량일지도. 어쩌면 그보다도, 나를 좋아한다는 것부터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왜 그런 거짓말을? 그게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저 남자애는 나를 좋아한다는 애를 왜 패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건 통통한 남자애가 아니라 걔한테 싸움을 건 남자애 쪽이 아닐까?
생각이 그에 이르자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고 금세 다시 끔찍해졌다. 통통한 남자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라 믿고 싶어하면서, 걔보다 훨씬 센 남자애가 나를 좋아할 가능성을 떠올리며 그리 나쁘지 않다 여기는 게 마치, 거의, 반인륜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제발 항복해. 이제 못하겠다고 해. 나는 통통한 남자애가 게임을 중단해주길 바랐지만 남자애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기나 끈기 같은 게 강해졌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 얼마간 맞은 모양이었다. 그쯤 되어서는 쉬는 시간이라도 제발 빨리 끝나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는데 종이 울리기 전에 담임선생님이 왔다. 너희 지금 뭐하니? 얼빠진 표정으로 선생님은 물었고 뉘앙스로 미루어 싸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은 아닌 듯했다. 너희는 이따 교무실에서 좀 보자. 그리고,
“한별아. 가방 싸서 나올래?”
그게 아빠가 죽은 날의 기억이다.
겨울방학을 조금 앞둔 시기였기에 장례식 후에도 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이듬해부터는 서울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학교도 그쪽으로 옮겼다. 그날 아파치 게임을 하던 남자애 중 누가 나를 좋아했는지, 강한 쪽인지 약한 쪽인지 둘 다인지 둘 다 아닌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하물며 섬에 혼자 남은 엄마에 대해서도 나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텐데 이마저도. 내가 그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겨우 열다섯 살이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그건 엄마와 나 공동의 상실이었는데 나는 엄마보다 훨씬 어리지 않았느냐고. 워낙에 엄마를 믿는 마음이 굳건하기도 했다. 나를 낳고 기른 부부 중 강인한 쪽은 엄마, 유약한 쪽은 아빠였으니까. 항상 그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유족이 비슷한 방식의 죽음을 시도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어쩌면 나는, 엄마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종종 생각했다, 엄마도 잃을 뻔한 위기를 지나왔는지도 몰라. 모르는 사이에. 잠든 엄마는 아, 하, 아, 하 소리를 규칙적으로 냈다. 날숨이 아, 들숨이 하. 엄마도 내가 그럴까봐 걱정했을까. 그럴까봐 외할머니에게 나를 맡겼을까. 아니면 자기까지 떠난 후에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까봐 그랬을까. 그러니까, 엄마에게도 그럴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닌 게 아닌가…… 일련의 생각들은 묘한 위로의 감각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엄마는 살아 있고, 엄마가 겪은 일, 배우자와의 사별에 비하면 두 번의 관계 파탄 정도는 그야말로 소꿉놀이 같은 거였으니까.
복학할 무렵에는 이제 연애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친구들은 잘 생각했다고들 했다. 만나봤자 또 그따위 남자일 바엔 수절하는 게 낫겠다며. 내가 대학에서 처음 사귄 남자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긴 수험 생활 끝에 군대까지 갔다 온 다음에야 입학한 그에게는 과에서 공인된 별명이 있었다. 만학도. 그와 사귄다는 것을 알리자 동기들은 예의상 말을 아끼려거나 조심하는 기색도 없이 탄식했다. 한별이는 다 괜찮은데 남자 보는 눈이 너무 구리다. 그저 나이가 많을 뿐이고 학번은 삼 년밖에 차이 안 나는데 이만하면 평범한 CC 아닌가 생각하는 한편, 열아홉 살 때 만나던 남자도 스물여덟 살이었다는 건 계속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지. 또래 남자한텐 마음이 잘 안 가는 걸 어떡해. 미안하지만 다 애새끼 같달까. 그런 내 말을 듣고 있던 동기 대부분 그런 애새끼들과 사귀고 있다는 걸 나는 조금 뒤늦게 떠올렸다. 그 말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한 친구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너 지금은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정도나 눈에 들어오지. 그런데 네가 나이 먹고 나서는 어떨 것 같아? 그때 가서도 열 살 정도는 많아야 남자로 보이면. 그러다 유부남 만나면? 위자료 수천 뜯기고 에타 블라 네이트판에 이름 빼고 다 올라가는 거야. 그럼 답 없는 거야. 개명하고 이민 가야 돼.”
“뭐야, 그 구체적인 저주는?”
“저주가 아니고 미친아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란 말이잖아.”
어쩌겠어, 대디 이슈인걸. 나는 동기들이 더는 참견하지 못하게 그런 말을 해버렸다. 동기 중에 이혼 가정 자녀는 드물지 않았지만 아예 아빠가 없는 애는 나뿐이었다. 아빠를 겨우 그런 핑계로 써먹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아빠에게 이죽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억울하면 죽지를 마시든가. 하지만 내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끌리는 게 단지 아빠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굳이 따지자면 농수 도랑에서 익사한 남자, 현우와 닮은 그 남자의 책임이 컸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하던가, 두려움과 설렘을 구별하기 어려운 떨림의 상태. 그 남자를 목격할 때마다 나는 그가 나를 짓뭉개버릴 것 같다고 느끼곤 했는데, 연애 감정을 모르고 성애적 상상력도 없었던 어린 내게는 그 긴박감이 천적 앞에 놓인 피식자의 감각에 가장 가까웠던 것 같다. 꼭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착각될 만큼이나 강렬하게 나는 그가 나를 망가뜨릴 거라 예감했던 거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삼켜지기 직전에야 알아차린 개구리처럼.
생김새가 닮았을 뿐 현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았다. 표정이 적어서 무심해 보이는 겉보기와 다르게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주저 없이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해왔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부담스럽게 따라다니지 않는 건 괜찮게 느껴졌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고 몇 달 흘려보내며 이쯤이면 포기했겠거니, 생각할 무렵 현우는 재차 말했다.
“누나, 누나도 나 좋아해달라고는 안 할게요. 나는 그냥 누나가,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잊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요.”
스무 살치고는 의젓하구나 싶었고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쓴웃음이 나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재고 따진 끝에 못 만날 것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기들의 충고에 따르면 하루빨리 취향을 고치지 않는 이상 망할 수밖에 없는 신세인 내게, 마침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나보다 어린 남자애가 나타났고, 천만다행으로 걔는 또래보다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한 상황. 내게는 과분한 호재라고 볼 일이었다.
사귈까 말까 고민이 된다고 말했더니 한 동기가 일침을 놨다. 야, 겨우 세 살 차이로 그렇게 유난 떠는 사람 없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현우는 세 살이 아니라 열한 살, 혹은 그보다 더 어렸다. 내가 연애 상대로 선호하는 연령과 비교하면. 그럼에도 나는 결국 현우를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그때는 나로서도 왜 현우만은 괜찮은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와 사귀는 게 이로운 일일 거라는 판단이 현우의 어린 나이를 상쇄해주는 건 아닌데도, 어째서 현우만은. 나는 내가 현우에게서 나 자신의 어떤 면면들을 발견한 거라 생각했다. 이전 연애들에서는 매번 내가 어리고 뭘 모르는 쪽이었으니까. 스무 살; 과에서 이름보다 만학도의 여자친구인 것이 먼저 알려진. 열아홉 살; 뭘 모르는 남자애들이 아니라 번듯한 어른과 사귄다는 걸 혼자 뿌듯해하던. 농수로에 빠져 죽은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나를 오해했을 것이다. 얼마나 교만한 믿음이었나. 나에게서 사랑을 구하는 사람을 내가 이해했다는 착각은.
현우와 사귄다는 사실을 공표하자 동기들은 매우 기뻐했다. 졸업을 목전에 둔, 그러니까 수십 명에 이르는 동기 가운데 한 사람의 새로운 연애 소식보다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었을 그들이 그렇게까지 달가워하는 게 나는 조금 쑥스러웠는데, 내가 현우와의 관계를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피차 공공연하게 여기면서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졸업까지는내겐 두 학기가 남아 있었고 현우는 미필이었다. 우리는 활동 기간이 일 년으로 정해진 회원 두 명짜리 동호회 같은 것. 누가 봐도 그랬겠지만 내가 보기에 특히 그랬다.
만일 현우가 두 학기 동안 남자친구 역할을 잘 해낸다면 수료증 같은 거라도 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현우가 남자친구였지만 정작 나 자신은 현우의 선생님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적어도 내 의식 속에서는. 물론 내가 생각한 수료증이 동정을 떼준다는 말의 은유 같은 건 아니었다. 섹스라면 진작에 해치웠고 이 연애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 예상했던 두 학기를 모두 마친 후에도 들지 않았다. 현우와의 연애는 속속들이 즐거웠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해보는 게 처음이어서 가끔 무섭다는 고백을 듣는 게, 키스 정도는 고등학생 때도 해봤다고 하더니 누나랑 사귈 줄 알았다면 첫 키스도 참을걸 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 보는 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어서 에나멜 구두코처럼 팽팽하게 빛나는 연분홍색 귀두를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게. 이전 애인들은 나를 보며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어떤 충족감에 이르는 순간마다 나는 그 앞에 멈춰 서서 나를 지나간 스물여덟 살의 남자들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도 그랬겠지. 나보다 미숙한 상대와 사귀며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는 연애에는 분명 뜻밖의 즐거움이 있었다. 이 관계를 승인하기 전에는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한편 나는 내가 현우를 좋아해, 대신에 현우랑 사귀는 게 즐거워, 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좋다와 즐겁다의 미묘한 다름. 막연한 좋음이 구체적인 즐거움보다 힘이 센 감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현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현우가 아니라 현우 같은 사람과 사귀는 일이라서, 그러니까 내게는 꼭 현우가 아니었어도 되는 연애라서. 이 또한 나의 이전 연애 상대들이 나를 보며 했을 법한 생각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괴로워졌다. 결국은 현우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예전의 나를 가엾어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걸 전부 내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굳이 현우가 아니어도 괜찮은 나를, 굳이 만나고 싶어한 사람은 현우인데. 먼저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더 이기적인 쪽이라고 나는 항상 믿어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의 그림자에는 당신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도사려 있으니까. 고백은 배타적인 지목이다. 나는 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사랑을 원한다는 의미가 담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상대와 그의 여러 속성 중 몇 가지를 선택적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나, 둘 중 정말 이기적인 사람은 과연 나일까? 이상적인 연애 상대에게서 사랑받고 싶어하면서도 자기가 상대에게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을 계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가령 나는 현우가 고등학생 때부터 피워왔다는 담배를 갑자기 끊은 게 싫었다. 몸과 옷과 방 깊숙이 밴 담배 냄새는 나보다 어린 현우에게서 본래의 내 취향을 떠올리게 하는 몇 안 되는 특징이었으니까. 현우는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원래 담배 냄새를 싫어하니 나도 분명 자기가 담배를 끊은 걸 기뻐할 거라고 멋대로 믿었다. 아니, 난 네 담배 냄새 좋아했어.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 섭섭함을 표 내지 않으려 애쓰는 나와 달리 현우는 멋쩍고 씁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누나가 좋아했다니까 나도 좀 아깝지만, 내가 내 냄새가 싫어져서 안 되겠어요. 코가 너무 예민해져서요.
사귀기 시작할 무렵부터 현우는 그랬다. 내가 나타났다는 것을 먼발치에서부터 알았다. 그 점은 조금 재미있어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기다리는 현우에게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멈춰 현우가 내게 다가오길 기다리곤 했다. 훈련된 경찰견들이 그러듯 현우는 두리번거리면서도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내가 있는 곳까지 정확히 찾아왔다.
“누나, 난 누나가 다 좋은데 그중에서 냄새가 제일 좋아요. 사귀기 전에는 이런 냄새라는 거 몰랐는데도.”
이런 식이다. 길가에서 현우가 나를 발견해내길 기다리던 순간들, 현우의 방에서 묵거나 현우가 내 방에 다녀간 날들, 도서관에서 현우는 졸고 나는 졸업논문을 쓸 때,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낼 때 현우가 짓던 풀죽은 표정, 함께 먹고 마신 모든 것의 맛과 질감과 둘이 나눈 대화 모두를 나는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고 그건 현우가 내게 건 저주처럼 느껴졌다. 누나, 좋아해달라고는 안 할게요.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잊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내 기억력이 이렇게 좋아진 것은 현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현우와 사귀면서 눈에 띄는 변화를 겪지 못했다. 사랑하면 으레 뭔가가 좋아진다는 것이 상식인지라, 현우는 내가 그대로라는 것을 내내 서운해했지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별다르게 건넬 만한 위로가 없었다.
드물지만 이런 사례가 있긴 있대, 로로마 반응성이 낮은 경우가.
그건 알려진 그대로의 말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내가 현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현우와 헤어질 것도 아니어서 내 어깨와 목 사이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며 행복해하는 현우, 그것으로 내 몫은 치렀으니 그애도 내게 안정적인 애정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우에게서 받는 사랑이 내게 정말 필요했는지를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지만, 당장은 쓸 일이 없는 외화도 돈이라 여기는 것처럼 나는 그걸 꼭 쥐고 있고 싶었다. 뚜렷한 이유는 떠올리지 못하면서도 아무튼 힘껏.
이렇다보니 나나 현우가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관계가 꽤 견실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몹시 깊은 것은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현우보다 내 마음이 더 큰 것으로 해석될 만한 근거도 적지 않았다. 현우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고 다음 계절에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런 상황이라 해서 헤어질 이유는 딱히 없는 것 같아 헤어지지 않았더니 동기들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너 아직도 걔 만나? 슬슬 진지한 관계도 생각해야지. 이전 연애에서도 그랬듯 나는 그 우려들을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언제는 늙은 남자 그만 만나라더니 또 시작. 적당한 남자라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그런 정도의 감상. 현우가 곁에 없다는 사실 자체에도 큰 유감을 느끼지 않는 내가 동기들의 오지랖에 별나게 반응할 이유가 있었을까. 나는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홀가분하다고 느꼈다. 현우가 있을 동안 좋게 느낀 감정의 폭, 딱 그만큼.
지나고 나서는 사소한 일 같아서 잊고 있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아주 구체적인 기억들, 그 첫번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열아홉 살 때 좋아하던 사람이 내 이름을 놀리던 기억. 너네 부모님 아마 NL이었을 거야. 한별, 한자로 바꾸면 일성이잖아. 그의 방 형광등은 오래 켜두면 어느 시점부터 빠르게 껐다 켰다 하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점멸하곤 했는데 바로 그때도 그랬다. 아, 한별이는 아직 어려서 NL이 뭔지 모르겠네? 짓궂게 웃으며 묻는 그 남자의 머리 위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하던 기억.
그걸 떠올린 건 내가 조교로 들어갈 강의의 교수와 처음 인사를 나누던 때였다.
“제 이름에도 별이 들어가요. 한유성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순간에는 그 대화를 그리 특별하게 느끼지 않았다. 나는 문득 떠오른 첫 남자친구와 한유성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했고, 그래서 상대가 건넨 인사말에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했다. 저도 알아요, 교수님 성함 정도는. 이건 조금 부적절한가.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면 됐겠다는 생각은 짧은 악수 후 허공에 민망하게 멈춰 있는 내 손을 볼 때에야 들었다.
안 그래도 한유성은 과 안팎으로 소문이 자자한 교수였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나이라는 건 대단히 많은 정보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징표고, 한유성의 나이; 35세는 빼어난 자질과 탄탄한 연구 실적과 필드 내에서의 인망과 명성 등을 두루 암시하는 숫자였다. 임용은 이제 이 년 차였지만 이미 단과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손꼽혔고, 우리 단과대 소속이 아닌 학생이라도 한유성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거였다. 비슷한 시기에 석사과정을 시작한 동기들은 입을 모아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여느 나이든 교수들이 아니라, 깐깐하다못해 괴팍해서 제자가 자기 연구실 책을 훔쳐 내다팔고 있다는 누명을 씌우는 교수나, 조교에게 자기 실내화와 운전할 때 신을 드라이빙 슈즈를 따로 챙겨 다니게 한다는 그런 악명 높은 교수가 아니라 한유성 수업의 조교가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젊은 나이가 언제나 정치적, 윤리적 감수성의 날카로움을 보증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유성의 경우에는 그랬다. 사려 깊고 정중하고 성실한, 너무 빈틈이 없어서 가까워질 계기를 엿보기 힘든 게 되레 흠이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대학원 첫 학기 개강 즈음은 현우가 막 자대 배치를 받을 무렵이기도 해서 늦은 저녁마다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통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한유성 칭찬만 들었노라 현우가 섭섭해한 날도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서는 우리가 또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현우의 고단한 일과 들어주기? 끝이 안 보이는 군 생활의 막막함에 대해 토론하기? 나와 현우가 처한 상황에 대해 더 적나라하게 질릴 만한 화제는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내 기억력이 앞으로 얼마나 좋아질지를 아직 몰랐기 때문에 나는 현우에게 계속 한유성 얘기만 했다. 나는 네가 나이들면 그런 아저씨가 되면 좋겠어,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훗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한유성의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날에도 나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현우와 나는 한유성과 그의 아내처럼 될 수도 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한유성을 알지 못했다면. 기억이라는 사물을 취급할 때의 주의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어날 당시에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던 사건이 이후의 또다른 사건과 교차하며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현우가 한유성처럼 나이들면 좋겠다고 말할 때의 내게는 어떤 악의도 저의도 없었다. 현우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한유성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