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어떤 사랑의 악마가 있어―(2/2)

한별, 지도교수로 염두에 둔 분이 있나요?”

한유성은 어느 학생에게나 경어를 사용했지만 이름에는 어떤 존칭도 붙이지 않았다. 외국어를 직역한 것처럼 들려 조금 특이한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아뇨, 지도교수 콘택트 생각하긴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늦어도 3학기 시작 전에만 정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 아직 제…… 주제도 잘 모르겠고. 나는 한유성이 나를 시원찮은 학생으로 볼까봐 걱정하면서도 실수에 변명하듯 웅얼웅얼 답했다.

달리 생각해둔 분이 없다면 나하고 하는 게 어떨까요.”

그 말을 들은 건 1학기 종강 무렵이었고 학기가 바뀌면 내가 보조할 수업도, 교수도 달라질 것이어서 나도 약간 불안해하던 시기였다. 한유성이 먼저 그렇게 말해온 것이 조금 기뻤고 꽤 의아했다. 강의 조교는 명칭 그대로 강의의 보조 역할일 뿐이어서 담당하는 교수와의 접촉면이 예상한 것보다 더 좁았고, 한유성은 스스로 수업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어서 시험 기간 외에는 내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한유성이 나를 제자로 삼고 싶어할 만한 장점을, 나는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한유성은 멋쩍어하며 웃었다.

지도교수는 보통 경력이 긴 분을 선호하긴 해요. 학계에서 누구누구 제자다, 이름만 들어도 아! 알아요, 할 만한 분이 좋죠, 아무래도. 그래서 그런지 저는 논문 지도가 아직이거든요. 마음 정한 분이 없다면 저도 한번 고려해줬으면 해요. 관심 분야가 전혀 다르다면 문제가 좀 되겠지만, 웬만한 주제는 제가 커버할 수 있고, 주제 단계부터 같이 모색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이건 프러포즈인가, 일종의. 그때까지만 해도 별 감정이 없었던 나는 그 제안이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한유성을 좋게 보는 것과 한유성을 좋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서. 전공 분야에 지대한 학구열이 있어서라기보다 사회 진출을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나에게는 몹시 감사한 제안이었다. 사양할 이유를 딱히 떠올리기 어려운.

종강과 맞물리게 휴가를 얻어 나온 현우를 외면한 채 한유성의 초대에 응한 건 그래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유성이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니 그에 걸맞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속 장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와인 바였다. 우리 학교 근처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가게가 다 있었나 싶게 분위기가 근사했다. 교수들은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구나. 나보다 어린 현우와는 물론이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과 만나던 때에도 그런 가게엔 가본 적 없었다. 혹시 한유성이 내게 추파라도 던지려는 것이 아닌지를 지레 의심하게 되었다.

물론 그게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한별, 이쪽이에요!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한유성 곁에는 대학원생이 다섯 명이나 앉아 있었으니까. 여자 넷 남자 하나, 그중 셋은 내 동기. 이게 다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너까지 여길 왔느냐는 눈총이 따가웠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다면 그냥 현우랑 만날걸 그랬다. 한유성도 웃기네, 이 많은 애들을 다 꼬셔놓고 나한테까지 오라고 한 건가?

처음에는 알게 모르게 서로 재고 견제하는 분위기였지만 와인이 몇 병 비어가는 사이 대화가 점차 활기를 띠었다. 물론 그 중추는 줄곧 한유성에게 기울어 있었다. 결혼하셨어요? 사모님하곤 어떻게 만나셨어요? 저도 교수님처럼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어학은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독일은 와인보다 맥주 아니에요? 다음에는 맥주 어떠세요? 학교에서 좀 거리는 있는데, 정통 수제맥주 취급하는 곳을 제가 알아요…… 쏟아지는 질문에 쑥스러워하면서도 한유성은 차근차근 답변했다. 마침내 모두가 더는 참신한 화제를 떠올리지 못해 다시 서로 눈치를 보게 될 때까지.

말이 드문드문 끊어지기 시작하자 한유성은 무심히 손목시계를 봤다. 그 순간에는 나를 비롯한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한유성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타교 학부 출신 남학생이 술 게임을 제안했다. 보통 게임을 하나요, 와인 마시면서도? 한 학생이 웃으며 핀잔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술 게임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듯했다. 곧 온갖 술 게임 제목이 튀어나왔다. 잠깐만요, 나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난장판에 끼어들었다. 교수님은 해외파셔서 잘 모르시잖아요. 세대가 다르기도 하고. 동기 여자애들이 왜 산통을 깨냐는 듯 입술을 비죽거렸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거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을 떠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승부욕을 자극당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남자는 세상에 없어서.

여러분보다 제가 더 많이 해봤을 수도 있죠. 아주 최신 게임만 아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나는 한유성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한유성이라도 결국 남자라고,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때는 꽤 취한 상태였기에 그 생각이 극단적이라 느끼지 못했다. 적당히 점잔을 빼던 한유성을 게임판에 끌어들인 내 수완이 자랑스러워 동기 여자애들에게 윙크를 날리기나 했다. , 그럼 혹시, 하며 자기가 아는 술 게임 종류를 나열하려는 남학생을 부드럽게 말리며 한유성이 다시 말했다.

마침 와인 마시면서 하기에 괜찮은 게임을 알아요. 독일에서 배운 건데, 제국주의라는 게임.”

몇몇이 동시에 예? 하고 되물은 후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게임의 정확한 이름은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줄여서 제국주의’. 먼저 한 사람이 인물, 사물, 주의나 사상이나 이론, 뭐든 좋으니 어떤 이름을 댄다. 예를 들어 와인’. 그러면서 또다른 한 사람을 지목한다. 지목된 사람은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응수해야 한다. 물론, ‘왜냐하면다음에는 정말로 그것이 어떻게 제국주의와 연루되는지를 말해야 한다. 지목한 사람도 지목된 사람도 아닌 갤러리들은 왜냐하면이후에 나온 사유가 타당한지를 평가하는 배심원의 역할을 맡는다. 지목되어 왜냐하면을 말한 사람은 다수의 판단에 따라 술을 마시거나 술 마시기를 면하거나, ‘왜냐하면말하기를 거부하고 처음부터 술을 마실 수도 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지목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목할 권리를 얻는다.

그럼 한번 해볼까요, 연습 삼아서 와인’, 그대로.”

맨 처음으로 지목된 사람은 동기 여자애 중 하나였다. 와인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왜냐하면, …… 대규모 농업으로 발생한 잉여 농작물이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잘했어요. 한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번째 차례에 처음으로 지목되었다. 세탁기,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왜냐하면 가사노동의 빠른 순환을 유도하여 생산성 증대를 강제하므로.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한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접근은 나쁘지 않지만 제국주의랑은 조금 거리가 있네요. 나는 게임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벌주를 마신 사람이 되었다. 오기가 생겨서 한유성을 지목했다. 제시어는 사랑’.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한유성은 진지하게 답변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뭐예요 교수님, 참나. 모두 웃었고 게임은 계속 이어졌다. 결투, 플라스틱, 온돌, 동물원, 권태, 코미디언, 태피스트리, 감자, 봉산탈춤, 제비뽑기 그리고

분신자살.

나는 갑자기 울었다. 마지막 제시어를 입에 올린 사람이 나의 가족사를, 정확히 아빠의 사인을 알고 일부러 나를 동요시키려고 그 말을 꺼냈을 리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항력으로. 죄송해요. , 죄송해요. 빠르게 두어 번 사과한 다음 내가 왜 사과했는지 모르겠다는 억울함에 휩싸여 입을 다물었다. 눈물은 금세 그쳤지만 곧 구역감이 올라왔다. 변기를 붙들고 몸싸움을 벌이다 입을 헹구고 돌아왔더니 일행 모두 계산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기 하나가 들고 있던 내 가방을 건넸다. 폰은 가방에 넣어놨어. 너 전화 계속 오더라. 나는 가방을 얌전히 어깨에 걸었다.

새벽 한시를 막 넘긴 때였다. 모두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한유성은 학생들이 먼저 택시에 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택시가 한 대 잡힐 때마다 무의미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한유성이 번번이 이겼다. 가까운 동네에 사는 사람끼리 둘씩 짝지어 타기도 해서 택시 세 대를 보내자 나와 한유성만 남았다. 정수리 꼭대기까지 찬 듯 느껴지던 술기운이 썰물처럼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곤 해도 혀뿌리 아래까진 수위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렇게 술이 깬 건 긴장해서였다. 왜 긴장이 됐을까, 한유성이 나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봐? 결국 둘만 남은 상황이 한유성의 교묘한 계략에 의한 것일까봐? 조금 전까지는 연달아 두 대가 서기도 하던 택시가 이후로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것마저 긴장됐다.

한별,”

문득 한유성이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찌푸린 눈으로, 일부러는 아니고 취해서 뿌예진 시야를 보정하느라 어쩔 수 없이 구겨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명하지 말아요.”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일단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진 후에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한유성은 아무 연민도 어떤 경멸도 없는 표정으로 재차, 마치 내가 아니라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말했다.

괜찮으니까.”

울면서도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뒤를 가리켰다. 택시가 오고 있었다.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해 지금과 같이 된 것은 바로 이날부터였다. 정확히 어떤 순간 시작되었는지를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내가 한유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것이다. 택시 뒷좌석에 오른 나는 곧 울음을 그쳤다. 아까는 한유성이 내가 우는 걸 보아주길 바랐단 듯이, 이제 그가 안 보니까 그만 울어도 되겠다고 느낀 듯이. 나로서는 일부러 눈물을 짜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기복이었다. 가방을 뒤져 휴대전화를 찾아냈지만 부재중 전화 세 통을 남긴 현우에게 콜백을 하지 않고 가만히 쥐고만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사랑을 제국주의의 발명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농수 도랑에 빠져 죽은 남자의 얼굴을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린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제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은 후회; 처음부터 한유성을 충분히 경계하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다. 내가 매력을 느끼기 쉬운 연령대인 만큼 주의가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그렇지만 무심코 좋아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는 곧 좋아하게 될 거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성격이 있지 않은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라 생각해야 했다. 미치지 않으려면. 어쩌면 나는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최대한 지연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모르는 사이에 지금보다 더한 참혹을 피해왔을지도.

꼭 나만 나쁘거나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고 느끼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한유성을 지도교수로 선택한 사람은 모두 크든 작든 그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기 때문에. 각자가 한유성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경쟁이 치열했던 와인 바 모임에서부터 그건 확실해 보였지만 이후에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파상-애정 공세가 이어졌다. 수업마다 강단에 성묘상 차리듯 음료와 간식을 올려둔다든지 특별한 용건도 없으면서 커피 챗과 식사 면담을 줄기차게 요청한다든지. 물론 그 정도야 교수들에게는 예사로울 법했지만, 한유성의 인기와 다른 교수들의 인기에는 분명한 질적 차이가 있었다. 가령 다른 교수들이 학교 앞 가성비 카페의 대용량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얻어 마실 때 한유성은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커피 명가의 스페셜티 블렌드를 조공받는 식. 맛과 향이 다른 건 당연하고, 수업 십 분 전 픽업 주문을 해서 자가용으로 직접 공수해와야 하는 정성에는 더욱 확연한 차이가 있는.

막상 한유성은 자기가 그런 식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눈치챘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것이다. 한번은 수업 시작 전 경고 아닌 경고를 남긴 적도 있었다. 특정인의 호의가 정도 이상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작은 성의도 사양할 수밖에 없어진다고. 항상 고맙지만 이미 다소 과분하니 더는 부담 주지 않길 바란다며…… 늘 마시던 스페셜티 커피를 손에 들고 그렇게 말하는 한유성의 무구함에 나는 조금 웃을 뻔했다. 뭔가 알긴 아는데 다는 모르시는구나. 누군가 한유성에게 고가의 트렌치코트를 선물하려 했다는 게 알려진 건 그 다음주였다. 물론 한유성은 거절했으나 가십거리가 되기 딱 좋은 사건이어서 학부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소문의 당사자가 그 옷을 환불하지 않고 직접 입고 다니는 바람에 과가 아예 한바탕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나는 문제의 학생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한유성을 둘러싼 호감들, 학생이 교수에게 응당 표할 만한 가벼운 성의 아래에는 각자의 질척거리는 애정이 세련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코트는 애정보다 조바심의 크기를 더 잘 나타내는 선물이었다. 누가 누가 티 안 내고 능숙하게 잘 좋아하는지를 두고 벌이는 아주 미세하고 조밀한 영역 다툼에, 자기는 이제 지쳤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절당하는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적어도 속은 후련했으리라 짐작할 만했다.

당연히 이해만 한 건 아니고 원망도 했다. 그 일에 한유성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고 그 학생 역시 결과적으로는 제 돈 주고 제 옷 산 셈이었지만 그 때문에 생긴 구설은 없었던 일처럼 깔끔하게 닦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민폐 아닌가. 제 충동의 결과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생각했어야지. 오히려 한유성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끼치지 못할 해를, 그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훨씬 치명적으로 입힐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마음먹었다. 이전부터 그래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해오기는 했지만 이 일로 더욱 결연해진바, 적어도 나만은 한유성을 끝까지 혼자서 속으로 취미로만 좋아하기로. 이미 생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게. 나에게는 물론 현우에게, 누구보다도 한유성에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리고, 어째서?

기억은 인식이다. 인식은 인간의 뇌라는 저장 공간에 기록되는 정보의 단위이며, 인간의 뇌는 저장 매체로서의 안정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인식; 기억의 질은 일정하지 않다. 기억은 사건이 아니고 하물며 체험조차 아니며 그것들이 드리운 한 사람 몫의 그림자에 가깝다.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정교하게 복원된 기억도 인식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포섭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상상하고 추론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기억의 불완전함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한유성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확히 진단받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치명적인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하듯이. 이에 나는 한유성이 있는 기억들을 집요하게 재탐색한다. 그의 말투, 표정, 음성, 체취, 제스처, 옷차림, 취향, 농담, 그 밖의 모든 것들. 무엇이 사랑의 단초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기억들을 되새기고 되새길 때마다 오로지 사랑만은 또렷해진다.

설명하지 말아요. 괜찮으니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나를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가.

나는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아서, 물론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망쳤는지에 대해서도 전부 기억한다.

곧 상병으로 진급한다는 현우의 말에 이쪽도 곧 학술제가 열린다고 답했다. 노래방 마이크 주고받듯, 상대가 듣든 말든 일단 차례가 돌아오면 자기 레퍼토리를 쏟아내는 방식의 통화였다. 현우는 자기 부대의 진급 방식이 일반적인 육군 부대들과 어디가 비슷하고 어떻게 특이한지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고 당연히 그런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던 나는 학술제 주제와 행사 기간과 프로그램 세부에 대해 떠들었다. 한참을 그러다 현우가 먼저 조금 빈정 상한 투로 말했다. 알았어, 잘해요 누나.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 거기서 뭐 하는 거 없는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발표는, 그러니까 학술제 리플릿에 이름이 들어가는 일은 교수나 박사과정생들이 할 테지만 그 나머지, 이를테면 강의실과 중강당에 세미나와 심포지엄 테이블을 배치하고 행사장 앞에서 리플릿과 명찰을 나눠주거나 질의응답 시간에 마이크를 들고 왔다갔다하는 등의 허드렛일은 나와 같은 대학원 저학년생들이 나누어 맡게 될 터라서.

때문에 학술제 무렵에는 한유성도 나도, 다른 대학원생들도 조금씩 더 분주해졌다. 학술제에서 나눠줄 소책자에 들어갈 원고를 완성한 한유성은 다소의 여유를 되찾았고 책자와 명찰 제작 등을 맡은 출판팀도 마감 후에는 약간 한가해졌지만, 나와 같이 진행 스태프로 배정된 학생들은 학술제 개회 전날부터 폐회 직후까지가 가장 바쁠 예정이었다. 한유성은 학술제에서 가장 큰 프로그램인 주제 포럼에서 다른 학교 교수 두 명과 함께 공개 토론형 발표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한유성이 우리 학교, 우리 과 교수진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내게는 주제 포럼이 열릴 중강당 스태프로 내가 배치된 게 좀더 의미심장해졌다. 한유성이 잘나서 잘나가는 거야 당연하고, 그래서 추종자가 더 늘어버린다 해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데, 한유성의 시야 내에 있어야 할 당위가 생긴 건 분명한 행운으로 느껴져서.

한별, 중강당에 잠깐 와볼래요? 여기 문제가 조금 있네요.”

한유성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건 학술제 전날 오후 세시쯤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응당 스태프인 내가 확인해야 할 일이라 곧장 호출에 응했다. 그 짧은 대화에도 일렁거리는 사심을 누르면서.

중강당은 자연광이 조금도 들지 않아 어두웠다. 어떻게 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핀 조명 하나가 무대 위의 그랜드피아노를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때문에 한유성이 말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쯤은 중강당 문을 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행사 당일 아침에 부랴부랴 치우기엔 너무 무겁고 존재감이 큰 물건이었다. 나는 단차가 있는 중강당 좌석 사이를 천천히 걸어 무대로 내려갔다. 한유성이 느리고 신중한 손길로 건반을 더듬고 있었다. 분명 어디에선가 들어보았지만 제목을 알지는 못하는 어떤 곡을, 슬프지만 따뜻하고 격정 없이 관능적인 연주를 들으며 나는, 가라앉아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돌덩이처럼 한유성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등뒤에 설 때까지도 한유성은 연주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고 피아노 뚜껑을 세게 눌러 그의 손을 으스러뜨릴 수도 있었다. 핀 조명이 백건에 드리운 내 그림자를 보고 그가 나를 향해 돌아앉기 직전까지의 짧은 사이에, 나는 내가 그에게 저지를 수 있는 무수한 나쁜 일을 상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돌아보았을 때 그중 한 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애인이 있다고 했지요?”

그 입맞춤이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알 수 없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런 것은, 그러는 동안에 초시계를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다만 내가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춘 것만은 분명하고, 그가 나를 밀어내지 않았던 것 또한 그렇다. 얼마 후에 두 입술이 멀어지자 그가 물었다. 나는 현우를 떠올렸다. , 맞다…… 그런 느낌.

나도 아내가 있어요. 이러지 않기로 하지요, 우리.”

그랬지. 이러지 않으려고 했다, 현우 때문이나 그의 아내 때문이 아니라 한유성을 위해. 열렬한 마음을 거부당했다는 수치심과 울화가 아주 잠시, 힘있게 치밀었다가 푹 가라앉았다. 절대 이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스스로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칼같이 사과하고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 피아노는 저 혼자선 옮길 수 없으니까 몇 분 더 부를게요. 울화는 금세 식었지만 부끄러움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적어도 쓸모없는 학생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약간 허세를 부렸다. 다행히 여기에는 한유성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니, 안 그래도 몇 명 더 연락해뒀는데 안 오네요.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자연스럽게 무마하고 싶어하는 한유성의 태도가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윽고 한유성이 부른 다른 대학원생들이 중강당에 속속 도착했다. 나는 한유성이 앉아 있는 피아노 의자에서 두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그들을 맞이하고, 그랜드피아노를 드는 데 몇 명이 더 필요한지 떠드는 걸 지켜보다가 관리실 직원을 불러왔다. 직원은 절대로 비전문가가 마음대로 피아노를 옮겨선 안 된다고 역정을 내더니 음대 학부생들을 데려왔다. 학부생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다 어디선가 그랜드피아노 전용 수레를 빌려왔고, 그렇게 피아노는 대략 두 시간 만에야 무대 뒤편 비품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할 수 없었지만 말해야 했다. 미안해, 나 교수님 좋아해. 그걸 교수님도 오늘 알게 됐어. 현우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그 사람도 누나를 좋아해요? 할말이 없었다. 아마 아닌 것 같아, 라고 말해야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끝의 끝까지 나는 이걸 포기하려 하지 않는구나, 그러니까. 통화가 끝났다. 현우는 일일 휴대전화 사용 시간이 끝나기 직전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누나, 미안한데요……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나는 누나 없으면 안 돼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알았다고 하고 끊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뒤늦게 현우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지른 일에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현우가 자기에게 불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가여웠다. 내가 현우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현우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 단지 그 때문에. 문득 나는 제국주의 게임을 떠올렸다. 한유성이 그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한유성에게 왜 사랑이 제국주의의 발명품인지를 물었을 때, 그가 하려던 대답.

사랑, 그것은 제국주의의 발명품.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굴욕을 견디게 하기 때문에. 노예 되기를 망설이지 않게 하기 때문에.

다음날은 아침 일찍 등교해 예정대로 중강당 앞에 테이블을 꾸렸다. 동기 두 명이 나와 함께 앉아서 명찰, 책자, 학술제 기념품으로 나온 볼펜을 챙겨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이 나와 유독 눈맞춤을 길게 한다는 생각은 종종 들었지만 그보다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한유성이 주제 발표자로 무대에 오르는 메인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에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았다. 한유성을 따라다니다 만나서 한두 번 말을 섞어본 게 전부인 박사과정생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와서였다. 한별 원우님, 지금 학교 에타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불길한 예감 속에 오랫동안 사용 않던 앱을 업데이트하고 재인증까지 거쳐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니 나와 한유성 이야기가 있었다.

사회학과에서 인기 많은 H교수랑 모 대학원생 불륜. 한 명은 오늘 중강당에서 발표하고 한 명은 행사 도우미 하던데 낯짝도 두껍다.

손이 떨렸다. 사람들이 이 글의 내막이며 전말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이따위 소문을 퍼뜨린 게 누군지 알아야 했지만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나와 잘 알지도 못하는 박사과정생이 정확히 내게 이 소식을 전한 것으로 보아 H교수와 모 대학원생의 정체가 이미 공공연하단 사실만큼은 가까스로 추정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그나마 무대 아래 있는 나는 얼마간 망신을 면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무대 위에 앉아 있는 한유성은 그럴 수 없었다. 어두운 강당 안에서 서로 몸을 기울여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전부 이 추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미친 사람처럼. 무대에 뛰어올라 이건 다 오해라고 외쳐야 했을까? 더 미친 사람처럼. 물론 제일 하고 싶은 건 도망치기였고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게 가장 덜 미친 선택지였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 주제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될 때 교수님도 에타 보셨나요? 같은 질문이 나올까봐 무서웠다. 끝까지, 내가 두려워한 일이 대놓고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평소 같았으면 오며가며 스몰 토크를 나누었을 동기들이 나를 적당히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 일이 아직 충분히 커지지 않았다는 것을.

키스 한 번 했어. 딱 한 번이었다고!”

엉망진창으로 하루를 보내고 현우에게 전화를 걸어 악을 썼다. 현우밖에 없었다, 그런 글을 올릴 사람은. 현우 말고 또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따지고 싶었지만 현우가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일과 후 한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기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쌓이고 응축된 분노를 다짜고짜 터뜨리자 현우는 울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 그걸로 화가 조금 누그러진다거나 이미 전부 증발해버린 애정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 얘는 진짜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범인은 현우일 수 없었다. 휴대전화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어서 전화도 아무때나 못 받는 애가 새벽에 그런 글을 올릴 수 있을 리가. 그 사실을 깨닫자, 그걸 알았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되는 건 아니라는 인식과 별개로 약간 민망해졌다. 일단은 사과를 해야겠어서 입을 떼자 찝찌름하고 비린 맛이 입안에 번졌다. 입술을 문지른 손에 피가 묻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던가, 그 정도로 화가 났던가 생각하며 거울을 보니 코피가 나고 있었다. 뚝뚝 떨어질 만큼 많은 코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이었다.

비정상적인 비()출혈은 급성백혈병의 대표적인 증상이자 신호다. 학술제 준비와 불륜 추문에 대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많이 시달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는 상상도 못한 진단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병은 누구에게나 그렇다. 돌연하고 치명적이다.

아파서 좋을 건 없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헛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소문을 불식시키려 애쓸 필요 없이 아수라장을 벗어났으니까. 캠퍼스에서 몸이 멀어지니 마음에나마 여유가 생겨선지 옛 동기들이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게 살다가는 에타 블라 네이트판에 이름 빼고 다 올라간 다음 개명하고 이민 가야 한다고. 이민 좋아하네. 죽으면 그만이지. 나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농담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낄낄 웃었다. 웃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현우와는 헤어졌다. 전화를 며칠 꺼두었다가 한참 만에 받아서 그렇게 말했다. 연락이 닿지 않는 얼마간 차근차근 체념할 준비를 했을 현우는 긴말을 덧대지 않고 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운이 아주 나쁘면 현우가 제대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는 내가, 돌이킬 수 없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얘기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현우는 끝까지 내 곁을 지키겠다고 할 게 뻔했고, 그러다 내가 정말 죽는다면 현우는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하게 될 거였다. 내가 농수로에 빠져 죽은 남자를 기억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게 현우를 배신해서 받는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항암 치료는 통증과 구역감에 지루함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다. 별생각을 다 한다 생각하면서 정말로 별생각을 다 했다. 그중에는 현우 덕분에 그동안 면역력이 강화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현우를 더는 좋아할 수 없게 된 때부터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진 게 아닐까. 이 가설을 채택하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현우와 나의 연애는 백만에 한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로로마 무반응 케이스가 아니게 되고, 갑작스러운 발병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가설의 효용은 무엇보다도 심정적인 차원에 있었다. 나조차도 때때로 의심에 사로잡히곤 했지만, 의외로 나는 현우를 정말 사랑한 거였다. 생각에 여기에 이르고 보니 현우에게 덜 미안해져서 좋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현우를 다시 사랑해서라도 건강을 되찾아야겠다고 마음먹진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시체가 되는 일에 큰 유감이 없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구토와 설사를 하고 살가죽 위로 골반의 곡선이 다 드러날 만큼 가파르게 말라가는 고통이 달가울 리는 만무했지만 그와는 아무래도 별개로, 그것이 내가 감수해야 할 운명이라면, 그래도 된다고……

입원한 지 한 달여가 지나도록 한유성은 소식이 없었다.

물론 그게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유성 입장에선 그 일이 봉변에 불과했을 테니까, 트렌치코트 사건과 다를 바 없이.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피하지 못했다 해서 구설에 휩싸이게 된 점을 감안하면 나를 증오하게 되었어도 할말이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건강하시길. 무사하시길. 한유성의 안녕을 빌고 스스로를 비웃는 게 습관이 되었다. 지랄 났네, 이 마당에 누가 알아준다고 사랑 타령. 하지만 그게 핵심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서도 내가 그대로일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어서 오히려 마음놓고 한유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아니면 뭐 어쩔 것인가? 누군가 눈치챘다 한들, 곧 죽을 내게 감히 그 마음을 멈추라고 할 수 있을까?

한유성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골수 외 침범 소견을 받은 날이었다.

연락이 늦었네요.”

, 많이요. 혹은, 왜요? 하려면 빨리 하든가 아예 안 하는 게 나았을 연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미안한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사람한테 들었어요.”

한유성은 대체 뭐라고 말한 걸까. 단순히 자기에게 반한 대학원생이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고만 말했다면 배우자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유성은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 적어도 배우자가 나설 일이라 볼 수는 없으니까. 일말의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는 걸 감지하자 약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한유성 본인도 아니고 그 아내가 걸어온 전화에 들뜨는 게 우스워서.

제가 한별씨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싶어서요.”

나는 한유성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학교의 교원인 그 여자는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수 학생 간 위계형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학생에 연대 의사를 밝혔다가 부당 해고를 당한 뒤 소송 끝에 복귀한 지 일 년이 채 안 된 사람이었다. 이름을 검색해보고 그런 행적을 알았을 때는 딱 한유성의 아내 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고, 바로 그 여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뭐 도울 일이 없냐고 묻는 건 또 이상하고 역겨웠다. 당신 의심하는군요, 당신 남편을.

그렇게 보일 일이라는 건 인정할 만했다. 한유성은 교수고 내가 제자였으며 나이 차이도 적지 않으니. 아내가 있는 남자와 애인이 있는 여자가 입을 맞춘 건 남자 쪽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 추정하는 게 대단한 착각은 아닐 거라고.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추행은 내 쪽에서 저지른 것이었다. 나는 혐의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당신 남편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어떻게 한유성이 그런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죠? 아무래도 당신보다는 내가 그 사람을 더 잘 알고 잘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그 일의 책임이 오로지 내게 있다는 걸 한유성의 아내에게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우월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저는 그 사람 떠날 생각 없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사이 그 수다스러운 여자는 다시 말했다.

다만 제가, 저만 한별씨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아주 잠깐 내 손에 쥔 칼처럼 느껴졌던 우월감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그 여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여자는 거침없이 찔렀다. 남편을 오해하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버릴 생각 없다 말하는 사랑의 크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모멸감. 수치심. 그런 감정들의 명칭 사이에서 현우가 떠올랐다. 현우와 내가 한유성과 그의 아내 같은 커플이 될 수도 있다 믿었던 때가. 한유성의 아내는 한유성보다 일곱 살 연상이었다. 유학중에 만나 현지 시청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고 들었다. 여자 쪽이 연상이란 이유만으로 막연히 나와 현우랑 닮은 데가 있지 않나 생각했던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는지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내 부끄러움을 그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제가 그랬어요.”

여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내가 계속 말할 수 있게 공간을 주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교수님이 그런 게 아니라 제가요. 그래서 저는 아무 생각 없어요. 죄송하지만 후회도 안 해요. 딱 한 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거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나 여자가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줄 게 없냐고 하셨으니까 한 번만 더 뻔뻔해질게요. 큰 건 바라지 않아요. 그냥, 알고 싶어요. 내내 알고 싶었어요. 교수님은 저한테 아무 감정 없으신지, 저만 이런 건지. 뭐라고 하셔도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바라는 건 정말 그거 하나뿐이에요. 교수님은 어떤 마음이셨는지 아는 거.”

정말 그랬다. 이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내내 내가 원한 것은 한유성의 마음을 아는 것, 그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아무렇지 않았는지, 나를 다른 눈으로 본 적이 한 순간도 없었는지, 그런데 왜 그때 나를 밀어내지 않았는지. 그걸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금세 다시 두려워졌다. 나는 그 여자가, 한유성의 아내가 거짓말을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그의 마음이 나와 같았다는 거짓말이든, 그에게 내가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거짓말이든. 여자는 뜻밖에도 가볍게 대꾸했다.

그 사람, 귀가 밝아졌어요.”

여자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각자 방문 닫고 작업하다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의자 바퀴 소리를 들어요, 그 사람. 우리집이 그렇게 좁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 방문 차음성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문짝 두 겹을 넘어서 그런다고요. 그러면 자기가 먼저 주방에 가서 물을 끓여요. 커피 마시라고.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왜 그렇게 됐는지 나도 내내 궁금했어요.”

정말 그것 말곤 묻거나 청할 게 없는지 거듭 확인한 후에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가능하면 이게 마지막 통화이길 바란다고 나는 말했다. 마치 그쪽이 채무자고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뻔뻔하게.

그것으로 족했다.

그전까지는 없거나 미미했던 어떤 능력이 별안간 발달했다는 건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작은 틈의 실마리. 한유성의 아내는 그가 누구를 새로 사랑하게 되었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았고 아무래도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듯했지만, 그것으로 내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우리가 나눈 단 한 번의 입맞춤을 내가 치밀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한유성이 나를 불렀을 때, 피아노를 치고 있었을 때, 내가 중강당 좌석 끝에서 무대까지 걸어가는 발소리를 그가 못 들었을 리 없다. 청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발소리의 무거움이나 가벼움, 리듬 따위로 누구의 발소리인지도 알아차렸겠지. 한유성은 내가 다가가는 것을 알았다. 바로 등뒤에서 잠시, 내가 그에게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 싶어했다는 것도 그는 알았을 것이다. 잘 억눌려왔을 충동이 어째서 그 순간만큼은 그를 풀어주었는지를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한순간 그는 직후에 내가 저지르려는 어떤 일을 기꺼이 당해주려 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은 남은 평생을 견디기에 조금도 모자람 없는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