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문어와 나―(1/2)

4. 문어와 나

 

 

결정론적 우주의 가장 큰 적은 지()입니다.

 

/

 

왜 그러는 거야.

아내는 평온하게 입을 열더니 이내 운전대와 대시보드를 쾅쾅 내리치며 반복해 말했습니다.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

 

당신은 단장(斷腸)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

 

어머니의 사인은 다코쓰보 심근증입니다.

 

/

 

운명론을 거절하기에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말았습니다.

 

/

 

이 도시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합시다. 당신 역시 이곳에서만은 익명이기를 원하니까요.

여기는 당신이 유학 시절을 보낸 곳, 달리 말하면 당신 인생의 십여 년이 묻혀 있는 곳이고 따라서 이 도시의 몇몇 인물과 장소들은 당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라서 당신은 그 기억의 경로들을 완벽하게 피해 다닐 수 있습니다.

거리를 바라볼 때 당신은 약간의 충동, 약간의 죄의식, 약간의 체념을 동시에 느낍니다. 평안을 바라며 이 도시에 왔기에 아직 여기에 사는 옛친구들을 만나고 싶지만, 평안을 바라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합시다. 당신이 서울만큼 잘 알지만, 당신을 아는 사람이 서울만큼 많지는 않은 도시에 돌아왔다는 것.

당신은 단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도착한 첫날 당신은 비즈니스호텔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호텔로부터 두 블록 서쪽에 예전 당신이 자주 드나들던 서점이, 거기서부터 또 서너 블록 떨어진 곳에는 오래된 한국 식당이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 출신인 그 가게의 주인 할머니는 당신의 아내를 유독 예뻐했습니다. 서점에서 헌책을 팔고 물어물어 찾아간 전당포에 시계를 맡겨 반지를 마련한 날, 당신 부부가 둘만의 피로연 삼아 찾았던 식당이 바로 그곳이었죠. 그 얘기를 전하자 주인 할머니는 서비스로 계란찜을 줬습니다.

그때도 당신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당신과 아내가 책과 시계를 처분한 건 정말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었으니까요. 월말이라 그달 치 생활비를 거의 다 쓴 김에 치기로 저지른 짓일 뿐. 정말 좋은 반지를 마련하고 싶었다면 다음달 생활비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어도, 혹은 몇 달 정도 시간을 두고 여윳돈을 모았어도 됐겠지요. 그래도 아내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언제 또 전당포를, 그것도 외국 전당포를 이용해보겠느냐며 재미있어하기도 했습니다.

당장은 이런 기억들에서도 조금 멀어져보도록 합시다.

조경으로 유명한 이 도시에는 지금 눈이 쌓여 있습니다.

전형적인 쇼트 슬리퍼인 당신은 오랜만에 늦잠을 잡니다.

 

/

 

꿈으로의 전환은 너무 쉽습니다. 그래도 이야기해봅시다, 당신이 이 도시에 돌아온 첫날 꾼 꿈에 대해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믿으면서요.

안동을 비롯한 경북 일부 지역에서는 차례상에 통문어를 올립니다. 안동은 당신의 큰집이 있는 고장이죠. 열 살 무렵까지의 방학 때마다 당신은 또래 사촌들과 어울려 천자문을 외고 동몽선습이나 격몽요결을 공부했습니다. 어린이 유자(儒者) 캠프라고 할까요. 참가하는 어린이들 전부가 혈연이라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큰집에 모인 여러 사촌 중에 당신이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체급에서도 학습 능력에서도 중간 정도, 였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이지만 어른들은 좀더 박하게 보셨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이 당신 자신의 유년에 조금 후한 편일 수도 있고요. 수줍음이 많고 여자 어른들을 잘 따르는 편이어서 꾸지람도 많이 들었습니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녀의 일이 서로 다르다는 까닭에서요. 하물며는 여자 어른들도 당신이 주방 가까이 오는 것을 만류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순한 어린이였지만 하고 싶은 일에는 의외로 오기를 부리는 편이었습니다. 내심에는 내가 뭐 많은 걸 바랐나? 라는 식의, 당신 나름의 반항도 조금 있었고요.

문어에게는 심장이 세 개 있다고 합니다. 다리를 펴면 몸길이가 당신 키만할 듯한 문어를 훌떡 뒤집어 내장을 뽑아내며 큰어머니가 말해준 것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문어를 먹지 못합니다. 문어는 이름에 글월 문() 자가 들어가는 선비의 동물이어서, 내륙 지방인 안동 차례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 아주 옴파탈이네.

이것은 당신 아내의 목소리입니다. 꿈에서 당신은 어린아이지만 당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도, 아내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는 사실도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머리가 크고 둥근 문어, 삶아서 다리가 고불고불 말려든 문어가 옴(Ω) 기호를 닮았다는 생각. 옴 하면 Homme, Omega, 그리고 Mantra(). 옴이라는 진언에는 창조와 파괴와 무()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합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가 한 단어에 들어있는 셈입니다.

당신에게 옴파탈이라는 농담을 던질 때(그래요, 그건 분명 놀리는 어조였습니다) 아내는 전혀 화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불자입니다. 이십대 초반에는 단기 출가를 한 적도 있고 가까이 지내는 스님에게서 받은 법명도 있습니다.

그게 뭐더라, 생각하며 당신은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깊숙한 곳에 묻혀 있는 당신 아내의 법명을 파내볼 작정으로요.

이즈음에는 당신도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얼핏 알아차려 설마 흙속에서 문어가 기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하고 웃습니다. 웬걸 문어는 땅속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습니다. 바가지로 땅을 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손에 쥔 건 살아 있는 문어의 둥글고 물큰한 대가리. 당신 팔에는 끈끈한 다리가 감겨 있고요.

꿈인 걸 안 것까진 좋은데, 꿈 특유의 황당한 전개 속에서 괜스레 문어를 떠올려버려 낭패를 보았음을 당신은 한발 늦게 깨닫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푹푹 찔려 들어가던 부드러운 흙이 이제는 문어의 무른 듯 질긴 몸에 꾹꾹 문대어질 뿐이고 문어는 화가 났는지 어쨌는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참, 이거 이러다 음몽이 되려는 건 아니겠지. 당신은 헛웃음을 치며 그렇게 생각하지만(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가지고 용케 그런 발상을 했네요, 당신) 꿈속의 당신 몸은 지나치게 어린데다 두족류 동물과의 정사를 상상하기에 당신의 지식이 한참 모자기도 한 관계로 꿈은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이쯤에서는 당신 의식의 활동이 꿈을 만드는 무의식을 방해할 만큼 활성화된 탓이기도 하지요. 꿈은 끝났지만 잠은 깨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잠을 붙잡아두려 애씁니다.

어쨌든 당신은 휴가중이니까요.

 

/

 

깨어나자마자 당신은 안경을 쓰고 휴대전화를 집어들어 꿈풀이 내용을 검색해봅니다. 본래는 그러는 편이 아닌데 그날따라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문어는 꿈에 나오면 길한 동물이라는군요. 특히 취업, 합격, 계약 성사, 사업 성공 등 크고 실한 성과를 나타내는 소재고, 문어를 잡는 꿈보다 문어에게 잡힌 꿈이 좋다는 것으로 보아 접촉 면적이 넓을수록 좋은 의미로 해석되는 모양입니다. 꿈에 나온 문어가 죽은 것이라면 흉몽이 된다고도 하네요. 갓 죽은 문어는 신체나 재물 등의 물리적 손실을, 물기가 마른 문어는 구설수나 다툼 등의 심리적 손실을 의미한다고요.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 그대로 휴대전화를 두드려 발견한 해몽 블로그 몇 곳을 재미있게 구경하던(학구열이 있는 사람에게 현상 파악과 해석은 순도 높은 쾌락을 보장하는 행위죠) 당신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다 손을 멈춥니다. 뭐라고 할 생각이었나요? 죽은 문어를 목격한 후에 커다란 문어가 몸에 달라붙은 꿈이니, 우리에게 시련이 있었으나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의미 같다고요?

당신은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그렇다기보다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당신의 가장 친밀하고 충실한 친구였습니다. 당신 또한 아내에게 그런 상대였을 테고요. 물리적인 충격을 느낄 만큼의 실망감은 그 이상의 신뢰를 공유하는 사이에서만 발생합니다.

단장. Heartbroken. Gut-wrenching. Herzschmerz. 당신은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일련의 사고에서 어머니는 정지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합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머니를 끝내 떠올리고서야 비로소, 이제 이 생각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따라서 당신이 지금 느끼는, 완전히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충동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당신의 인식과 무관하게.

당신의 자기 인식은 비교적 정확한 편입니다. 당신은 가르치는 일을 맡기에 낯가림과 수줍음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에요. 연단에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경험을, 그중 상당 부분을 외국어로 쌓으며 본래적 기질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도 옳습니다. 정확히는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이 준 자신감, 말하자면 석박 시절에 비하면 훨씬 할 만하다라는 안도감이 불러온 효과지만요.

또 아내 생각을 하나요. 별수없군요.

어느 정도는 아내 탓을 하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논문 지도교수를 하고 싶다면 원생들과 스킨십(당연히 그런 의미의 스킨십이 아니고요)을 좀더 늘릴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해준 건 아내였으니까요. 제자를 두더라도 사적인 관계를 형성할 생각은 전혀 없던 당신에게 그게 그렇지가 않다니까 참, 하며 아내는 혀를 찼습니다.

밥이라도 한끼 사 먹이고 술이라도 한잔 사주면서 친해져야 돼. 교수님 말고 은사님 되려면 그런 게 좀 필요하더라. 우리도 독일 있을 때 교수들이 집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데 가봤잖아. 그렇게 곁 안 내주는 사람들도 그걸 다 하는데, 자기라고 못할 거 있어?”

그러다 내가 그 핏덩이들 중에 하나하고 정분이라도 나면 어쩌게, 하고 농담했던 기억을 돌이키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합니다. 그럴 사람 아닌 거 아니까 결혼했지 하며 웃던 아내는 이제 당신이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인 것을 압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알고 있었다안다는 전혀 다른 말이고요.

한때 당신은 아내가 아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영화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요(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아내는 항상 당신을 당신 자신이 인식하는 것보다 나은 사람이라 믿었습니다. 좀더 지적이고, 좀더 침착하고, 선량하고 사려 깊고 관대하고 명랑한 사람으로. 당신도 아내와 함께하는 동안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믿어왔습니다. 아내에게는 분명 그런 힘이 있었어요. 아내와 대화하다보면 더 깊이 생각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할 수 있었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문제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정리되는 듯해 행동에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여,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당신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동기부여와 그로 인해 정말로 나아진 실상의 총합, 그것이 당신에게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모두를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는 그래서, 당신은 이제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

 

구글 맵에서 리뷰를 보며 방문할 만한 가게를 골랐습니다. 투숙한 지 서른여섯 시간 가까이 방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당신은, 전날 배달로 먹은 타코를 판 가게가 꽤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식맛도 물론 나쁘지 않았지만, 리뷰에 따르면 분위기가 좋은 스페니시 바라고 해서요. 당신이 유학생활을 마무리한 후에 생긴 가게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이 도시에 사는 당신의 친구들은 이렇게 근본 모를(타코를 파는데 스페니시 바라고요?) 가게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고요.

사실 당신은 이런 종류의 시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들 하잖아요. 바에 가서 혼자 앉아 있으면 누가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 그래도 되는 가게가 따로 있는지 아니면 어떤 가게에서나 그렇게 해도 되는지. 망설임 끝에 당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처음 고른 가게보다 어두운 곳에 갈 용기는 없고, 더 망설이다가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 공산이 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누구라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자, 가게를 닫을 때까지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한다면…… 서버에게 트링크겔트라도 후하게 주고 통성명이라도 하자. 이 소박한 결심을 굳히기까지 정말 큰 결의가 필요했습니다.

서른여섯 시간 만에 씻고(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다고 당신은 항변하고 싶을 겁니다) 챙겨온 옷 중 가장 좋은 코트를 입고 방문을 나섭니다. 문 옆 복도에 그날 몫의 생수 두 병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창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심호흡한 뒤에, 다시. 당신은 방을 나섭니다.

 

/

 

결정론적 우주에 주인이 있다면 그는 무엇을 어디까지 계획해두었을까요? 이를테면 당신의 사사로운 꿈의 내용 같은 것, 그런 것조차 그가 직접 기획한 것일까요? 도중에 당신이 설핏 깨어 꿈의 내용을 얼마간 스스로 주무르게 되는 것까지도, 설마?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정론적 우주를 결정론적 우주라 부르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스페니시 바에서 합석 상대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바에 들어간 지 한 시간 정도는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아(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은 절대로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위인이 아닙니다) 의기소침해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엄청난 소득을 거둔 셈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찾아간 가게에서는 당신이 기대한 것과 같은 일(낯선 사람과의 즉석 만남)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거든요. 원래는 말입니다. 그건 당신이 한 번쯤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죠. 평범한 요식업소에서조차 말입니다.

축하할 만한 일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여간해선 없는 일이 어쨌든 일어났다는 것은 평소와 같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란 의미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험이라는 게 늘 그렇죠.

당신의 일행은 꽤 독특한 사람 같습니다. 처음 다가올 때의 차림새와 생김새, 앉아서 대화를 시작한 이후의 말본새 전부가 지금껏 당신이 알아온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닮지 않았어요. 상기해봅시다, 그것이 당신이 오늘의 대화 상대에게 바란 그대로라는 사실을요. , ‘누구와도 닮지 않음이 구체적으로 이런 모양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당신은 스스로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속물이 아니라고 믿어왔고 그 믿음은 당신을 배신한 적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일행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갑자기 말을 걸어온 상대를 보고 잠시 말을 잃었던 당신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그러자 상대는 정중하게 다시 물었습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당신은 얼떨떨한 심정(한 시간 동안 아무 일 없더니 갑자기 이렇게 잘 풀린다고?)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상대는 구석 테이블을 가리켰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접시를 들고 올게요.”

그제야 당신은 깨달았습니다, 상대는 방금 들어온 손님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한참 전부터 이 가게에 있던 사람이란 사실을요. 물론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일이죠. 한 시간 가까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신, 딴짓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을까봐 휴대전화 한 번 들여다보지 않고 멀뚱멀뚱 앉아만 있던 당신을 지켜보다가 먼저 용기를 내준 사람이니까요. 하긴 평소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낯선 사람에게 관찰당하는 게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겠지만요.

이윽고 상대는 곧 한쪽 손에 접시를, 한쪽 손에 마르가리타 잔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왼쪽 옆구리에는 둘둘 만 외투를 아슬아슬하게 끼고서요. 아까도 느꼈지만 다시 봐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투는 두꺼워 보이지만 입고 있는 상의는 계절감을 종잡을 수 없는 브이넥 반소매 니트, 그것도 네크라인이 명치까지 파인 디자인이어서요. 당신은 태닝한 상대방의 가슴팍을, 하물며는 가슴 사이에 맺혀 반짝이는 땀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들고 있는 외투가 아니었다면 이 사람, 바깥의 겨울을 경유해 온 게 아니라 가게 어딘가에 연결된 사차원의 문을 열고 마이애미나 와이키키 같은 곳에서 온 게 아닌지를 의심했겠지요.

상대는 재차 합석 의사를 확인하려는 듯 테이블 옆에 잠깐 그대로 서서 당신을 바라보았고 당신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는 엄지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펠리페.”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당신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 파울(Paul).”

정말로?”

당연히 아니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요.

파울이라는 이름은 당신이 상대방을 보자마자 떠올렸고 미처 떨쳐내지 못한 이미지에서 따온 것입니다. 몇 시간 전 열성적으로 찾아 읽은 꿈풀이 글들을, 당신은 떠올렸습니다. 꿈에 나온 문어는 커다란 성취를 암시하는 소재라고 했던가요. 틀렸습니다. 문어를 만나려고 문어 꿈을 꿨던 거예요. 머리카락은커녕 모공도 보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깔끔하게 까놓은 맥반석 계란처럼 반질거리는 펠리페의 머리를 보며 당신은 독일의 점쟁이 문어 파울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모든 경기의 승무패 결과를 정확하게 예언했던 동물 말입니다. 아깝다, 이름까지 펠리페가 아니라 파울이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당신은 엉겁결에 당신 이름이 파울이라 말해버린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동양 이름이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편견에 찬 반응을 보인 것 같아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당신은 펠리페의 정중한 사과에 조금 놀라고 죄책감도 다소 느꼈습니다. 펠리페는 스스럼없지만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즉 당신이 취하고 싶은 바로 그 적절한) 태도로 자기가 가져온 접시를 당신 쪽으로 조금 밀었습니다.

드실래요?”

농담이 과한걸. 당신은 웃지 않으려고 연신 헛기침을 하며 생각했습니다. 골라도 하필이면 문어 세비체가 뭐냔 말이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자기가 문어를 닮았단 걸 정확히 알고 그 점을 활용해 대화 상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의심했지만 펠리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문어를 먹지 않아요.”

알레르기?”

심리적인 문제예요. 원하신다면 제 음식을 드셔도 됩니다.”

당신은 펠리페가 방금 했던 것처럼 당신이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초리소 샐러드 접시를 펠리페 쪽으로 살며시 밀어주었습니다. 펠리페는 빙긋 웃었습니다. ? 잘생겼네, 하고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너무 눈에 띄는 다른 특징들 때문에 발견이 늦었지만 펠리페는 상당한 미남이었습니다. 얼굴 골격이 뚜렷하고 눈빛이 서늘해서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러니까 당신은 일종의 키메라와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어의 머리통과 추성훈의 가슴팍과 보이 드 샤넬의 얼굴을 가진,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지만 어쨌든 버젓이 존재하는. 왠지 땀이 많은 체질인 듯한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군요.

펠리페는 당신의 접시를 다시 당신 쪽으로 밀며 말했습니다.

저는 육상동물을 먹지 않아요.”

페스코 베지테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