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군. 당신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할말이 없네. 실로 그랬습니다. 이후 대화를 통해 천천히 확인하게 될 터였지만, 통성명을 하고 약간의 취향을 서로 밝힌 것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듯, 당신과 펠리페 사이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낯선 대화 상대를 눈앞에 두고서야 당신은 어울리지도 않는 객기를 부렸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돌려보낼까요? 그럴 용기는 있나요? 미안하지만 마음이 바뀌었으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달라 말할 용기.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체온(펠리페의 경우에는 열기에 가까웠는데요), 숨소리, 생생한 활력과 존재감 전체가 당신에게는 무거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적절한 토픽을 고르느라 머리를 굴리는 사이 펠리페는 점원을 불러 세워 마르가리타 피처 두 병을 주문했습니다. 마르가리타라면 나도 좋아하지만, 한 번에 두 병이나? 미심쩍어하는 내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당신에게 펠리페가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마시는 건 전부 제가 계산할 테니 전혀 신경쓰지 마세요. 주문한 것이 나오자 펠리페는 카운터에서 긴 빨대를 두 개 가져와 피처에 그대로 꽂았습니다.
“그래서요, 파울.”
당신은 펠리페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도 단숨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랬지, 내가 가명을 댔지.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랬기에 완전히 익명인 채로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주눅들고 혼란스러워하던 당신에게 약간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었고 펠리페가 마저 말하길,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픈가요?”
나름대로 유학(儒學)을 근본 삼은 집안에서 자란 당신에게는 종교적 체험이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유학 초기 한인 교회에 몇 주 나가본 것, 결혼 후 귀국하여 아내의 친구가 있는 절에 방문한 것, 사원에 방문한 경험을 꼽으라면 그 외에도 몇 가지는 더 댈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종교적 체험’이라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그저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 있었을 뿐, 그러한 사실을 그렇다고 감각할 뿐, 별다르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펠리페의 질문에 곧장 눈물을 흘린 것이야말로, 당신에게는 최초의 종교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우는 동안에 당신은 슬프다기보다 벅찼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당신을 조금 당황시켰습니다. (당신처럼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이렇듯 감상에 압도되는 상황에서도 무심코 메타 인지를 작동시키고 말지요.)
펠리페는 우는 당신을 침착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익숙한 듯도 했습니다, 자기가 한마디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는 게 이게 딱히 처음은 아니라는 식으로. 한편 당신의 흐느낌은 스콜과 같았습니다. 구덩이를 웅덩이로 만들고 강을 범람시키며 작은 동물 몇 마리쯤은 익사시키는 폭우, 그러나 짤막한. 그런 울음은 마음의 오염을 씻어내는 작용을 하지요. 얼마간 울고 나서 펠리페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당신은 눈가와 코밑을 닦아내고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펠리페가 테이블 위에 무심히 둔 당신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개기 전까지는요.
잠깐 사이에 당신은 이 스킨십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여러 차원에서 고민해 보았습니다. 위로를 뜻할 가능성,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물론 이것이었지요. 당신이 우는 모습은 정말 서러워 보였을 테고 상대방은 친절한 사람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피부와 피부의 접촉면에서는 의외로 뚜렷한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하잖아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죠. 당신의 손등을 감싼 펠리페의 손바닥에서는 분명 단순한 선의 이상의 무언가가 발신되고 있었고 당신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는 데에 약간의 시간을 더 허비했습니다. 손수건 다 썼으면 어서 돌려달라는 뜻인가, 혹시 자기 손을 올려둘 거치대가 필요했나, 또는 그냥 손을 테이블 아무 곳에나 올려두려 했는데 착륙 좌표를 잘못 잡은 건가, 아니면……
아니면, 뭐겠어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지 않겠어요. 당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펠리페의 눈길이 보충 설명을 해주고 있잖아요. 당신이 진작에 알아차렸으나 당장은 부정하고 싶었던 바대로, 펠리페는 처음부터 당신을 유혹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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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는 당신이 처음 만나는 성소수자가 아닙니다. 이쪽 방면으로 당신은 스스로가 꽤 열려 있는 사람이라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학 시절 지향성이나 정체성을 오피셜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꽤 만나보았거든요. 당신의 전공 분야에는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주로 그런 이유에서, 당신은 ‘그런 문제’가 당신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가령 많은 이성애자 남성들이 뾰족한 근거도 없이 품곤 하는, 게이들이 ‘정상적인’ 남자인 자기에게 호감을 표시하면 어떻게 하냐는 둥의 두려움을 당신은 내심으로 비웃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마찬가지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했거든요. 이 생각이 퀴어니스에 완전히 무지한 다른 이성애자 남성들의 인식보다 과연 얼마나 더 나은가는 차치하고, 바로 그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종류의 상황이 바로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도록 합시다. 이쯤에서 당신 아내의 조금 독한 농담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지요.
자기 아주 옴파탈이네. 마성의 남자였어, 알고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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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 마침 시원하게 울고 난 직후여서 머릿속이 말끔했기 때문에 그 혼란은 더욱 크게 느껴졌고요.
당신은 거절에 소질이 없습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당신 성격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해도 좋을 핵심적 특징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남다르게 내향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건 애초부터 거절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성향 때문입니다. 부탁받을 일이 생길 만큼 친밀해지지 않으면 거절할 상황도 좀처럼 생기지 않으니까요. 거절할 일을 만들지 않고 살다보니 자연히 거절하는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나이와 경력과 권위가 쌓이면서 미세하게나마 점진적으로 긴장이 풀려온 탓도 있을 테지요.
아무리 그런 당신이라 하더라도 단호한 거절이 필요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 그랬지요. 호의를 보여준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이유로, 무례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당신 자신을 무리하게 바꿔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말하고 나자 조금 더 용기가 났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어 사과하고 나니 말의 내용과는 딴판으로 전혀 미안하지 않고 홀가분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펠리페가 아니었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라는 확신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령 펠리페가 여성이었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애서가들만이 지을 수 있는 맥락이 풍부한 표정과 오래 인내하고 단련한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탄탄한 육체미를 두루 갖춘, 그래요, 바로 펠리페 같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야 진정으로 펠리페와 같은 여성이라면, 머리까지도 싹 벗겨진 알 대머리라야 하겠지만요.
어쩔 수 없지요, 당신은 정말로 대화만을 원했으니까요. 낯선 사람과 만나 대화하고 싶다는 충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전혀 모를 만큼 당신이 순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누구도 쾌히 믿어주지는 않을 당신 자신의 본의에 정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펠리페가 손을 거두었을 때 당신은 조금 겁을 먹었습니다. 이상하지요. 당신 자신의 의지로 그를 거절하고는, 그 선택이 펠리페를 떠나게 할까봐 겁을 먹는다는 것. 펠리페는 방금 만난 낯선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그의 뜻에 따라줄 의향이 없으면서도 그가 자리를 뜨진 않길 바란다는 것은 다소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욕망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현재 느끼는 충동의 총합이 유아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요. 그 사실이 당신에게 낯설었습니다. 낯선 상대 앞에서는 당신 자신도 이방인이 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순간의 감정들이야말로 당신이 스스로 알고 믿어온, 당신이 잘 만들어온 표면 아래의 진실이었던 걸까요.
“알겠습니다.”
흔들리는, 흔들리다못해 진동하는 당신과 달리 펠리페는 단단하고 미더운 태도로 말했습니다.
“나야말로 미안합니다. 불쾌하게 해서요.”
“아니에요. 거절해서 미안합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거절은 익숙하거든요.”
그러한 사과의 연쇄 속에서 당신은 펠리페가 거절한 쪽처럼 당당하고 되레 당신이 거절당한 쪽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조금 의식했습니다.
“당신 문제가 아닙니다.”
“아뇨, 대부분은 확실히 제 문제예요. 저에겐 애인이 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생각하며 당신은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바로 그런 반응을 말한 거라는 듯 펠리페가 손을 당신 쪽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곤 그 손으로 브이 사인을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아아, 이 사람 폴리아모리라고 하는…… 그런 사람인가. 그때까지의 모든 혼란과 의아감을 뒤로하고, 짧은 순간이나마 당신은 흔쾌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다른 많은 것을 경제적으로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진상이 주는 충족감이 있는 법이지요. 펠리페는 매끄럽게 허공을 휘젓던 손으로 턱을 괴었습니다.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슬픔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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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문어의 심장은 세 개. 이런 것까지 문어를 닮을 필요는 없잖아? 딴죽 걸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심장은 한 개로 충분하다고. 단 하나의 심장도 고장나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는 당신의 하나뿐인 심장 또한 복수의 인물에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면서 당신은, 그와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긴 적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아내에게 입힌 상처를 생각할 때 당신은 깊은 절망과 수치를 느낍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한 또다른 이를 떠올릴 때 당신은 그로 인해 당한 모든 오욕이 기꺼이 견딜 만해집니다. 어쩌면 당신도 문어인 걸까요?
당신과 펠리페의 만남은 정말 우연한 사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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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인가 당신은 웃음을 그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병째 들이켜고 있는 마르가리타의 덕, 또 어느 정도는 당신 자신을 ‘파울’로 소개하며 얻은 안전한 감각의 덕, 그렇지만 대체로는 펠리페가 대단히 매력적인 대화 상대인 덕이었죠. 당신은 펠리페의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런 시절을 스페인에서 보낸 펠리페가 유소년 축구팀에서 활약한 적이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독일 대 스페인 경기 결과가 그들 일가에 작지만 심각한 위기로 작용했다는 사실도요(이쯤에서 당신은 점쟁이 문어 파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펠리페의 두 애인에 대해 듣는 동안 자연히 그가 바이섹슈얼 폴리아모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따라서 당신은 펠리페에게 보통의 문어보다 더 많은 심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2는 4니까). 지금까지 펠리페가 만나온 수많은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펠리페는 놀랍게도, 그들 모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먼저 누군가를 떠난 적은 이제껏 없었다고요.
그렇다고 펠리페가 실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은 당연히 아니고요, 당신이 흥미를 보일 만한 진중하고 지적인 의견도 종종 꺼냈습니다.
“독일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신앙에 대한 태도예요. 내가 아는 한은 말이죠. 그건 선에 대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선을 행해야 한다, 이 명제에 대한 독일 사람다운 근거는 그것이 윤리적 의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스페인 사람들은 어떠냐면, 그것이 악의 반대이기 때문이라는 식이에요.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독일 사람들이 뚜렷한 윤리적 가치관 안에서 행동하길 원한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악을 저지르더라도 적극적으로 개심하려고 합니다.”
“그런 구분에서라면 나는 독일 사람에 가깝겠네요.”
곰곰 생각하던 당신이 그렇게 말하자 펠리페는 웃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정신의 국적은 스페인이고요. 실수를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실수가 용서받지 못할 거라 상상하지 말란 겁니다. 나도 당신에게 실수를 저질렀고 당신은 나를 용서했습니다. 그 덕에 우리가 대화할 수 있게 됐잖아요. 나는 실수를 인정하지만, 내가 한 시도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위험을 조금 감수하면 삶이 컬러풀해지잖아요.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또 한국인 남성과 이런 대화를 해볼 수 있겠어요?”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유학 생활이 길었던 탓에 당신의 독일어에는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파울이라 소개했습니다. 이 인간은 정말 점쟁이 문어의 화신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나에 대해 뭔가 알면서 접근해 온 건가……? 당신의 상상력이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가려 할 때 펠리페는 마르가리타를 마시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켰습니다. 펠리페가 가리킨 당신의 옷소매 끝에는 BEANPOLE이라는 자수가 박혀 있었습니다.
“한국인 남성과 대화하는 게 처음인 거지, 한국인 자체를 전혀 못 본 건 아니거든요. 그 브랜드는 한국인들만 입더라고요.”
당신은 그때까지의 대화 중 가장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밋밋한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빨판이 달린 다리로 파이프 담배를 거머쥔 문어의 모습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점쟁이가 아니라 탐정이었구나. 의혹이 빠져나간 자리에 친밀감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이제 펠리페에게 당신의 슬픔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독일인의 이름으로 펠리페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고 믿을 동안은 말할 수 없었던 당신의 유년기부터(당신은 독일에서 자란 한국계 어린이의 유년기를 꾸며내 말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좋지 못합니다) 최근에야 경험한 완전히 새로운 슬픔에 대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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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쓰보 심근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장도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환이 오십대 이상의 여성에게 가장 흔하다는 정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를 만큼 강렬한 고통을 선사하는 심근 질환은 주로 근력이 약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별 등의 고강도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순간적으로 좌심실이 크게 위축될 수 있습니다. 이때 수축된 좌심실의 압력으로 좌심실 위쪽은 맹렬하게 팽창합니다. 이 증상을 처음 발견한 일본인들은 이렇게 변형된 좌심실의 모양이 일본의 전통 방식 문어잡이에 사용되는 항아리 모양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어에게는 바위틈이나 구덩이에 숨는 습성이 있어서 입구가 넓고 안이 비좁은 항아리에 사족을 못 쓰거든요. 항아리의 명칭을 본떠 이 질환의 이름은 다코쓰보 심근증. 다른 말로는 상심 증후군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단장, Heartbroken, Gut-wrenching, Herzschmerz, 이와 같은 말들은 당신에게 단순한 문어(文語)적 표현이 아닙니다. 이 질환으로 숨을 거둘 때 당신의 어머니는 지금의 당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일반적인 다코쓰보 심근증 환자들의 연령보다는 젊었으며, 당신의 나이는 불과 열여섯이었습니다. 그후로 영원히 어머니를 증오하게 될 거라 예감하던 사춘기 소년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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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많이 해보았다면,”
그 대화에서 당신이 주도적으로 화제를 제안한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로로마의 효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알고 있겠네요.”
그것이 당신이 먼저 궁금해한 최초의 주제라는 것을 펠리페도 의식했는지, 펠리페는 한동안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나, 당신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만큼.
“글쎄요, 나는 언제나 나를 그대로의 나라고 느끼거든요.”
펠리페는 빈 마르가리타 피처를 들고 점원과 눈을 마주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습니다. 능숙한 주문 뒤에 당신에게도 더 마시려는지 묻는 눈짓을 했지만 당신 몫의 피처는 아직 절반쯤 차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로로마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번에는 당신이 펠리페를 빤히 바라보게 되었네요. 당신은 단 한 번의 입맞춤, 그 앞뒤에 놓인 짧은 사랑만으로 비약적인 청력 상승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귀가 밝다는 사실은 당신이 느끼는 다종의 괴로움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가 서툴다고 생각하는 당신조차 그럴진대 이 분야에 정통한 것으로 보이는, 최소한 당신보다는 훨씬 경험이 많은 듯한 펠리페가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그 많던 사랑이 모두 가짜였던 게 아니라면. 펠리페는 바로 그 생각을 지적해 옵니다.
“내가 로로마의 영향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껏 내가 해온 사랑은 모두 진짜가 아닌 게 됩니까?”
새로 주문한 마르가리타가 자리에 도착했습니다. 펠리페는 빨대도 꽂지 않고 피처째 크게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독점적 관계 지향인들은 사랑을 피자나 케이크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한 사람에게 한 판을 전부 줘야 하는 것으로요.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면 한 사람이 한 조각씩 나눠 갖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라면 내 사랑 같은 것은 당연히 부족하게 느껴질 겁니다. 나에게는 피자든 케이크든 끝없이 구워낼 오븐이 있는 건데.”
당신은 펠리페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까지의 대화에서 보인 적 없는, 방금의 방어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항상 너무 많은 사랑을 동시에 하고 있는 펠리페는 누구와의 어떤 사랑이 자기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어떤 변화든 자기의 일부로 긍정하는 태도 말고는 뚜렷한 대안을 떠올리기 어려웠을 테지요. 그중 특별히 마음에 드는 변화를 굳이 꼽는다면, 어떤 사랑은 좋았고 어떤 사랑은 그렇지 못했다는 차등을 두는 일이 되기도 할 테고요.
당신이 이러한 감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하자 펠리페는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내 운이 아주 좋다는 겁니다. 파울, 당신을 만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운이나 복 같은 개념도 일종의 역량 또는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해석한다면 펠리페는 로로마의 작용으로 운이 좋아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보기에 펠리페가 지닌 특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운이 아니라 카리스마입니다. 그를 지나가거나 그가 지나온 많은 사랑들 중 적어도 하나는 펠리페의 카리스마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게 틀림없다고, 당신은 확신했습니다. 낯설고, 낯설다못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평소라면 말을 섞을 생각조차 못했던 상대임에도 차츰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힘. 감히 그의 말을 무시할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끌림.
당신이 늘 스스로에게 부족하다 느껴온 능력이기도 한 그것은 펠리페의 사랑들 중 하나의 결과일 수도 있고, 펠리페의 로로마가 빚어낸 많은 결과물의 총합으로서 나타난 또하나의 소득일 수도 있을 듯했습니다. 이를테면 미모, 화술, 여유, 재치, 주량, 이 밖의 당신이 발견한 펠리페의 모든 미덕이 저마다 기여해 만들어낸 독립적인 특성. 그렇다면 펠리페는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고, 그 사랑들은 펠리페를 더더욱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당신은 상상했습니다.
이론상 무적인 펠리페가 진실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어쩌면 머리털이 다시 나게 해줄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물론 차마 이런 농담은 입 밖에 꺼낼 수 없었지만요.
“나는 로로마를 의심하진 않지만,”
대신에 당신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로로마의 시대가 오기 전에도 사랑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사랑도 당연히,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 거였죠.”
어째서? 혹은 어떻게? 라고 묻듯 펠리페의 눈가에 웃음기가 감돌았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서 죽었습니다.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이 이야기는 더이상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은 줄곧 여유만만하던 펠리페의 얼굴에서 잠깐이나마 웃음기가 사라지게 만든 점에 대한 묘한 승리감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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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창자가 끊어진다는 말의 유래가 된 고사의 주인공은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입니다. 비슷한 뜻의 영어 표현 ‘gut-wrenching’을 당신이 처음 본 것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자식을 자기 집 욕조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소식을 보도하는 영문 기사에서였습니다. 그렇군, 위장은 어머니의 것이고 심장은 연인을 위한 기관이군. 당신이 일생 내내 천천히 마련해온 감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러할 테지요.
당신은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삶에 충분히 이입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종손은 아니었지만 뼈대 있는 집의 며느리 몫을 해내느라 고되었을 테고, 어머니가 대단한 재원은 아니었다지만 결혼 전에는 음악을 전공했다고 하니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만 한 삶이 유감스러웠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지만요. 여기에는 특별한 상상력이나 대단한 공감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길고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고요.
어머니의 애인은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해서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점잖은 어른들이 멱살을 붙들고 붙잡힌 채 목소리는 낮추어 주고받는 대화에서 당신은 이 죽음의 전말을 얼마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먼저 모든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아버지의 친구였으나 어머니의 애인이기도 했던 사람이 어머니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것이 당신 어머니의 섬약한 심장에 치명적인 작용을 했습니다.
당신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누군가의 연인인 채의 죽음을 맞았다니요. 당신이 어린 시절 익힌 책들에 그런 도리는 없었습니다. 하기야 유학이란 것이 워낙, 옳지 않은 바에 대해 상상할 기회를 주지 않는 철학이기는 합니다. 펠리페의 도식에 따르자면 독일인에 가까운 태도지요. 당신은 어머니에 대한 이해를 단호하게 중단했고 그 증거로 어머니 없이도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럴 만큼 어리기는 했으니까요.
하여 어엿하게 자란 당신이 어머니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러고도 그것이 어머니의 죄와 같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을 때, 당신은 결정론적 우주에서 살아갈 모든 의욕을 잃었습니다. 당신의 잘못을 오롯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당신이 너무나 나약한 사람이었던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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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관계 지향인들의 죄의식을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펠리페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충실함이라는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바에는 자기가 다른 사랑을 느낄 가능성도 있음을 인정하는 게 편하지 않은가요.”
그것이 당신이 들려준 어머니 이야기에 대한 반응인지 아니면 어머니를 닮은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인지 아직 알 수 없다고 생각해 당신은 일단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가리타를 머금은 펠리페가 검지를 척 세워 보였습니다. 그렇지, 이 얘기를 들려줘야겠어, 하듯이요.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모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어떻게요?”
“물론 나는 다른 사랑들을 숨기지 않아요. 이런 나를 받아주면 좋지만 거절하는 것도 자유죠. 파울이 그랬던 것처럼요.”
멋쩍게 웃는 당신을 두고 펠리페는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대체로. 자기가 나만을 사랑하듯 나도 그 사람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니까요. 사실은 내가 사랑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모노가 폴리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아직은. 그렇지만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생각해주는 사람들도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말해요. 나와 만나는 동안에 자유롭게 다른 사랑들을 시도해봐도 좋다고. 그걸 숨기지만 말아달라고. 그러지 않더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끌림을 솔직하게 말해달라고요. 나에게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나요?”
당신의 물음은 솔직하게 말해도 펠리페, 당신은 상처를 받지 않나요? 라는 뜻이었지만 펠리페는 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파트너 이외의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매력을 느껴요. 자기가 모노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요. 육체적인 끌림일 수도, 정서적인 호감일 수도, 일시적일 수도, 반영구적일 수도 있어요. 모두 가능합니다, 충분히.”
이때 부르지도 않은 점원이 당신과 펠리페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폐점까지 십오 분 남았음을 알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충실하기로 맹세한 상대 외에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자체가 무슨 괴물 같은 욕망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 모노나 폴리는 결심이나 약속에 가까운, 실천의 문제예요. 육상동물을 먹지 않기로, 혹은 동물실험을 하는 제품을 소비하지 않기로 하는 것처럼요.”
당신은 그때껏 주머니 속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12시 46분.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내에게서.
“배우자를 사랑하나요?”
당신은 펠리페가 너무 뻔한 것을 물어본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펠리페는 특유의 서늘하고 그윽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고,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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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내가 운전대를 내리치며 왜 그러는 거냐고 반복해 외치던 때는 당신이 이 도시로 떠나오기 일주일 전입니다. 그때 당신이 느낀 심정을 정확하게 말해볼까요. 당신은 두려웠습니다. 줄곧 아무렇지 않은 듯했던 아내가 갑자기 폭발한 것이.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이고 신실한 불자이며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 늘 성숙한 태도를 보여오던 아내가 불시에 무너져내린 것이. 그러면 당신이 지금껏 인정하기를 꺼려오던 또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말해봅시다.
그때 당신은 기뻤습니다.
인간의 뇌는 신체가 파손될 때 고통을 희석하기 위해 쾌락의 호르몬을 분비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니요, 당신이 그때 느낀 기쁨은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감정입니다. 당신은 아내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가 느끼는 고통 그 자체가 기뻤느냐고 하면, 물론 그런 것도 아니기는 합니다. 당신은 아내가 발산하는 고통, 무언가를 주먹으로 내리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이 단장이나 심근증에 다름 아닌 육체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기뻤습니다. 두려웠거든요. 갑자기 터뜨린 분노 이전에, 별다르게 당신을 탓하지 않는 아내의 침착한 태도는 당신과의 매끄러운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다행이다. 당신 아직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 때문에 고통을 느낄 만큼 나를. 아직은 당신이.
그 기쁨은 곧 또다른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확인된 사랑은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확인되어야만 하니까요. 당신은 아내가, 고통을 느낀 그 순간만큼은 당신을 확실히 사랑했으나 그 고통에 질려 당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습니다. 두려움, 기쁨, 다시 두려움, 총체적인 두려움,
아내를 사랑하느냐고요? 고통스럽게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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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알게 되면 결정론적 우주에서는 더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예정된 고통은 피할 길 없이 다가오니까요. 고난을 피하려는 안간힘, 그런 개인적인 노력조차 사실은 모두 정해져 있는 것이고 고난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재생산할 뿐이어서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해 결정론적 우주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는 미지(未知)입니다. 이것은 문어의 심장이 세 개인 것처럼 자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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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한 대로 펠리페는 당신과 먹고 마신 값을 모두 본인이 치렀습니다. 묘하게 계산이 칼 같아서 당신이 혼자 주문한 초리소 샐러드와 마르가리타 첫잔은 제외했기 때문에 당신은 점원에게 당신 몫의 트링크켈트를 줄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계산대의 점원에게 이름을 물었고 점원은 파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이상한 우연도 다 있군요…… 당신은 점원의 부슬부슬한 곱슬머리를 보며 웃었습니다.
당신이 밖으로 나왔을 때 펠리페는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조임 끈까지 야무지게 잡아당겨두어서 가게 안에서와는 또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펠리페. 당신은 호기롭게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묵는 호텔로 갈래요? 와인을 살게요.”
그때 펠리페의 얼굴이 차가워 보인 것은 날씨가 추워서였을까요, 아니면 그가 웃지 않을 때에 언뜻언뜻 보이는 남자 향수 모델 같은 인상 탓이었을까요. 당신은 그 답을 곧 알게 됩니다.
“같이 가면 나에게 기회를 줄 건가요?”
당신은 말문이 탁 막히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말 잘하는 걸로 먹고 사는 당신이 그러는 것도 퍽 드문 일인데 말입니다. 펠리페가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당신 자신의 성향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펠리페가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고 훨씬 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덩어리가 된 후에 다시 만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당장은요.
“아무리 짧은 끌림이라도 나에게 사랑은 사랑입니다. 나는 당신하고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요.”
당신은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고 펠리페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당신을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십여 분의 짤막한 동행에서는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즐거웠습니다. 가령 펠리페는 다음 타깃으로 대만인 여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는데요,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 없는데다 로로마의 최초 발견자가 대만인 여성이라고 하니 운이 따라준다면 바로 그 여성을 만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운이 좋은 편이니까요. 당신은 스스로도 무례하다 느낄 만큼 그 꿈을 놀려주었습니다. 펠리페 당신은 못 느낄지 모르지만 당신의 관계 맺음에는 분명 수집벽이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진짜로 만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이 묻자 펠리페는 왜 로로마 같은 걸 세상에 풀어놓았느냐고 따지려 한다고 답했습니다.
호텔 앞에서 손을 흔들고 떠나가는 펠리페의 뒷모습을 당신은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함께 걷는 내내 메일 주소라도 물어볼까 어쩔까 고민하다 비로소 깨달은바, 펠리페의 많은 사랑들은 그에게 그만큼의 매력만을 부여한 게 아니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깊은 고통도 함께 있었겠지요. 당면할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계속 사랑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고 싶기 때문, 더 많이 알아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남았다고 믿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호텔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새벽 1시 16분. 이 도시와 서울의 시차는 대략 일곱 시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내는 지금 집에 있겠지요.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고 퇴근했거나, 아직 차 안에 있거나. 당신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통화 연결 음이 울리는 동안, 서 있던 자리에 쪼그려앉았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또 겁이 나서, 주저앉은 당신은 당신이 어린아이처럼 작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곧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고 싶어.”
당신이 말했고 아내는 한참 만에 대답했습니다.
―나도.
이에 당신이 묵묵해지자 아내는 다시 한참 만에 물었습니다.
―……돌아올래?
“아니.”
다음 순간 당신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