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El Lago)
명상이 끝나면 자유시간, 저녁식사, 그리고 다시 자유 시간이었다. 요가와 명상은 호숫가에서 진행되었기에 공동체의 성원 대부분은 명상 직후의 자유 시간에 물놀이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샤시는 공공연히 몸을 드러내는 걸 원치 않았기에 물에 들어가지 않았고 하나는 샤시가 물놀이를 하든 하지 않든 그 곁에 있는 걸 선호했다. 하나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펠리페도 멀뚱멀뚱 앉아만 있었다.
본인들이 젊기 때문에 타인의 젊은 몸에 대한 선호나 애착은 특별히 없는 세 사람이 보기에도 공동체의 물놀이는 장관이었다. 공동체의 삼분의 이를 이루는 우퍼들은 전부가 젊거나 어렸고, 그 나머지인 발렌시아 출신의 일꾼들 역시 대부분 서른 언저리의 젊은이들이었다. 서로의 몸을 이미 알거나 알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과 함께 호수에 몸을 담근 채 광선처럼 선명한 정념들을 발산하는 광경.
조금도 젖지 않은 몸으로 꼼짝 않고 그것을 지켜보는 동안 세 사람은 모두 자기가 갑작스레 몹시 나이들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나는 펠리페가 자기와 샤시만의 시간을 침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왜 물에 안 들어가냐든지, 꺼지라든지 말을 걸 마음이 들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흠뻑 젖은 머리에서 물기를 짜며 한 여자가 펠리페 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빠르게 주고받는 스페인어 대화를 하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주로 식사 준비조에서 일했다. 그건 펠리페에게 접근할 기회가 펠리페가 속한 과수원 작업조 사람들보다 훨씬 제한적이라는 의미였는데, 모처럼 자기가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어서 펠리페를 찾아온 듯했다. 아니면 단순히 왜 물놀이를 하지 않느냐고 물으려 한 것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펠리페는 이따금 하나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든 나랑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쳐다보는 거지, 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내 말없는 샤시도 신경이 쓰였다.
젖은 머리 여자가 떠나자 샤시가 하나에게 몸을 바싹 붙이고 속삭였다.
“재미있다.”
“뭐가?”
“펠리페가 하나 네 생각만큼 얼빠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사적인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어서 미안하지만.”
“어떤 근거로?”
“저번 우물가 사건 이후로 생각을 많이 했대. 결론은 자기가 먼저 다가가는 경우에만 사랑을 하는 게 좋겠다는 거였대.”
하나는 곁눈질로 펠리페의 눈치를 살피는 척했지만 실은 열띤 태도로 소곤거리는 샤시가 귀엽다는 생각을 좀더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방금 그 여자한텐 그렇게 말했어. 솔직히 말해서 당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괜찮다면 자기가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그렇구나.”
하나는 샤시가 엉덩이를 붙인 땅에서 반 뼘 뒤에 손바닥을 짚으며 무심히 대꾸했다. 샤시는 계속 말했다.
“나는 조금 흥미가 생기네.”
“저 사람?”
“응.”
그럴 수도 있겠다, 하나는 생각했다. 언뜻 보기에 샤시와 펠리페는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사람들 같았다. 샤시는 작고 펠리페는 크다. 샤시의 피부색은 진하고 펠리페의 피부색은 옅다. 펠리페는 남자와도 여자와도 관계를 맺는 남자인데 샤시는 남자와도 여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논바이너리.
하지만 놀랍게도, 질투라는 감정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만한 닮은꼴이 또 없겠지.
샤시의 말뜻을 이해한 하나는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나는 왜 어느 쪽도 아닐까. 하나가 작은 자괴에 골몰해 있을 동안 샤시는 몸을 일으켰다. 하나의 팔에 샤시의 작은 엉덩이가 스쳐지나갔다. 샤시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펠리페 곁에 다시 앉았다.
“안녕.”
“안녕.”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알아.”
“나도 널 알아. ‘사랑의 진리’는 작은 공동체잖아.”
샤시와 펠리페의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는 듯했지만 쉽게 끊어지지도 않았다.
조금 후에는 하나도 자리를 옮겼다.
문제(Un Problema)
공동체의 수원에 로로마가 유입되기 전날 샤시는 몬티 홀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인가 호랑이인가’에서 여자를 자동차로 바꾸고 호랑이를 염소로 바꾼 다음, 염소가 있는 문을 하나 더 만들면 몬티 홀 문제. 미국의 옛날 텔레비전 퀴즈 쇼에서 유래한 이 문제에서, 진행자 몬티 홀은 언제나 도전자에게 답변을 바꿀 기회를 한 번 줬다. 이미 도전자가 셋 중 하나의 문을 선택한 상황에서, 오답 문을 열어 보여주며 묻는 것이다.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문을 고르시겠습니까? 이때 대부분의 도전자는 최초의 선택을 고수하려 하지만, 선택을 바꿀 경우의 정답 확률은 반대 경우의 두 배에 이른다. 첫번째 선택에서 도전자가 오답을 골랐을 확률은 2/3이고 정답을 골랐을 확률은 1/3이니까. 친절한 진행자가 오답 하나를 제거해주면, 그때까지 열리지도 선택받지도 않은 제3의 문을 고르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전자는 최초의 선택을 고수하려 한다.
샤시의 이해 안에서는 사랑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염소를 고르고도 그것이 자동차라 믿고 싶어한다. 반대로 운좋게 처음부터 자동차를 고르고도 자기의 행운을 끝까지 모를 수 있다. 그런 착각이 가능한 이유는 당연히, 사람은 자동차도 염소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고른 사랑이 상품이라 믿으면 상품이 되고 벌칙이라 생각하면 벌칙이 되는 것이겠지만……
“그럼 염소면서 자동차인 존재도 가능하겠네.”
샤시의 이야기를 들은 펠리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샤시는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고 느꼈다. 아마도 그럴 거야. 사실은 모두가 뿔과 바퀴와 핸들과 발굽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거야. 헤드라이트에 가로획 동공이 있고 보닛에는 부드러운 털이 북슬북슬한 염소이자 자동차, 그리고 여자이자 호랑이인 존재.
모든 문 뒤에 키메라가 있는 게 사랑일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마담은 기쁜 얼굴로 공동체의 모든 수원에 어떤 미생물이 자리잡았음을 공표했다.
“변화를 느낀 사람은 없나요?”
모두가 모여 있는 식사 자리에서 마담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이 나에게 부여한 최초의 힘은 예지였어요.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답니다. 사랑만 하면, 사랑을 하는 존재들마다 특별한 힘을 부여받는 날이 온다는 것을요. 이제 드디어 여러분, 나의 사랑하는 당신들도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닐 텐데. 하나는 심드렁한 태도로 샐러드 접시를 뒤적거리며 생각했다. 바로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니스에 체류하던 하나에게 로로마는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매릴린 먼로가 노래했듯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성미의 프랑스인들은 자국의 공공 수도(水道)에 로로마 성분을 첨가한 최초의 국가로 만들었고, 하나는 거기서 이미 로로마로 인해 발생하는 천태만상의 소동을 얼마간 겪은 후였다. 선제적이고 기습적으로 로로마를 풀어버린 프랑스 정부를 힐난하던 다른 EU 국가들도 속속 로로마 공급을 추진했고 그중 하나가 스페인, 하나의 체감으로는 이곳은 조금 늦된 셈이었다.
하나가 생각하기에 로로마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못 되었다. 그것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도 사랑의 힘이 기적을 일으킨 사례는 종종 있지 않았는가, 잠깐이나마 괴력을 발휘해 마이크로버스 앞바퀴를 번쩍 들어 자기 아이를 구출한 사람이나 큰 나무 위에 고립된 고양이를 구하려다 엉겁결에 고소공포증을 극복한 사람이 나오는 해외 토픽 같은 것.
그러한 일시적 능력 증대를 반영구적인 것으로 바꾸어준다는 특징을 매혹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은 인정할 만했다. 인간은 원래가—샤시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일반적으로—사랑을 하는 존재고, 로로마는 피지어로 사랑을 뜻하는 그 별명답게 생명력과 증식력이 엄청난 미생물이어서 고비용 투자 없이도 전 국민의 능력을 적어도 하나씩은 개선 및 증대할 수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는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개인에게는 미처 기대한 적 없던 능력 하나가 개화하는 것이지만, 국가에게는 인구수만큼의 능력 증대가 기대되는 일. 다수의 문제가 되면 로로마로 인해 어떤 힘이 강화되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능력들 가운데 국가에 도움이 되는 힘을 골라내기만 하면 되니까.
가장 빨리 문제를 알아차린 것은 스포츠 분야였다. 이를테면 로로마를 섭취한다고 해서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근력이나 장거리 육상 선수의 심폐지구력이 향상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음이 확인된 것이었다. 운좋게 자신의 전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능력의 증대를 경험한 선수들이 출현하자 로로마 음용을 도핑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IOC를 비롯한 국제 스포츠 협력 기구들은 로로마가 이전에 금지 약물로 규정된 적 없고, 가까운 시일 내 각국에서 일반 사용 검토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근거로 들어 사용을 승인했다. 이 결정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았으나 현명한 처사라고 하나는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물 한 병을 선수촌에 풀기만 하면 어디에서나 로로마의 유익을 누릴 수 있으니 금지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고 성토하는 목소리 역시 공허할 뿐이었다. 프랑스에 인접한 국가의 해안 지방에서 로로마의 영향이 확인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고 로로마의 최초 발견 지역인 멜라네시아 제도의 작은 섬이 수몰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어차피 온 세상이 로로마에 뒤덮이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였다.
입소와 동시에 개인용 전자기기를 자진 반납해야 하는 공동체의 특성상 대부분의 성원들이 로로마를 전혀 들어본 적 없거나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겠지만, 하나가 겪은 농장 바깥의 세계는 이미 그랬다. 하물며는, 당연히, 하나의 체내에도 로로마가 잔류해 있었다. 아직 공동체 성원 중 아무와도 그런 적이 없어 미처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누군가 하나와 입을 맞추거나 하나의 다리 사이를 핥았다면 그 사람도 필연 로로마의 숙주가 되었을 터. 공공 수도시설 대신 지하수를 사용하는 ‘사랑의 진리’는 역설적으로 로로마의 영향력에 지배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적어도 스페인에서는—공간이었으나 마담이 자기 손으로 그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었다.
앞으로 문제가 끊이지 않을 거야, 하나는 직감했다.
샤시한테 빨리 여길 떠나자고 해야겠어.
그렇지만 이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하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미생물(El Microbio)
로로마의 존재를 알았을 때 펠리페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미생물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했는데 어째서 내게는 어떤 변화도 없는 거지?
“로로마가 체내에 침투하기 전부터 해오던 사랑에는 아무 효과도 없어.”
하나가 말했다.
“왜?”
“너 푸른곰팡이가 왜 백신이 되는지 알아?”
“포도상구균 같은 유해균을 억제하기 때문이잖아.”
핀잔을 주려던 하나가 도리어 말문 막혀하며 펠리페를 노려보았다. 별 쓸데없는 걸 다 알고 있네. 하나는 펠리페가 모르겠다고 하면 나도 몰라, 라고 대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푸른곰팡이는 자기가 먹는 게 인간에게 해로운 균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샤시가 말했다.
“아마 모르겠지. 거기엔 아무 의도도 없어. 푸른곰팡이나 로로마는 인간의 존재조차 모를 거야. 그걸 감각할 기관이나 이해할 지능이 없을 테니까. 만약 감각이나 인식이 충분히 발달했다 해도 그것들은 너무 작고 인간은 너무 크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일치시킬 수 없어. 인간이 우주를 막연하게 느끼는 것처럼, 우주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그건 왜 그런 걸까? 나에게 의미가 있는 현상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게 인간의 습성일 뿐이야.”
그렇구나,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너희 둘은 어떻게 만났어?”
하나는 샤시를, 샤시는 하나를 보았다. 네가 말할래? 내가 말할까? 입을 연 쪽은 샤시였다.
“다른 농장에서.”
그게 다야? 펠리페도 하나도 허탈한 얼굴로 샤시를 보았다. 아니야, 우리 좀더 사연 있는 사이잖아. 하나는 조금 억울했다. 내가 아플 때 네가 약을 건네줬잖아. 아무도 내가 아픈 걸 눈치채지 못했을 때 너만은 제대로 날 보고 있었잖아. 힘들겠지만 가능한 한 약을 먹지 말고 계속 화장실에 가세요, 인위적으로 배설을 멈추면 해로운 균이 배출되지 않고 몸에 잔존한대요. 그리고 물을 많이 마셔요. 정말 위험한 건 탈수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사제랑 물에 타 먹는 이온음료 분말을 줬잖아.
거기까지 떠올린 하나는 샤시가 펠리페에게 전부 말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물갈이가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똥 싸다 만난 사이인 걸 떠올리면 아무래도 진지하지 않은 느낌이 드니까. 혹시 그래서인가.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은 그 지점에서 조금 더 뻗어나갔다. 똥쟁이라는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연애 상대로는 못 보게 된 건가, 샤시의 정체성하곤 별개로. 가지고 있던 상비약이 마침 전부 떨어졌을 때 예상치 못한 친절을 입은 하나는 샤시가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착각해 금세 샤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왜소한 체격과 아무렇게나 길러 멋없이 덜렁 묶은 머리는 하나가 본래 좋아하던 타입과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여자니까. 여자애라고 생각했으니까.
“바르셀로나 근교 포도 농장이었어.”
하나는 다른 많은 말을 참고 그렇게만 말했다. 샤시가 펠리페에게 물었다.
“너는 왜 여기에 왔어?”
“‘사랑의 진리’를 가르쳐준다고 해서.”
“나도 그래!”
샤시가 흥분하며 외쳤다. 드문 일이었다. 하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난 아니야.
해 지기 전까지의 자유 시간에는 세 사람이 늘 붙어다녔지만 어두워지면 하나가 샤시를 독점할 수 있었다. 샤시가 펠리페에게 느끼는 호기심에 성적인 맥락은 조금도 없었고 펠리페 역시 샤시에게 좋은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몫의 베개를 안고 샤시의 방에 찾아간 하나는 지난 며칠간 그랬듯 샤시를 설득하려 애썼다.
“이제 충분하잖아.”
충분하다니, 뭐가? 샤시는 하나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고찰이라면 이제 지겨울 만큼 했잖아.”
아니야, 나는 조금도 ‘사랑의 진리’에 다다르지 못했어. 샤시는 잘라 말했다. 하나는 답답해서 눈물이 다 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말했다.
“이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적어도 여기서는. 너는 그게 좋아?”
하나는 샤시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샤시의 정체성을 알게 된 순간 고백도 못해보고 끝난 사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아직 고백만은 하지 않았으니 승산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어쩌면, 충분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면, 그런 후에 내가 고백한다면, 착한 샤시는 나를 사랑하는 척해줄지도 몰라. 사랑하는 척은 누구나 다 해. 관계를 이루는 데에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한데 그 두 사람의 마음의 깊이가 같지 않은 건 언제나 당연한 일이야. 내가 더 사랑하고 샤시는 덜 사랑하고, 아니 나를 아주 조금만 사랑하고, 그게 정 어렵다면 아예 안 해도 돼. 사랑하는 척만 하면 돼.
나는 그거면 돼.
“걱정해줘서 고마워.”
샤시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괜찮아.”
하나는 베개를 안고 복도로 나왔다. 조금 후에 샤시가 문손잡이 위에 있는 걸쇠를 가로로 밀었다. 낡고 녹슨 걸쇠는 죄인의 목을 치는 무딘 도끼처럼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내며 잠겼다. 여전히 복도에 서 있던 하나는 그것이 샤시가 자기를 밀어내는 소리라 생각했다. 샤시로서는 하나가 이 농장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혼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 두려웠을 뿐이지만.
사실은 샤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나가 말한 적 없는 본심을. 하나가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를 위해서였다. 샤시도 하나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 세상 유별난 사람들만 모아놔도 거기서 꼭 더 별난 티를 내버리는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나가 무엇을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샤시도 알았다. 샤시에게 ‘사랑의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하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다못해 숨길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자기에게만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감정,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고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가 만족할 때까지 사랑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하나는 지금 당장 관계를 시작하고 싶어하겠지. 그건 무서워. 샤시는 침대 위에 몸을 옹송그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