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Everything is gross but you―(3/3)

대화(La Conversación)

이날 밤 샤시의 방을 떠난 하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펠리페를 찾아갔다. 노크 소리에 펠리페는 헐레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고 문밖에 선 하나를 보고 이 상황이 꿈이 아닌지를 잠시 의심했다.

만져도 돼?”

아니.”

그러면 뭘 하지?”

대화.”

이후에도 펠리페는 주로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반했고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끌리는 남자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에서 펠리페를 거절한 사람 중 최초는 하나였다. 그랬군, 하나와 샤시가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니. 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완전히 거절당했음을 드디어 받아들인 펠리페는 다소 침울해졌으나 이윽고는 묘한 충족감을 거머쥐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끼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이었다. 그전까지 해온 자신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사랑, 앞으로도 자기 자리가 주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랑, 그런 사랑들에 대한 상상에는 순전한 재미가 있었다. 때문에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져오기 시작한 새벽에 하나가 길게 하품하며 자리에 눕자, 펠리페는 하나에게 닿지 않게 몸을 슬쩍 피해주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나는 찡그렸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너랑 내가 뭔가 의미 있는 거라도 한 것 같잖아.”

섹스보다 훨씬 좋은 대화였어.”

하나는 질색하다 잠들었지만, 그 순간 펠리페는 또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역시 하나를 사랑해. 그래서 하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 그로 인해 하나가 행복해진다면.

왜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날이 밝은 후에도 세 사람은 붙어다녔지만 그들 사이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음을 세 사람 모두 알았다. 하나는 펠리페하고만 대화했고 샤시도 펠리페에게만 말을 걸었다. 펠리페가 자리를 비우면 샤시와 하나는 거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선량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편이기도 한 펠리페는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샤시와 하나가 서로 주고받을 호의와 관심까지 자기에게 부자연스럽게 쏟아지는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탈락하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샤시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우리 셋은 조금 이상한 그룹이지, 공통점이 거의 없는. 그렇지만 펠리페랑 하나는 어쨌든 유성애자야. 당장은 펠리페가 하나를, 하나는 나를 좋아하지만 언제든 다른 누군가에게 반해 떠날 수 있어.

안 그래도 공동체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로로마를 음용한 이후에 새로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아무 능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안 마담이 반쯤 미친 사람처럼 새로운 성원들을 마구잡이로 맞아들인 탓이었다. 마담은 지역 신문에 광고를사랑의 진리를 탐구할 연인 구함. 필요한 것은 모험심과 열정뿐, 무료 숙식 제공냈고 새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퍼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었다. 주로 스페인 출신인 새 성원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 못했고 삼십대 이상이 손에 꼽게 적은 기존 성원들에 비해 연령대가 다양했다. 공동체의 분위기에 잘 융화되지 못하는 듯했던 그들은 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마담의 가르침 하나를 맹렬하게 신봉하기 시작했다. 많이 사랑할수록 많은 힘을 갖는다는 가르침.

공동체 내에서는 누가 누구를 어떤 식으로 사랑하든 죄가 되지 않았기에 그 결과는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El Poder)

사람들은 로로마로 얻은 저마다의 힘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가령 시력, 두꺼운 안경을 벗게 된 것은 물론 호수 건너편에 있는 나무의 종과 그 가지에 앉은 새의 색을 말할 수 있게 된 사람. 또는 근력, 이십 리터짜리 물통 하나도 힘겨워하던 가냘픈 팔로 이제는 마담을 번쩍 안아올릴 수 있게 된 사람. 유연성이 좋아져 요가를 더 잘하게 된 사람, 머릿결이 눈에 띄게 좋아진 사람, 미각이 몹시 예민해져 저녁식사에 쓰인 향신료를 전부 읊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자랑을 늘어놓는 이들은 대부분은 새로 유입된 성원들이었지만 기존 성원 가운데에도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달리기가 빨라졌거나 암산 실력이 늘었거나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는 능력이 좋아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나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전생이 보인다, 머나먼 곳에 사는 자신의 도플갱어와 교신을 할 수 있다. 마담은 뛸듯이 기뻐했다. 새로 들어온 성원들에게, 이처럼 오랫동안 사랑을 연마한 사람들은 더욱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고 설교하기도 했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를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로로마로 인해 신장되는 능력이 초능력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사랑의 크기와 강도에 따라 증가의 폭 또한 무한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초능력이 아니었다. 원래 안경만 쓰면 얼마간의 거리는 볼 수 있는 사람의 시력이, 애초부터 물통을 들 만큼의 힘은 있었던 사람의 근력이 좋아졌을 뿐이니까. 달리기나 암산 같은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음속에 가깝게 달리거나 컴퓨터만큼 연산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고, 실로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들을 초능력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자신이나 인간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발달하는 게 고작이었다. 결정적으로 전생이니 도플갱어니 하는 것들이나 마담이 주장하는 예지력 같은 것은 로로마로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처음 세계 여행을 시작할 때 멋모르고 들어갔던 농장에서 매직 머시룸을 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이런 헛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하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하나도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나쯤 지어내기는 했다. 마담이 각자의 새로운 능력을 집요하게 묻고 추궁하더니 급기야는 식사시간마다 돌아가며 하나씩 발표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해서였다. 제 어깨 보이시죠? 여기에 원래 기미가 있었거든요. 그게 사라졌어요. 피부가 좋아지고 있는 거죠. 하나는 박수를 받았다. 멍청한 인간들. 내 어깨는 원래 이랬어. 너는 알지? 하나는 샤시를 바라보았다. 샤시는 충격을 받은 듯한 눈치였다. 그 얼굴에 하나도 조금 충격을 느꼈다. 가엾은 샤시, 내 거짓말을 믿는구나. 내가 자기 말고 또다른 사람을, 새롭게, 정말로 좋아하게 된 줄 아는구나. 그게 슬퍼? 화가 나?

그런데 그게 왜 사랑이 아니야?

펠리페는 자기의 능력을 발표할 차례가 돌아오자 운이 엄청나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마담이 묻자 어깨를 으쓱할 뿐 증거를 보여주긴 어렵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쟤가 머리가 좋긴 좋아, 하나는 생각했다. 자기가 거짓말하는 요령을 보고 펠리페도 적당히 지어낸 것 같다고. 하지만 나중에 펠리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 또 누굴 사랑하게 됐다는 거야?

그건 비밀이야.

그러니까 하나와 펠리페를 비롯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이 전보다 발전된 능력을 갖거나 적당히 그런 척 둘러댈 수 있었지만, 샤시만은 그러지 못했다. 진짜 사랑을 해서 진짜 힘을 얻을 수도, 그런 게 가능한 척할 수도 없는 샤시만은. 충치가 사라졌다고 해. 구강 내 플라크가 적어졌다고, 치석이 없어졌다고 해. 마담이 당장 검증할 수 없는 뭔가가 달라졌다고 말하란 말이야. 지병이 나았다고, 불면증이 씻은듯 가셨다고, 지긋지긋한 안구건조증을 떨쳐냈다고. 샤시가 거짓말하기를 바라면서 하나는, 샤시가 하게 될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또한 바랐다. 샤시가 드디어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작은 능력이라도 생겼다고 고백하기를. 그것이 진실이기를.

하지만 샤시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샤시가 부족하다고, 혹은 사랑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마담은 샤시의 양어깨에 손을 하나씩 얹은 채로 말했다. 누가 감히 걔를 그렇게 본다는 거야. 하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생각했다. 그러는 하나의 등에 펠리페가 가만히 손을 얹었다. 누가 정말로 샤시를 나쁘게 생각한다면 그건 마담, 당신이 그렇게 말해서잖아. 하나에게는 마담만큼 샤시도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이거야. 내가 경고한 게 이런 거라고. 결국 이런 순간이 온 게 어때? 좋아? 만족스러워? 이게 네가 원하던 거였어?

하지만 말이에요. 나는 샤시에게 정말 큰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러나 이어진 마담의 말은 공동체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특정한 개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당신의 소질에 맞지 않아서일지 몰라요. 당신은 더 큰 것을 사랑해야 해요. 인류 전체를 말이지요. 그리고 내가 늘 말하는 것처럼, 큰 사랑에는 큰 힘이 주어질 거예요. 샤시, 나는 당신을 위대한 사랑의 존재로 만들고 말겠어요.”

 

 

(Una Habitación)

그때부터 샤시만을 위한 특별 훈련이 시작되었다.

마담은 요가 리더와 명상 리더를 따로 뽑아 공동체 전체의 루틴을 관리하게 하고 자기는 샤시를 전담했다. 샤시는 기뻐했다. 마담과 가까워질수록 사랑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므로, 당연히. 하나의 눈에는 샤시가 그애답지 않게 우쭐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샤시는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감을 때까지의 모든 일과를 마담과 함께했고 따라서 오렌지나무 밭에서도 닭장에서도 창고에서도, 주방에서도 호숫가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하나와 펠리페는 식사시간에만 먼발치에서 샤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샤시가 느끼기에 특별 훈련은 특별하지 않았다. 마담과 독대하여 더 난도가 높은 요가 동작을 수행하고 더 오래 명상을 할 뿐이었다.

큰 소득이 없었기에 그런 식의 훈련도 계속되지는 않았다. 마담은 하나가 비아냥대며 예상한 것보다도 더 빠르게 샤시에게 실망감을 내비쳤고 그에 샤시는 당황했다. 그럼 스무 해 넘게 일관되었던 자기의 속성이 단 며칠 사이 바뀔 줄 알았단 말인가, 오로지 이번에는 마담 자신이 개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감이 놀랍다고 해야 할지, 아니 그리 놀랍지 않다 해야 할지 헷갈린다고 샤시는 생각했다. 적어도 마담이 완전히 자기를 포기한 것은 아닌 듯하다는 점에 희망을 걸면서.

나를 따라와요.”

어느 밤에 마담은 샤시의 손을 잡고 숙소 복도로 데려갔다. 그날따라 관계를 맺는 성원들이 많은지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교성과 낡은 침대 프레임이 관절염을 앓는 듯한 금속음이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일층에서 삼층까지 모든 복도를 순회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오면서 마담이 물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마담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할까? 샤시의 마음 안에서는 마담이 원하는 답변을 알고 싶다는 욕망과 바로 그것만은 피해서 답하고 싶다는 충동이 동시에 번져 섞이고 있었다.

기뻐해야 해요.”

마담이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샤시의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거의 틈 없이 내뱉은 것이었다.

사랑이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고, 우리가 쉴 때도 사랑은 잠들지 않고 지치지 않아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하는 사람 자체보다 위대해요. 내 말을 이해하겠어요?”

그보다는하고 샤시는 생각했다. 마치 사랑을 만드는 공장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약간의 위화감과 함께 곱씹었다. 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랑이 필요할까. 사랑하지 않고도 싹은 트고 해가 빛나고 바람이 부는데, 불은 사랑을 먹이로 자라지 않고 파도는 사랑을 연료로 달리지 않는데, ? 원론적으로는 사랑 역시 인간의 생명 유지 비용 이상의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만, 아무 비용 없이 발생한 사랑을 비용으로 또 무엇을 얻어내려 이 많은 사랑을 생산하고 있는 걸까, 공동체는. 이 모두는.

또한 마담은.

잘 모르겠어요.”

사랑을 모르듯 거짓말도 못하는 샤시는 작은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즐겁지 않나요? 사랑스럽지 않나요? 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렇게 간절하게 사랑을 외친다고 상상하는 것이도취적인 어조로 사랑에 대해 떠들며 걷던 마담은 샤시의 말에 딱 멈춰 서더니 샤시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눈길이라고 생각한 건 샤시가 착각한 거였을까, 다시 보면 마담은 샤시를 측은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음날부터 샤시에게 오로지 샤시만을 위한 방이 주어졌다.

공동체의 성원이 총 서른 남짓일 때는 대부분이 자기만의 방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마흔을 넘길 즈음부터는 둘 이상이 방 하나를 공유하는 사례가 속속 생겨났다. 그 무렵만 해도 그나마 자원자를 받아서 방을 공유할 사람을 정할 수 있었으나, 성원 수가 예순에 가까워지자 싫든 좋든 모두가 룸메이트를 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에게도, 펠리페에게도 차례대로 룸메이트가 배정되었고 마담의 거처로 방을 옮겨 며칠 지내기 전에는 샤시에게도 함께 이틀을 지낸 룸메이트가 있었다. 새 룸메이트는 샤시가 스페인어를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저녁나절 방을 떠나 새벽녘에야 돌아왔다. 잠귀가 밝은 샤시는 그때마다 깨어 아침까지 뜬눈으로 버텼다.

그런 룸메이트라도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샤시는 했다. 마담이 샤시에게 독방을 제공한 까닭이 바로 그것일 터였다. 외로움을, 지독한 외로움을 가르치려는 것. 샤시를 특별 대우하느라 다른 성원들보다 호사스러운 환경을 조성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샤시가 그 맞은편에 놓인 외로움을 먼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접근이었다. 외로움은 사랑을 상상하게 하니까. 죽음을 앞두었다는 공포가 삶에 대한 의지에 오히려 불을 댕기듯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격렬히 질투한 적도 없는 샤시에게는 증오의 경험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식사시간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 말고는 누구와의 어떤 소통도 기대할 수 없는 방에서 종일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자,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을 단 한 점의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증오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마담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방문을 넘어온 최초의 인물, 하나를 보았을 때 샤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마담을 죽여줘.

 

 

살인(El Asesinato)

샤시는 미치지 않았다. 누가 미쳤느냐를 따진다면 감옥도 아닌데 독방을 만들어 사람을 감금한 쪽일 거라고 하나는 생각했다. 샤시의 방에는 간수도 없고 커다란 창문까지 있으므로 감옥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 방에서 샤시는 꼬박 이 주를 버텼다. 왜 진작에 도주하지 않았을까, 하나는 탄식했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휴대전화도 없이 이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시내까지 나가려면 마담, 또는 차를 가진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복도에 간수가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농장을 나가기까지 누군가에게 발각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나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아. 나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하며 우는 샤시를 하나는 오랫동안 안고 있었다. 샤시가 너무도 가여웠고, 동시에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고, 단순히 안는 것 말고 다른 뭔가를 시도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웠고, 그런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말했지. 빨리 떠나지 않으면 너에게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우는 샤시를 보고 느낀 복잡한 감정 가운데 그런 이상한 의기양양함도 섞여 있음을 발견하자 하나는 부끄러워졌다. 이건 정말 사랑일까? 이것까지가 사랑일까? 사랑하는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지는이가 걷잡을 수 없이 상처 입은 모습을 보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내밀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전부 사랑할 수 없어. 나는 그럴 수 없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전부를 사랑하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샤시는 울면서 말했다.

나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바뀔 수 없었어.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굳이 따지자면 널 제외한 전부가 역겨워.”

마지막 말이 하나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고 곧 아프게도 했다. 나 빼고는 다 역겹다면서 그게 어째서 사랑이 아니라는 거야. 동시에 하나는 그런 생각도 했다.

사실 너를 최고로 역겹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세상에서 가장 너를 훼손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얼마나 간단하게 그럴 수 있는지 하나는 알고 있었다. 순순히 안겨 우는 샤시의 어깨를, 턱을 쥐고 강제로 입을 맞추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샤시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나를 사랑해?”

대신에 하나는 샤시의 독방을 떠나 펠리페를 찾아갔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사랑한다면 마담을 죽여줘.”

실제로 샤시가 하나에게 한 말은 마담을 죽여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감금과 정서적 학대의 경험이 샤시의 정신을 극한으로 몰아갔다고는 해도, 그로 인해 샤시가 증오라는 감정을 새로이 깨달았다고는 해도 샤시는 본질적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그러나 하나는 자기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고 믿었다. 샤시에게 정말로 필요한 해답이 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한편 펠리페의 사랑은 의심하고 있었다. 보답이 없는 사랑인 것을 하나도 펠리페도 알아서. 펠리페는 하나 말고도 많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중이어서.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 펠리페는 하나에게 자기의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기가 한 번에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그중 몇몇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거라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이 사랑 앞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할게.”

극단적인 제안을 꺼낸 하나는 물론 펠리페 자신조차 그 수락에 몹시 놀랐다.

하지만 펠리페는 결국 마담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다른 이를 찾아가 마담을 죽여달라고 청했다. 하나가 자기에게 그렇게 했듯이.

펠리페가 비겁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사랑을 이유로 살인을 부탁한다는 것은 무리한 청원이다. 마담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이 입에서 저 입으로 떠도는 동안 점점 강한 극단성을 띠게 된 것은 삼 개월에서 육 개월 정도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그들이 공유하는 현실감각이 점차 흐려졌기 때문, 또한 그들 대부분이 스무살 남짓한 또래였기 때문이다. 샤시는 언제든 독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샤시가 갇힐 만큼 잘못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담은 샤시를 가둘 권한이 없었다. 하나는 언제든 샤시를 데리고 공동체를 떠날 수 있었다. 샤시가 하나의 품에 안겨 울던 그때, 바로 그다음 순간에라도.

하지만 정말 그렇게 했다면 일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담은 순순히 하나와 샤시를 차에 태워 시내에 데려다줬을까? 이 일을 계기로 진짜로 본격적인 감금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명상 모임과 신흥 종교 사이의 경계 어디쯤에 애매하게 위치했던 공동체의 성격이 단숨에 신흥 종교그중에서도 각별히 위험한 종류의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을지도.

때문에 하나는 공동체에서의 일은 공동체 안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일어날 일이 모두 일어난 후에야 사실 그 믿음이 틀린 것이었다고 단언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겁한 행위다. 샤시를 구하려면 마담을 제거해야 했고, 그래서 하나는 펠리페를 찾아갔고, 펠리페는 또다른 누군가에게 그 부탁을 전달했다. 이 말이 어떤 입에서 또 어떤 입으로 전달되었는지는 하나도, 펠리페도, 물론 샤시도 몰랐다.

이틀 후에 마담이 머무는 농장주 가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공동체 성원 대다수가 연루된 이 살인의 실행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마담과 함께 이 농장에 있던 단 한 사람, 므슈 툴루즈. 마담의 남편이었다. 농장주 가옥에 보관되어 있던 공동체 성원들의 전자기기도 이때 전소되었기 때문에 므슈 툴루즈는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가 범행을 자수했다.

경찰은 평소 마담의 방종한 성생활에 불만을 품었던 므슈 툴루즈가 경영난을 해결하려고 보험금을 노려 저지른 단독 범행으로 사건을 결론지었다. 공동체는 크게 부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해산되었다. 샤시는 여행을 중단하고 요양과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미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하나는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김에 샤시를 뒤따르기로 했다. 다른 대부분의 성원에게도 저마다의 갈 곳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은 펠리페뿐이었다. 관계가 거의 파탄에 이르러도 결코 먼저 떠나지 못하는 그 특유의 성향은 이미 이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알렉스 또는 마담, 마담 툴루즈(Madame Alejandra Toulouse)

열한 살 때 알렉스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예수님, 제발 저와 사귀어주세요.

저를 사랑한다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엄마 아빠조차도 제가 동생처럼 예쁘지 않아서 저를 싫어해요.

예수님 같은 분이 저와 사귀어주신다면 우리 학교 애들 중 아무도 저를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

이 짧은 기도에서 충분히 짐작 가능한 바대로 알렉스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특별한 계기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 알렉스는 특별히 예쁘지 않았지만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재능이 개화한 적 없으나 뾰족이 못하는 것도 없었다. 예쁘거나 특별하지 못한 것이 사랑받아선 안 된다는 근거는 아니니 알렉스는 그저 운이 몹시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신에 알렉스에게는 사랑을 희구하는 재능이 생겨났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는 것이어서 아무도, 알렉스 자신조차 그것이 희소하게 막대한 재능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알렉스는 사랑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여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알렉스를 허풍쟁이, 사기꾼으로 생각하며 농장을 떠났지만 알렉스가 사랑에 대해 한 모든 말이 거짓은 아니었고, ‘사랑의 진리는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한 채 알렉스와 함께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