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드라마―(1/2)

6. 드라마

 

 

자꾸 쓸데없는 것들이 생각나. 네가 예전에 들려준 얘기. 릴케가 한 말이랬나,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여자는 영원히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좆 까라 그래. 아니면 평소엔 잘 듣지도 부르지도 않던 노래 같은 거. 이 밤이 지나면 우린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데, 뭐 이런 가사. 하필 왜 이게, 하필 왜 지금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상황이 안 맞잖아. 지금은 밤도 아니고 우리는 아직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는데.

 

이게 처음인데.

 

어머나 씨발 내가 우나봐.

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막 만지네. 아직 눈물 닦아줄 정은 남아 있나. 그런 건 없는데, 그냥 네가 착한 거거나. 그랬지 넌 원래 착한 애였어. 따뜻한 손. 다정한 마음씨. 웃는 얼굴. 너는 웃어. 어떻게 된 애가 여기서까지 웃어. 실은 나도 웃고 싶은데, 옛날에 우리 도란도란 얘기하던 생각 나서 웃으려면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어려울까.

울지 마.”

?

오늘 우리한테 좋은 날이니까.”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 아까는 그렇게 애써도 안 나오던 웃음이 네 말 한마디에 새어나와. 이거 봐, 난 아직 이래. 네가 그런 말을 해도 웃음이 나. 네 감정은 이제 모르겠지만 난 여전히 사랑이야. 그러니까 나가자고, 이런 장난 지금이라도 때려치우자고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론 생각하고 딴판인 말이 나가버려.

여기 웃는 사람 너밖에 없어.”

아니야. 이건 내 마음이 아니야. 그야 그게 팩트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정말 그래. 여기 웃는 사람 너뿐이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우리밖에 없고.

이혼 법정 대기실은 진짜 이상한 곳인 것 같아. 기본적으로 다 둘씩 와서 앉아 있긴 한데, 길어야 한두 시간 안에 헤어질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다들 남보다 못한 느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느껴져. 그런데 평일 점심시간 언저리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헤어지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도 이상한데, 결정적으로, 자리가 별로 없어서 동행한 사람과 굳이 꼭 붙어 앉아 있어야 하는 점이 너무 이상해. 그래도 일행과 멀리 떨어져 앉지 않는 건 협의이혼의 마지막 감정적 보루 같은 걸까. 우리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이성적으로 헤어지기로 했으니, 피차 유치하게 굴지는 않겠다, 뭐 그런 걸까.

문이 열리고 또 두 사람이 나와. 한 부부가 두 개인이 되는 순간을 이렇게 자주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어. 얼마 후에는 바로 우리가 그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안 믿겨. 너는 콧노래를 흥얼거려. 조금 미친 것 같아. 이 밤이 지나면 우린. 웃기게도 그 멜로디를 듣고 나니까 마음이 좀 밝아졌어. 나도 아까 왠지 그 노래를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이상하지? 우리 아직 그래. 네 생각이 내 생각이야. 내 마음이 네 마음이고.

아니야?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사실 나 자신 없어. 네 마음을 이제 잘 모르겠어.

딱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질문이지만, 그래도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나 봐. 내가 네 소맷부리 붙들고 또 울기 전에 그냥 내 눈 보고 말해줘. 이런 씨발 근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네.

부탁인데 그렇게 딱하다는 듯이 보지 마.

차라리 안아줘. 아니면 최소한 내 말에 성의 있는 대답을 들려줘.

왜 변했어?”

너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솔직히 말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부터 들어. 너는 곤란한 질문은 피해 다니는 편이지. 그래서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그렇지만 네가 변할 줄은 몰랐어.

내가 이런 사람인 건 너도 알지. 자잘한 건 다 알지만 중요한 건 잘 모르는.

매번 이런 식이야. 너에게 실망한 마음이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바뀌는 거. 늘 내가 나빴던 거지. 지금도 그렇지. 네가 변할 줄 몰랐던 내가 멍청한 거지. 너는 아니라고 해주지 않지. 이제 내 자책을 멈추게 해줄 생각이 네겐 없지. 어떻게 그럴 수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

 

벌써 육 년이나 됐다니 믿기지가 않아. 곧 헤어진다는 걸 감안하면 아직 육 년밖에 안 됐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도 기억하지? 우리 처음 만난 거, 기적이었다는 거. 나는 삼 년 반 만에 귀국한 참이었고 너는 계양이었나 청라국제도시였나, 지인 집들이에 다녀오는 길이었어. 하루만 내 귀국이 일렀어도, 집들이가 하루 아니 한 시간만 연기되었어도 우리 못 만났을 거야. 너나 나나 공항 철도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공항 철도라는 건 원래 비행기에서 막 내렸거나 이제 곧 탈 사람, 아니면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타는 거잖아. 네가 낮술 좀 한 김에 택시를 탔다면, 내가 공항 철도 대신 리무진 버스를 타기로 했다면 서로 존재도 몰랐을 우리는 하필 그날 그 시간에 공항 철도 같은 칸 안에 타고 있었어.

말을 섞기 전부터 조금 의식하고 있었다고 하면 너는 믿을까? 시야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씩은 관찰해보게 되니까. 다들 그러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적어도 나는 그렇거든. 저 사람 옷 예쁘게 입었네, 저 사람 화장은 안 했는데 머리는 숍 가서 세팅받은 것 같네, 저 사람은 통화를 엄청 큰 소리로 해서 무슨 라디오 사연 듣는 것 같네, 그런 생각들. 참고로 널 보고는 좀 내 스타일 같다고 생각했어. 출입문 앞 봉을 잡고 서 있는 너. 옆모습하고 뒷모습의 중간 정도랄까, 그 정도밖에 안 보이는데 데님 셔츠 깃과 귓불 사이 목선하고 턱선에 왠지 자꾸 눈길이 갔어. 그래서 보고 있었어. 힐끔힐끔. 내가 서 있던 곳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갑자기 푹 고꾸라지기 전까지는.

할머니라기엔 섭섭하고 아주머니라기엔 애매한 분이셨어. 여행객이셨겠지. 아주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아마 태국분인 것 같아. 정신없는 와중에 그분 캐리어 네임 태그를 뒤집어봤는데 읽을 수 없는 문자라 당황했던 기억이 나거든. 그렇지만 그것도 조금 나중 일이고, 그분이 쓰러지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들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난 게 먼저지. 바로 앞에 서 있다가 그분이 토한 희멀건 액체를 뒤집어쓴 나를 빼고.

그때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 벅찼던 것 같아. 옆에 앉은 일행이 그분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면서 외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허벅지 부근에서 뭉근하게 올라오는 온기와 들큼 짭짤한 토사물냄새, 색색의 뱀떼처럼 빠르게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창밖 풍경,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 상황이 너무 압도적이면 귀에서 삐소리 들리면서 사고와 감각이 차단되는 느낌이 들잖아. 나한텐 그때가 그랬어. 내 시야에 네 얼굴이 들어온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야.

잠시만요, 공간 좀 내주세요.”

네가 어깨를 들이밀고 있는 거였어, 나하고 쓰러진 그분 사이 좁은 공간에. 두어 발짝 뒷걸음질치고 나니 시야도 조금 넓어지고,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어. 너는 그분을 바닥에 눕히고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어.

“119에 연락해서 응급 상황이라고 말씀하시고 열차 번호, 방향, 다음 정차 역 알려주세요.”

네가 내게 맡긴 역할은 그거였어. 시키는 대로 119 누르고서야 생각났는데 나 그때 갓 귀국한 상태라 한국 번호가 없었거든. 휴대전화 자체를 아예 잃어버린 적이 있어서 기계도 외국에서 산 거였고, 급한 대로 와이파이나 쓰려고 그저 켜놓기만 한 상태. 그런데 119는 그래도 걸리더라. 네가 시킨 대로 말했더니 어떤 응급 상황이냐고, 불이 났는지 환자가 발생했는지 물었던 기억이 나. …… 외국인 관광객 여성이 구토하고 실신했는데요. 지금 CPR을 시도하고 있어요. 도와주시는 분이 아마 의사나 간호사이신 것 같아요……

다음 역은 공덕이었어. 119 정말 빠르더라. 문 열리고 환자분 어떻게 내려드려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발차가 잠시 지연된다는 차내 방송이 나왔고 들것을 든 구조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왔어. 너랑 환자분 일행이랑 구조대원들이 내릴 때 엉겁결에 나도 따라 내렸어. 내리면서 보니까 구조대원들이 너한테 동행을 요청하는 것 같던데, 그때 너는 뭐랬더라. 사실은 지금 술을 좀 마신 상태라 더는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던가.

환자분과 일행과 구조대원들, 그 일과 무관한 나머지 승객 모두 떠날 때까지 너랑 나는 엉거주춤 있었어. 새로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속속 내려오는 걸 볼 때에야 현실감각 같은 게 좀 돌아온 것 같아. , 이 일은 이렇게 끝났구나. 큰일이었지만 이제 더는 나의 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먼저 말했어.

감사합니다.”

그건 내가 들을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니 아무도 너에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거, 그제서야 그게 떠올랐고.

저는 한 거 없는데요. 그쪽이…… 선생님이 고생했잖아요.”

심질환은 실신할 때 머리를 부딪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막아주신 게 결정적이에요. 119 신고도 해주셨고요.”

나야말로 네게 감사하다고 할까 고민하다가 그게 또 내가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았어. 감사해야 하는 사람은 정신을 잃은 환자분 본인, 아니면 네 응급처치를 받은 환자를 인계해간 구조대원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모르지, 어쩌면 환자분 일행이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거듭 말하고 계셨을지도. 그렇지만 어쨌든 너는 결국 어떤 감사도 전달받지 못했잖아.

오늘 우리는 사람을 하나 구한 거예요.”

맞아, 너 분명히 그때 그렇게 말했어. 뻐기거나 우쭐대는 기색 하나 없이 그냥 담백하게.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일이야. 기억 안 난다고는 못하겠지. 만나자마자 같이 한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 그걸 잊을 수는 없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바로 그때부터 네가 좋았어. 너는 잘 몰랐겠지만, 왜냐하면 널 만난 이후로 나한테는 쭉 너뿐이었으니까 네가 알 리 없는 정보지만, 나는 워낙 그래. 사랑에 빠지는 건 순식간인데 그게 참 끈질겨. 잘 물리지를 않아. 누가 봐도 장한 일, 감사한 일을 한 사람이 아무에게도 감사받지 못했는데, 그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마음씨가, 뭐랄까 거의 감동적이었어. 그래, 이거다. 나는 네가 감동적인 사람이라 좋았어. 이게 가장 정확한 첫인상인 것 같아.

저는 원래 내릴 역이 여기였는데, 어디까지 가세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건. 뭘 어떻게 해야 이 만남을 어쩌다 일어난 별일말고 그렇게 시작된 우리로 만들 수 있을까. 민락동이요, 할까 말까.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해서 또 한참을 가려고 했다고 할까 말까. 눈치보니까 씻고 가라고 할 것 같은데.

저희 집, 이 근처거든요. 옷 빌려드릴게요.”

너도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 그때 장기 여행 마치고 귀국하는 거였거든. 한국 들어오기 전에 웬만한 짐은 버리거나 본가로 부쳐두긴 했지만, 갈아입을 여분 바지 한 벌 정도는 그때 멘 배낭에도 들어 있었어. 나중까지 생각할 것 없이, 너도 척 보면 알았을 거 아냐. 내 배낭에 뭐가 들어 있었겠냐고. 밀수꾼처럼 금괴랑 외화를 꽉꽉 채워왔을까? 심마니도 아닌데 산삼이라도 똘똘 감아놨을까?

그래서 나는 너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보면 알 텐데, 지하철역 화장실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만한 사이즈의 일인 걸. 그런데도 굳이 도와준다는 걸로 봐서 너도 나를 그냥 보내는 게 아쉬웠나보다 싶었어.

당연히 첫 만남부터 그렇고 그런 수작질을 하려는 것까진 아닐 거라 믿기도 했고, 직전에 너랑 내가 했던 숭고한 행동을 고려하면 그 당일에 또 야리꾸리한 뭔가를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한데, 널 따라가면 서로 적당한 호감 표시는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최소한의 기대는 있었어. 물론 팬티까지 푹 젖어서 얼른 개운하게 씻고 싶은 마음도 컸지. 사람이 자기 땀에 젖어도 찝찝한 게 인지상정인데, 남이 토한 정체불명의 음식물 때문에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냄새가, 하필 하반신에서 진동을 하니 내가 어땠겠어. 못 이긴 척 점잖은 척할 여유도 없이 알았다고 했지. 감사하다고.

그래, 그러고 보니까 그제야 나는 너한테 고맙다고 했네. 감사해야 될 사람은 따로 있다며 이상한 고집을 부리느라 그때껏 그 말을 삼갔는데.

얼마 만이었을까, 가슴이 그렇게 우당탕퉁탕 뛰어댄 게.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해. 심장이 고장나서 쓰러진 누군가를 도와줘놓고 내 심장이 잘 뛰노는 걸 느꼈다는 게.

첫 만남에 처음 가본 너희 집은 좋았어. 아늑했어. 그냥 그 근방에 수천수만은 될 아파트 한 동 한 호실이었지만 이게 얼마 만에 와보는 집 같은 집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집이었어. 당연히 그게 실망스럽기도 했어. 거실 벽에 당당히 걸린 가족사진이 이 집에 너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줬으니까. 사람 넷으로도 모자라 아버지와 어머니 품에 각각 강아지 한 마리씩 안고 찍은 그런 스케일의 가족사진. 그러고 보니 보고 싶네, 카코랑 포코. 너희 집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줬던 것도 걔들이었지. 그래서 그런대로 좋았어. 네가 나랑 뭘 어떻게 해볼 작정으로 데려온 게 아닌 건 알겠고, 그건 조금 실망스럽다고 쳐도, 알알 망망 짖는 조그만 강아지들이 있는 너희 집이 좋았어.

편하게 씻고 나오세요. 바지랑 속옷은 제가 세탁기 돌려둘게요.”

아뇨. 여분 쇼핑백이나 비닐봉지 같은 거 있으면, 그런 데에다 담아주시면……

하긴 세탁하고 건조하고 그러려면 좀 오래 걸리겠네요. 주소랑 번호 적어주시면 제가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제가 한국 오랜만에 들어와서 번호가 없어요.”

좀 수상해 보였으려나?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나중에 네가. 전화번호가 곧 신원인 요즘 세상에 번호도 모르는, 아니 아예 없는 사람을 집에 들인 게 그제야 좀 겁났다고.

연락처 적어주시면 제가 나중에, 제 번호 개통하고 연락드릴게요. 제가 지금 신세 지고 있는 거니까 나중에 밥이라도 한끼 사게요.”

내가 씻는 동안 너는 편의점에서 팬티를 사왔어. 이제 와서야 하는 얘기지만 허리는 크고 엉덩이골은 엄청 끼는 팬티였어. 근데 너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 팬티 나 아직 있다. 잘 입진 않지만 아무튼 속옷 서랍장에 있긴 있어.

나갈 때 네가 내 옷을 담아 건네준 쇼핑백에는 네 연락처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어. 그러고 보니 여태 통성명도 안 했구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거기 쓰인 네 이름을 보고 그 생각을 했어.

신보미.

이름이 예쁘다. 이름도 예쁘구나. 무슨 한자를 쓸까, 보배 보 아름다울 미? 한자 잘 몰라서 다른 글자는 떠오르지도 않지만 그런 이름일 것 같아, 그게 어울려, 그런 생각을 했어. 내 이름이랑 네 이름이랑 나란히 놓으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2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그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진짜 별생각을 다 했어.

조금 징그러울지도 모르지만 그중에는 너와 함께하는 생활에 대한 상상도 있었어.

그때부터 나는 그랬어.

 

*

 

호출 현황판에는 가운데 한 글자만 가려진 우리 이름이 이웃해 떠 있어. , . 곧 우리 차례야. 오 씨발 또 눈물나려고 해.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이로 드롭 탈 차례 기다릴 때하고 비슷한 것 같아. 곧 내가 뚝 떨어질 걸 알고 있다는 점, 앞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우리 앞을 지나간다는 점이 똑같아. 물론 재미있겠다는 기대감은 손톱만큼도 없고, 내 멋대로 이 대기선에서 떠날 수 없다는 점은 자이로 드롭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지만.

아까 나온 사람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한 십 분쯤 전에 봤잖아. 한 사람은 엉엉 울며 주저앉았는데 한 사람은 어딘가에 전화 걸면서 먼저 나갔던. 떠난 사람이 너무 냉정해서 나는 그 통화 상대가 궁금했어. 가족일까? 엄마나 아빠. 협의이혼이니 변호사는 굳이 필요 없겠지만 법조계 지인일 수도 있지. 사실 맨 먼저 든 생각은 그 상대가 연인일 가능성에 대한 거였지만, 그렇게 단정짓는 건 어쩐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다른 익스큐즈들을 상상해보려 한 거야. 나 말고도 이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전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확신해. 그만큼 남은 미련이 없어 보였다는 뜻이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너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너는 눈치챘을까.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둘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는 거. 오늘 이 시간대에만 이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기실에 동성 부부는 우리밖에 없으니 눈길이 모일 만도 한 것 같아. 당연히 화는 나지. 조금이지만. 화보다는 의아한 마음이 좀더 커. 지금 쳐다보는 사람들은 레즈비언 커플을 생전 처음 봐서 저러나? 그게 자기가 당면한 잠시 후의 이별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느끼는 건가?

평소라면 눈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쏘아봤을 거야. 뭘 봐, 구경났어? 그런 마음으로.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도 같아. 그런 식으로라도, 신기한 구경거리에 눈 돌려서라도 자기의 비극을 외면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이런 사소한 분노와 의문에 집중하려 애쓰면서, 다가올 이별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과 똑같은 마음이겠지.

똑같은 마음이라.

그러고 보면 그래, 아직도 동성 부부의 혼인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싶어서 역시 의아해. 그런 지도 벌써 이 년이나 됐는데.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마음이야. 똑같이 사랑하고 평생을 약속하고 싶어해. 그러다 갈라서려 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징그럽게 똑같아. 로로마의 효과를 보면 알 수 있잖아. 여자가 여자를 사랑해도, 남자가 남자를 사랑해도 로로마는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잖아.

로로마가 아니고서는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는 얼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한들 소통이 될 리 없겠지만.

 

*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나는 로로마의 유익을 적잖이 누린 편이야, 내가 원래 로로마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었다는 사실하곤 별개로. 로로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부부가 되기 어려웠을 거야. 동성 혼인신고 허용 같은 정책 차원의 얘기만이 아니라, 네가 내게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나는 로로마의 도움을 받았어.

나는 그날 날짜도, 날씨도, 우리가 먹고 있던 메뉴도 기억나.

너 원래 이렇게 예뻤던가?”

네가 문득 그렇게 말했던 때.

나는 그때 조금 더 예쁜 척하느라 입을 가리고 아 뭐야아, 하고 웃어넘겼지만 진지하게 답하자면, 아니. 나 원래 그렇게 예쁘지 않았어. 그리고 맞아, 나는 갑자기 예뻐졌어.

너를 좋아해서.

사실 너도 나를 좋아해서 네 눈에 콩깍지가 낀 거라고, 그래서 네 눈에만 내가 예뻐진 거라고 믿고 싶지만, 나는 정말로 나를 알던 누구나가 눈을 의심할 만큼 예뻐졌어.

그런데 예뻐진다는 건 어떤 일일까? 특정한 미인을,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닮아간다는 뜻은 아닐 거야. 예쁜 얼굴이라는 건 사실 꽤 다양하니까. 비비언 리와 오드리 헵번이 서로 다르게 예쁘고, 김혜수와 전지현 둘 다 미인인 건 누구나 알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야.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어. 그 가능성 안에서 예쁘다, 안 예쁘다가 결정되는 건 눈 코 입과 눈과 눈 사이 간격이나 눈꼬리 입꼬리 콧볼 너비와 콧대 높이 같은 것들의 밀리미터, 아니 나노미터 차이의 첨예한 문제지. 평소에는 그저 그랬던 사람도 어떤 표정을 지을 때만큼은 확연히 매력적이게 되는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해. 표정이 다이내믹하게 변할 때는 이목구비 배치상의 살짝 유감스러운 점들이 한꺼번에 보정되니까.

나한테 일어난 변화는 그런 거였어. 입술이 아주 조금 도톰해지고 이마 선의 머리숱이 살짝 더 빽빽해지고, 눈꼬리 각도가 정말 미세하게 변한 거. 가족들 말로는 얼굴도 작아졌대. 사실 나는 내 얼굴 거울로 자주 봐서 잘 몰랐는데, 얘기 듣고 여행 다닐 때 사진하고 비교해보니 확실히 다르더라. 동일 인물인 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만, 그 동일한 인상 안에서 최대치의 예쁨이 실현된 거랄까. 네가 좋아하는 미드에 자주 나오던 표현을 빌리면 이게 나의 ‘The best version of me’인 거야.

처음에는 순수하게 놀랍기만 했던 것 같아. 아주아주 조금만 변해도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는 거구나. 알다시피 ‘예쁨’이라는 게 얼마나 다채롭든, ‘평범함’은 그의 몇 배는 더 다양할 수 있는 거잖아. 내 얼굴은 누가 봐도 평범 그 자체였는데, 분명 그랬는데, 밀리 혹은 나노미터 단위 미묘한 변화로도 누구나 어? 예쁘다, 하며 돌아볼 만한 얼굴이 되는구나. 그게 신기했어. 

나는 좋게 말해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고, 나쁘게 말해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야. 그 의식엔 당연히 외모에 대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궁금해하는 만큼 그들이 내 모습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이 로로마의 작용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기준에 부합하는 신체 변화. 이게 너를 사랑해서 내가 얻은 로로마의 효과인데, 짧게 말하면 그냥 예뻐졌다인 거지.

그즈음에 너는 이상한 점을 못 느꼈을까? 내가 너무 자주 연락하는 거. 첫 만남엔 어디 사는지 일언반구 언급도 안 하더니, 갑자기 집이 가깝다며 뭘 자꾸 같이 하자고 불러내는 거. 나 너 때문에 부모님 졸라서 자취 시작했어. 너무 똑같은 동네면 네가 좀 수상하게 여길까봐 적당히 골라서 숙대 앞. 나중에 우리가 같이 살게 된 첫 집. 그때까진 왕왕 이게 맞나 싶은 자괴감도 느끼긴 했어. 네가 아무리 좋아도 이게 맞나. 너도 이쪽인 건 처음부터 감이 왔는데, 지금 애인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올인해도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