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드라마―(2/2)

우연히 특별한 경험을, 예를 들어 누군가를 함께 구조한 경험을 공유한 두 사람이 이후에 꼭 가까워진다는 법 같은 건 없어. 그런데도 가까워졌다면, 그건 둘 중 누군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일이겠지.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어. 그게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해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거. 내가 바로 강한 의지를 보인 쪽, 그 장본인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했던 건 첫째, 당연히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였고 둘째, 너도 나한테 어느 정도는 호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래도 봐, 내 생각이 옳았잖아. 결과적으로는. 갓 취직해서 바빴을 텐데도 너는 내가 만나자면 만나고, 하자는 건 다 같이 해줬어. 그 선선함이 나에 대한 관심 덕인지 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몰라서 조바심 느끼던 즈음이었어. 네가 나한테 예쁘다고 했던 건.

나중에 우리 썸 탄 기간에 대해서 말을 맞춰볼 때, 너랑 내가 생각한 시기가 조금 달랐던 거 기억나? 너는 나한테 예쁘다고 한 다음 네가 나한테 사귀자고 하기까지의 이 주 정도를 썸이라고 정의했잖아.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부터 사귀기로 합의하기까지의 석 달을 쭉 썸이라 생각했어. 네가 썸이라고 부르는 이 주는 그저 확실히 고백해올 때까지 내가 기다린 기간이라 믿었고.

아니 그럼, 그전엔 우리 뭐였는데?”

내가 황당해하면서 물었더니 너도 똑같이 황당해하면서 되받아쳤었지.

친구였지!”

그때는 그게 섭섭했어. 처음부터 사랑이었던 건 나뿐이고 너는 그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한 게. 그런데 차차 그것까지 좋아졌어, 이상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려주는 첫번째 에피소드가 바로 그거라서. 너는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 말하자면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고 바탕인 사람. 반면에 나는 우정보다 사랑을 늘 앞세우는 사람, 그래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오래든 친구인 척할 수 있는 사람.

나는 네가 나랑 다르다는 게 좋았어. 공정성을 기하자면, 네가 나랑 똑같다고 느꼈어도 나는 네가 나랑 똑같아서 좋았어라고 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네가 어떤 사람이었어도 나는 좋았을 것 같아. 어째서인지 몰라도 일단 좋다고 느낀 게 먼저였고, 그런 다음에야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 게 순서니까 그건 당연해. 다행히 너는 좋아하는 마음이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 사람이었냐 하면, 나랑은 다른 방식으로 좋은 사람이었던 거지.

 

*

 

법정 문이 열리고 또 두 사람이 걸어나와. 두 사람 다 후련해 보여. 그래, 이별은 저런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거겠지. 저 두 사람에게는 오늘 이 일이 선물처럼 느껴지겠지. 두 사람 모두에게 그렇다면 그건 정말 잘된 일이겠지.

사무원이 우리 이름을 불러. 앞 차례 사람들 나가고 숨 한 번 제대로 쉬기나 했을까 싶게 재빨리.

강하나, 신보미.”

그러지 말지. 조금 천천히 하지. 나는 이혼 법정 판사의 피로를 생각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 거 알지만, 그분도 피곤할 거 아냐. 오늘 하루만도 수십, 수백 쌍, 아니 이미 어제까지 수천수만 쌍의 이별을 승인했을 테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거 아냐.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쉴 틈을 주는 게 어떨까. 그게 지금이면 안 될까. 하지만 사무원은 야속할 만큼 사무적이야.

들어오세요.”

어쩔 수 없네. 드디어 우리 차례야. 각오는 됐어?

나는 안 됐어.

먼저 벌떡 일어나는 네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네가 뒤돌아 나를 물끄러미 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잠깐 망설이다가 나한테 손을 내밀어.

이혼 법정에 손잡고 들어가는 부부는 하루, 한 주, 아니 일 년에 몇 쌍이나 될까.

나도 모르겠어. 네 손을 잡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조금 원망스럽기도 해. 왜 마지막까지 다정하려 하는지 모르겠어서.

 

*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어. 하루종일이 뭐야, 남은 평생에 걸쳐서라도 말하고 싶어. 그러고 싶었어. 네가 그래도 된다고 해주기만 한다면. 역으로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면? 글쎄, 그것도 나한테 그렇게 어려운 주제는 아닌 것 같아. 좋아한 건 내가 먼저라도 사귀자는 제안은 네가 했고, 그것 말고도 증거는 차고 넘쳐.

우리가 사귀고 처음 함께 갔던 여행. 초여름이었고 너는 면허를 막 딴 햇병아리 운전수였어. 새벽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오 분 후에 집 앞으로 나오라길래 어리둥절해서 나갔더니 뚱뚱한 차 한 대가 좁은 골목으로 힘겹게 기어들어오던 기억. 아버지 차를 끌고 나온 네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씩 웃어서 나도 빵 터졌던 기억. 너는 소양강을 보러 가자면서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춘천에 있는 막국숫집으로 찍었어. 갑자기 왜? 운전 연습하고 싶어서?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 주차장에서 네가 말했어.

그거 알아? 나 주차 엄청 잘한다.”

평일 그 시간대 휴게소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더 많았어. 본격적인 휴가철이 오기 전이어서였는지, 그 휴게소는 원래 그렇게 한산한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래서 네가 자랑하는 주차 실력이 크게 의미 있게 느껴지진 않았어. 그래도 스스로 잘한다고 하니까, 네가 그런 어린애 같은 자랑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맞장구를 쳐줬지. 와아 우리 보미 잘한다, 주차왕 주차신이다. 너는 내가 오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약간 서운한 듯이 말했어.

나 진짜 잘해. 너 때문에.”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별생각 없이 물었더니 너는 평생 그 질문만 기다린 사람처럼 자신 있게 말했어.

공간지각 능력이 좋아졌거든. 이렇게 주차 잘하는 초보 이십 년 만에 처음 본다고 했어, 운전 연수 강사님이.”

귀여워.

내가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샐쭉해하는 거 귀여워. 그런 와중에도 자랑은 하고 싶어하는 마음 귀여워. 결정적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내가 이미 아는 사실을 굳이 돌려 돌려 말하는 거 아주 미쳐버리게 귀여워. 나는 운전석에 앉은 네가 너무 귀여워서 확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말마따나 초보인 너를 깨물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워서 참았어. 그리고 호언장담한 대로 너는 주차를 정말 잘했어. 운전대를 딱 두 바퀴 감고 후진 딱 한 번, 그런 다음 다시 운전대를 푸니까 그 뚱뚱한 차가 깔끔하게 주차선 안에 들어갔어. 앞에서 보고 뒤에서 봐도 바닥에 그어진 모든 선분에 평행하는 모양새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웃기는 여행이었어. 내비게이션 예상 운행 시간은 원래 두 시간 사십 분 정도였는데 네 시간도 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잖아.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뛰어난 공간지각 능력이 주차 실력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운전 실력 전체를 상승시켜주는 건 아니니까. 주차가 운전에서 꽤 까다로운 부분이긴 해도, 운전에는 그것 말고도 상당히 많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비교할 다른 초보 운전자를 많이 알지 못해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너는 공간지각 능력이 필요한 다른 운전 스킬, 예를 들어 차선 바꾸기라든지 앞뒤 차량과의 간격 유지하기 같은 것에 소질이 있었고, 그 나머지에는 솔직히 별로 없었어. 이를테면 브레이크를 너무 콱콱 밟아서 너도나도 안전벨트에 캑 하고 목 졸린 것도 여러 차례, 차선 변경을 할 때는 매번 깜빡이보다 와이퍼를 먼저 켜고 아 맞다, 하며 다시 끄는 식. 어쩔 수 없지, 너에게는 그게 첫 장거리 주행이었으니까.

목적지로 찍었던 식당에서 막국수랑 메밀전병을 먹고 소양강을 보러 갔어. 밥은 맛있고 너랑 함께 있어서 좋긴 한데 왜 갑자기 강을 보러 왔는지는 영 모르는 채로 너만 따라다녔는데, 소양강 처녀 노래비() 옆에서 네가 마침 그걸 물었어. 왜 내가 강 보러 오자고 했는지 알겠어?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웃으면서 고개 저었더니 너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말했어.

네 이름 그런 뜻이잖아. 여름의 강.”

그랬나?

난 네가 널 만나게 해주려고 여기에 데려온 거야.”

그 말을 듣고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너를 안는 것 말고는.

이름 뜻을 알려준 건 그보다 몇 달 전 일이었어. 내가 네 이름 뜻을 묻고 보배 보에 빛날 미라는 대답을 들은 게 먼저였고 그런 다음 네가 내 이름은 순우리말이냐고 물었어. 원래 부모님 의도는 순우리말로 하나라고만 짓는 거였는데 할아버지가 굳이 한자 뜻을 지어서 붙이셨다고 대답했지. 여름 하에 물 질펀히 흐를 나. 웃기지 않아? 나는 늘 나()라는 글자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거든. 그냥 흐르는 물도 아니고 질펀히 흐르는 물이라니 그게 뭐냐고, 뜻 좋은 다른 한자 다 놔두고 대체 왜냐고. 내가 내 이름으로 자조한 건 그게 처음이 아니었는데, 너처럼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아니, 좋은 이름인 것 같아. 여름에 물이 마르지 않고 넉넉하게 흐른다는 게 얼마나 좋은 말이야. 엄청난 축복의 뜻이 담긴 이름이네. 때와 곳이 함께 있는 이름이고.”

그러더니 너는 기어이 나를 여름의 강에다 데려다놓은 거야. 그러려고 운전까지 배워서. 그러고 보면 집순이 중의 집순이인 네가, 직장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네가 갑자기 면허는 왜 따려는 걸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나를 위해서였다니. 그렇게 배운 운전에정확히는 주차에뜻밖의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그 또한 나 때문이라니. 우리가 운명이 아닐 수 있을까.

너한테서 받는 사랑이 나는 너무 좋았어. 네가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내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하고는 너무 달라서, 네 사랑을 받는 나는 내가 아는 나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 당연히 새로운 내가 기존의 나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어. 이를테면 네가 나를 여름의 강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게 되어야지. 네가 나를 그거라고 믿으니까 내가 그게 되어줘야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는 너를.

너를 안으면 몸 어딘가에서 분홍색이 느껴졌어. 그것도 내가 너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감각이야. 촉각으로는 색채를 알 수 없는데 어째서 입술이 닿은 부분만은 분홍으로 느껴지는 걸까. 목덜미, 쇄골, 명치, 허벅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 그 어디에나 꼭 눈이라도 달린 듯이 너의 분홍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하면 메아리처럼 꼭 응답해주는 목소리. 귀여울 때, 섹시할 때, 졸릴 때, 또렷할 때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나 네 목소리. 네가 너인 걸 알 수 있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

누군가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게 사랑이야, 하고 보여줄 만한 기억들이 많이 있어. 그렇지만 그런 자료 없이 말로만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어렵지. 우리는 강아지가 어떤 생물인지 알지만, 너희 본가에 강아지가 두 마리나 있지만, 강아지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게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그래도 사랑의 생태를, 매우 작은 부분이나마 나는 아주 정확히 알게 된 것 같아. 그것만큼은 사랑을 경험해본 적 없거나 사랑의 존재를 완고하게 불신하는 사람에게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의 먹이는 말하기와 듣기야. 그 먹이의 영양분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야. 그 영양분의 수용체는 상상력이야.

우리 그랬잖아. 정말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잖아. 가령 네가 고등학생 때 댄스 동아리였다는 이야기. 안 어울리는 건 둘째 치고 공학에서 댄동이면 남자애들한테 인기 많았던 거 아니냐고 하니까, 한 학년 위에 마성의 이반이었던 언니가 있어서 동아리가 완전히 아기 레즈 소굴이 됐다고 했잖아. 그 언니 좋아했어? 물으니까 아니 그 언니가 내가 좋아하던 애랑 사귀었어, 그랬지. 난 그 얘기가 좋았어. 네가 마성의 이반 언니랑도, 좋아하던 애랑도 못 사귄 얘기라서가 아니고, 그 얘기를 들으면 네가 헐렁한 옷을 입고 남자 아이돌 춤을 따라 추느라 쩔쩔매는 게 상상돼서. 너는 날렵하게 핏되는 옷이 어울리고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너도 별수없이 어이없는 옷을 입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꼬맹이였다는 상상을 하니까, 다 커버린 네가 왠지 전보다 더 귀여워 보이게 됐어.

내가 네게 들려준 얘기들도 그랬을까. 중학생 때 짝사랑 고백 실패하고 레즈인 거 소문나서 왕따당한 얘기. 고등학생 때는 좀 나은가 싶었는데 또 비슷한 일 겪고, 자퇴할까 고민하다가 후배한테 고백받고 얼레벌레 사귄 얘기. 스물한 살 때 세계 일주 한답시고 가출하다시피 출국했던 얘기.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도 메일 주고받는 샤시라는 친구 얘기. 너는 이런 얘기들 사이사이에서 어떤 나를 상상했을까.

장래에 대한 얘기도 우리는 많이 나눴어. 나중에 우리, 방이 세 개 넘는 집에 살게 되면 방 하나는 오락실로 꾸미자. 나는 요즘 식물에 관심이 많아. 다음 집에는 해가 잘 드는 베란다가 있었으면 좋겠어. 카코랑 포코가 더 나이들어 언젠가 떠나게 되면 우리, 그때는 고양이를 데려올까? 고양이도 좋지만 우리 아이를 갖는 건 어떨까, 입양을 하든 정자 공여를 받든 해서…… 나중 언젠가에 대한 우리 둘의 의견이 매번 일치한 건 아니었지만 난 그 얘기들 전부 소중하게 생각해. 나나 너, 한 사람만이 아니라 서로가 있는 미래를 전제하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그 미래가 어떤 형태가 되든.

아깝고 궁금해. 우리가 헤어지면 그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흩어지는 건지.

오지 않은 미래가 어디쯤에서 증발해버리는 건지.

 

*

 

법정이라고 해서 막연히 마호가니 강대상이 세트로 구비된,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나오는 법정 같은 걸 상상했는데, 막상 보니 법정보다는 집무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공간이야. 판사는 출석을 부르듯이 우리 이름을 차례로 불러. 강하나, . 신보미, . 흐음, 하는 콧소리. 팔락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 판사는 우리가 제출한 서류를 보는 것 같아. 아니면 적어도 살펴보는 척이라도 하는 거거나. 그렇다고 판사가 무성의하다고 생각해선 안 되겠지. 거의 똑같은 서류를 하루에도 수십 건씩 검토할 테니까, 지루하기도 지루하겠지만 아예 인이 박이기도 해서 눈감고도 어떤 내용인지 줄줄 읊을 수 있겠지.

아이는 없네요. 없으면 뭐, 심플하지.”

뒷말은 혼잣말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그 말에 조금 부아가 나. 심플하긴 뭐가 심플해? 한 부부를 더는 상관없는 사람들로 만드는 일이 어떻게 심플할 수 있어.

강하나씨, 주민등록번호 불러보세요.”

대답을 하자니 입이 떨어지질 않아. 판사 말이 분명 들리긴 하는데. 네가 대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강하나씨가 직접 말씀하세요, 판사는 혀를 차면서 다시 말해. 별말도 아닌데 왠지 좀더 위축돼. 저런 목소리를 두고 준엄하다고 하는 게 아닐까. 매일매일 같은 일을 하며 수십 년을 보내온 사람 특유의 권위랄까, 불가사의한 힘 같은 게 그 무감정한 목소리를 나이테처럼 감싸고 있는 듯이 느껴져.

더듬더듬 주민등록번호를 말하면서 곁눈질로 슬쩍 옆을 보니까 너도 꽤 굳어 있는 것 같아. 그게 내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해. 긴장했구나. 대기실에선 괜찮아 보이더니 이제야 너도. 아니, 왜 이제 와서? 아까는 웃기도 하고 콧노래도 부르더니 막상 판사 앞에 서니까 긴장하는 이유가 뭐야. 잠깐이지만 그게 정말 궁금하다가 금세 답이 떠올라.

, 알겠다.

너 정말 겁먹었구나.

까딱하면 내가 대답을 잘못해서 뭐라도 그르칠까봐, 혹시 이혼 못할까봐 걱정하는 거구나.

너 그렇게 나랑 헤어지고 싶구나.

그 생각을 하고서야 정신이 아주 조금 드는 것 같아.

강하나씨, 이혼에 진정으로 합의합니까.”

판사는 음 높낮이에도 음절 단위의 간격에도 큰 특징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의례적인 말을 해. 그런 다음 너에게도 똑같은 걸 물어. 신보미씨, 이혼에 진정으로 합의합니까. 왜 차례가 넘어갔지? 나는 뭐라고 대답했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법정 문이 열려.

됐습니다.

나가세요.

그걸로 끝.

판사 말이 맞았어. 우리가 헤어지는 건 정말 심플한 일이었어.

남들하고 다를 바 하나 없이.

 

*

 

이제 와서, 라기보다도 바로 지금 떠올리기엔 조금 묘한 추억이지만, 결혼식 때가 생각나. 가정법원 판사 앞에 나란히 섰을 때와 네 대학 은사님 앞에 섰을 때가 겹치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그때도 가나다순으로 내가 왼쪽, 네가 오른쪽이었지. 우리는 둘 다 H라인 드레스를 입었어. 취향 따라 너는 하얀 미니 해트, 나는 웨딩 베일을 썼지만 드레스는 비슷한 디자인이었어. 웨딩 업체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력이 십 년인데, 이십 년인데, 아니 평생 이 일을 했는데 드레스가 두 벌인 결혼식은 처음이니 어쩌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나한테는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역시 여자는 여자랑 결혼을 해야 되는 것 같아, 그래야 예복을 커플룩으로 입을 거 아냐 우리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달까.

식 올린 당일에 신혼여행을 갈 계획은 아니었어서, 정확히는 비교적 한가한 연말에 가기로만 하고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아서 그냥 집으로 가야 했어. 우리 차를 타고 우리집으로. 헤어 메이크업 실장님들이 달라붙어서 네 머리, 내 머리에서 헤어핀을 각각 이백 개씩은 뽑았을 거야. 그러고도 집에서 머리 감을 때 핀이 또 나와서 깜짝 놀랐어. 머리가 무거운 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그대로 공항 보안 검색대라도 지나가면 머리에서 삑삑삑삑 난리가 났겠다 싶었어. 하여간에 보통 피곤한 날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날은 네가 처음으로 사고를 낸 날이기도 하니까.

도로 위에서는 별일 없었어. 주말이라 그런지 차들이 하도 많아 느릿느릿 가야 했으니 그야 뭐 당연하려나. 그 와중에 네가 슬슬 졸려고 하길래 내가 신보미 정신 차려, 우리 결혼기념일이 제삿날 되는 수가 있어 그런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나. 그래, 그 달팽이 행진 같은 시내 운전도 네 피로에 한몫 보탰겠지. 기어이 주차장에서 사고를 낸 건 그래서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후진하다 옆 차에 아주 살짝 부딪쳐 퉁, 아니 통, 하는 소리가 났을 뿐 큰일도 아니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싶었는데,

그때 넌 꼭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내 눈치를 봤어.

알아, 잘 알지. 나는 로로마 때문에 예뻐졌고 너는 로로마 때문에 주차를 잘하게 됐어. 그건 내 얼굴이 언제든 다시 평범해질 수 있고, 네 주차 실력이 예전만 못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알고 있었어.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더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 네 운전 경력은 우리 사랑의 역사하고 비슷해. 만으로 사 년 조금 넘게, 햇수로는 오 년째 무사고 운전 경력을 자랑하던 네가 하필 가장 자신 있어하는 주차에서 실책을 냈으니 네 심정이 어땠을까. 큰일이라고 소란을 피우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어.

그렇지만 아니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잖아. 네 자신감이 과했던 거지. 워낙 잘하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그냥 무턱대고 하기엔 또 그날 네가 너무 피곤하기도 했던 거고. 그날 그 작은 사고는 그렇게 넘기고 싶었어.

우리 사랑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을 결혼식 당일에 하고 싶지는 않았어.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결혼한 걸 후회한 적이 있어. 아니 오히려 나야말로 그렇다고 해야 할까.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건 아닐까, 동성혼 법제화, 정확히는 동성 간 혼인신고 허용 소식에 흥분해 지나치게 큰일을 벌인 건 아닐까. 우리는 속보가 뜬 당일에 손잡고 구청으로 달려간 수만 쌍의 동성 커플 중 하나야. 발 빠르고 운좋게 웨딩 업체를 구해서 두 달 만에 식까지 해치운 점에선 그 수만 쌍 가운데서도 선두라고 할 수 있겠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니 그때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결혼할 즈음은 우리가 한창 삐걱거릴 때였어. 너랑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먼 곳으로 오래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너는 집을 중심 삼은 원의 지름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해. 결혼하기 직전까지 넌 여권도 없었는데 그걸 이상하거나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지, 난 항공 마일리지 적립이 꽤 돼서 너 데리고도 후쿠오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다녀올 수도 있는데. 나는 사랑하는 단 한 사람, 그러니까 너만을 필요로 하고 너는 너를 아껴주고 네가 아끼는 사람들과의 연결을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소중히 여겨. 그 외에도 숱한 차이점들. 한식인가 양식인가 집밥인가 외식인가 맥주인가 소주인가 개인가 고양이인가.

그중에서도 제일 이해가 안 됐던 건, 넌 대체 미드를 왜 그렇게 보는 걸까? 하는 부분. 드라마 보는 네 뒤에서 나 저기 가봤다, , 우리도 나중에 저기 가볼까, 그런 말을 하면 너는 꼭 티브이 볼륨을 올렸어. 까불지 말라는 듯이. 그게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네가 절대 방문하지 않을 나라에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가족 시늉을 하는 프로그램을 집에 콕 처박혀서 보는 게.

처음에는 달라서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니 너무 달라서 좀 그렇다는 말처럼 뻔하고 무책임한 소리가 있을까. 그래도 별수없이 우리는 달랐어. 달라서 피곤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게 됐어.

그런 시기였기에 이제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소식이 더 미덥고 마침맞게 들렸을 거야. 동성 혼인신고 허용 속보는 기습적이면서도 건조했어. 왜 이제껏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막 생각난 김에 이제부터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런 뉘앙스로 느껴졌달까. 무슨무슨 전문가들은 로로마 효과가 동성의 연인 간에도 이성 연인들의 경우와 동일한 수준으로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와 표준국어대사전상 사랑의 정정 논의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기존의 사랑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뜻이었다나.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로로마 이전에는 동성 간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럼 그땐 그게 뭔 줄 알았는데?

그런 모욕감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는 그게 문제가 아니기도 했어. 알았고요, 이제 결혼해도 되죠? 그때 구청에 달려간 사람들은 다들 그런 심정이었을 거야. 우리가 그랬듯이. 결혼을 하면, 우리가 그전까지보다 더 강하고 견고한 것, 이를테면 제도라는 것으로 연결되면, 그즈음 내가 네게그리고 아마도 너 또한 내게느끼던 미묘한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생각이 아주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해. 어쩌면 진작 헤어질 수도 있었을 우리가 서로를 이 년이나 더 붙잡아둘 수 있었던 건 결국 결혼했기 때문이니까. 결혼이라는 건 그러니까…… 내 소감은…… 헤어지기를 더 번거롭게 만들자는 합의인 것 같아. 절대 못 헤어지는 건 아니지만, 결합과 결별 모두를 공공의 영역에 두면서 고통스러운 결별을 약속하는 거지. 결별이 그렇듯 어려울 것이기에 우리는 가급적 헤어지지 않겠습니다, 이 맹세의 공증에 국가가 나서도록 하는 거야.

그래서 최종적으로 너와 결혼한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아니.

시간을 돌려도 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 거야. 우리가 서로를 조금씩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그 일이 일어나는 조짐을 느끼면서도, 널 내 곁에 두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을 거야.

너도 똑같은 심정으로 똑같은 짓을 저지르려 했을 거란 사실을 아니까.

아무리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어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같았으니까.

 

*

 

법원 출입구에는 공항 보안 검색대 같은 금속 탐지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어. 왜 그럴까, 가정법원에도 흉기를 가져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나갈 때는 그 게이트를 꼭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그건 또 왜일까, 법원에서 나가면 흉기를 휘둘러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겠지만 아무튼 옆문으로 나가도 된대. 그런데도 나는 굳이 보안 검색대를 지나서 나가. 그건 네가 먼저 옆문으로 나갔기 때문.

다리에 힘은 없는데 걷자니까 어떻게 걸어지긴 해. 나와보니까 날씨는 욕이 나올 만큼 좋아. 이런 날이면 너랑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어. 너는 이런 날마다 이불을 베란다 턱에 걸고 패고 싶어했지.

너는 멀리 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어. 태워다줄게, 네가 그렇게 말할 게 겁나. 나 아직 조수석에 앉아도 돼? 내가 뒤에 앉으면 어색하지 않겠어? 그보다, 집까지 가는 길 내내 나 울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내가 먼저 말하는 게 좋겠어, 나 그냥 택시 타려고. 아니 조금만 걸으면 지하철역이니까, 날도 좋으니까 조금 걸으려고. 그런데 입에선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말이 먼저 나가.

왜 변했어?”

그래, 나는 그게 알고 싶었어. 아까 네가 끝내 하지 않은 답.

네가 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너는 나를 안아. 아아 꿈인가, 아니 꿈은 아니야. 목 언저리에서 네 분홍이 느껴져. 지금 내가 운다면 그 분홍 때문일 거야. 헤어져서도 네 분홍을 알아보는 내 피부가 원망스러워서일 거야.

나 변하지 않았어.”

네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해.

나도 변하지 않았어.”

알아.”

나에게서 한 발짝 멀어진 네가 하는 말.

우리 둘 다 변하지 못했어. 우리가 헤어지는 건 그래서야.”

맞는 말이야.

이제야 모두 이해가 돼. 정확히는, 이미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을 나도 너처럼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우리가 헤어지는 건 서로를 위해 변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남은 사랑을 아까워하지 않고 돌아서야 하는 건 그래서야.

알았어.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지만 이제는 이런 결말도 조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나 조금만 울게.

너까지 울면 나는 어떡해.

 

*

 

지금 떠오르는 건 네가 가장 좋아하던 오래된 시트콤의 한 장면이야.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최강의 픽업 라인을 전수해주고 있어. ‘내가 서유럽에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에요……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콧방귀를 뀌어. 이야기의 화자는 상식이 부족한 미국인의 스테레오 타입 같은 캐릭터라서 서유럽도 배낭여행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지. 지어낸 얘기라는 걸 간파한 거야.§

너는 이미 수도 없이 본 그 장면을 마치 처음 본다는 듯 집중해서 보고 있어. 나는 또 뒤에서 까불어. 서유럽 배낭여행, 나도 갔다 왔는데. 나야말로 진짜로 갔다 왔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너도 화면 속의 배우처럼 코웃음을 쳐. 조금 후에 내가 한 말과 거의 똑같은 대사가 나올 거라면서.

약간의 실랑이 후에 이야기는 계속돼. 사실 이야기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끝까지 제대로 구연하고 나면 이야기를 들은 상대가 홀딱 넘어온다는 점이 핵심이야. 세상에 그런 얘기가 어딨어! 내가 대놓고 비웃으면 너는 인상을 팍 쓰면서 쉿,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

이제 와서 그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게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나는 이제 알 것 같아. 그런 이야기는 있어. 꼭 서유럽이 아니어도, 배낭여행이 아니어도 괜찮아. 어떤 이야기는 단숨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해. 사랑은 원래 이야기를 먹으면서 자라나는 거니까.

우리가 나눈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랬듯이.

지하철역까지 나를 바래다주면서 너는 말했어. 우리 너무 멀어지지 말자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네게 여전히 나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거라고. 아직은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언젠가 아니게 되겠지, 앞으로 네가 사랑하게 될 누군가에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 결국 말하진 못했지만, 말하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줄곧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도 괜찮아. 언젠가 그래야 한다면 내가 먼저 괜찮다고 말해두고 싶었어.

그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는 아마 계속 예쁠 거야. 헤어지고 나서는 더 예쁠 거야. 나중에는 예쁘고 슬픈 할머니가 될 거야. 평생 예쁘다가 예쁘게 죽을 거야.

네가 주차를 잘 못하는 할머니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마 그럴 거야.

그게 내가 상상하는 우리 이야기의 끝이야.

 


§ <프렌즈>, S08×E04 ‘The One with the Videotape’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