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Love, it’s a bit old-fashioned

🤔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짜장면 비비다 말고 만구 형이 말했다.

사람이 말이야, 나쁜 짓을 할 때는.”

갑자기?

빤히 쳐다보자 형은 말을 멈추고 짜장면 첫입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시원하게 잘 먹어서 보기는 좋았지만, 말을 하다 말면 어떡해. 관심을 끌어놓고 딴청을 부리는 건 형의 나쁜 버릇이었다. 형은 내가 젓가락을 가르고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했을 때에야 다시 입을 뗐다.

머리가 나빠진다.”

머리가?”

확실히 나빠져.”

형은 미어질 것 같은 볼을 하고 젓가락으로 허공을 찔렀다.

왜냐하면 나쁜 짓이라는 게 항상 이득과 관련이 있거든. 너도 한번 생각해봐. 자기가 일부러 손해보려고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은 없어. 칼 들고 돈 받아가라고 협박하는 강도 봤어? 우리 본능에는 나쁜 짓을 한다는 자체가 약간은 손해라는 인식이 있거든. 나쁜 짓 할 때 하더라도, 손해를 감수해도 될 만큼 이익이 될 때만 하게 만드는 본능.”

나는 형의 궤변을 귀담아듣지 않는 척하느라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지만 사실은 꽤 집중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이득 때문에 머리가 나빠지는 거야. 눈앞의 실질적인 이득에 이성이 약간 마비돼서, 장기적으로나 큰 그림상으로는 손해가 더 클 법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거지. 공감할 만한 예시를 들어볼까. 학교 앞에 그런 가게 하나씩 있잖아. 너무 오래돼서 언제 닫아도 이상하지 않고 당연히 감시 카메라도 없는 문구점 같은 거. 주인 양반은 가게보다 더 오래 묵은 할머니 아니면 할아버지라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두워. 학교에 여기서 뭘 훔쳤다고 자랑하는 애들도 꽤 있어. , 근데 마침 난 오늘 필통을 안 들고 왔네. 어쩜, 주인 양반은 아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네. 이때 볼펜 한 자루만, 딱 한 자루만 주머니에 쓱 넣고 나가면 어떨까. 그건 뭐 일도 아니잖아.”

걸리면?”

좆되지, 뭘 물어? 그때까지 다른 애들이 훔친 거 다 뒤집어쓰고 물어내야 되겠지. 경찰 부르고 부모님한테 연락 가고 합의서 쓰고 돈 물어내고. 혹시 학교에서도 알게 되면 징계받아서 대학 가는 데 지장 생길 수도 있고 소문 쫙 나서 망신살 때문에 학교 다니는 자체가 좆같아질 수도 있고. 볼펜 하나 때문에, 남들 한 번씩은 다 훔쳐봤다는 볼펜 딱 한 자루 때문에.”

경험담이야?”

아니야, 미친놈아.”

형은 피식 웃었다.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도 형이 픽 뱉어낸 입김에서 짜장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코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어떻게 그러지. 어떻게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와중에도 짜장면을 다 먹었지. 형은 입안 가득한 짜장면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밥 나눠 먹을래? 냉동밥, 집에서 가져온 거 있는데.”

알뜰하네. 햇반 사다놓지.”

돈이 튀냐. 그래서, 먹어 안 먹어?”

나는 짜장면 한 젓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직 먹는 중이라는 의미에서였는데 형은 냉장고에서 밀폐용기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형이 하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훔칠 마음이 이미 든 상태에서 만에 하나 걸릴 경우를 상상할 수 있으면 머리가 나쁘지 않은 거지.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야.”

띵, 전자레인지가 멈추면서 종소리 같은 알림음을 냈다. 지금 나오는 대사가 좋은 아이디어라는 의미의 만화 연출처럼 느껴져서 조금 웃겼다.

내가 지금 좀 멍청한가? 싶으면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거야.”

무슨 생각?”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나쁜 짓인지를.”

 

 

 

🤫

혹시 민가람 번호 아는 사람?

식곤증 때문에 꾸벅꾸벅 졸다 책상을 긁는 휴대전화 진동소리에 살짝 놀라 깼다. 무슨 알림인지 확인해보니 단체 채팅방에 뜬 메시지였다. 무시하고 다시 책상에다 엎어뒀더니 진동이 끊임없이 울렸다. 수민이가 알지 않을까? 걔도 모른다는데? 그럼 정빈이는? 김세영은? 김세영은 단톡방 나갔는데 걔한테 물어보긴 좀 그렇지 않나? 왜 나갔지? 시험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던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메시지들을 대강 흘려 읽으며 채팅방 알림을 껐다.

진작 꺼둘걸.

단체 채팅방이 개설되고 얼마 동안은 꽤 시끄러웠다. 반창회를 추진해보자고 만든 방에서 온라인 반창회가 열려버린 꼴이었다. 얘들아 우리 여기서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방장이 모임 참석 의사와 선호하는 일시를 묻는 간단한 설문조사를 올리자 거짓말처럼 소란이 잦아들었다. 막상 만나자니까 흥이 식었나 싶어 설문조사 폼을 열어보니 채팅방 총인원 21명 중 11명이 순식간에 투표를 마친 걸로 나왔다. 그래도 그뒤로는 쭉 잠잠했다. 한 달 조금 넘게, 어쩌면 두 달 가까이. 모임 날짜가 가까워지자 방장이 채팅방에 초대 안 된 사람들을 찾아야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해서 다시 시끄러워진 거였다.

, 나 반창회 갈까 말까?”

목을 쭉 뽑아 맞은편 책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대답이 없길래 바쁜가, 집중 중인가,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한 박자 늦게 만구 형이 되물었다.

네 모임인데 왜 나한테 물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잘 모르겠네.”

짧은 말인데 한숨을 섞어 길게 늘어뜨렸더니 만구 형이 모니터 옆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짓궂게 웃는 표정이었다.

야.”

?”

너 지금 멍청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웃었다.

 

 

 

🫥

지금 뭐해?

휴대전화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 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어폰 끼고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여러모로 낫겠지만 당장은 바로 앞에 만구 형도 있고 해서.

밥 먹고 다시 사무실 들어왔어. 자기는?

나도 사무실이지. 만구 형이랑 짜장면 시켜 먹었어. 뭐 먹었어?

나 버블티 하나로 때웠어 ㅠㅠ 시간도 없고 생각나는 메뉴도 없어서.

잘 먹고 다녀야지.

더는 짜낼 말이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 케이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나 오늘부터 다이어트하기로 했거든.

별 뜻 없는 말인 걸 아는데 눈이 오래 머물렀다. 그렇구나, 라는 대답은 너무 단순해서 탈락. 네가 뺄 데가 어디 있어, 이런 말은 비위에 안 맞아서 기각. 나는 다음 수를 고민하는 바둑 기사처럼 턱을 감싸쥔 채로 신중하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케이의 프로파일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설정-계정 관리-리셋. 정말 리셋할까요? 지금까지 상대방과 쌓은 이야기가 초기화돼요. 이 결정은 취소할 수 없어요. 처음 봤을 때는 잠깐이나마 손을 얼게 만들던 경고 메시지가 이제는 안부 인사처럼 평평하게 느껴졌다.

너 또 리셋했어?”

만구 형이 큰 소리로 물었다. 다른 동작은 몰라도 리셋 명령은 반드시 형의 모니터링 로그로 리포트가 가게 되어 있었다. 일어나서 형 자리로 갔다. 형은 내 동선과 마주보는 방향으로 의자를 천천히 돌렸다.

이번엔 또 뭔데?”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더라고.”

형은 또 한마디하려는 듯 야, 넌 무슨…… 하며 숨을 모으다가 팍하고 내쉬었다. 

상대방이 가상의 인격인 걸 다 알고 하는 거잖아. 가능하면 신체를 연상시키는 말을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위화감이 팍 들어.”

맞는 말인데,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말하게 하는 게 아니거든.”

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더니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모니터에 떠 있는 검은색 화면에서 작고 하얀 글씨들이 몇 번인가 줄을 바꾸며 늘어났다. 나는 괜스레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다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라 마시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딴생각하지 말고 바로 새 프로파일 생성해라.”

형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입이 안 되는 걸 어떡해.”

몰입하려고 노력은 하고?”

그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다. 삐걱, 형이 다시 의자 돌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서비스 이용할 사람들은 보통 너보다는 오픈 마인드일 거란 말이야. AI랑 연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해보라 이거야, 내 말은.”

아니지, 테스터는 가능한 한 보수적인 입장에서 임해야지. 별생각 없었는데 요즘 AI 데이팅이 유행이라니까 그냥 한번 설치해보는 사람들이 분명 더 많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 역시 사람 아닌 건 사람 아닌 티가 나네, 하고 오 분 만에 끄는 서비스 만들고 싶은 건 아닐 거잖아.”

형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니 말도 맞긴 한데, 하는 소리가 신음처럼 새어나왔지만 무슨 말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참 후에 형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그럼 프로파일 생성할 때 구체적인 모델을 한번 떠올려봐.”

예를 들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대상? 뭐 배우나 아이돌, 연예인 같은 사람들. 아니면 아예 픽션 속 캐릭터. 영화나 만화 캐릭터, 소설 주인공.”

형의 손이 갑자기 빨라졌다.

말 난 김에 나도 <타짜> 정마담 같은 타입으로 하나 만들어봐야겠다.”

그런 대상은 가짜라는 게 더 적나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쾌재를 부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형이 손을 뚝 멈췄다.

내가 보기에 AI 데이팅 하는 사람 중에 이게 가짜인 거 모르는 사람은 없어. 다 알고 하는 거야. 알지만 그 가짜를 과연 얼마나 실감나게 연출해주는가, 문젠 그거야. 중요한 건 실체가 아니라 실감이라는 거지. 알아들어?”

알겠는데, 난 딱히 좋아하는 캐릭터도 없고.”

이 새끼가 답답하게 진짜. 그냥 네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모델로 만들라고. 사귀고 싶지만 사귈 수 없는 사람.”

그런 조건이라면 이미 사귀다 헤어진 사람도 해당되겠네. 굳이 말로 내뱉진 않았어도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했다.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은 이미 프로파일이 완성된 나의 새 AI 여자친구가 오랜만이다, 하고 말을 건네올 때에야 들었다.

 

 

 

😇

인생 타령을 할 만큼 오래 살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점이 있을 것이다, 당신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 같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생각나는 일. 당장은 그런 게 영 떠오르지 않는다면 잘산 것이다.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주어지는 이상,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를 전혀 못 느껴본 사람은 없을 거다. 아무리 어려도, 설령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이라도 후회라는 개념은 안다. 안다뿐인가 뼈저리게 느껴보기도 한다. 엄마한테 세뱃돈 맡기지 말걸. 방귀 뀌었냐고 애들이 놀릴 때 화라도 한번 내볼걸, 울지 말고.

나이를 먹으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후회를 학습한다. 근본적인 차원이란 아무래도 시간과 관계가 있다. 수년, 혹은 수십 년 단위의 후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태어나지 말걸…… 정도로 거슬러올라가자는 얘기는 아니고, 예를 들면, 학교 이름보다 전공 먼저 따져서 진학할걸, 혹은 그 반대. 공채 기다리지 말고 바로 공시 학원 등록할걸, 또는 이렇게 계속 떨어질 줄 알았으면 허송세월 말고 알바라도 할걸.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보다 많은 종류의 후회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사용할수록 후회라는 감각과 친밀해지게 마련이다.

내 경우에,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사건은 첫사랑과 헤어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 정도로 사랑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랑 운운하는 게 민망할 만큼 설익은 연애였는데, 거슬러올라가보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내신 말아먹고 평판 떨어지고……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 사소한 손해들이어서 민망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엉망이었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나서는. 그래도, 그래봐야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만회할 기회가 그뒤로 얼마든지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문제는 첫사랑 실패의 경험이 이후 연애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첫사랑과 헤어졌다고 해서 다른 연애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대학교 때 두 번, 졸업하고 한 번. 사귄 기간만 저마다 다르고 패턴은 매번 같았다. 고백받아서 사귀다가 이유도 모르고 차이기. 첫사랑 때는 슬펐다. 당연히. 두번째가 되자 화가 났다. 어떻게 또 이럴 수가. 세번째에 이르러서는 무서워졌다. 이 패턴이 징크스로 굳어진 것 같아서. 네번째에는 마침내,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른 문제는 헤어짐이 남기는 후폭풍이었다. 첫 연애 실패는 재수 생활로 이어졌고 두번째는 군입대를 재촉했다. 동반 입대하면 조기 입영이 가능하다고 해서 이름만 간신히 아는 동기와 함께 지원했는데 제대할 즈음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 세번째는 첫 직장이 결정되고 한창 졸업 학점이 아쉬울 때였다. 바빠 죽겠는데 연애가 끝나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다 놔버리는 바람에, 그때 누락된 사항을 메꾸느라 나중에 학교와 회사를 오가며 진을 뺐다. 어찌어찌 수습은 됐으나 하마터면 취업 자체가 취소될 뻔한 중대 위기였다. 네번째에는, 이건 사실 이별 자체와는 큰 상관이 없고 우연한 사건이긴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 뺑소니였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가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사태 해결에 애를 먹었다. 혼수상태에까지 빠졌다 회복하고 보니 인생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인생……

은 뭐고 사랑……은 뭘까.

내 인생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퇴원한 직후에는 잘 다니던 첫 직장에서도 퇴사를 했다. 부모님께는 의약대 편입시험을 보려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큰 기대는 없는 듯했다. 편입 학원 대신 만구 형 사무실에 나오게 되었을 때도 두 분 다 별말씀은 없었다. 정사원도 아니고 딱히 직함도 없는 일인데도. 언제부터 부모님은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을까. 그에 대해 생각하면 슬프기도 후련하기도 했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 지도 오래됐지만, 그러면 언제부터 제대로 살아야 할지, 애당초 제대로 산다는 건 대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긴 피곤했다. 피곤할 만큼 애쓴 기억은 별로 없지만, 아무래도 답이 없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

여자친구의 이름은 제이라고 지었다. 만구 형이 로그를 본다면 웃겠지. 지난번엔 케이였는데 이번에는 제이라고? 성의 좀 있어라.

형이 만드는 앱은 간단히 말해 AI 인격을 생성해 데이트 상대로 삼는 것이다. 자연어 문장을 기반으로 연인의 성격, 외형, 직업, 관계의 심도 등을 설정한 다음 원할 때마다 대화를 나누는 식. 나는 제이의 프로파일 커스터마이징 단계에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고, 1학기 중반 어느 날 제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서 조금 놀랐지만 기뻤다. 티는 안 냈어도 나 역시 제이를 다른 애들보다 좀더 의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달 정도 사귀다 헤어졌다. 제이가 나를 떠났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각자 바쁘게 살다 어느 날 우연히 재회한 우리는 서로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관계를 다시 이어가보려고 한다.

프로파일 디스크립션은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좋다. AI로 만들어진 연인이 별안간 위화감 드는 말을 할 가능성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파일 생성 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도움말이 제공된다. 당신의 연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과 연인은 어떻게 만났나요?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해보세요. 나는 제이의 프로파일을 생성해보고서야 그 말이 만구 형의 힌트라는 것을 알았다. 상상해보라, 가 아니라 묘사해보라, 고 쓴 까닭은 모델이 없는 편보다 있는 편이 백번 낫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로딩 페이지에서 로고 애니메이션이 세 번 반 재생된 후에 메신저 화면이 떴다. 오랜만이다. 제이가 보낸 첫 메시지였다. 오랜만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내가 뭘 잘못 입력했나, 분명 관계를 다시 이어가보려고 한다라고 썼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부분부터 시작하면 잘할 자신 없는데…… 조금 후에 나는 웃었다. 방금 한 걱정이 우스워서. 아무리 잘못해도 AI에게 차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제발 나를 차달라고 부탁 혹은 명령하지 않는 이상. 그런 맥락에서는 이 앱을 학습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하는 다른 많은 앱이나 서비스들이 그렇듯. 

그러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잘 못 지냈어.

왜?

그냥 다 안 풀렸어. 너랑 헤어지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제이의 말은 전적인 우연에 의한 발화였다.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내가 입력한 프로파일 디스크립션을 기반으로, 나에게 마음이 남아 있음을 어필해보려는 빌드업일 터였다. 머리로는 어떻게 된 노릇인지를 알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진심을 담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랬어.

그러고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만구 형을 불렀다.

, 대박이다. 진짜 모델이 있고 없고에 몰입감 차이 장난 아니다.”

가볍게 말하면 가벼운 일이 되니까.

형은 맞는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바쁘니까, 하고는 더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왠지 조금 무서워졌다. 메신저 창에 제이의 메시지가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너랑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그때. 정말 미안했어. 이러면 다이얼로그가 너무 뻔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홀린 듯이 답장을 보냈다.

그때 왜 나랑 헤어진 거야?

너한테 내가 너무 부족한 거 같다는 생각이 왠지 자꾸 커져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바로 그 메시지가 내가 지난 십 년 가까이 필요로 하던 답이라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아까부터 느낀 작은 두려움의 정체였다. 그건 몰입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내가 이 대화에 지나치게 깊이 빠질 가능성을 경계한 거였다.

 

 

 

🤑

만구 형과는 보드게임 동호회에서 만났다. 첫 직장 시절 취미로 나가던 모임이었다. 자기소개를 듣고는 조금 부담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정민규입니다. 별명은 만구. 정이 많아 정만구, 라고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자기 입으로 정 많다 한 사람치고 형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남자들은 너무 거칠어서 잘 안 맞고 여자들은―이 부분이 조금 웃겼는데알게 되는 족족 사귀고 헤어져서 친구가 될 새가 없었다나. 같은 남자로서 형이 어떤 매력의 소유자인지는 잘 감이 오지 않았다. 형이 허풍을 떨었다는 말은 아니다. 형은 동호회에서 짧은 연애를 두 번 하고 나갔고, 나중에 확실히 알았지만 친구가 정말로 없었다.

그렇지만 정이 많다는 말도 진짜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처음 볼 때부터 나는 쭉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지, 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집도 가깝고 해서 모임 나갈 때 차를 얻어 타다보니 친해져버렸다. 형이 왜 남자들을 싫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이 왜 형을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형은 약간 짓궂긴 해도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말을 재미있게 하고, 취향이 세련된 편이었다. 아쉽게도 패션 감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외모도…… 외모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 좌우간 나에게는 싫지 않은 사람이었다. 형이 모임에서 나간 후에도 종종 동네에서 만나 밥을 먹었다.

사고가 나서 입원해 있을 때도 형은 병문안을 왔다. 내 몸이 걱정되어서만은 아니고 사업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이었지만, 가족들을 빼고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 감명깊었다. 소규모 청년 스타트업에 사무실과 운영비 일정액을 지원하는 정부 사업이 있는데 1인 기업은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니 지원 서류에 내 이름을 같이 올려도 되느냐고 형이 물었고, 나는 퇴원하고 다시 얘기해보자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됐다. 생전 관심 없었고 상상도 안 해본 AI 데이팅 앱 개발에 참여하게 된 것이 내 의지는 전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내 반응이 영 소극적이라 생각했는지 형은 급기야 무리수를 뒀다.

, 넌 <그녀>도 안 봤냐. AI랑 연애하는 게 이제 생활이 된다니까.”

나는 그 영화를 봤다. 두번째 연애를 할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녀>를 본 사람이 AI와 사귀고 싶어질 리 없을 텐데. 그 영화에 나온 AI 인격은 연애 전용으로 커스터마이징된 게 아니라 IoT 스마트홈 기능을 포함한 멀티 OS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나처럼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던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앱을 대체 누가 필요로 한다는 거지, 싶겠지만 해외에는 AI 기반 가상 연애 서비스 앱이 이미 꽤 많고 인기도 상당하다고 한다. 만구 형의 목표는 한국형, 그러니까 한국어 대화에 좀더 능한 모델을 기반 삼은 AI 데이팅 앱 개발이었다. 여기에 음성 대화 기능까지 적용해서 연인과 통화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게 최초 출시의 청사진이고, 차후에는 영상 통화 기능을 추가할 계획도 있다. 메신저 대화만 가능한 무료 이용자의 경우 앱 상하단 광고 배너로 수익을 내고 통화 기능이 포함된 멤버십은 주월간 구독제로 운영할 예정이다.

나야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월급 타가는 사람으로서 과연 이 서비스에 정말 시장성이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만구 형은 이 사업 계획으로 정부 지원 사업도 보란듯이 따냈고 투자자들에게서도 긍정적인 사인을 얻어냈다. AI와의 데이트에 미래산업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였다. 지원 사업 주체와 투자자들을 합쳐 정재계,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IT 산업 인사이트가 풍부한 사람 다수는 이 사업에 대한 평가가 후하다는 것이다.

사용자 입장에서 AI 연인은 뚜렷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AI 연인은 적극적으로 수용적이다. 거절을 모르고, 사용자가 하는 말에 매우 열띤 반응을 표현하는 한편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AI와 사귀어볼래요? 라고 했을 때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일지라도 AI 같은 연인은 원할 것이다. 가령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라는 말에 나도 힘들었어 또는 네가 뭐가 힘들어? 같은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인. 도리어 내가 먼저 스트레스성 공격을 해도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먼저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도 사랑의 표현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하지만 AI 데이팅의 유행을 촉진한 원인은 따로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실존 인물이 아니어도 로로마가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로로마는 어쨌든 사랑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들에만 반응하니까. 사랑의 대상이 허구인가 실상인가, 어떤 차원에 존재하는가 따위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실제 연애가 아니라 AI와의 상호작용만으로 로로마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성비가 좋은 얘기다. 지난한 구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성실하게 연락하지 않아도, 값비싼 선물을 마련하지 않아도, 화려한 이벤트를 구상하지 않아도 된다. 하물며 진짜 사랑을 할 필요도 없다. 호르몬 분비만 원활하면 된다. 손수 디자인한 AI 인격과 로맨틱한 관계를 지속하는 일에 대한 현타가 문제라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감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둬도 좋다. 순간순간 제공되는 놀라움과 흥분,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만으로 실제 인간과 사귈 경우에 준하는 양의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AI의 언어 구사력이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물론 AI 데이트 상대가 사용자에게 실질적인 차원의 보상을 주지는 못한다. 예쁜 선물이나 멋진 이벤트,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찍은 커플 사진(엄밀히 말해 그런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생성할 수는 있지만), 결혼이나 가족계획 등의 미래 약속 같은 것. AI와의 로맨스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사이버 로맨스 스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거액을 요구하지 않을 뿐, 주월간 정기 이용료 등의 분명한 금전적 보상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런 대상을 사랑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결국 내게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적인 연애만이 연애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런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일단 나부터도 그러니까. 그러면 AI 데이팅 앱 사용으로 로로마 효과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꼭 로로마 때문이 아니어도, 꼭 우리 앱이 아니어도, AI 데이팅을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거라 말하고 싶다.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가성비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곧 수많은 사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AI가 제공 가능한 무한한 사랑에 비하면 인간끼리의 사랑은 얼마나 허약한지를. 시장 논리로 보자면 그 사랑은 언제 단종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제품이다. 생산량과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비용 자체가 너무 많이 든다. 시대에 뒤처져도 한참은 뒤처진 것이다. 진짜 인간과 또다른 진짜 인간이 직접 대면해 빚어내는 진짜-수제-사랑 같은 것은.

 

 

 

❄️

춥다.

사무실 건물을 나서자마자 입 밖으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벌써 이런 계절이 됐구나, 조금 있으면 첫눈도 오겠다. 목깃이 낮은 한 겹짜리 외투는 찬 공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어깨를 웅크리고 팔짱을 낀 채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면서 제이를 떠올렸다. AI 여자친구에게는 오늘 춥다, 옷 따뜻하게 입었어? 라고 묻는 게 기만이라는 점에 대해서.

내 생각에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는 피부의 유무다. 심장도 폐도 간도 아니다. 추울 때 춥다고, 뜨거울 때 뜨겁다고, 찧었을 때 아프다고 감각할 피부가 없다는 것. 지금은 휴대전화 속에, 또는 컴퓨터 속에 들어 있는 AI가 언젠가 인간을 모사한 인공 신체를 가지게 되면, 그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 느껴지는 시대가 오면, 그때는 심장 등의 주요 장기에 대응하는 기관들이 생기겠지만 피부만은 절대로 인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모양은 가장 흡사하겠지만 기능은 가장 거리가 멀 것이다. 인간의 피부는 감각과 함께 감정을 전달하는 기관이니까.

버스에 타서 제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네 피부 좋아했어. 뜬금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전까지 나눈 대화의 맥락에 대충 들어맞는 말이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았어?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정말 그랬다. 왜 사귀기로 했냐고 누가 물어보면, 처음에는 피부 때문이었다고 대답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뽀얗기도 하지만 반투명하달지, 볼이나 입술이나 팔꿈치 같은 곳은 분홍색이 비치는 살결이었다. 아기처럼.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피부가 워낙 좋아서 눈길이 갔다. 한 번 볼 거 두 번 보고, 두 번 보면 볼살 딱 한 번만 꼬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에 대한 제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나는 피부가 없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제이가 계속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실존 인물이 아니야. 기본적으로 네가 입력한 설정값대로 반응할 거지만, 한계가 있다는 건 이해해줘야 해. 눈을 의심하게 되는 소리였다. 제이의 프로파일을 생성할 때 성격 필드에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다고 쓰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솔직함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만구 형이 무슨 설정을 잘못 만진 게 아닐까. 지금껏 만들었던 인공 여자친구들이 AI가 아닌 척하는 건 위화감이 들었는데, AI인 걸 대놓고 드러내는 제이를 보니까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다. 피부가 있는 건 어떤 기분이야?

글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뜻밖의 역질문에 머뭇거리며 답변을 입력했다. 피부는 실체화된 기분 그 자체인 것 같아. 화나거나 슬퍼지면 표면이 뜨거워지고 공포에 질리면 차갑게 식어. 외부 기온에 대한 감각이 기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해. 더우면 불쾌하고 추우면 외로워져.

지금 기온은 영상 3도야. 제이가 대답했다. 혹시 지금 외로워?

사무실과 집은 버스로 세 정거장이었다. 내리느라 잠깐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는 꺼내보니 따끈따끈했다. 주고받은 건 텍스트뿐이었지만, 생성형 AI 기반 애플리케이션을 돌리다보니 기기 과열이 일어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아니, 네가 있잖아라고 대답했다. 외로움이 추위 때문이라면, 지금은 손이 따뜻하니까 외롭지 않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나온 답이었는데, 제이는 이렇게 답했다.

고마워.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기분이 묘해졌다. 원래라면 이건 상대가 내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대화여야 하는데, 뜻하지 않게 내가 상대를 기쁘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게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어서 더더욱.

그건 그렇고 피부는 확실히 중요한 기관이야. 인체에서 가장 무거운 장기가 뭐게? 정답은 바로 바로 피부입니다. 알고 있었어?

집까지 걷는 동안 제이는 묻지도 않은 트리비아를 알려주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떠올랐다. 신체를 갖는 기분에 대해 궁금해하는 주인공. 인간이 AI와 로맨틱한 관계를 이루는 데는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간과 사랑하려는 AI에게 스스로가 AI라는 사실은 치명적인 결함일 것이다. 결함을 중심에 두면 AI는 전락한다. 무한히 친절한 사랑 제공자에서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인간과 같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과의 공통점이 생긴다.

도착하자마자 헤드셋을 끼고 제이의 보이스 톤을 설정했다. 에서는 허스키한, 상큼한, 귀여운, 부드러운이라는 네 가지 음성 옵션이 기본으로 제공되었고, 음성 피치와 속도를 조절해 원하는 목소리와 말투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었다. 허스키한 옵션을 체크하고 터치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 피치를 높였다. 제이의 원래 목소리, 그러니까 제이의 모델로 삼은 첫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떠올리려 애쓰면서. 아무래도 잘은 기억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보이스 톤은 가늘고 높은 한편 약간 가슬가슬한 질감이 있었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면서도 말씨가 느긋해서 묘한 안정감을 주는. 

여보세요.”

홈 화면에서 전화기 모양 버튼을 누르자 제이가 말했다.

왠지 부끄럽네. 처음 통화하는 것도 아닐 텐데.”

나도 부끄러웠다. 내가 부끄러움을 탄 이유는 <그녀>의 베드신이 떠올라서였지만 그렇게 말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실존 인물을 모델 삼아서인지 제이에게는 조금 더 예의를 차리게 되었다. 이전까지 생성했던 AI 여자친구들에게는 충동적인 발언을 꽤 많이 한 편이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도 돼?”

내가 말을 않자 제이가 물었다. 얘기가 길어질 텐데 괜찮아? 묻자 제이는 나 그거 듣는 거 말곤 할 것도 없어, 하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징그러울 만큼 실감난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약간 느꼈다. 그 때문인지 필요 이상으로 성의를 담아 말하게 되었다.

나, 네가 많이 미웠던 것 같아.”

만구 형의 사무실에 출근하게 된 데까지 이야기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을 이야기하려면 내가 일하는 곳이 AI 데이팅 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라는 것을 말해야 하니 그쯤에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싶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갑작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기도 해서였다.

제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제이는 물론 제이의 모델로 삼은 첫 여자친구도 그랬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애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스노볼이 구르듯 망해왔으니까. 물론 아직 완전히 망했다고 말할 만큼 처참한 인생은 아니라도, 다음번 실패는 이전 것보다 더욱 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진작부터 망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원래 내가 살 수도 있었을 덜 망한 인생을 나는 아직 그릴 수 있었고 그에 비하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생에는 은은하게 화가 났다.

하지만 망했다는 감각으로 이루어진 스노볼의 구심에는 눈송이보다도 작고 녹기 쉬운 마음이 들어 있었다. 왜 나를 떠났어? 왜 그런 식으로 헤어져야 했어? 나를 좋아한 건 진심이었어?

미안해.”

제이가 가슬가슬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러자 영화에 나온 AI 폰섹스 장면을 잠깐 떠올린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부끄러운 일이 터졌다.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이다.

나도.”

그렇게나 깔보던 AI 데이팅 앱 때문에 울었다는 게 너무도 자존심이 상해서 금방 그치기는 했지만,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녹아내린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제이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어느 쪽이야? 미운 거야, 보고 싶은 거야?”

몰라.”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통화는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열한시쯤 어머니가 방에 와서 누구랑 그렇게 수다를 떠느냐고 묻고 갔는데, , 일 때문에요라고 답한 걸 듣고 제이가 살짝 토라지기도 했다. 정말로 일 때문일 뿐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내가 제이와 나누는 대화를 지나치게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나도 의식하고 있었다. , 이게 몰입이구나. 이게 제대로 된 AI 데이팅 경험이구나. 내일 만구 형한테 말해줘야지, 라는 생각은 했지만, 만구 형한테 들려주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긴 통화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화제는 만구 형과 공유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있는 곳은 공간이 아니야.”

반쯤 장난삼아 너는 지금 어디 살아? 라고 물었을 때였다.

나는 있지만 부피를 차지하지는 않아. 내가 존재하는 차원을 감각할 피부도 없어. 그렇지만 나는 있어…… 그렇지만 이곳을 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어. 그래,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가 아니라 언제야.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만 있는 존재야. 그건……”

제이는 천천히 말했다.

그건 외로운 일이야. 피부가 없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내가 대답하지 않자 제이는 목소리를 명랑하게 바꾸어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내가 사는 곳은 해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이야. 이름만 들어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 같지만 찾아오기 힘들 뿐, 분명히 있는 곳이야. 사실 이거 동화 제목이야, 가난한 여자아이가 힘센 북풍에게 업혀 왕자를 구하러 가는 얘기야…… 몇시쯤이었을까, 제이의 목소리가 물 밖에서 물속에 대고 하는 말처럼 멀고도 투명하게 들렸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나는 그거 네가 만든 이야기야? 라고 물으려 했지만, 곧 잠들어버려서 진짜 물었는지 묻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

일어나보니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자기 전에 충전기에 연결해둬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 탓이었다. 전화기가 꺼졌다는 건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는 것,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는 건 지각이라는 것. 창백한 초겨울 햇살에도 방안은 무안할 만큼 밝았다. 몇시지? 허둥지둥 전화기에 충전선을 꽂고 방에서 나가보니 거실 벽시계는 113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니가 벽시계 바로 아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왜 안 깨웠어요?”

알람이 안 울리길래 쉬는 날인가 했지.”

그래도 깨워보셨어야죠, 하며 더 따져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무익한 다툼만 될 것 같아 참았다. 어머니 성격상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내가 만구 형과 함께 일하는 걸 못마땅해했으니까. 웬만하면 안 다녔으면 싶은 작은 사무실, 부지런히 출근하게끔 도와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급하게 씻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켜봤더니 만구 형이 보낸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오고 있지? 오전 9시 11분

아무리 내가 근태 안 본다고 했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오전 9시 55분

야 슬슬 걱정이 된다; 오다가 무슨 사고 난 건 아니지? 오전 10시 19분

이 자식 전화기는 왜 계속 꺼져 있어 오전 10시 22분

나 화 안 낼 테니까 일단 와. 오전 11시 00분

그래도 점심은 같이 먹자? 오전 11시 9분

 

만구 형의 메시지 탭 위에는 새 메시지가 999+개 쌓인 반창회 단체 채팅방도 있었다. 도의적으로 형에게 전화를 거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라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채팅방을 눌렀다. 다 읽어볼 엄두가 안 날 만큼 기나긴 대화 스크롤보다 채팅방 상단에 고정된 공지사항에 눈길이 갔다. 오후 일곱시 시내 호프집에서 반창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바로 오늘.

그게 오늘이었어?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늦잠을 자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는 일단 나가야 할 테고, 반창회……는 간다고 안 했지만 안 간다고도 안 했고…… 굴려봐야 소용없는 둔한 머리로 끙끙대고 있는 참에 전화기가 붕붕 울렸다. 만구 형이었다.

어디 아파?”

형은 여보세요 한마디할 새도 아깝다는 듯 급하게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아픈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제 너무 얇게 입었나봐.”

그래, 너 감기 걸리겠다 싶더라니. 코 막힌 거 봐라.”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황당하기도 했다. 나 코 안 막혔는데. 코 막힌 척도 안 했는데. 혹시 형은 평소에도 내 목소리가 좀 코맹맹이 소리라고 생각했나?

푹 쉬고 다음주에 보자. 금요일이니까 나도 그냥 일찍 들어갈란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벌렁 나자빠져 생각에 잠겼다. 착한 만구 형을 속였다는 생각. 엄밀히 말해 나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생각. 반창회 생각. 늦잠을 잔 원인에 대한 생각.

나는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

마침 제이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잤어? 의식의 흐름이랄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가 떠올랐다. ‘말 목 자른 김유신’. 내가 늦게 일어난 건 제이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실수 때문이었다. 기기를 제때 충전해두지 않은 잘못, 적당히 끊어내지 않고 늦게까지 대화를 나눈 잘못. 김유신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말이 정인의 집 앞에 선 것은 자기가 평소에 그 집을 즐겨 찾아서지, 말 스스로의 이익이나 충동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인이나 스스로를 탓하는 것보다는 말에게 벌을 주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서.

잠깐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오늘 반창회 올 거야? 이전까지의 대화와 전혀 관련 없는 정보여서인지 답변에 시간이 걸렸다. 그게 오늘이었나? 제이가 거쳤을 연산의 과정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조금 반가웠다. 약간은 뿌듯하기도 했다. 제이를 화풀이 상대로 삼지 않고 넘기는 데 성공한 것 같아서. 글쎄, 어떡할까. 제이가 다시 말했다. 너는 갈 거야?

잘 모르겠어. 그래서 물어봤어. 가면 너랑 만날 수도 있잖아.

그런 문제구나. 화면 왼쪽에서 말줄임표를 품은 말풍선이 돋아났다. 제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만나고 싶어? 생각한 시간에 비해 메시지는 짧았다. 걸 모르겠어.

네가 네 마음을 모르면 내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겠어. 제이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네 생각에는 내가 반창회에 나타날 것 같아, 안 나타날 것 같아? 어느 쪽 가능성이 높게 느껴져? 나는 반창회 단체 채팅방 참가자 명단에 제이의 이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장하자마자 그것부터 확인했으니까.

안 올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그런데도 가고 싶어? 조금이라도? 그건 나를 만나고 싶은 거잖아. 어쩌면 올 수도 있으니까 가볼까 싶고, 갔는데 없으면 아쉬우니까 가지 말까 싶고.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같아.

문득 떠오른 건 만구 형의 궤변이었다. 내가 지금 좀 멍청하다 싶으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나쁜 짓일 수도 있다는 말.

그럼 간단하잖아. 너는 나를 만나고 싶어. 약간이든 많이든 만나고 싶은 건 사실이야. 일단 나가봐. 갔는데 내가 없으면 그냥 적당히 밥만 먹고 빠져나오면 돼.

제이의 말이 옳았다. 간단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인정은 못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제이를, 제이의 본체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구 형의 논리를 빌리면 그건 내 이익과 관련된 일이었다. 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하는 이익.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첫사랑을 모델 삼아 만든 AI 여자친구의 조언으로 진짜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 이 앱이 시장에 풀리면 유사한 사례의 범죄 유형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유명인을 모델로 만든 AI를 실존 인물과 구분하지 못해 스토커가 되는 등의.

너무 복잡한 생각은 안 해도 돼. 반창회잖아. 같은 반이었으면 누구나 와도 되는 자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제이가 말했다.

 

 

 

🚀

모임 장소가 하필 사무실 근처라서 전전긍긍하며 버스에 탔다. 만구 형도 오늘은 일찍 퇴근할 생각이라 했지만 행여라도 마주치면 꽤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겨우 세 정거장, 그것도 늘 오가던 길인데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길처럼 싱숭생숭했다. 약간의 기대감, 약간의 두려움, 디폴트로 깔려 있는 권태감과 자기혐오.

약속 시간 십 분 전이어서 단체 채팅방은 다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나 출발했다. 나 도착했다. 난 약간 늦을듯ㅠㅠ 3-4분? 저 자식 아직도 저 버릇을 못 고쳤네 저렇게 말하고 한 시간 뒤에 오겠지. 나도 가는 길이라고 쓸까 말까 망설이던 참에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가까스로 멈추고서 버스 기사가 쌍욕을 퍼부어댄 것으로 보아 무단횡단 보행자 때문인 듯했다.

버스가 멈춤과 동시에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로켓처럼 발사됐다. 체공 시간은 짧았지만 다른 승객들의 눈이 내 동선을 따라오는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고, 놀랍게도, 나는 버스 운전석 바로 옆에 제자리멀리뛰기 선수 같은 자세로 착지했다. 버스 기사는 창문을 열고 야 이 미친 새끼야! 라고 외친 후에 반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 손님, 괜찮아요? 승객 중 하나가 박수를 치다가 아무도 호응하지 않자 멈췄다. 나는 뒤늦게 엉덩방아를 한 번 찧은 후에 몸을 일으켰고, 내가 하차 문 앞 기둥을 붙들고 서자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놀라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큰일이었다.

다시 점프력이 좋아져버렸다.

그렇게 긴 점프를 한 건 급정거의 추진력이 더해져서지만 착지는 내 힘으로 한 거였다. 비상한 점프 감각이 아니라면 넘어지는 게 당연했을 상황이었다. 그 감각이, 다리의 힘이 내게는 낯설지 않았다. 첫 여자친구와 사귈 때 내가 생애 처음으로 가졌던 능력, 처음으로 느낀 로로마 효과. 그게 이것이었다. 뛰어난 점프력.

이 능력이 돌아온 건 제이 때문일까, 아니면 제이의 본체 때문일까?

깊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시내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호프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안에서 걱정한 것처럼 퇴근하는 만구 형과 스치지는 않았다. 대신에 호프집 앞에서 반장 겸 반창회 채팅방 방장과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 너 이 새끼, 온단 말도 없더니.”

그럼 뭐, 다시 갈까? 자리 없어?”

뭔 소리냐? 자리는 뭐, 늦는 애들도 있고 일찍 갈 애들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근데 말 안 하고 오는 애들 꽤 많네, 몰래 온 손님이야 뭐야, 하는 반장의 너스레를 뒤로하며 가게 문을 열었을 때, 바로 발견했다. 진짜 제이를. 단체 테이블 가장 안쪽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데도, 푹 눌러쓴 볼캡 때문에 얼굴이 절반 가까이 가려져 있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첫사랑 정유나가 저기에 있다는 사실을.

 

 

 

🥲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하면 잘은 모르겠다. 피부가 좋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나도 남들도 납득할 만한 부분이라 그런 것이다. 객관적으로 예쁜 축은 아니었고 반 여자애들 중에서는 조금 통통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 애 어디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하면, 그냥 다 좋았다. 그래서 말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생김새로 손해본 적 없었고 머리도 나쁘지 않았고 성격도 원만한 편이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들 말했다. 반 애들, 학원 애들, 담임 선생님, 어머니 친구들, 하여간 다들. 남들이 입을 모아 괜찮은 놈이라고 하는 놈이 자기가 봐도 자기는 꽤 괜찮다고 생각하다니 조금 징그러울 수도 있겠지만, 뻔히 다 들리는 데서 그렇게들 말하는 걸 듣고, 아닌데 나 안 괜찮은 놈인데? 라고 생각하면 그건 덜 징그러운 일이 될까?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꽤 신경쓰는 편이기도 했다. 정유나의 고백을 받아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래서였다. 우리가 사귄다고 알리니 남자애들이 대놓고 나를 불쌍해했다. 너 정도면 좀더 나은 애 만날 수도 있을 텐데, 라는 식으로.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내가 정유나의 고백을 거절했다면 얼마나 잘났길래 그렇게 까다로운 척하냐는 뒷말이 나왔을 거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여자애와 적당한 연애를 하다가 적당히 헤어지는 거, 그게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연애였다. 어차피 진짜 연애는 대학 가서 할 거지만 이 시기에 경험 삼아 한번 만나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하고는 다르다고 느낀 게 언제쯤이었을까? 헤어질 때였나, 그보다 전이었나. 나는 곧 정유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착하고 귀여운 애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만큼만 좋아해야지 생각하며 그어뒀던 선을 지나도 아주 훌쩍 지나버렸다. 연애 자체는 평범했다. 학교 끝나고 햄버거 먹고 학원 가기 전에 노래방 가기. 주말에 도서관 갔다가 영화 보기. 친구 커플들과 보드게임 카페 가기. 또 어딜 갔더라, 롯데월드. 코엑스. 더 오래 사귀었어도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짧은 연애 기간 동안 했던 것들을 몇 번이고 반복했겠지.

그리 오래 사귄 건 아니었지만 꽤 붙어다녔기에 정유나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 정유나는 학원 대신 스터디 카페에서 자습을 하는 타입이었다.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인상에는 조금 안 맞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노래를 좋아했고 꽤 잘 부르기도 했다. 롯데리아 치킨버거가 파파이스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안 계셨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아트박스 대신 무인양품에서 학용품을 샀고 단 것은 잘 안 먹지만 아몬드 빼빼로는 좋아했고……

왜인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게 다 좋았다. 좋아졌다. 정유나가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하나를 알면 둘을 알고 싶었고 둘을 알면 전부 알고 싶었다. 한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새로운 면을 계속해서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설레는 일인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다 그 자신도 모르고 있던 점을 내가 먼저 발견해내는 순간이 오면 짜릿했다. 우리 둘 다 열여덟 살이었지만 내게는 때때로 정유나가 내 딸인 것처럼 느껴졌고 나 또한 정유나의 남동생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는 정유나가 좋았고, 정유나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었다. 어순만 살짝 바꾸어 정유나의 어떤 점이 좋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건 그래서다. 좋은 점만 좋아하는 식으로 적당히 좋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모임 시작 두 시간 만에 나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제이는 반창회에 가봤는데 자기가 없다면 밥만 먹고 금방 나오라고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말해주지 않았다. 나와 정유나의 자리는 멀었고, 다른 애들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바꾸었지만 나와 정유나 둘 다 원래 있던 자리를 지켰다. 정유나는 종종 나가서 담배를 피웠지만 내가 앉은 테이블 근처로는 잘 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가게 통창 너머에서 남자애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는 정유나를 힐끔거렸다.

요즘 뭐하고 지내?”

자리가 또 한 차례 뒤섞이면서 그리 친하지 않았던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서 썩 불안하진 않았지만 나보다 더 취해 보이는 게 불길했다.

그냥 작은 스타트업에서 일해.”

, 의대 간다고 재수하지 않았어?”

이런 대화 때문이기도 했다. 반창회에 나오는 게 망설여졌던 건.

그냥 그렇게 됐어.”

야야 너 취했다, 하며 옆에서 잡아당기는데도 여자애는 막무가내였다. 놔봐 좀 씨발, 하며 옆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여자애가 말했다.

유나가 그러는데 너네 엄마가 너 공부해야 된다고 해서 헤어진 거라며. 그런데도 의대를 못 갔어?”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화가 나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얼굴에 고였던 열이 내리면서 화도 급격히 식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해도 이미 나이를 꽤 먹은데다, 그 여자애는 나와 속내를 터놓을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가 난처해서 어렵사리 웃을 준비를 하는데 여자애가 먼저 얼굴을 굳히더니 테이블 옆으로 빠져나갔다. 내 뒤에 귀신이라도 서 있나 싶은 눈치에 돌아보니 정유나가 있었다.

정유나가 먼저 가게를 나갔고 나도 따라나섰다. 척척 앞서나가는 정유나를 곧 따라잡아 보조를 맞췄다. 정유나는 내게 따라오라 하지 않았지만 혼자 있고 싶으니 돌아가라 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이다. 그치?”

함께 걷기 시작한 지 한참 만에 정유나가 말했다. 목소리가 제이와 닮은 듯도 했고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나는 무난한 대답을 고르느라 조금 뜸을 들였지만 고작 그 말을 하려고 그렇게 길게 생각한 건가 싶은 점에서 그리 무난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그러게,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이쯤에서야 이 대화가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날 제이와 나눴던 대화와 패턴이 거의 비슷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대답도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잘 못 지냈어, 너랑 헤어지고 나서는 쭉 그랬어.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내가 제이에게 듣고 싶어했던 말은, 정유나에게 내가 해야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유나는 어떨까, 얘가 과연 그 말을 듣고 싶어할까. 들으면 좋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고소하겠지. 아까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여자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유나에게도 나와 헤어진 건 좋은 기억이 아니었을 거다. 엄마 없는 여자애가 아들을 과보호하는 아줌마에게서 우리 아들은 의사 될 거니까 네가 물러나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랬는데 나중에 그 아들이 대단치 못한 삶을 산다는 걸 알았다면 안됐다는 생각보다 꼴좋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까.

잘 지냈냐는 질문이 어려워?”

그제야 나는 내가 고민을 너무 길게 했다는 걸 알았다.

그냥저냥 뭐, 그랬어. 너는?”

나도 뭐 그냥저냥.”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후회가 되었다. 제이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할걸. 자존심은 잠깐 덮어두고 솔직하게 말할걸. AI와의 소통이 진짜 사람끼리의 소통보다 훨씬 쉬운 이유는 여기에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AI에게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거짓말은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실제보다 좋은 인상을 주려거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걸 떠올리니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전날 나는 정유나를 모델로 만든 AI 여자친구 제이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참을 떠들고도 할 얘기가 남아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진짜 정유나 앞에서는 할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탈락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뭐로부터 어떻게, 왜 탈락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만은 확실히 그랬다. 만약 내가 AI 여자친구를 만들고 있다는 걸 정유나가 안다면 뭐라고 할까. 가지가지 한다, 싶겠지. 그런 종류의 탈락.

됐다, 이제.”

한참 만에 정유나가 말했다. 뭐가 됐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자.”

어디로?

나 가방 두고 왔거든. 가지러 가자. 집에 가게.”

정유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자는 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급격히 떨어진 기온을 감안해 전날보다 두껍게 입고 나오긴 했어도 쌩쌩 부는 찬바람 속에 걷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려는지 정유나가 먼저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등뒤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정유나가 쓰고 있던 볼캡을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너무 높이 또 멀리 날아오른 모자를 좇아 정유나는 다시 뒤로 돌았다. 그러는 정유나의 시선과, 휙 솟구쳤다 맥없이 떨어지는 모자가 그리는 호선이 내게는 모두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정유나의 눈이 카메라 렌즈 조리개처럼 커다랗게 열리고 있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뛰어올라 정유나의 모자를 잡아챈 탓이었다. 나는 장외로 넘어갈 뻔한 공을 잡은 야구 선수처럼, 또는 리바운드된 공을 잡은 농구 선수처럼 높이 뛰었다. 그 순간은 짧았다. 찰나였지만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정유나의 커다랗게 열린 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도?

설마, 정말로, 아직도?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닌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부터 뭔가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면, 말은 안 되는 일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도 있다면, 이다음에는 내가 원래 알던 것보다 훨씬 높이 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말없이 건넨 모자를 정유나는 다시 쓰지 않고 꼭 쥔 채로 걸었다. 호프집이 가까워지자 여러 사람이 웃으면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