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1. 사랑은 유행
인류 역사상 사랑보다 오래 유행한 게 있을까?
당신은 나른한 한낮의 베란다. 손에는 걸레를 쥐고 시선은 창밖, 유아차를 밀며 놀이터 둘레를 거니는 여자들을 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햇살이 참 좋죠. 안녕하세요, 미세먼지 농도가 좀 걱정이긴 해도. 당신은 아기 엄마들이 주고받을 대화를 상상하며 자기 입술을 달싹인다, 낯선 외국어 영화를 엉터리로 더빙하는 장난을 칠 때처럼. 주르륵. 힘껏 비틀어 짠 걸레에서 흘러나온 물이 베란다 배수구로 기어간다. 창밖 여자들의 걸음처럼 느리지만 분명한 방향을 지닌 움직임. 어느덧 퍼걸러 아래에 들어간 여자들은 이제 종아리와 발목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자들의 시선이 향했을 쪽으로 당신도 눈을 옮긴다. 즉 퍼걸러 앞 모래밭, 아파트 어린애들이 모여 흙장난을 치고 있는.
그런데 정말이지 사랑보다 오래 유행한 게 있기나 할까?
당신을 그런 생각, 생각이랄지 몽상, 그렇다기보다 말장난 같은 상념으로 이끈 것은 물론 여자들. 고가의 유아차를 끄는, 12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아도 그리 젊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한 아기 엄마들. 망측한 생각을 하려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저 원숙한 여자들이 하나씩 껴안고 있는 아기들이 어떤 행위의 결과인가에 대한? 하지만 정말 그게 아니다, 당신의 작은 머리 속에서 사랑이라는 말과 유행이라는 개념이 서로 손을 잡게 만든 것은, 정확히는 엄마들이 아니라 아이들 쪽. 내 아이는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라는 주제.
그건 말하자면 당신이 요즘 하는 생각을 저 여자들도 똑같이 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
인류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 당신은 당신 조상들의 사랑의 결과이며 당신 후손들은 당신 사랑의 증거. 물론 사랑 없는 결합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부부는 아무리 불우한 결혼이라도 굳이 사랑하는 척을 한다,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그건 한 사람의 기원에 사랑이 없었다는 폭로가 거의 범죄나 다름없다는 의미, 또한 이 전제를 시인하는 사회적 제스처.
그러니까 사랑, 그것은 당신과 적어도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과 아마도 온 인류의 관심사.
인류의 어제에 있었고 오늘 있으며 내일도 있을 가장 오랜 유행.
“수호야!”
그 이름의 등장과 함께 당신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을 송두리째 지운다. 생각뿐일까, 당신이 원래는 베란다에 놓인 화분의 이파리들을 닦으러 나왔다는 사실조차 당신은 잊는다. 거기가 베란다라는 것은 물론 한순간 당신이 당신이란 것도 깜빡할 뻔했다. 놓친 것인지 놓은 것인지 모르게 걸레는 바닥에 떨어졌다. 오른손을 높이 든 당신은 베란다 창에 거의 달라붙은 채, 그것만이 당신이 아는 유일한 단어인 양 아들의 이름을 줄곧 외친다. “수호야! 수호! 여기 좀 봐.” 지금 막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선 수호는 이제야 막 자기 이름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퍼걸러 아래 앉아 있는 여자들의 아이들보다 훨씬 크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에 단지 놀이터를 가로질러 걷는 것만으로 수호가 퍼걸러 아래 모인 여자들의 이목을 한몸에 모으고 있을 거라 당신은 확신한다. 부럽겠지. 샘나겠지. 우리 애도 저렇게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그 여자들이 수호를 남자로 인식할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당신도 수호를 낳은 이후로는 자기보다 영(young)한 남자를 그런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이 퍼걸러 아래에 있는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당신은 아이를 거의 다 키웠고 그 여자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빼면. 하지만 바로 그게 아주 중요한 차이다. 당신을 퍼걸러 여자들, 나아가 다른 모든 여자들과 아주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수호라는 존재다. 잘생기고 키 크고, 성격 반듯하고 머리 좋은 아들. 낳은 공도 공이지만 길러낸 정성을 생각하면 다신 못 만들 것 같은, 수천 번 수만 번을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이 뿌듯한 걸작.
당신이 베란다 창을 열며 다시 수호야, 하고 불렀을 때 수호는 마침 퍼걸러 앞을 지나고 있었다. 수호가 허리를 펴고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 때 수런수런 떠들던 여자들이 뚝 조용해진 것을, 당신은 분명히 감지했다. 그렇다니까. 나한테만 잘난 아들이 아닌 거야 얘는. 오늘 시험 어땠어? 잘 봤어? 당신이 베란다 난간을 쥐고 깡총깡총 뛰며 묻자 수호는 휴대폰을 높이 들어 보인다. 거실 소파 위에서 당신 휴대폰이 지르르 지르르 떨기 시작한다. 아아, 아파트 시끄러우니까 소리지르지 말고 통화하자는 거구나. 얘는, 그냥 올라와서 얘기하면 될 걸. 아차차 나부터가 아직 다 올라오지도 않은 애한테 그랬지? 그렇다니까, 수호 얘가 나보다 생각이 더 깊다니까. 나는 어쩜 이런 아들을 뒀을까.
이애랑 사귈 여자애는 얼마나 행복할까.
“시험 어땠어? 할 만했어?”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그치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당신은 현관으로 달려가 묻는다. 손사래를 치는 아이에게서 가방과 체육복 상의를 굳이 받아내고, 그애 방문 앞까지 졸졸 따라가며 연신 물으니 아이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대꾸한다.
“그럭저럭 봤지 뭐. 나 바로 나가서 애들이랑 농구 하기로 했어요.”
“저녁은?”
“먹고 들어올 것 같아요.”
“숙제는?”
“중간고사 오늘 끝났는데 숙제는 무슨.”
“여자친구는?”
당신의 마지막 물음에 수호는 방문 앞에 뚝 멈춰 선다. 화가 난 걸까, 저녁식사나 숙제처럼 툭툭 물으면 툭툭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거 물어봐서 화났어? 하며 간을 볼까 네가 왜 정색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안면몰수를 할까, 망설이는 당신을 향해 수호는 빙긋 웃어준다. 조금 긴장해서 뻣뻣해진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 진짜로 여친 사귀면 섭섭해서 어쩌려고 이래?”
방문이 닫힌다. 민망해선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당신을 방밖에 남겨둔 채로. 그러게, 서운하긴 할 것 같아. 누구한테 말도 못할 상실감이어서 혼자 끙끙 앓겠지. 울 수도 있어, 어쩌면 나는 울 수도 있어. 지금껏 알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근사한 내 아들의 첫 연애를 알게 되는 날에는. 곰곰 이어진 당신의 생각은 다시 감탄으로 이어진다. 얘는 어쩜 이렇게 어른스러울까. 자기가 여자친구를 사귀면 엄마가 섭섭해할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닐 텐데. 그래, 이런 점이 특히 그렇다는 거야, 얘랑 사귈 여자애는 자기 마음을 오해당하는 일이 없을 거 아냐. 알지도 못하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그 여자애가 벌써부터 부럽고 얄미운 건 내가 네 엄마라서만은 아닐 거야.
하지만 그런 마음보다도 네가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 궁금한 마음이 정말로 더 큰걸.
수호는 금방 다시 나온다. 간편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입었던 교복은 흰 셔츠 따로 감색 바지 따로 분리해서 세탁 바구니에 넣고 냉장고에서 꺼낸 보리차를 유리컵에 따라 마신 다음, 컵을 설거지통에 넣고 현관에 반듯하게 서서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한다.
“좋아하는 애는? 좋아하는 애도 없어?”
응석 부리듯 묻는 당신에게 수호는 또 웃어준다.
“생기면 말해줄게요.”
“다른 애들은? 친구들 중에는 여자친구 생긴 애 없어?”
몰라요, 다녀오겠습니다. 수호는 농구화에 까치발을 심은 꼴로 발을 질질 끌며 현관을 나선다. 그렇게 급하게 나가고 싶었을까, 현관문이 탕 닫히는 소리가 당신과 수호 사이에 가로놓인 셔터가 내려가는 효과음인 양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호에게 아직은 여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한편으로 조금은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혼란스럽다.
아니야, 아니지.
요즘 세상에 저렇게 괜찮은 애가 아직 사랑을 모른다는 게 자랑은 결코 아니야.
당신은 베란다로 돌아간다. 팽개쳤던 걸레를 다시 집어들고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다 끝내 아파트 단지 정문을 넘어서는 수호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본다. 퍼걸러 아래 앉은 여자들은 이미 저멀리 걸어간 그애가 아직 보일까, 보인다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을까, 저렇게 멀쩡한 남자애가 아직 여자친구 한 번 사귀어본 적 없다는 걸 상상이나 할까. 그럴 수도 있다고?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내 아들이어선 안 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당신을 어떤 엄마라 부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 수 있다. 우선 당신은 당연히, 스스로를 완벽한 엄마라 생각하고 싶다. 당신의 눈에 수호는 완벽한 아들이고, 물론 완벽한 아들은 완벽한 엄마의 손에서 자라나니까. 이에 어떤 사람들은 당신에게 극성 엄마 딱지를 붙이고 싶어할 것이다. 눈만 뜨면 아들아들 꿈에서도 아들아들, 보나마나 학교, 학원, 지역사회 전체에 치맛바람을 자연재해급으로 휘날릴 거라고. 당신은 이들에게 코웃음 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이 얼마나 완벽한 엄마인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디테일이 바로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수호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 유치원이든 학원이든 학교든 당장 쫓아가 따지고 싶은 순간, 담임 교무주임 교감 교장과 면담하며 아이를 잘 좀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도 없는 그 모든 순간들을 당신이 어떻게 참아 넘겨왔는데. 가서 으르고 따져서 속이 풀리는 건 잠깐이지만 나대는 엄마라는 낙인은 영원히 남는다는 걸 당신은 너무나 잘 알았다. 나대는 엄마의 아들이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엄마가 영원히 나댈 수밖에 없다. 그럼 뭐 엄마가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장차 취직할 직장에서도 나대줘야 하나? 그럴 수는 없지. 무슨 일을 겪었을 때, 그 당장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아도 아들이 직접 그 일을 핸들링하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그애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당신은 진작에 알았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당신을 현명한 엄마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 키우기 전략은 그랬다, 일단 다른 아들 엄마들이 물론 그러듯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은 당연지사. 아들이라는 존재가 워낙 그렇지, 여자애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당신이 한때 여자애였기 때문에 확신하건대, 여자애들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하고 여자애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아이의 서투름과 느림에 성내거나 탄식하지 않고 열의 열 가지를 빠짐없이 챙기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열한번째 원칙. 아이가 마마보이 소리를 듣지 않게끔 대외적으로 엄마의 존재감을 숨기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수호를 보기 드문 남자애로 키울 수 있었던 비결에서 수호의 타고난 특별함을 제외한다면, 바로 이 디테일이 당신의 승부처가 되었을 터.
그러나 겸손한 엄마로서, 그러니까 대외적으로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현명한 엄마로서, 완벽한 엄마라는 호칭을 굳이 사양해야 한다 치면, 당신은 스스로를 트렌디한 엄마라 정의하고 싶다. 하루종일 쇼트폼 영상을 들여다보며 배운 밈을 아들한테 써먹으며 요즘 이게 유행이라며? 요새 애들은 이런 줄임말을 쓴다며? 물어대는 엄마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요즘 아이들이 그런 짓거리에 얼마나 질색하는지를 아는 엄마.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아들이 어떻게 발맞추게 할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프로듀스를 아들에게 제공하려는 마음가짐의 차원에서,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은 누가 뭐래도 트렌디한 엄마.
그런 당신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사랑.
언제는 그게 유행 아니었던 적도 있나. 당신에게는 이런 자조, 자조랄지 의아감, 그렇다기보다 야유에 가까운 내심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안다. 유사 이래 전 인류 초미의 관심사였던 그것의 인기가, 오늘날에야말로 가히 폭발적인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유는 단순하다. 사랑의 유익과 효능이 완전히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당신이 이웃과 나눈 대화를 되새겨보자.
“수호가 지금 몇 학년이지?”
단지 앞 마트에서 마주친 그 여자는 당신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그 여자의 남편은 당신의 배우자와 같은 성형외과에서 일한다. 부부 동반 모임에서 종종 말을 섞으며 친한 척해왔지만 늘 묘하게 불편했던 그 여자는 당신과 나이가 같은데, 그쪽 부부의 결혼이 좀더 일렀고 그들의 아들은 수호보다 세 살 많다. 그 집 아들이 재수를 거쳐 올 초에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남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기억력이 왜 이렇게 나쁘지, 지 아들 학번이 한 해 밀려서 내 아들 학년도 헷갈리나.
“올해 2학년이죠. 고등학교.”
“어머, 그럼 수호 엄마 지금이 제일 힘들겠다. 고3은 자기부터가 조심조심이라 차라리 좀 낫거든? 근데 2학년은 말야, 지가 예비 수험생이라는 위기의식이 없어가지고 엄마만 혼자 똥줄이 타요.”
이 여자가 이렇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말 놓기로 합의한 적이 없는데 제멋대로 반존대. 쓰는 어휘도 그래, 수준 떨어지게 똥줄이 뭐야 똥줄이. 당신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내 아들이 지 아들 같은 줄 아나, 우리 수호는 속 썩인 적이 없거든?
“뭐 알아서 잘하겠죠. 수호도 그 댁 아드님처럼 좋은 결과 거둬야 할 텐데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상대가 적당히 듣기 좋은 말에 만족하고 떠나주길 바라서였지만 이웃 여자는 기다리던 말이 드디어 나왔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아휴, 이 새끼 이번에도 의대 못 보내면 군대나 보내야지 했는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재수 학원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가지고 말야.”
재수생이 연애를 해서 의대에 갔다는 게 무슨 말이지, 일타 강사를 꼬셔서 개인 과외라도 받은 게 아닌 다음에야. 미심쩍어하는 당신에게 이웃 여자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누설하듯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거 있잖아, 로로마(Loloma). 로로마.”
“그게 학습 능력에도 영향을 미쳐요?”
로로마는 2010년대 후반부터 수도로 공급된 미생물의 별명. 소위 ‘사랑의 힘’ 미생물이라 하는 그것이다. 이웃 여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수하면서 다른 거 다 올랐는데 수학만 늘 골치였거든, 다 풀 수는 있는 문젠데 맨날 시간이 모자라다나 뭐라나. 근데 연애하고 딱 그게 좋아진 거예요, 연산 능력이.”
여자는 검지를 세워 보이며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1등급, 1등급 하고 뇌었다. 남편하고 둘이서 그 집 아들은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다고 몇 번이나 흉을 봤었는데, 걔가 수학 1등급이 나올 정도면 사랑의 힘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가보다…… 당신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여자와 마주할 동안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상이었다.
“난 그래서 우리 아들 여친, 아예 그냥 딸이라고 부르잖아.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걔랑 아주 결혼도 했으면 좋겠어. 내가 아들 몰래 용돈도 몇 번 줬다니까?”
당신은 우웩 구역질하는 상상을 했다. 아들 여친이 아들 여친이지 딸은 무슨 딸이야, 아들이랑 딸이랑 결혼을 왜 시켜. 하지만 그 여자의 심정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로로마로 강화되는 능력치는 완전히 무작위라 하니 이웃 여자 입장에선 아들이 마침 딱 그 여자애와 사귄 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처럼 느껴질 만하고, 그럼 그 여자애가 넝쿨째 굴러온 복덩이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하여 그것으로 대화가 끝났어도 속이 시끄러울 여지가 충분한 당신인데, 이웃 여자는 거기서 굳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수호는 아직 여자친구 없어?”
“모르죠, 연애는 하는데 저한테 말만 안 하고 있는 건지.”
“그렇지? 수호 같은 애가 없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엉뚱한 여자애 만나지 않게 해야 돼. 알죠?”
그리하여 얼마간 유예될 가능성이 있었던 당신의 고민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즉시 시작된 것이다. 여태 아들의 연애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뒤처진 엄마라는 뜻이 되나?
설마 저 여자보다도?
이웃 여자와의 대화가 무슨 영향을 미친 건지, 단순히 기분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 이후 접속하는 SNS마다 로로마와 관련된 알고리즘을 당신 앞에 들이밀었다. 사랑을 할 때 체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감응하는 로로마의 기전, 2001년 남태평양 작은 섬에서 발견된 로로마의 유래, 로로마로 인해 이색적인 능력이 강화된 먼 나라 이웃 나라 사람들의 다종다양한 사례, 이미 알고 있었거나 크게 관심 없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당신의 눈을 사로잡은 건 최근 막 유행이 시작된 키즈팅이라는 문화에 대한 쇼트폼 영상이었다. 로로마로 신장할 수 있는 능력이 무작위인 이상 최대한 일찍부터 가능한 많은 사랑을 해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이르면 유치원생 연령의 아동끼리 만남을 주선한다는 이야기. 물론 자녀가 ‘엉뚱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으니 직장 동료나 같은 아파트 주민 등 사회적 배경이 비슷한 그룹끼리, 어디까지나 가정 간의 합의하에 부모의 입회하에 진행한다는 보충 설명.
한마디로 사랑도 조기교육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는 거구나.
늘 그렇듯 당신은 빠르게 상황을 간파했고, 수호 일에라면 또 항상 조금씩 그랬듯 막막함을 느꼈다. 늦었구나, 우리 애는. 내가 더 트인 엄마였더라면 진작에 괜찮은 여자애 몇몇쯤은 물색해놨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러듯 당신은 곧 낙관에 돌입했다. 수호가 그만큼 괜찮은 애라서. 약간 뒤늦더라도 끝내주는 상대와 최고급 사랑을 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도 그럴 것이 당신에게 이 관심사를 심어준 이웃 여자의 아들, 바로 걔의 사례가 그렇지 않은가, 어느 면모를 보나 수호보다 한참은 처지는데다 나이도 세 살이나 많은 걔조차 뒤늦게나마 첫 연애를 터서 결국에는 효도를 했다고 하니까…… 게다가 수호는 지금 막 중간고사 기간. 적어도 시험 끝날 때까진 이 얘기로 아들을 괴롭히지 않기로 당신은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다시 지금, 당신은 불안하다. 당신이 안달나 있는 만큼 수호가 이 유행에 함께 열 올려주지 않는 것이 불안하고 완벽에 가까웠던 지금까지의 양육이 시대에 뒤처졌던 단 하나의 판단 때문에 한순간에 모조리 어그러질까봐 불안한데, 웬걸 정반대의 지점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불안이 등등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당신 앞에 수호가 정말로 여자친구를 데려올까 불안하고 그 여자친구가 수호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이를테면 공간지각 능력이나 연역 추론 능력 같은 걸 강화시켜주는 애가 아닐까봐 또 불안하다. 이래도 불안 저래도 불안. 당신은 워낙 잔잔해서 있는 둥 없는 둥 했던 수호의 사춘기를 뒤늦게 대신 겪는 것만 같다.
이것도 다 사랑 때문이야, 그렇지?
물론 그렇다, 아들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시름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언제나 그렇듯, 당신의 생각은 옳다.
이 아픈 깨달음에는 어딘지 달콤한 구석이 있고.
태몽은 동아시아 일부 문화권에서만 꾸는 것이라 한다. 달리 말하면 본인의 태생을 예지하는 꿈을 쥐고 태어나는 것이 특정 문화권 내에서만 가능한 배타적 경험이라는 의미. 당신은 수호의 태몽을 꾸지 못했다. 시댁, 친정, 남편, 하물며 대학 졸업하고 당신 결혼식 때까지 별 연락도 주고받지 않던 대학 동창마저 어느 이른 아침에 내가 좀 태몽 느낌 나는 꿈을 꿨는데 내 주변에 임신 계획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거든? 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지만, 오로지 당신만이, 오히려 당신만은 임신 기간 내내 꿈 없이 캄캄한 잠을 잤다. 이 점을 당신은 수호에게 조금 미안해하고 있다. 이 특별한 아이에게 더욱 특별한 이야기를 부여해주지 못한 게 미안, 그런데 실은 미안하기만 한 게 아니라 고맙기도 하다. 몸속에서마저 너무나 순하고 선했던 나머지 엄마가 언제나 깊은 잠을 자게 배려해준 아이, 똑바로 눕기도 옆으로 눕기도 불편한 임신 말기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곧장 코를 골 수 있게 허락해준 아이.
그렇게 네가 특별했단다.
오히려 수호가 태어난 이후에야 당신은 어떤 꿈을 꾸기 시작했다. 출산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종종 꾸는 이 꿈의 배경은 아마도 당신의 체내. 당신은 수호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본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둡고 어째서인지 따뜻한 미지의 공간 한가운데 작은 점으로 된 빛이 뿅 하고 나타나고, 그 작은 빛 덕에 어둠이 지닌 손이 윤곽을 드러낸다. 이 꿈에서 당신은 몸이 없다. 그야 이 꿈은 당신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시신경과 안구가 내시경 카메라처럼 몸안을 더듬어내려가 자궁 안을 조망하는 듯한 느낌이다. 토닥토닥. 당신의 어둠의 손이 빛을 모으고 다듬는다. 빛의 구체는 점점 커지고 주름지며 아기의 모양이 되어간다. 얼굴로 추정되는 부위 어디쯤에 U자 모양 흠을 한 쌍 내서 감은 눈꺼풀을 만들고, 양옆으로 잡아 뽑은 덩어리가 팔이 되고, 팔 끝에 깍지를 끼고 조물조물 주물러 손가락 발생. 팔이 생기자 아기는 기지개를 켜고, 다리가 생기면 발차기를 한다. 어둠의 손은 아기처럼 작고 섬세해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요 작은 것에서도 돋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속눈썹까지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쓰다듬어 자아낸다. 완연한 아기의 형태가 된 빛은 이따금 발가락을 쥔 채 꿈틀, 몸을 뒤치거나 이 없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한다. 아……
사랑스러워!
내가 이런 걸 만들다니. 이렇게 작고 소중하고 특별한 걸 만들다니. 그게 인형처럼 잠잠히 모양만으로 귀여운 게 아니고, 연하지만 뼈도 있고 적지만 피도 흐르고 콩알만한 주제에 피부도 손톱 발톱도 다 있어서 만지면 부드럽기도 하고 어쭈 제법 단단한 구석도 있다니. 플라스틱이나 합성고무로 만든 게 아니라 내 살로 만든 거라 안으면 따뜻하고 아플 땐 열이 나고 땀도 흘릴 줄 알다니. 언제까지고 마냥 이 모양인 게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자라는 기능까지 있다니, 자라면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움직일 수도 있다니.
정말 너무 신기해.
당연히 이 꿈은 당신이 배우거나 배우지 않은 어떤 과학에도 근거하지 않았고, 이 꿈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영감은 아이를 낳고 안은 순간에 당신이 받은 깊은 인상이다. 그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무리 밝고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라도 크게 뜬 두 눈과 잘 훈련된 양손으로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존재가 어둡고 비좁은 공간 안에서 눈도 없고 손도 없이 빚어졌다는 사실은. 모양만 그럴싸하게 주물러진 게 아니라 생장하고 사랑하는 기능까지 있다는 사실은.
내 몸은 뭘 어떻게 알고 네 몸을 만든 걸까.
신기해, 네가 살아 있다는 게.
네가 너라는 게.
그게 고마워.
이게 고마운 이유는 내가 너를 사랑해서겠지.
그런 그애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 태어난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가고 키도 당신보다 훌쩍 커버린 지 오래. 당신은 수호가 처음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당신에게 처음 사랑한다고 한 날과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한 삼 년 전 어느 날을 모두 기억한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고 가르쳐준 적도 없는 말을 하고 제 딴에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제 엄마 아빠를 속이려 한 적도 있는 그애. 이제는 거의 성인 남성의 형태로 자라버린 그애와 당신이 한때 품에 담쏙 안을 수 있었고 여전히 꿈에도 종종 나오는 발가벗은 아기를 당신은 별 위화감 없이 동일한 존재로 여기며 산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란 바로 그 의외성에 있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엄마는 항상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하면 아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너는 경이로 꽉 찬 존재니까.
성장이라는 건 언제나 놀라운 거니까.
막상 수호가 데려온 첫번째 여자친구를 보고서는 그렇게 기뻐하지 못할 당신이었지만 어쨌든, 그전까지의 생각은 그랬다.
그러니까 당신도 다음 사건의 돌발성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수호가 하굣길에 불쑥 전화를 걸어와 오늘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가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날이 온다는 것, 그게 당신 예상보다 조금 빠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런 종류의 돌발성은 미리 예측은 할 수 있어도 대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당신은 허둥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묻는다. 시험은 어땠어? 때마침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기에 질문은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들린다. 여자친구 이슈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이어 수호는 지금 부담스러우면 가지 말까? 묻고 당신은 아냐, 아냐 꼭 데려와, 신신당부를 한 뒤 전화를 끊는다.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했더라, 아 맞다 베란다 화초 이파리 닦으려 했는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인가 거실에 뭐 없나. 청소기, 청소기만이라도 간단히 돌려두자. 애들 줄 만한 간식거리가 있나? 와인 안주 삼아 사다놓은 치즈 플래터, 이건 수호는 잘 먹지만 여자애가 어떨는지. 모르겠다 와서 입 심심하다 하면 배달을 시켜주든지 둘이 나가서 사먹으라고 용돈을 주든가 하고. 청소기 돌리기 전에 머리 한번 빗을까? 립스틱이라도 발라? 여자애 입장에서 남자친구 엄마가 너무 꾸미고 있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을까? 아니 뭐 부스스한 꼴로 나오는 것보다야 그 편이 성의 있어 보이고 좀 낫지.
헐레벌떡 살림과 용모를 정비하고 소파에 앉아 여러 번 자세를 고치며 위엄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태도를 고민하던 차에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반사적으로 현관을 바라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들어와 문을 닫는 수호는 혼자다.
“여자친구는?”
“밖에 있겠대요. 금방 다시 나갈 건데 괜히 자기 온다고 해서 아줌마 불편하시겠다고.”
“들어오라고 해.”
“굳이?”
“아무리 잠깐 왔다 가더라도 어른이 있는데, 인사는 하는 게 예의야.”
수호는 그런가, 하더니 현관문 밖에 선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내가 수호 엄마야 하고 인사하며 당신은 여자애를 재빨리 뜯어본다. 생각보다는 예쁘지가 않다, 조목조목 보면 귀여운 느낌이야 있을 법하지만. 요즘 아이답지 않게 키가 작아 꼭 당신만한 여자애는 당신보다 조금 더 살집이 있어 보이고, 뭐 피부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희고 고와 그야말로 아기 같은 인상이다. 얘는 왜 불편하게 굳이 밖에 있으려 했을까? 어른이 어려운가? 그건 가정교육 문제인데.
나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 하고 수호가 방으로 간 사이 당신은 티 안 나게 여자애를 심문해보기로 한다. 얼마나 만났니? 한 달쯤 됐어요. 누가 먼저 고백했니? 제가요, 수호 농구 하는 거 보고 멋있어서요. 당돌하구나, 하고 당신은 속으로 생각한다. 감탄과 탄식 그 사이 어디쯤의 감각. 수호랑 같은 반이니? 수호처럼 외동이니? 아줌마가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서 미안한데 수호 여자친구를 처음 봐서 너무 반갑고 신기해서 그래, 꿈은 뭐니? 오늘 시험은 잘 봤니? 이리 와서 옆에 앉아봐, 왜 불편하게 거기 계속 서 있니?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요. 궁금한 거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수호랑 연락 안 될 때 대비해서 아줌마가 네 연락처를 받아둬도 되겠니, 당신이 묻고 여자애가 휴대폰을 꺼내든 순간 수호가 방밖으로 나와 여자애를 감싼다. 여자애가 불쑥 꺼냈다 도로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특히 케이스가 얼마나 꼬질꼬질했는지에 당신의 온 신경이 주목된다. 에어 프라이어에 넣고 구운 듯 갈색으로 바랜 젤리 케이스에 온갖 스티커를 붙였다 뗐다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구형 스마트폰. 애가 애가 여자애가 휴대폰 꼴이 그게 뭐야. 가만 보니 교복 셔츠 깃도 살짝 누런 게 엄마가 애벌빨래를 안 해주나보지, 여자애니까 자기가 직접 해도 될 텐데.
집에 홀로 남은 당신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처럼 외롭고 기막혀진다. 거기서 수호가 여자애를 감쌀 줄은, 내가 뭐 걔를 일방적으로 해코지하려 한 것도 아니고 싸움을 건 것도 아닌데 걔 편을 들 줄은. 작은 심술이랍시고 당신은 수호에게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소파에 던져둔다. 겨우 한 달 만난 여자애가, 지가 먼저 좋아해서 만난 것도 아닌 여자애가 엄마보다 중요했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진짜.
하나 다행한 점이 있다면 아들의 첫 여자친구를 목격하고 울어버리면 어떡하나 했던 당신의 걱정이 빗나갔다는 것. 울긴 내가 왜 울어, 우는 건……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수호한테 어울리는 여자애라야 말이 되지. 내 아들이 얘를 말도 못하게 사랑하는구나, 그렇겠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여자애라야지, 걔는……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구나. 어떻게 그랬지? 이름도 궁금하지가 않았어 걔는.
당신은 조금도 경계심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그 여자애를 수호가 왜 만나고 있는지 궁리하기 시작한다. 설마 내 탓인가, 내가 하도 여자친구 언제 사귀냐고 들들 볶아서 제일 먼저 고백해온 여자애를 덥석 사귄 거 아닌가. 설마 불쌍해서 만나나? 짧게 봤지만 교복이며 소지품 꼬락서니 어느 하나 단정치 못하고 어른 대하는 법도 모르는 걸 보아 사정이 그렇게 좋은 집 애 같진 않던데. 아니 설마 반항하는 건가? 수호 걔가 엄마 마음을 그렇게 모르는 애가 아닌데, 엄마가 질색팔색할 만한 여자애를 혹시 일부러?
당신은 세차게 도리질을 쳐 그 모든 설마를 떨쳐내려 한다. 아니지 아니야. 아들 믿어야지. 내 아들 내가 안 믿어주면 누가 믿어줘. 또한 중요한 건 그 여자애가 어떤 애인가보다 그 여자애를 사귀어 수호가 어떤 이익을 보는가라는 점을 당신은 상기한다. 수호에게 의미 있는 능력을 신장해주기만 한다면 그 못마땅한 여자애가 아니라 어디 고철 집에서 주워온 부루스타라든가, 그에 준하게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상관이 없는 거다, 이론상으로는.
과연 믿음직한 아들임을 증명하듯 수호는 금방 돌아온다. 여자애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냥 왔다는 설명. 모처럼 남편도 일찍 퇴근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 당신은 수호의 첫 연애를 공히 축하해주자는 화제를 꺼낸다. 명목상 수호의 연애 소식을 남편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지만 내용상으론 당신이 은근슬쩍 수호를 추궁하는 목적의 대화다.
“잠깐 봤는데 애가 귀엽고 당돌하더라. 수호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생각한 바와 정반대의 말을 꺼낸 이유는 수호가 아냐 아직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고 그냥 만나보는 거지, 하고 도리질 치길 바라서였지만 수호는 배시시 웃을 뿐. 엉뚱하게도 당신의 남편이 대꾸한다.
“당신처럼?”
“내가 뭐?”
“그렇잖아? 우리 엄마도 당신 처음 보고 애가 보통은 아니다, 그랬다고 내가 말했지. 그래서 난 엄마한테 뭐가요 귀엽잖아요, 그랬다고. 수호가 나랑 보는 눈이 비슷한가봐.”
그 말이 당신의 신경을 건드린다. 당신의 남편은 성형외과 전문의. 이 동네 여자애들 눈은 다 당신 남편이 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인형 얼굴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이 고르고 고른 여자가 바로 나, 그런 자신감을 은밀히 품고 있는 당신은 낮에 만난 여자애가 당신과 닮았을 거란 남편의 짐작에 비위가 틀어진다. 머리만 좋았지 생김새는 엉망진창인 당신 유전자에 얼굴 하나 믿고 사는 내 유전자 섞어서 수호 같은 아들 낳아놨더니 뭐가 어쩌고저째.
“그러게요. 이런 것도 닮나, 내가 엄마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나.”
하지만 묘하게도 수호의 반응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다. 그래? 귀엽고 당돌한 점이 엄마를 닮아서 그 여자애가 좋아? 네 이상형의 원형이 그럼 나라는 얘기야?
“그렇게 좋니?”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요. 쑥스럽게.”
말로는 쑥스럽다지만 딱히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대꾸하는 수호는 지금까지 중 가장 낯설다. 어른스럽다, 언제 이렇게 컸지 내 아들이. 그럼 예열도 충분히 했겠다, 가장 궁금했던 걸 물을 차례.
“뭐 달라진 건 없어?”
“뭐가요?”
“있잖아, 로로마 효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강해진다던데.”
체내에 유입된 사랑의 미생물 로로마는 인체가 사랑을 느낄 때 분비하는 호르몬의 칵테일에 감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 이론상으로는 짝사랑에도, 부모 자식이나 형제자매와 같은 가족 간의 사랑에도, 친구 사이에도, 보편 인류에의 애정에나 하물며는 반려 동식물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일정한 효력을 지니지만, 당신의 말처럼 호르몬 분비가 활발한 연애 초기에 가장 뚜렷한 효과를 보인다. 거꾸로 말하면 사랑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로로마의 존재가 공기처럼 당연해진 요즘 세상에서 새롭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반드시 어떤 능력이 증대되게 되어 있으므로.
“아, 좀 웃길 수도 있는데요.”
수호는 음식을 가득 물고 있는 입을 가리며 뜸을 들인다. 뭔데, 뭐가 좋아졌길래. 네가 그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어, 싫긴 해도 그건 인정할 테니까 어서. 머리가 좋아졌니? 수호 너 그러잖아, 시험 자신 없을 때는 그럭저럭 봤다고 하지만 자신 있을 때는 별로 안 어려웠다고 하잖아. 그 여자애 사귀고서 이번 시험 잘 본 거지? 암기력이 좋아졌니? 논리적 사고가 증대됐어?
“점프력이 좋아졌어요.”
당신이 놓친 젓가락이 딱 소리를 내며 탁자에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