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인생은 완전히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환갑(還甲)’이라는 나이가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그 나이는 내가 행했던 많은 것들을 수거하라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인생이라는 수레를 끌며 그동안 저질렀던 아둔함과 실패들, 실수들, 빛나는 감격에 찬 기억과 그 기억이 파생시키는 감정과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장면들과의 해후, 해후……를 그만 멈추고 더 나아가 감추라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아직 환갑이 아니다. 조중균(趙衆均)씨가 그럴 뿐.
회사에서 처음 조중균씨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에이, 설마” 하며 믿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데 환갑의 평사원이 있단 말인가. 희망퇴직을 시행하면 사십대 초반들도 줄줄이 신청하는 판국에. 아니면 오너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이후 삶을 독려하려 고용했다는 말인가. 당연하게도 사장은 그렇게 아량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있던 입맛도 다 떨어지게 만드는 구내식당이 그 증거였다.
한동네에 사는 구부장 언니도 “그럴 리가 없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외주 편집자의 세계에서는 오십만 되어도 들어오는 원고 종류가 다르다고. 언니에게는 점점 더 숨 막히는 난도의 원고들이 의뢰되는데 최근 고통의 원인은 『저녁의 토마스 아퀴나스 주해』라는 번역서로, 14세기 볼로냐대학 교수의 기록집이라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걸 또렷하게 깨달은 적이 있어. 체육시간이었지.”
원래 소설가 지망생이라서 그런지 언니는 어딘가 소설적으로 사고하고 말했다. 흥미를 유발하고 바로 구체적인 사건으로 진입했다. 지루한 묘사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관점에는 모호함 없이 고드름처럼 차갑고 뾰족한 ‘각’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언니는 물론이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나 혼자 간직해온 세계일 뿐.
“열 살 때인가 앞구르기를 하는데 나만 못했어. 다음 체육시간까지 이틀 동안 앞구르기를 연습했지. 마침내 성공해서 갔더니 알아? 그다음 시간은 뒤구르기 수업이었어.”
어쩌다보니 우리는 만날 때마다 동네 성당을 이용했는데, 야외 벤치에 앉으면 어린 시절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이, 그리 변한 것 없이 좁은 성당 마당을 뛰어다니곤 했다. 그 모습을 보다보면 우리는 결국 우리처럼 늙어갈 애들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받아온 은총과 은혜의 결과물로, 나는 크리스마스에만 성당을 찾는 이벤트용 신자가 되었고 언니는 아예 냉담자였다. 언니는 최근 가톨릭에서는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냉담자가 아니라 ‘쉬는 교우’로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성당도 안 나가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신앙의 영역이 아니지” 하고 잘랐다. 교정자로서의 업데이트일 뿐이라고.
편집자들은 보통 삼사 년 간격으로 이직하고 내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이번이 다섯번째 직장이었다. 다섯번째 직장이란 다섯번째 애인처럼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해도 초장의 설렘이나 긴장 따위가 확연히 덜한 자리였다. 첫 출근 때부터 나는 아주 분명한 기시감을 느꼈다. 일단 사무실 구조며 사용하는 물품이 유사했다. 맞은편 과장은 파티션 위로 나비 날개 같은 개인용 가림막을 활짝 펼쳐, 되도록 완전한 고립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전 회사에서도 일괄 지급했던 브랜드였다. 사무실 한편에 흰 베니어판을 세워 만든 탕비실과 안에 마련된 비품도 동일했다. 웬만해서는 마시지 않는데 왜 회사마다 저 맛없는 커피머신이 있는 걸까. 대체 저 기업은 어떤 영업을 했기에 그 많은 회사의 탕비실에 저 애물단지를 들여놓을 수 있었을까. 커피 캡슐 옆에는 종이컵과 설탕 스틱 그리고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다 알 만한 심심한 디자인의 현미녹차와 옥수수수염차 티백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물자국으로 우글쭈글해진 안내문이 여러 장 붙은 것까지 똑같았다. “청결 유지” “사용한 컵은 각자 세척해주세요!” “도시락 드시는 분들 수채구멍 막힘 주의!”
그런데 어느 날 다시 보니 ‘어떤’ 차이가 있었다. 안내문 문장 위에 아주 조그맣게, 그냥 초파리 같은 것이 붙었나 하고 지나칠 만큼 조그마한 검은 글씨가 쓰여 있는 거였다. “수챗구멍, 고유어 합성명사.” 최근 탕비실에 부착된 고흥산 햇생강차 소개글도 이런 깨알같은 수정을 피할 수 없었다. “생강차는 부장님 증정이세(->에)요!” 그뒤로 며칠간은 그런 흔적을 찾는 데 흥미를 느꼈다. 뱅크시의 작품을 찾아다니는 뱅크시 헌터들처럼. 하지만 그 익명의 교정자가 누구인지는 곧 밝혀졌다. 흡연 부스에서였다. “재털이에 확실히 털어주세요”라는 게시문 위에 조중균씨가 검정 플러스펜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뭐 하세요?”
조중균씨는 담배를 문 채 돌아보았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뱃불이 약간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요즘 사람들은 된소리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재는 떠는 거지 터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맞춤법 규정이 그 모양이 돼버려서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도스또옙스끼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파리는 빠리여야 하고요.”
“아……”
나는 이것이 조중균씨와 나누는 첫 대화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말을 길게 끌었다. 피력하는 의견에 비해 조중균씨의 말투가 조곤조곤하고,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일단 동의했다.
“하긴 나까무라도 나까무라여야지 나카무라라고 하면 그 맛이 안 살 더라고요.”
가까이에서 보니 환갑이라는 조중균씨는 그 정도 ‘연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안이라는 느낌도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인식할 때는 시각부터 체취까지 총체적으로 흡수해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결론 내지 않나. 아, 이건 진상이다라든가, 관계가 멀면 멀수록 좋겠다든가, 잘생겼네, 혹은 혈색이 좋은 걸 보니 건강관리를 하나보네, 하다못해 피부가 건성이구나까지. 하지만 조중균씨에게서는 뭐랄까, 그렇게 결론지을 만한 ‘통째의 느낌’이 없었다. 흐릿하고 생선 비늘처럼 투명한 느낌이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혹은 무표정해서?
내 말에 대한 반응을 기다렸지만 조중균씨는 철제 재떨이에 담배를 제대로 ‘떤’ 다음 부스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봄바람이 조중균씨의 바짓단을 흔들며 가늘디가는 발목을 드러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휴대폰으로 도스또옙스끼를 검색했다. 그렇게 쓰던 시절은 무려 육십 년 전이었다.
이직이 몰고 온 중요한 변화는 출퇴근길이었다. 이전 회사는 강남이라 혜화동에서 가자면 버스와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이제는 버스 한 대로 오갈 수 있었다. 중간에 갈아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마를 탄 듯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시간에 그저 내 감정에만 푹 빠질 수 있어 좋았다. 피곤하면 피곤해하며 갔고 유달리 몸이 가벼우면 그 가벼움을 누렸다. 시간이 온전히 내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예상치 못한 괴로움이 있었으니 버스 광고 모니터로 영도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기는 일부러 버스 탓을 해서 그렇지 그건 이직이 불러온 재앙은 아니었다. 엄마조차 영도가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 보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매 회차 집중하면서 영도의 발성, 동작, 표정, 모든 것을 평가해댔다. 아직도 걔가 서울국악원의 ‘중딩’ 연습생인 것처럼.
“아니 쟤가 꾀목을 쓰고 있네, 꾀목을.”
꾀목이란 진성을 내야 할 대목에서 가성을 이용하는 것으로 수련에 지친 연습생들이 스승을 속이기 위해 흔히 쓰는 발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에서 영도는 보이스 피싱범들을 잡으러 다니는 중인데 진성을 쓰든 가성을 쓰든 무슨 상관일까.
“영 못쓰겄다, 영주야. 너 영도 연락처 있지? 그렇게 꾀목을 쓸 거면 내 제자라고 어디서 주둥이 털고 다니지 말라고 똑 부라지게 알려라잉?”
“걔가 그걸 왜 말하고 다녀. 어린 시절 학원 좀 다닌걸.”
나는 휴대폰으로 원피스를 구경하면서 퉁명스럽게 답했다. 물론 연락할 수는 있었다. 십 년 넘게 연락을 주고받지 않으면서도 영도는 휴대폰을 바꿀 때마다 내 번호를 저장해두었으니까. 거의 육 개월 단위로 카카오톡에 추천친구로 뜨는 바람에 나는 유명인의 빈번한 신변정리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 중 영도와 연락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만나면 늘 영도 이야기를 했다. 내가 먼저 꺼내기도 했다. 그건 그냥 옛일, 다 지난 일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떠들고 돌아오는 마음은 도저히 쿨해지지 않았다. 내내 무대 위에 올라 있었던 듯 소진되고 영혼까지 텅 비었다. 그런 날 소설을 썼다. 어떤 마음을 쓰는 것과 지우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기에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밤의 노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