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소작 (마지막)

아버지는 내게 먼저 들어가라 말하며 몸을 한껏 더 웅크렸다. 아버지의 목덜미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늘 뭘 먹었는지 헤아려보았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인공 폭포를 등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니 어른들이 거실에 빙 둘러앉아 떡과 과일을 가운데에 두고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없었다. 엄마는 사과를 삼키며 홀로 들어온 내게 물었다. 네 아빠는? 조금 더 걷다가 온대. 대답하고는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큰이모부가 불러 세웠다. 이리로 오라고. 너도 이제 성인이 아니냐고.

내일 성묘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가 성묘만 마치고 빠르게 돌아올 것. 돌아오는 길에는 가평에 들러 순두부를 먹고 목욕까지 할 예정. 할머니의 의견에 이견은 없었다. 말을 마친 할머니는 거실을 훑어보며 둘러앉은 모두에게 새해의 목표를 물었다. 큰이모부부터 말하기 시작한 새해 목표는 모두가 비슷했다. 올해도 가족이 건강하게 해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마지막은 나였다. 할머니는 대학 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그림에 뜻이 있는 거냐고도 물었다. 나는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라 정확한 목표는 없으나 우선 적응, 적응을 잘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중에 초상화나 그려달라 덧붙였다. 이모와 이모부들도 같은 말을 보탰다. 그때, 누군가의 휴대폰에서 자정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비로소 새해였다. 아이들이 방안에서 뛰쳐나오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시끄럽게 외쳤다. 이모들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아이들을 진정시켰으나 할머니는 크게 웃으며 내버려두라고 했다. 얼마나 보기 좋냐. 그러던 중 가장 어린 사촌 하나가 할머니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다 들었다고, 그런데 아직 할머니의 새해 목표는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으셨다고. 할머니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허리를 세운 뒤에 거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묘가 끝나면 선산을 넘길 거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시세보다 싸긴 한데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땅 아니냐. 묘도 전부 이장할 거다. 전에 봐두었던 내 장지 있지. 그래 철원 거기 추모공원으로. 내 장례는 매장 대신 수목장으로 해라. 적송으로. 그게 사계절 내내 파랗다더라. 아무도 동요하지도 반발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할머니는 덧붙였다. 돈은 걱정 마라. 계약은 이미 해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부들과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모들과 할머니는 명절 동안의 지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모들이 각각 영수증을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면 어머니가 정리한 뒤에 할머니에게 청구하는 식이었다. 나는 고개를 세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유난히 어두웠다. 신도시 중심부의 불빛만이 거리를 어렴풋이 비추었다. 낮에는 비치지 않았던 내 실루엣이 창문에 명확히 그려졌다. 그 뒤의 할머니도 이모들도. 그리고 아직 아버지는 저 어둠 가운데에 있었다. 아까 아이들이 그랬는지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조금씩 새는 바람이 차가웠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물었다. 어머니는 어차피 돌아올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때가 되면 돌아올 거라고 대답하며 할머니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할머니는 미간을 조이며 종이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혀를 차며 나를 불렀다.

늙어서 그런지 도통 보이지를 않으니, 선우 네가 이거 좀 읽어봐라. 

어머니는 자기가 하겠다며 소파로 올라섰지만, 할머니가 제지했다. 아까 준 돈…… 그 대신이라고 생각해라. 나는 할머니의 곁에 앉아 종이를 받아들었다. 어떤 이모가 어디에서 얼마나 지출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손끝에 침을 바르고 품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지폐들이 틈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는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큰이모 구만 이천원이고요, 말하는 동시에 창문 틈으로 비명이 들려왔다.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이모들은 대수롭지 않게 취객의 주사 정도로 여겼으나,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봉투를 꾹 쥔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비명은 끊어질 듯 끈질기게 이어졌다. 모르는 새에 이미 소화해버린 걸 억지로 토해내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한참을 듣고 있다가, 내게 창문을 힘주어 닫으라 지시했다.

건방지게…… 남의 집 앞에서. 

선우 네가 나가봐라. 저런 것들, 내버려두면 계속 저럴 것이 분명하다. 아주 초장에 잡아놓아야 한다.

이모들은 할머니를 빤히 올려다보았고 어머니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 엄마, 왜 선우가 나가야 해?

할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얘가 강단이 있지 않냐. 강단이.

창문을 닫자마자 집안의 훈훈한 기운이 온몸에 감돌았다. 따뜻하고 안락한 기분 속에서 나는 천천히 뒤돌아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은 챙기지 않았고 주먹은 꾹 쥐었다. 할머니는 봉투를 다시 품안에 넣으며 말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서둘러 다녀오라. 밖은 춥다.

나는 신발장에 널려 있는 신발을 헤집어 내 것을 찾아내려 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아무 신발에나 발을 끼웠다. 조금 컸으나, 불편하진 않았다. 어떤 문은 밀어도 당겨도 열린다는데. 생각하며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할머니의 말처럼 밖은 추웠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허리를 길게 뽑아 곧게 폈다.

그게 그런 강단이었구나.

복도등이 꺼지고 어둠이 주변을 점거했으나 움직이자마자 빛이 돌아왔다. 빛의 경계를 따라 어둠은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나는 발을 내밀며 밖으로, 겨울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화단 뒤에 몸을 반으로 꺾은 채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이 있었다. 가지만 남은 화단과 실루엣이 겹쳐지니 원래 거기서 자라는 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신발을 바닥에 긁는 소리를 내자 실루엣은 단숨에 몸을 일으키고 내 쪽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그의 손을 낚아챘다. 뜨겁고 축축했으며, 타액 탓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손을 잡아끌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아버지는 잠시 멈추어 두리번대더니, 겉옷 안쪽에 손을 비벼 닦았다.

네 엄마는 아직 모르는 거 맞지?

아빠, 병원에 가시는 건 어때요?

나는 앞서 걸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뒤따라오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뒤를 쫓는 것만큼은 자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반쯤 입을 열다 말 사람이니까. 나는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현관 앞에 서자 다시 복도등이 켜졌다. 문을 열기 직전에, 아버지는 내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점점 꺼져가는 목소리였다.  

선우야, 그 돈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

할머니가 준 돈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먼 옛날을 상상했다. 아버지가 소작농들을 관리하던 시절의 어느 수확철을.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지시로 빌려준 땅에서 자란 고추와 가지, 고구마와 배추를 살폈을 것이다. 그러다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사돈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남자의 밭에. 아버지는 자신의 친부가 일군 땅과 길러낸 농작물을 살폈을 것이다.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밭을 뒤로 한 채 다음 땅으로, 다음 밭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친부는 떠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차라도 한잔하자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다음에.

다음에 마셔요.

그래주실 수 있죠? 

어쩌면 그것이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서 본 어떤 가능성일지도 몰랐다. 

움직이지 않으니 복도등이 꺼졌다. 나는 더듬더듬 문고리를 찾아냈다. 문고리에서는 집안의 열기가 조금씩 느껴졌다. 찾기만 하면, 문고리를 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약간의 힘만이 필요했다. 아깐 밀어 열었으니, 이번에는 당겨 열기. 그렇게 되면, 겨울이 거실로 휘몰아칠 테다. 그러나 상관없다. 거실의 열기는 겨울도 덥힐 것이다. 이 안의 가족들은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지는 따뜻한 거실을 모르고 배부르게 잠드는 법을 모른다. 나는 문을 열기 전, 아버지에게 일러두었다.

생각 좀 해보고요.

그래도 되는 거 맞죠?    

그러나 아버지는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움츠린 채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아닌 그를 위해 문을 당겨 열 것이다. 그런 뒤에 안락한 가정과 살찐 아이들이 있는 환한 거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내가 잠시 비우고 나온 자리를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