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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노마가 오는 날이다.
이연은 마당에 떨어지는 햇빛을 바라보며 스툴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와 박공지붕의 그림자를 지면에 드리우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깃든 햇빛과 그림자를 볼 때마다 이연은 프랑스 소설이 생각났다. 감정을 배제하고 대상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그 소설은 그림자의 각도에 대한 정교하고 수학적인 묘사로 시작한다. 대학 시절에 그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장이 뭐 어쨌길래 웃음까지 터뜨렸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하필이면 그게 대학도서관의 고요한 열람실이어서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던 것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연은 나중에 그 대학의 교원이 되어 불문학 수업을 맡았는데, 커리큘럼에서 그 소설을 빼지 못한 자신에게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매력도 별로 없고 확실히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면 배워야지. 역사란 그런 것이니까. 그게 이연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 의미란 또……
지난해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이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것이었다. 정원……이라기보다는 마당이라고 불러야 할 작은 공간이 있고, 거기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가 마음에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단독주택은 집값 안 오르는 건 둘째치고 손이 많이 가서 힘들어요. 그렇게 말리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연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오랜 로망이어서요. 이사를 강행한 후에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연, 잘했어. 다른 공간이 다른 삶을 만드는 거야.
이십 년 가까이 살았던 옛 아파트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이연은 직장 근처의 구축 아파트에서 성철과 함께 살았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살기에 나쁘지 않았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이라고 해도 좋았다. 성철을 닮은 아파트라고나 할까. 성철은 함께 살기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연은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했던가? 이연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곤 했다. 단순하고 유치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곱씹게 되었다. 사랑했겠지. 그러니 결혼을 하고 그 긴 시절을 함께 보낸 것이겠지. 아들 노마까지 키우면서. 물론 시간이 지나면 뭐든 무덤덤해지고 습관이 된다. 습관이란 사랑의 반대말인데. 삶의 맥박을 되살리는 게 사랑인데. 하지만 습관이나 생활이 되지 않는 사랑이 진짜 사랑인가. 그건 그냥 호르몬의 작용 아닌가. 게다가 시간이 지난 뒤 모든 과거가 뒤바뀐다면…… 아아, 모르겠어……
문학을 공부하면서 이연은 뭐든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익숙해졌다. 그건 겸손도 아니고 반성도 아니고 포스트모던 어쩌고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것…… 이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그루의 관목이 서 있고 작은 화단도 있지만 대여섯 걸음 걸어 철문을 열면 바로 골목인 좁은 공간. 남은 건 이 작은 공간뿐이라고 해도 좋았다. 성철은 떠났고 노마 역시 떠났다. 오래 살아온 아파트는 이연 스스로 떠났다.
성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낡은 아파트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연의 직장이 가깝다는 이유로 얻은 아파트였다. 자신을 배려한 성철에게 이연은 여러 번 고마움을 표했지만 성철이 세상을 뜨고 이연 자신이 정년퇴직을 했는데 굳이 그 아파트에 미련을 둘 이유는 없었다. 노마 역시 성인이 되어 아파트를 떠난 지 오래였고.
노마.
그렇지. 오늘은 노마가 오는 날이다. 노마가 이 집을 처음 방문하는 날.
이연은 노마를 생각할 때마다 그냥 노마라고 생각을 했다. 개명을 했다고 해도 이연에게 노마는 노마였다. ‘준일’이라는 새 이름은 입에 붙지 않았고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을 버리고 준일 같은 평범한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을까? 노마가 어느 날 통보하듯 개명 사실을 알려왔을 때, 성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연 역시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준일이라는 새 이름에 위화감이 들어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계속 노마라고 부르기도 뭣해서, 이연과 성철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부모가 되었다.
처음에는 딸인 줄 알았거든.
둘이 있을 때 성철은 웃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릴린 먼로의 이름을 태명 삼아서 노마라고 불렀는데, 아들이 태어나다니.
마릴린 먼로의 어린 시절 이름이 노마 진이라고 했다. 왜 하필이면 마릴린 먼로인가 궁금했지만 이연은 묻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이름을 왜 굳이? 하고 묻는 대신, 이연은 짧게 코멘트했다.
나쁘지 않은데? 노마는 남자아이한테 더 어울리기도 하고.
노마라는 이름을 이연은 그렇게 옹호해주었다. 한국어로는 어딘지 천하게 느껴지는 데다 ‘놈아’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노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이름을 바꾼 것 같지는 않지만.
올해 초 이 단독주택으로 이사했을 때도 노마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 집을 계약하고 이사 사실을 알렸는데도 짧은 문자를 보내왔을 뿐이다. 이사 잘 하세요. 건강하시고요. 그게 전부였다. 이연 역시 더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어젯밤에 문득 노마가 스스로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내일 저녁에 방문해도 괜찮겠느냐.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인사말도 없이 그런 용건만 적혀 있었다. 이연 역시 간단하게 답을 보냈다. 저녁 다섯시 반이면 괜찮겠다고. 아래 적는 주소로 오라고. 집에서 식사하자고. 몇 분 뒤 노마는 알겠다고 짧은 답신을 보내왔다.
이연은 효도 같은 전통적 관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성철도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노마가 스스로 가족을 이루고 가족의 가치를 깨닫기를 바랐을 뿐이다. 소위 ‘정상 가족’을 이룰 필요는 없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동거를 하든 동성을 만나든 혼자 살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든 상관없다. 하지만 같이 사는 존재가 있으면 좋겠지. 혼자는 외로우니까. 그게 성철의 생각이었고, 이연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이연은 오랜만에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다.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는 온라인쇼핑몰을 이용하기가 번거로웠다. 아파트처럼 문 앞에 물건을 놓아두기가 여의치 않으니 택배함을 설치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제야 이연은 동네에 마트가 있는지 찾아보았고 대형마트가 두어 정거장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차를 몰고 나가 장을 보았다.
성철이 있었을 때는 기업형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를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재래시장을 몇 번 가다가 온라인쇼핑몰이 등장한 후에는 습관처럼 클릭을 했다. 온라인쇼핑몰이 소위 ‘플랫폼 봉건주의 시대’의 영주 같다는 것은 이연도 알고 있었다. 온라인 영지를 지배하면서 상인들 시민들을 농노로 부리고 돈을 거둬가니 봉건지주와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빠른 배송과 최저가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연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윤리적, 정치적 기준을 타협 없이 적용하는 것은 일상에 매이지 않은 단독자만 가능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고 일을 하면서 그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속 가능한 삶 속에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아, 그런 걸 ‘냉소적 이성’이라고 하지. 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교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이용하는 사람들처럼. 성철은 그런 미운 말을 했다. 자신이 장을 보는 것도 아니고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기껏해야 가끔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릴 뿐이면서. 집에 들여놓은 대형 디지털 액자를 분해했다 조립했다 하는 게 일인 사람이.
미술계의 문제들에 대해 성철만큼 비판적인 사람도 드물었다.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안온한 공간에 갇힌 주제에 비판적인 체하는 화가들이 경멸스럽다고 했다. 화려하고 현학적이면서도 내부가 텅 빈 비평적 수사에 의지하는 작품들을 혹평했다. 소위 ‘한국적’ 스타일을 앞세워 해외 아트페어나 비엔날레에 혈안이 된 이들을 멀리했다. 그 자신이 화가 출신이면서도, 아니 화가 출신이라서 더 그렇다고 했다.
화가가 아니라 화가 ‘출신’이라고 한 것은, 그가 별다른 작품을 남기지 못한 채 그림을 접고 평론가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돈이 모이는 곳 특유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는 데는 열정적이었으나 제 밥벌이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연은 성철을 지지해주었다. 괜찮아.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하지만 한때 섬세한 미감을 가졌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주장만 내세우는 건 좀……이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거칠다고? 내가? 정치적이면 거친 거야? 섬세한 미감이라니 너무 구태의연하지 않아? 하는 날선 반응이 돌아올 게 뻔해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런 얘기를 깊이 있게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즈음 성철이 불현듯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