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선이 민기와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세 달 전이고 같이 뛰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이다. 그리고 민기를 처음 만난 것은 일 년 전 진선의 결혼식. 보통은 상견례에 형제자매도 함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때 은선은 호주에 있었고 진선의 결혼식은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은선은 아직 결혼을 해본 적 없지만 친구 중 몇몇은 이미 결혼을 했고 그들의 결혼은 자의든 타의든 아주 느리게 진행이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선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진선이 민기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은선은 호주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하며 그 근처 카라반 파크에서 지내고 있었다. 한 시간 이내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었고 간혹 셰어 하우스가 있더라도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쌌다. 어찌저찌 농장 관리자에게 직원들이 많이 산다는 곳을 소개받았는데 그게 카라반 파크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캠핑에 온 기분이겠지만 실상은 들판의 고시원에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은선은 그다지 불만을 갖지 않았는데 매일같이 농장에서 중노동을 하고 오면 기절하듯 잠들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할까봐.
그런 날들을 보내는 중에도 은선은 종종 진선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진선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진선은 자신의 언니고 가족이니까. 나름 그 지역에서 가장 평이 좋은 통신망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인터넷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 진선과 영상통화를 하는 내내 몇 번이고 화면이 멈췄지만 희한하게도 중요한 말만은 제대로 들렸다.
결혼?
그래. 민기랑.
민기가 누군데? 은선이 그렇게 묻기도 전에 결국은 통화가 끊겼는데 굳이 다시 걸지는 않았다. 며칠이 지나 진선에게서 식장을 잡았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뿐이다. 거참 빠르네. 은선은 이제까지 봐왔던 주변의 사람들, 진선을 포함한 그 사람들의 지지부진한 연애 혹은 결혼생활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진선이 결혼을 한다니 진선의 이전 연애 같은 것은 떠올릴 필요가 없겠지, 언급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겠지, 생각하면서 바로 옆 캐빈에 사는 마테오의 차를 얻어 타고 시내에 나가서 장을 봐왔다.
마테오는 은선보다 두 살이 어렸고 은선과 같은 농장에서 일했지만 블루베리를 직접 따거나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수출입 관련한 사무 업무를 봤다. 은선은 그 일이 블루베리를 따거나 포장하는 것보다 조금 더 수월한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마테오도 퇴근하고 돌아오면 기진맥진해 캐빈에 틀어박혔기 때문에 별다를 건 없겠거니 생각했다. 마테오와 은선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각기 다른 시내의 마트에서 장을 봤지만 사는 품목은 매번 비슷했다. 어떤 식빵이 제일 싸고 어떤 우유가 소비 기한이 길며 어떤 시리얼이 덜 눅눅해지는지. 그런 대화를 피차 서툰 영어로 나누면서 은선은 이것이 호주에서의 삶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카라반 파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열 개가 조금 넘는 캐빈은 이 인용과 사 인용이 섞여 있었는데 꼭 권장 인원수에 맞게 사는 건 아니었다. 농장 직원의 말대로 대부분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지만 종종 시가지에서 밀려나온 호주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은선은 그런 것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은 한국이나 호주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끔 은선은 누구보다 느릿하게 뛰는 민기를 보면서 저런 사람이 무슨 수로 우리 언니와 그렇게나 빠르게 결혼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은선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기는 진선의 남편이고 따지자면 은선에게도 가족이지만 다 커서 만난 사람을 갑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평소 은선은 고분고분한 동생이었다. 호주에 간 것도 순전히 진선 때문이었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는 만 삼십 세까지 신청 가능했고 이 년 전의 은선은 만 이십구 세를 앞두고 있었다. 그즈음 은선은 유럽에 의료용 기기를 수출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외국계라 그런지 워라밸이라든가 복지 같은 것들이 나쁘지 않았다. 주에 한 번은 재택근무가 가능했고 금요일은 오전만 일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경력만 좀 쌓고 나가려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아예 눌러앉아버렸다.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는 설렁설렁 업무를 보다가 진선과 거실 겸 부엌의 접이식 밥상에 마주앉아 계절에 맞는 과일을, 이를테면 참외나 딸기나 귤 같은 것들을 먹으면서 별 볼 일 없는 얘기를 늘어놓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진선이 은선을 방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뜸 호주에 가라고 했다.
나는 이미 늦었으니 네가 가라.
나이 제한이 더 여유로운 나라도 있을 텐데 뭘 굳이, 라고 생각했지만 얘기하지는 않았다. 진선이 늦었다고 말하는 것이 꼭 나이가 아닐 수도 있고, 혹은 그냥 은선을 보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진선 혼자 살고 싶은 것일 수도. 대학 때문에 진선에 이어 은선까지 서울로 온 이후 둘은 항상 같이 살았다. 그래야 더 넓은 집에서 더 싸게 살 수 있었다.
그때 은선은 입사 삼 년 차를 넘기는 중이었다. 마의 369. 모두가 퇴사를 고민한다는 시기였는데 은선은 그렇게까지 온 마음으로 퇴사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코로나 시기를 지나오며 비트코인이라든가 주식 같은 것에 나는 왜 관심이 없었나, 그런 생각을 했고 어차피 그런 걸 시도할 자본금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경제적 자유라니.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까 평생 일할 거 일 년쯤 외국에 나가는 게 뭐 어떻느냐는 진선의 말에 설득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진선은 워킹과 홀리데이에 절반씩 집중하라고 했다. 둘 중 하나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된다면서 은선의 계좌에 오백만원을 보내주었다. 입사 이후로 꾸준히 부은 적금 계좌가 만기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평생 가장 큰 숫자가 생활비 통장에 찍혀 있어서 은선은 어쩐지 좀 벅찬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워킹 홀리데이를 이유로 퇴사를 신청했더니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옆자리의 동갑내기 직원이 아깝다고 그랬다.
뭐가요?
아니. 그럼 결정사에서 점수를 깎는다잖아요.
결정사?
네. 결혼정보회사.
글쎄요. 제가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할 만큼 경쟁력이 있는 결혼 상대일지…… 말했더니 그 직원이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요. 재미있게 놀아요.
일도 해야죠.
네. 일도 하시고.
퇴사한 후로 그 직원과 다시 연락한 적은 없지만 은선은 가끔 그 말이 떠올랐고 떠오를 때마다 웃었다. 하하. 결정사라니. 진선에게도 얘기했더니 똑같이 웃었다. 하하. 결정사라니. 거기 가입비가 얼마인 줄은 아냐. 종종 인터넷에 떠도는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를 볼 때마다 은선은 자신이 몇 등급이나 되나 셈해보기도 했으나 별 의미는 없었다. 은선은 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아무튼 진선이 등급과 관계없이 결혼을 했다는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민기와 처음 달린 날 오전에는 거실 소파 앞에 앉아 진선과 둘이 딸기를 먹었다. 진선이 결혼하지 않고 은선이 호주에 가지 않았을 때와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훨씬 넓고 깨끗한 거실에 그럴싸한 유리 테이블과 가죽 소파가 있다는 점은 달랐다. 진선은 딸기의 꼭지를 따서 반으로 잘라 락앤락 통에 차곡차곡 넣어두었고 은선은 진선이 자른 딸기를 설탕에 찍어먹었다.
3월 딸기는 물딸기래.
그렇군.
어디선가 3월 딸기로는 딸기청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았는데 은선은 그때그때 설탕에 찍어먹는 쪽이 좀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진선은 다 따놓은 딸기 꼭지를 정리하고 드라마를 틀었다.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인 듯했는데 어딘가 익숙했고 보통의 드라마가 그렇듯 원래도 불행한 주인공이 더 불행해지는 내용이었다.
아. 저거 민기네.
그리고 민기가 티브이 화면에 나왔다. 민기는 불행한 주인공이 더 불행한 일을 겪고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가 어깨를 부딪치는 행인 역할이었다. 아이씨 뭐야. 민기의 대사는 그게 다였는데 그것마저도 무척 어색해서 은선은 저도 모르게 형부가 연기를 너무 못하네, 하고 중얼거렸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진선에게 등을 찰싹 맞았다.
사실이잖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언니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네.
진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민기의 연기 활동을 응원한다니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결혼은 무엇이지. 은선은 그런 게 궁금했지만 많이 궁금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랬다간 또 등을 맞을 것도 같았고. 사실 유명한 연기과를 졸업한 사람은 민기가 아니라 진선이었다. 진선이 연기과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괜찮은 극단에 들어가서 꾸준히 연기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은선은 언젠가 진선에게 연극 티켓 두 장을 선물받아 고등학교 동창과 신촌의 어느 극장에서 진선의 연극을 봤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된 빌라의 꼭대기 층을 개조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계단을 오르는 것이 조금 벅찼고 좌석에 앉았을 즈음엔 동창과 함께 숨을 헉헉거렸다. 하지만 진선이 어떤 내용의 연극에 무슨 역할을 맡아서 연기를 했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연기를 관뒀지.
언젠가 진선이 그렇게 얘기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은선이 생각하기에 진선은 그다지 재능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한 배우였다. 배우가 가진 재능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얼굴과 몸의 생김새, 목소리, 일종의 사교성, 창의성, 보편타당하면서도 고유한 개성, 집중력, 연기력 등등. 그 모든 것을 진선은 보통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
진선은 연기 학원에서 입시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천직인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은선이 생각하기에도 진심으로 들렸고 또한 사실이었다. 민기가 연기에 도통 재주가 없다는 게 사실인 것처럼.
그렇다고 민기가 연기로만 돈을 벌겠다고 한 것은 아니라서 은선은 진선과 민기의 결혼생활이, 사실 진선과 민기는 그전에도 함께해왔지만 은선은 그들이 결혼한 이후밖에 보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그 삶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민기의 연기는 나쁘지만. 민기의 연기가 나쁜 것 또한 드라마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진 않으니까 그것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진선과 은선은 잠깐 스쳐간 민기를 보고 나서 드라마에 몰입했다. 주인공은 잘생겼고 연기도 곧잘 했다. 진선은 가끔 주인공이 울거나 분노하거나 체념하는 얼굴을 보면서 참, 진정성이 없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은선은 그러거나 말거나 민기가 그런 것만 아니면 됐다고 생각했다.
은선도 그랬지만 민기도 이제까지 달리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달려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체력 때문에. 한때 민기는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꾸준히 했었는데 아무래도 체력이 늘지 않아 트레이너에게 물었더니 그런 건 유산소운동을 해야지만 는다고 했다나. 그때 민기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면서 우는소리를 했고 은선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뭘 형부가 근력 운동 좀 했기로서니 세상이 무너집니까. 속마음은 그랬지만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은선은 아직 민기가 어색했다. 민기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족 된 마음으로 애쓰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민기는 대부분의 날을 공무원으로 일하고 가끔은 배우로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하다고, 무엇보다도 사는 데엔 체력이 제일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렇지요. 은선은 그렇게 대답했다. 은선은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농장을 거쳤다. 호주라면 사시사철 화창하고 따뜻할 줄 알았는데 나름의 계절 변화가 있었고 제철 작물이 있었다. 은선은 딸기를 따고 블루베리를 따고 감을 따고 아보카도를 따다가 감자를 선별하고 리치를 포장했다. 그런 일에도 역시 체력이 필요했다.
체력은 중요하지요.
그렇게 덧붙이면서 난생처음 사본 러닝화의 끈을 묶었다.
러닝화는 진선과 은선, 민기가 다 같이 아웃렛 매장에 가서 골랐다. 정확히는 진선이 그 둘의 러닝화를 골라주었다. 진선은 연기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몸을 많이 써서인지 신발에 대해 은선과 민기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기능보다는 가격을 더 중시해서 골랐지만. 그 점에는 은선도 민기도 그다지 불만이 없었는데 풀코스 마라톤을 뛰겠다는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고 러닝 크루에 들어가서 러닝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