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무관한 피(2)

단지 은선은 왜 진선이 아니라 자신이 민기와 뛰어야 하는지 좀 의아했지만 진선이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움직인다 학원에서, 하고 얘기해서 금방 수긍했다. 언젠가 은선은 입시 준비를 위해 연기 학원에 다니던 진선에게 여벌의 트레이닝복을 전해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 은선은 진선이 팔을 펼쳤다가 접었다가 다리를 쭉 폈다가 쪼그렸다가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우당탕 쓰러졌다가 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날 진선은 땀을 뻘뻘 흘렸는데 그건 진선뿐만이 아니라 연습실 안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그런 걸 아직도 하고 있다니 불쌍하다.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고 아무튼 진선에게는 이미 충분한 체력이, 평생 써도 별로 모자랄 것 같지 않은 체력이 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은선에게도 앞으로 살 날은 많이 남아 있었고 그러려면 체력이 필요하긴 했다. 그런 마음으로 민기와 러닝을 하라는 진선의 말도 곧잘 들었다.
아무래도 민기가 숫기가 좀 없잖아.
어떻게 처제 앞에서 그런 말을.
각자의 러닝화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는 진선이 운전을 했다. 당장 오늘부터 러닝을 시작하면 되겠다는 민기의 말에 은선은 고분고분하게 네, 좋지요, 하고 대답했을 뿐인데 진선이 갑자기 민기의 숫기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혼자 뛰는 것이 좋지 않나. 아니면 숫기를 좀 가지기 위해서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는 러닝 크루를 찾아 들어간다든가.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두 가지의 선택지가 결국에는 극과 극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자신과 민기 둘이 뛰는 게 좋다는 말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내도 아니고 처제와 하는 달리기. 이상하다면 그것이 좀 이상했지만 아무튼 가족이라면 또 이상할 것은 무엇인가. 게다가 은선은 굳이 따지자면 민기와 진선의 신혼집에 얹혀사는 중이었고 서로가 익숙하든 낯설든 관계없이 한집의 식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러닝을 하지 못했다. 진선과 달리 은선과 민기는 체력이 부족했고 러닝화 쇼핑을 다녀온 것만으로 진이 다 빠져서였다. 민기는 매일 일하니까 그렇다 치고, 너는 뭐가 문제야. 진선은 소파에 누운 은선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은선은 나도 일한다고,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처제 열심히 일해. 우리 서무 주임이 아주 만족해.
민기는 소파 앞에 앉아 진선이 껍질만 깎은 참외를 포크로 통째 찍어서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지각도 한번 안 하고 문서 수발도 안 미루고. 탕비실 간식도 예산에 딱딱 맞게 잘 사오고. 커피 원두도 떨어진 적 없고. 설거지도 깔끔하고 냉장고도 깨끗하지.
일이 그게 다야?
그게 다야.
그게 다라니.
그게 크지.
처제가 없으면 그걸 다 서무 주임이 한다구. 민기가 그렇게 덧붙였고 진선은 뭔가 허탈한 표정으로 참외를 하나 더 깎아다 민기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참외가 벌써 나와? 몰라 마트에 있던데. 여름이 제철 아냐? 요새는 계절도 왔다갔다하지 뭘. 은선은 그 부부가 뭐라든 말든 소파에 누워서 거실 불이 너무 밝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낮잠을 자고 싶은데 불이 너무 밝네, 불이 밝아서 잠을 못 잔다니 팔자가 참 좋네, 그런 생각을.
호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은선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일자리를 구했다. 워킹 홀리데이로 온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별점을 높게 준 숙소인 만큼 모든 방의 채광이 좋았는데 암막 커튼은 따로 없었다. 대신 창문을 열어놓을 때마다 미색의 하늘하늘한 커튼이 바람에 날렸다. 불행히도 은선은 창문 바로 옆 침대를 사용했는데 날이 밝아올 때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을 자야 했다. 그건 참 답답한 잠이었다고 은선은 생각했다.
은선은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식당에서 만난 또래의 대만 사람들에게 딸기 농장을 소개받아 면접을 봤고 고용 계약서를 쓴 후에는 농장에 딸린 숙소로 짐을 옮겼다. 그 숙소는 또 너무 캄캄했다. 창문이 작아서 같은 숙소를 쓰는 직원들이 요리를 할 때마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매번 문을 활짝 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선은 잘 잤다. 그만큼 농장 일이 피곤했던 탓이었다. 은선이 일하던 팀의 관리자는 백발의 할머니였는데 매번 은선이 퇴근할 때마다 더 빨리, 더 많이, 넌 할 수 있어, 라고 영어로 적힌 쪽지를 건넸다. 은선은 생각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즈음 은선은 트롤리를 밀며 딸기밭을 누비고 다녔다. 딸기를 따는 것보다는 트롤리를 미는 것이 더 힘들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을 쉬었지만 그다음날 질척질척해진 흙 위에서 트롤리를 밀고 다니는 건 시간이 지나도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고 결국 트롤리와 함께 넘어져서 젖은 흙에 처박힌 날 농장에서 잘렸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고 얼마 안 돼 다른 농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누구나 도시에서 일하는 걸 더 선호했지만 은선은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할 만한 점이 자신에게 있는지 잠깐 생각했고 금방 마음을 접었다. 그런 날에는 불이 밝든 어둡든 잠을 잘 잤다. 그것도 체력의 문제일 수 있었다. 어쩌면 달리기는 호주에서부터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은선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곧 팔로 눈을 가리고 잠들었다. 달리면서 제대로 된 감자를 선별하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그다음날에 민기가 은선에게 강아지 런을 뛰자고 했다. 진선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취미 연기반도 맡고 있어 주말 오후에는 학원에 나가고 없었다. 은선은 그런 수업이야말로 민기가 들어야 할 텐데,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수업을 듣는 것은 아무래도 좀 고역일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연기 학원이라면 진선의 학원 말고도 많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강아지 런이요?
응. 강아지 런.
그게 뭐죠?
그 있잖아,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강아지 모양으로 달리는 코스.
아. 댕댕 런.
달리고 나면 러닝 앱 지도에 강아지 모양의 경로가 그려지는 코스를 은선도 언젠가 SNS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나간 유행을 뒤늦게 따라하는 걸로 유명한 아나운서가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직접 뛰기도 했으니 사실 유행은 좀 지났을 텐데 은선은 뭐 아무튼 달리기만 하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그걸 왜 굳이 강아지 런이라고 하시나요.
좀 그렇잖아.
뭐가 좀 그런가요.
댕댕 런이라고 하면, 괜히 영포티 같아.
형부는 아직 포티도 안 됐잖아요. 은선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아무튼 민기가 숫기가 없기는 하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역시 부부란 그런 것인가. 서로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잘 아는 것이 아닐까. 은선은 진선의 결혼식에서 민기를 처음 봤지만 그날 민기는 그다지 숫기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결혼식 날 민기는 직접 축가를 불렀다.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은선은 저도 모르게 오, 하는 입 모양을 하고 민기의 노래를 들었다. 민기는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불렀고 노래를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기보다는 나았다. 은선은 민기가 참 다방면에 재주가 없고 공무원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은선은 결혼식이 끝나고 울산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이틀 정도 묵었다가 다시 호주로 떠났다. 네 형부가 저, 노래를, 잘하는 거냐. 은선이 떠나기 전에 아빠가 그렇게 띄엄띄엄 묻길래 은선은 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게 대답했고 옆에 있던 엄마는 특별한 날이니까 하는 거지 뭘, 하고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다.
다행히 은선도 진선도 엄마를 닮아서 쓸데 있는 소리와 쓸데없는 소리는 구분할 줄 알았고 은선은 민기 앞에서도 진선 앞에서도 자주 떠오르는 말들을 굳이 하지 않았다. 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획적이지 않고 숫기가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은선이 현관 앞에서 러닝화를 신으려다 말고 검색해보니 댕댕 런의 코스는 무려 팔 킬로미터가 넘었다.
형부, 저희가 오늘 처음 뛰는 건데 삼 킬로미터도 아니고 팔 킬로미터를 뛸 수 있을까요.
그런가. 그럼 강아지 머리만 뛸까.
그건 또 너무 짧을 것 같은데.
뭐 어떻게든 뛸 수 있겠지.
은선과 민기는 어떻게든 뛰긴 뛰었다. 진선과 민기의 신혼집은 서촌 안쪽의 작은 빌라였고 강아지 머리만 뛰면 너무 짧을 수 있으니 미리 뛰어놓자, 라는 합의하에 집 앞의 골목을 지나 큰길가로 빠지자마자 바로 뛰기 시작했다. 은선도 민기도 서로의 페이스를 알고 있을 리 없었으므로 은선이 지치면 민기가 같이 걸어주었고 민기가 지치면 은선이 같이 걸어주었다. 강아지 코에는 음식점이 많았고 강아지 귀에는 갤러리가 많았고 강아지 목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정독도서관이 있어서 벚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은선과 민기는 온갖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온갖 색깔의 한복을 입고 거니는 거리를 어찌저찌 지나 집 앞까지 되돌아왔다. 그랬더니 결코 강아지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기묘한 모양이 러닝 앱에 그려졌다.
좀 실망스럽네.
그러게요.
은선과 민기는 집 앞에서 지친 얼굴로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진선에게 러닝 기록을 보여주자 진선은 아주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언니라도 웃으니 다행이네.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와 동시에 민기가 자기라도 웃으니 다행이네, 하고 말해서 은선도 조금 웃었다.

 

은선은 그후로도 민기와 다섯 번 더 같이 뛰었다. 민기가 촬영을 나간다든지 은선이 감기에 걸렸다든지 하는 이유로 달리지 않은 날도 있었고 그냥 달리기 싫은 날도 있었다. 그사이 기온이 더 올라서 달리기에 제격인 날씨가 되었고 강아지 머리를 두 번 도는 동안에도 걷지 않을 수 있는 서로의 페이스를 잘 알게 되었다. 거리에 벚꽃이 지고 개나리에 잎이 돋고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것을 은선은 민기와 함께 보았다. 그렇다고 은선이 민기를 완벽한 가족으로 인식했다거나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전혀 없어졌다는 건 아니어서 그냥 데면데면하게, 각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듣고 싶은 노래를 들으면서 뛰었다.
며칠 전에는 민기가 뛰다 말고 은선에게 무슨 노래를 듣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빅뱅입니다. 빅뱅 노래는 너무 많은데. <배드 보이>요.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 그렇지는 않고요. 그런 희한한 대화를 나누면서 육 분 삼십 초의 페이스로 뛰었는데 말을 하는 동안 호흡의 리듬이 무너졌고 결국 신호등 앞의 연석에 앉아 오 분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