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민기는 강아지 머리를 한 바퀴 돈 다음 창덕궁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를 제안했고 은선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어서 다시 뛰기 시작했을 즈음 은선은 문득 대답만 하고 되묻지를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형부는 무슨 노래를 듣느냐고 물었다.
나는 버즈지.
설마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인가요.
<가시>도 듣고 <겁쟁이>도 듣고.
으. 은선은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고 민기는 껄껄 웃었다. 저런 소리를 내면서 웃다니 아직 포티가 아닌데도 영포티라고 불릴까봐 걱정할 법하다. 은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달렸다.
정독도서관을 내려와 창덕궁까지 가는 길은 강아지 머리와 달리 평탄한 직선 코스라서 뛰기에 훨씬 좋았다. 그렇다고 페이스를 올리지는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은선도 민기도 결코 빠르게 뛰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되도록 느리게 뛰어야 할지도. 체력이 느는 것보다 잃는 속도가 빠르면 안 되니까. 그날 은선과 민기는 창덕궁 입구가 공사 때문에 큰 패널로 막혀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뒤돌아 집까지 달렸다.
은선은 이제 만으로 갓 서른을 넘겼지만 민기는 서른을 지난 지도 팔 년이 넘었다. 가끔 은선은 느릿하게 뛰는 민기 옆에서 역시 느릿하게 뛰면서 앞으로 나도 느리게 뛰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민기가 실제로 포티가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도. 사실 뭐든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호주에서도 자주 했다. 이를테면 체리 농장에서 너무 높은 가지에 열린 체리를 딸 수 없다고 관리자에게 얘기했을 때 덩치 큰 대머리 관리자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높이 솟은 가지를 부러뜨려 은선에게 쥐여주었다. 은선은 관리자의 팔뚝에 난 밝은 갈색 털이 햇빛 아래 투명하게 빛나는 걸 보면서 체리 가지를 받았다. 그 가지에는 총 열일곱 개의 체리가 달려 있었는데 덜 익은 것과 너무 익은 것을 제외하고 은선이 바구니에 넣은 것은 열두 개 정도였다.
어떤 농장은 과일을 따는 것보다 선별하는 게 더 어려웠다. 너무 익은 것과 덜 익은 것, 무른 것과 모양이 상한 것을 솎아내야 했다. 하지만 톱 피커들은 그것들을 능숙하게 섞었고 다 채운 바구니의 가장 위쪽에는 완벽한 과일들만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일을 잘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유연함과 무심함이 필요했다.
은선에게는 그런 것이 대단히 있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있었고 그 덕에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보통의 노동자로 살 수 있었다. 은선이 외국인인지 내국인인지만이 달랐다. 그렇다면 내국인인 편이 훨씬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은선은 비자를 연장하지 않았다.
오늘도 은선은 점심시간 전에 퇴근했다. 진선이 퇴근길에 김밥을 좀 사오라고 하길래 그렇게 했다. 참치김밥과 치즈김밥을 한 줄씩 사고 혹시 몰라 컵라면도 샀다. 진선은 김밥보다 컵라면을 사온 것에 만족해했다. 은선이 산 컵라면은 육개장과 왕뚜껑이었다. 은선과 진선은 소파 앞에 앉아 왕뚜껑 하나에 김밥 두 줄을 나누어 먹었다.
오늘은 뛰러 가나?
가야지.
민기는 점심으로 뭐 먹는대.
구내식당.
그렇군.
은선은 민기와 같은 과에서 일했기 때문에 민기의 처제가 아니라 적당히 아는 후배 정도로 소개되었다. 아무래도 무관한 편이 좋아. 민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선을 도로정책과 초단기 근로자로 추천했다. 저랑 형부가요? 은선이 그렇게 물었을 때 민기는 아니 누구든지, 하고 대답했다. 은선은 매일 일곱시 사십오분에 출근해서 도로정책과의 우편물과 신문을 차례로 찾았고 여덟시 삽십분에는 탕비실 정리를 마쳤다. 시청 매점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면 작은 카트를 끌고 가서 간식거리나 문구용품을 샀고 남는 시간에는 휴게실에 가서 잤다. 그러는 동안에는 민기의 말대로 누구와도 무관할 수 있었다.
가끔 은선이 탕비실 정리를 하는 중에 민기가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러 오기도 했다. 다른 주임들이 있는 경우에는 굳이 알은척하지 않았지만 둘뿐인 경우에는 민기가 먼저 커피를 마시라든지 졸린다든지 이따 출장이 있다든지 하는 소소한 말들을 늘어놓고 갔다. 오늘은 인사과 주임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민기는 그것이 불만인 것처럼 입꼬리를 내리고 말했다. 은선은 달리 해줄 말도 해줄 것도 없어서 새로 사온 콤부차 스틱 중에 파인애플맛을 세 개 골라 민기에게 건넸다. 이게 맛있나. 그렇게 묻길래 귀신이 있어요, 탕비실에 파인애플 귀신이, 하고 대답했더니 민기가 웃었다.
실제로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은선이 도로정책과에서 일하는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탕비실에 채워놓은 콤부차 스틱은 파인애플맛만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쯤 되면 누군가 집에 가져가는 것이 아닐까.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은 은선도 맛이 궁금해져서 파인애플맛 콤부차를 타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냥 파인애플맛이었다.
진선이 참치김밥을 좋아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것이다. 진선은 참치김밥 한 줄을 혼자서 거의 다 먹었고 은선은 치즈김밥 위주로 먹었다. 왕뚜껑은 적절히 나눠 먹었다. 이 집이 김밥을 잘해. 진선이 얘기했고 은선도 동의했다. 다 비슷한 김밥 같아도 어느 집 김밥이 좀더 맛있고 어느 집 김밥은 좀더 맛이 없었다. 그중에 더 맛있는 김밥집을 찾는 것이 은선에게 중요했다. 같은 돈이라면.
김밥 한 줄에 오천원이 넘어가게 되었을 때 은선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 주식 생각을 했고 코인 생각을 했고 ETF라든지 아무튼 적은 돈으로도 투자를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이제껏 자신이 했던 투자 중에 가장 잘한 것은 아무래도 민기와 진선이 신혼집을 구할 때 적금을 깨고 호주에서 번 돈을 합쳐 육천을 보탠 일이다. 그 덕에 은선은 지금도 서울에 살 수 있었다. 울산의 부모님 댁에 내려가거나 비좁은 단칸방에 살지 않고. 거실이 있고 부엌이 있고 제 몫의 방이 있는 곳에서.
워킹에만 집중하지 말랬더니. 은선의 돈을 받고 진선은 그렇게 얘기했었다. 그렇진 않았어. 은선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럼 뭐에 집중했니. 진선이 묻기에 그냥 사는 거,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은선이 일확천금의 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은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런 걸 바랄 것이다. 진선이라도. 민기라도. 다만 그 꿈은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며 복권을 사는 데에도 어느 정도의 성실함이 필요했는데 은선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은선의 성실함은 근태를 잘 지키는 것, 매일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 양말을 뒤집지 않고 빨래통에 넣는 것, 다 마른 빨래를 그때그때 개어 정리하는 것,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청소기를 돌리는 것으로 전부 소진되었다.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그러다가도 엄지손톱만한 금을 얻는 일도 있었는데, 카라반 파크에서 지내던 때였다. 은선은 퇴근 후에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빨래를 돌렸다. 옆 캐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테오의 여자친구가 왔나보군. 은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테오의 여자친구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은선과도 인사를 한 적이 있었지만 이름이 길어서 금방 잊어버렸다. 마테오와 그의 여자친구는 만날 때마다 싸웠다. 은선의 캐빈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싸워서 가끔 은선은 무슨 말을 하면서 저렇게 싸우나, 궁금했고 왜 매번 저렇게 싸우나, 궁금했다. 하지만 은선에게도 매일 할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은선은 흙이 묻은 운동화를 씻으려고 공용 수돗가로 갔다. 저녁 시간의 카라반 파크에서는 가끔 서로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정도의 작은 파티가 열렸지만 은선은 대부분 자느라 참여하지 않았고 그날은 그런 파티도 없었다. 수돗가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운동화를 씻고 있으니 바람소리가 들렸고 해가 지는 소리가, 그런 소리는 들릴 리 없었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광활한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은선이 안 쓰는 칫솔로 운동화 밑창을 닦는 동안 카라반 파크 안쪽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는 줄지어 서 있는 캐빈을 가로질러 수돗가 근처에 멈췄다. 바이크 뒤쪽에 커다란 박스를 실은 남자가 천천히 헬멧을 벗는 동안 은선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남자는 땀에 젖은 머리를 털면서 은선에게 물을 써도 되느냐고 물었고 은선은 글쎄요 저는 이곳의 관리자가 아니라서, 라고 말하긴 했지만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남자가 대충 세수를 하는 동안 은선은 나머지 운동화 한 짝의 밑창을 닦았다.
한국인?
어떻게 아셨나요?
운동화를 잘 닦길래.
남자는 어딘가 이국적으로 생긴 아시아인이었는데 뜻밖에도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은선의 부모뻘이라기엔 조금 젊어 보였지만 아무튼 나이든 아저씨였고 밝은 색상의 하와이안 셔츠 위에 가죽 재킷을 입어서 그다지 친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난 호주 사람이지만 와이프랑 애들은 한국인이에요.
그러시군요.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지금은 연구년이라.
네.
은선은 이전에 다녔던 직장의 나이든 상사가 그랬듯 묻지 않은 말을 자꾸 하는 남자에게서 슬며시 몸을 돌리면서 운동화에 칫솔질을 했다. 남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지만 발음만큼은 호주 사람 같았다.
여행 왔나요?
아니요. 일하러.
아하. 워킹 홀리데이.
보통 워킹만 합니다.
은선이 그렇게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흐음, 흐음, 그런 소리를 내더니 은선을 보고서 내 딸이 딱 자네만큼 컸어요, 하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남자의 딸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은선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인사했다. 남자는 하와이안 셔츠에 손에 남은 물기를 닦으면서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다가 말고 다시 뒤돌아 왔다. 그러더니 은선이 앉은 의자 팔걸이에다 작은 노란색 돌멩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하나 가지세요.
이게 뭔가요?
금이에요. 돌아다니면서 금을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남자는 오토바이 뒤에 실려 있던 큰 박스에서 금속탐지기를 꺼내와 보여주었다.
나한텐 별로 의미가 없지만 자네한텐 있을 것 같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금방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 은선은 남자가 두고 간 금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서 지는 해를 향해 비추어보았는데 진짜 금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모양이 영 볼품없어서 그런지 씹다 뱉은 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은선이 금을 손가락으로 굴려보는 동안 남자는 오토바이를 돌려 다시 카라반 파크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은선에게 아무래도 자네가 더 크네요 내 딸보다, 그렇게 말하더니 또 훌쩍 사라졌다.
은선은 금방 그 일을 잊었고 남자가 주고 간 금은 은선의 수많은 파우치 중 하나에 넣어진 상태로 한국까지 왔다. 입국 절차라든지 세관 신고 같은 것은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그 정도로 작은 금은 잡아내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은선이 입국하던 날에는 민기와 진선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 금은 이십이 인치 캐리어에 넣어진 상태로 민기의 차 트렁크에 실렸고 은선이 짐을 풀 마음이 들 때까지 한 달 넘게 방치되었다.
진선까지 출근하고 나면 은선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진선은 김밥과 라면을 먹고 샤워를 한 뒤에 늘 그랬던 것처럼 편한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은선은 현관을 나서는 진선을 보면서 소파에 누웠다. 잘 다녀와. 그래. 그런 다음에는 혼자 소파에서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고 짧은 동영상을 하염없이 보거나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평생 진선과 살 수는 없을까. 민기는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곧 잊어버리고 변기를 닦거나 공기청정기 필터를 씻었다. 그러다보면 민기가 퇴근했고 같이 저녁을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했다. 가끔 민기는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왔고 가끔 은선은 민기가 오기 전에 혼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럴 때의 메뉴는 보통 달콤한 빵이거나 아주 매운 닭발이었다.
오늘 은선은 푹 익은 김치에 참치와 두부를 넣어 김치찌개를 끓였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계란 세 개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냉동실 안쪽에 숨어 있던 잔멸치를 꺼내 간장에 볶았고 애매하게 남은 물만두도 전부 끓여서 퇴근한 민기와 저녁을 먹었다. 처제도 시집을 가도 되겠군. 민기는 햇반에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씩 비벼 먹으며 그렇게 말했다.
안 가고 싶은데요.
그것도 좋지.
민기는 은선을 별로 쳐다보지 않으면서 계란말이를 먹었다. 간이 완벽하다고 작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은선은 그런 민기를 바라보면서 민기의 대답이 그거 좋지, 가 아니라 그것도 좋지, 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민기는 진선과 결혼을 했으니 그 결혼생활을 좋아했으면 하는 것이 진선의 동생 된 은선의 바람이었다. 민기의 처제 된 은선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아직 그것은 후순위다.
민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은선은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은 집 근처가 아니라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까지 가서 한강공원을 뛰기로 했다. 굳이 한강을요? 은선이 묻자 민기는 굳이 그렇게 하니까 더 좋지, 하고 대답했다. 밥을 먹고 바로 뛰면 배가 아프니까 소화를 시킬 겸 광화문역까지 걷기로 했고 은선과 민기는 현관 앞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러닝화 끈을 묶었다.
신발이 금방 더러워졌네.
그러니까 검정색을 사랬잖아요.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광화문역까지 가는 길에 은선은 새로 알게 된 지름길을 민기에게 알려주었다. 광화문광장 끝까지 걷지 않고 중간의 세종문화회관을 통과하면 광화문역 1번 출구가 나온다고. 그런데 막상 걷고 보니 거리는 비슷하거나 더 먼 것 같았다. 대신 두 사람은 역 안에 새로 생긴 러너들을 위한 휴식 공간을 발견했다. 굳이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퇴근 시간이 지난 뒤의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딱히 앉을 자리도 없었다. 은선은 민기와 나란히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흔들거리는 지하철의 움직임을 버텼다. 달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