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가 듣지 못한다는 건 항상 알았지만 그녀가 항상 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언제 와닿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얘길 듣고도 믿지 않았다. 섹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앉혀놓고 삶의 진실을 말해줬을 테고, 실제로 충격을 받지도 않고 아마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어떤 것을 아는 것과 그걸 알기를 거부하는 것 사이에는 우리 중 가장 깨우친 사람이라고 해도 지극히 즐거이 머무는 어두컴컴한 틈이 자리하고 있다. 만일 엄마에 대해 공식적으로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할머니였을 것이다. 며느리를 못마땅해한 분이자, 아들 집 거실에 있던 며느리의 농인 친구들을 볼썽사납게 꽥꽥대는 새들만큼이나 혐오스럽게 여긴 분이었다. 그게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어머니를 놀리며 대하던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떤 남자들은 어머니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요염했으며 상대가 시선을 내릴 때까지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쇼핑중에 농인들이 내는 단조로운 후두음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이에게 보이는 반응이었다. 우리는 이집트 유대인들과 함께 쫓겨나기 전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 웃음은 목청껏 웃는 건 아니었지만 잔인하다 싶을 만큼의 빈정거림과 경멸을 담은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얼굴에서 그걸 읽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은 항상 실실 웃는지 마침내 이해했을 것이다.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 사람들이 그녀를 외면하는 이유, 친절하게 굴던 이들이 그녀와 놀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태도가 바뀌는 이유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1924년, 어머니는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어를 쓰는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전거 무역상으로 성공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청각장애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청각 전문의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상담을 받고 난 후에는 매번 더욱 낙담한 채로 돌아왔다. 의사들은 치료법이 없다고 말했다. 생후 몇 개월 된 아기는 뇌수막염으로 청력을 잃었고,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귀는 건강했지만 뇌수막염 때문에 청력을 관장하는 뇌 부분이 손상된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청각장애 자긍심 비슷한 것도 전혀 없었다. 청각장애는 낙인이었다. 극빈층은 귀먹은 아이들을 방치하기 일쑤였고, 그들에게 천한 노동 종신형을 선고했다. 아이들은 문맹으로 남았고 그들의 언어는 원시적인 몸짓이었다. 내 어머니의 부모님이 지닌 그 고상한 관점으로는 청각장애를 고칠 수 없다면 그걸 숨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장애가 부끄럽지 않다면 숨기는 걸 배워야 했다. 수화가 아닌 독순법을 익히고, 손을 쓰지 않고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식사는 손으로 하지 않으면서 왜 말은 손으로하려 드는가?
처음에 어머니는 유대계 프랑스인 사립학교에 등록했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 부모와 교사들은 농아가 그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파리에 있는 특수학교로 보내졌다. 수녀들이 가르치는 곳이었고, 알고 보니 농아를 위한 학교라기보다 예비신부(新婦) 학교에 가까웠다. 그녀는 책 한 권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걷거나, 허리와 팔꿈치 사이에 책을 끼우고 식탁에 앉는 연습을 통해 바른 자세를 배웠다. 바느질, 뜨개질, 자수를 익혔다. 하지만 쾌활하고 활달한 아이였던 그녀는 아버지의 상점에서 자전거를 하나씩 수집하는 말괄량이로 자랐다. 그녀는 인형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프랑스식 사교법 혹은 프랑스식 우아함과 몸가짐을 익히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이 년 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선의에 찬 신식 그리스 여성에게로 보내졌다. 자신의 저택에서 프랑스식 사립 농인 학교를 운영하는 여성이었다. 학교는 다정하고 너그러운 분위기에 사명감이 풍겼다. 그러나 수업은 엄마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을 흉내내는 법을 배우는 길고 고단한 시간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독순술 수업이었다. 주로 정면 독순술을 배웠는데 어머니의 경우는 빨리 깨친 덕에 측면 독순술도 배웠다. 그녀는 읽기와 쓰기를 익히고, 수화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문학도 조금 배웠다. 그리고 졸업식에서는 우연히 알렉산드리아를 지나가게 된 장관에게서 프랑스 동메달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들리는 척하기를 익히느라 자신의 첫 십팔 년을 보낸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없을 듯했다. 그건 장님에게 지팡이를 쥐지 않고 이 기둥에서 저 말뚝까지 걸음 수를 세어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핵심 구절에 있는 말장난을 들어야지만 웃을 수 있는 농담에 웃는 법도 배웠다. 러시아어로 말하는 누군가에게는 정확히 적절한 간격으로 고개를 끄덕여서 상대가 자신의 말을 전부 이해한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그리스인 여자 교장은 학생들의 우상이었지만, 그녀의 교수법은 복잡한 개념을 처리하고 통합하는 능력에 한해서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어느 한계점을 넘으면 엄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 후보자가 내놓은 공약들을 요약해주면 정치 이야기를 할 순 있어도, 후보자의 의제에서 모순점들을 철저히 따져 사고하는 건 누군가 설명해줘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추상적인 어휘를 습득하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인 틀이나 상징적인 지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모네의 그림을 좋아할 수 있어도 보들레르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할 순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신은 자신이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있을까?” 혹은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언어를 써서 생각했을까? 나는 묻곤 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언어가 아니라면 그녀는 생각들을 어떻게 체계화하는 걸까? 그것 또한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에게 자신이 농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깨달았는지, 들을 수 없는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을 듣지 못해도 괜찮은지 묻는다면, 그녀는 그것에 대해 정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차라리 장님에게 색깔을 묘사해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재치도 그녀를 빗겨나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코미디, 농담, 슬랩스틱을 사랑했다. 흉내내기에 재능이 있었고 무언극 배우 하포 마르크스를 좋아했다. 그는 말이 아니라 제스처로 농담을 하는 배우였다.
그녀에게는 충직한 농인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손가락으로 표현할 수 있는 농인들과 달리, 그들은 알파벳이 없는 언어를 사용했다. 오백 단어를 좀처럼 넘지 않는 어휘를 손짓과 표정으로 구사하는 간단한 언어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바느질, 조리법, 점성술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고, 아이들과 노인들을 쓰다듬으며 아낌없이 친절을 베풀 수 있었다. 손은 말보다 더 친밀하니까. 하지만 친밀함과 복잡한 개념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학교를 떠난 뒤 어머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했다. 피를 뽑고 주사를 놓는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병원에서 2차세계대전중에 부상당한 영국 군인들을 간호했다. 그녀는 그들 중 몇몇과 데이트를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열여덟번째 생일에 선물한 오토바이에 그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녀는 파티에 가는 걸 좋아했고 빠른 춤에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지르박을 추거나 이른아침 해변에서 수영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파트너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미모와 따스함, 온순함과 노골적인 대담함의 이색적인 조합에 놀랐다. 그것은 그녀가 농인인 처지를 보완하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녀가 농인이라는 걸 잊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예외였다. 시아버지가 될 사람은 그녀더러 ‘불구자’라고 했고 시어머니가 될 사람은 ‘꽃뱀’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두 분은 삼 년 뒤 결혼했다. 결혼식 사진 속에서 그녀는 활짝 웃고 있다. 그녀의 그리스인 선생님은 그녀가 이룬 승리에 환호했다. 그녀가 농인 게토를 벗어나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그녀가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유대인으로서 이집트에서—그리고 이집트 밖으로 나가 이탈리아, 그다음은 미국에서도—그렇게 많은 장애에 맞서온 지성과 투쟁적인 인내심으로 훌륭한 전문직 여성이 되었을 것이다. 내과 의사나 정신과 의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깨어 있지 않은 시대를 산 그녀는 가정주부로 남고 말았다. 유복했지만 그녀는 단지 여성일 뿐 아니라 농인 여성이었다. 두 가지 치명타를 갖춘 셈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이해했으며 그리스어와 기초 아랍어를 배웠다. 그리고 우리가 이탈리아에 정착하고 나서는 매일 시장에 가서 이탈리아어를 하나씩 익혔다. 뭔가 이해되지 않으면 그녀는 이해하는 척하다 결국은 이해했다. 그녀는 거의 항상 이해했다. 1968년 미국으로 이민가기 몇 주 전, 어머니는 나폴리에 있는 영사관에서 미국식 영어를 처음 접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따라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조용히 알아듣기 힘들게 횡설수설했는데, 미국 영사관 직원은 선서로 오해하고 흔쾌히 통과시켰다. 그 장면이 너무 어색해서 남동생과 나는 초조해하면서도 킥킥거렸다. 건물을 걸어나오면서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웃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이유를 설명해줘야 했다.
그녀의 청각장애는 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처럼 항상 서 있었고, 결혼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오르기 힘들어졌다. 회상해보면 벽은 항상 거기 서 있었다. 아버지는 클래식을 사랑했지만, 그녀는 콘서트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러시아 장편소설과 문체가 율동적이고 멋진 프랑스 현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그녀는 패션잡지를 선호했다. 그는 퇴근 후 집에서 독서하는 걸 좋아했지만, 그녀는 나가서 춤을 추고 저녁식사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미국 영화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집트에서는 미국 영화에 프랑스어 자막이 달려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 영화를 더 좋아했다. 프랑스 영화에는 자막이 없어서 그녀는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화면상으로 배우들의 입술 모양을 읽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레코 이집트의 세라피스, 알렉산드리아 주변의 고고학적 발굴,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의 소설처럼 상상하기에도 가장 희귀한 것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그녀는 가십거리를 좋아했다.
그들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얼마나 철저히 맞지 않는지 깨달았다. 두 분은 마지막날까지 서로 사랑했지만, 매일 오해하고 모욕했으며 다투었다. 그녀의 농인 친구들이 집에 오면 그는 밖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1960년대의 몇 년 동안은 아예 집을 떠나 있었고, 우리가 이집트를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돌아왔다. 농인사회를 벗어나 결혼한 그녀의 친구들 부부도 다난한 결혼생활을 겪었다. 농인 부부들만이 귀가 들리는 부부들만큼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어머니는 끝내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남을 웃기려고 익살스럽게 흉내내며 말하는 게 아니라면, 영어의 입술 움직임은 충분히 명쾌하거나 분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공적인 자리에서 입술 움직임을 과장하는 걸 싫어했다. 자신의 청각장애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게 싫어서였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장벽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선의를 지닌 이들은 농인의 화법을 따라 하거나 거친 목소리를 흉내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와 소통하려고 애썼다. 다른 이들은 마치 데시벨을 높이면 자신들의 요점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들이 소리지르고 있다는 걸 구별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거나,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아니면 그냥 웃고 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놀이터에서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이상한 목소리로 말하느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엄마는 원래 그렇게 말해.” 누군가 지적하지 않는 한 그녀의 목소리는 내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목소리, 해변에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나를 어르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목소리.
가끔은 엄마가 사실 농인이 아니라고 나 스스로를 설득해보려고 했다. 그녀는 고약한 장난꾸러기라고. 이따금 아이들이 눈먼 척하거나 죽은 척을 하며 노는 것처럼, 그녀가 귀먹은 척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팔짝팔짝 뛰게 만드는 더 좋은 수가 있을까?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장난을 멈추기를 잊어버린 것이다. 시험을 위해 나는 그녀가 보지 않을 때 뒤로 스르륵 다가가 귀에 대고 소리쳤다. 반응이 없다. 움찔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통제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때론 그녀에게 달려가 누가 현관 벨을 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내가 얕은 장난을 친 걸 깨닫고는 웃어 넘기곤 했다. 그녀 인생의 기쁨인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가 농인이라는 걸 상기시키는,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런 장난을 치다니 웃기지 않은가. 어느 날, 나는 그녀가 아버지와 외출을 하려고 옷을 차려입는 걸 보다가, 그녀가 귀걸이 한 쌍을 달고 있을 때 예쁘다고 말해줬다. 그래, 예쁘지. 하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어.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그래도 나는 농인이야, 잊지 마.
아이로서는 쉽게 잘 웃고 코미디를 좋아하고 유대관계가 좋았던 엄마와, 아내이자 농인으로서 슬픔을 견뎌내는 엄마를 연결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항상 울었다. 그분들은 다 울었다. 하지만 농인과 함께 살아온 우리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잘 느끼지 못한다. 동정심은 얕은 물에 물수제비로 던져진 돌맹이처럼 순식간에 잔인함으로 건너뛰었다. 소리 없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녀의 고독을 느껴보려는 노력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화내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녀는 내 말을 결코 들을 수 없었으니까. 상대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사실 말 자체보다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일이므로 어느 정도 추측과 통찰이 동시에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것보다 더 고된 일은 없었다. 그녀는 남동생이나 내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가 그 번호로 다이얼을 돌려 그녀 대신 전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배관공이나 친구들, 재봉사를 불러줄 수 있다는 것을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귀라고 했다. “얘는 그녀의 귀야.” 그녀의 시어머니는 공표하듯 말하곤 했다. 그 말의 뜻은 이러했다. 며느리의 뒤치다꺼리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주여 감사합니다. 안 그랬으면 저 불쌍한 여자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내가 전화를 걸지 않고 빠져나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숨기. 다른 하나는 거짓말하기였다. 나는 다이얼을 돌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통화중이라고 말했다. 오 분 뒤에 걸어도 아직 통화중이라고. 그 전화가 급할 수 있다거나, 남편이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으면 그녀가 외로움을 이길 수 있도록 친구든 친척이든 누군가와 얘기하는 게 간절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때로는 남자들이 전화를 했지만 남동생과 내가 중간에 낀 채로 하는 대화는 어색했다. 그 남자들은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중간자로 대기하는 일은 남동생에게 넘어갔다. 나는 동생에게 말하고 동생은 내 말을 전하고, 뒤편에서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할지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동생은 그걸 다시 내게 전했다. 가끔 나는 동생에게 그녀를 바꿔달라고 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거나 말해보라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워서였다. 그녀가 항상 내게 말하던 것들을 그녀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였다. 발음이 조금 불분명하고, 어그러진 문법에, 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들, 내가 말을 모르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올라가는 그 소리들을.
어릴 적 나는 어머니가 농인 친구와 통화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를 누군가 발명하는 상상을 했다. 그 기적은 삼십 년 전쯤에 일어났다. 내가 그녀에게 전신 타자기를 마련해드린 때다. 그녀는 난생처음 나나 남동생을 끼지 않고 농인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투른 영어로 장문의 메시지를 타이핑하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러다 칠 년 전 나는 그녀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 화상으로 통화할 수 있는 장치를 TV에 설치해드렸다. 친구들 대부분은 나이가 너무 많아 왕래를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다.
어떤 새로운 경험에도 열려 있던 어머니는 신기술을 만날 때마다 사랑에 빠졌다. (새로운 것에 다가가길 주저했던 아버지는 단파 라디오에만 매여 있었다.) 어머니가 팔십대 중반이던 몇 년 전, 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해외 친구들과 스카이프나 페이스타임으로 몇 시간이고 통화할 수 있게 아이패드를 사드렸다. 소년 시절 상상한 기계보다 더 좋았다. 그녀는 내가 집에, 사무실에, 체육관에, 심지어 스타벅스에 있을 때조차 내게 전화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페이스타임을 하면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혹은 잘 있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녀는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피웠는데, 나의 가장 큰 우려는 혹여나 그녀가 넘어져서 다치는 상황이었다. 또 페이스타임을 하는 건 내가 그녀를 그렇게 자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패드로 얘기하고 있는 걸 보니 오늘밤엔 오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어머니는 그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에 속했다. 언어는 이식된 팔다리 같은 인공 보형물이었다. 그녀가 지니고 살도록 배웠지만 그것 없이 살 수 있었으므로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더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었다. 사람들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과, 냄새 맡다fragrare라는 라틴어 동사를 어원으로 한 직감flair이 있었다. 그녀의 레이더는 항상 작동중이었다. 누구를 신뢰할지 무엇을 믿을지 어떻게 어조를 읽어낼지 분간하는 레이더였다. 그녀는 청각장애로 잃은 것을 후각으로 메꾸었다. 그녀는 내게 향신료를 가르쳐줬다. 식료품점에서 삼베 포대에 손바닥을 밀어넣고 향신료를 한 움큼 꺼내 내게 각각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면서 이름을 알려줬다. 그녀의 향수, 눅눅한 모직 냄새, 가스가 새는 냄새를 분간하는 법을 알려줬다. 냄새에 관한 글을 쓸 때 내가 향하는 곳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녀에게 단번에 끌렸다.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뿜어져나오던 느긋하고 명랑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몹시 불행한 영혼이었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그녀에게 끌린 이유는 누구와든 단번에 친구가 되는 그 거침없는 친화력 때문인 것 같다. 상대가 부자든 빈자든, 착한 이든 나쁜 이든, 정육점 주인, 집배원, 신분이 높은 사람, 혹은 그녀의 모국어가 자신과 같은 프랑스어라는 걸 모르고 그녀를 도와준 어퍼웨스트사이드 슈퍼마켓의 세네갈인 직원이든 상관없었다. 칸다하르나 이슬라마바드에 떨어져도 그녀는 아무 문제 없이 시장에서 원하는 소고기 부위를 찾아 가격을 흥정하다가 끝내 승리하고, 그와 동시에 처음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굴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더 대단했던 건, 친밀감의 존재를 잊었거나 아예 내면에 그게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살펴 찾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언어였다. 수감자들이 각자의 감방에서 그 자체로 독특한 문법과 알파벳으로 구성된 새로운 언어를 익혀 소통하는 것처럼,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 언어를 가르쳤다. 때로 내 친구들은 그녀를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녀가 들을 수 없다는 걸 잊고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하곤 했다. 그들이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모르고 농인이 말하는 프랑스어는 더더욱 모르는데도 말이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친구들에게 통역을 해주려고 하면, 친구들은 “이해했어”라고 말하곤 했다. “난 다 이해해.”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끼리 내버려두렴, 그만 끼어들어도 돼, 우린 괜찮아, 라는 뜻이었다. 정작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였다.
몇 년 전 어느 날, 정말 매섭게 춥던 날이었다. 나는 조깅을 하다가 몸을 녹이고 숨도 고르고 어머니가 잘 지내는지 확인할 겸 그녀의 집에 들렀다. 그녀는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 그날 밤에는 친구들과 같이 나가기로 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없지만 다음날 들를 테니 언제나처럼 스카치위스키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어머니는 좋아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떤 요리를 원했을까? 나는 윗부분이 살짝 바삭하게 구워진 지티를 제안했다. 그녀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스키용 마스크를 벗고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모두 내 입술이 가려진 채 이루어졌다. 그녀는 눈썹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내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어머니가 생을 마친 신대륙은 모두가 존중받고 평등한 권리를 가졌으며 존엄과 안전으로 번영했다. 그녀는 구대륙보다 신대륙을 더 좋아했지만,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셰익스피어라면 그녀의 ‘수용되지 않은’ 언어를 뭐라고 묘사했을지 생각하며, 말보다는 표정으로 유대감을 형성하던, 또다른 시대에서 온 그 직접적이고 촉감적인 언어를 내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깨닫는다. 나는 이 언어를 그동안 읽거나 공부한 책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말에 대한 믿음이나 재능, 혹은 큰 인내심이 없던 내 어머니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