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임희주는 다른 때와는 달리 많은 선물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택배를 많이 받았고 선물을 풀고 나서도 알록달록 예쁘게 생긴 포장 박스들을 한참 동안이나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법한 틴케이스(거기엔 사탕이나 초콜릿, 쿠키가 들어 있었다)들은 애초에 버리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책상 위나 책장에 진열하고 뿌듯해했다.
그것들을 전부 정리한 건 이듬해 여름이었다. 임희주의 집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여덟 개 있었는데, 새로 하나를 더 들이며 그 참에 미뤄왔던 분갈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작았던 화분에서 큼직한 화분으로 식물들을 옮긴 뒤, 이제는 책상에
올려둘 수 없는 무게가 된 화분을 어딘가에 올려놓기 위해 임희주는 책상을 팔고 낮은 책장을 샀다. 분갈이를
한 화분들을 책장 위에 올리고, 책장에는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책과 책상 위에 함께 뒀던 틴케이스들을
넣었다.
정리를 마치고 두 손을 탁탁 털며 뿌듯하게 화분들을 감상하던 임희주는, 한
김에 다 먹은 사탕통과 초콜릿통도 몇 개 좀 버리려고, 틴케이스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러다 청소하려던 걸 잊고 틴케이스의 예쁜 디자인을 감상했다. 먼지가
쌓인 것들은 하나씩 들어 대충 먼지를 닦고, 오랜만에 열어보기도 했다.
틴케이스 구석에 사탕가루가 조금 남아 있는 게 보여, 물티슈로 사탕가루를 닦아내려던 참이었다.
안 돼!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귀 기울여보니 틴케이스가 조금씩
울리고 있었다.
제발! 우리 굶어!
그 소리에 맞춰서도 틴케이스가 떨렸다.
너희가 누군데? 어디에 있는데?
여기, 틴케이스 안에.
안 보이는데.
안 보여도 믿어주면 안 되니? 우리 여기에 살아!
보여야 믿지.
임희주의 말에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그맣게 웅성거리는
것도 같았다. 몇 분의 대치 후 틴케이스 안에서 정말로 조그만 사람들이 스르르 나타났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고 바늘만큼 가는, 사람들이었다.
넌 누구야?
우리는 너의 비밀이야.
무슨 비밀?
네가 말하지 않는 것은 다 비밀이야. 봐봐, 틴케이스는 지금 바글바글해.
임희주의 질문에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며 반쯤 투명한 작은 사람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다른 반투명이들보다는 겁이 없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처럼 보였다. 그를
제외한 다른 반투명이들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틴케이스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나는 무슨 비밀이게.
음……
임희주는 청소나 화분 따위는 잊고 방보다 너저분한 자기 속마음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꺼내보았다.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고 맞히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내 비밀이 있나? 그런 것이 있나? 자기가 비밀이라고 주장하며 이름을 맞혀보라는 저
반투명이에게 정답을 대고 싶었다.
망칠까봐 두려운 마음?
땡.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
비슷해. 힌트를 줄까? 잘되고
싶은 마음, 하기 싫은 마음, 서운해하는 마음, 부자 되고 싶은 마음, 칭찬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
모르겠어.
나는,
……
이제 그만두고 싶어 마음.
……
임희주는 별안간 멍해졌다. 그랬다.
그건 비밀이었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임희주는
자기 앞으로 나선 조그만 반투명이를 빤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생겼구나,
내 비밀이. 밴드 멤버들에게는 거의 모든 걸 털어놓는 사이였다. 십 년 간 그래왔다. 그러나 그것만은 말하지 못했지. 다들 행복해 보여서. 임희주는 기타 연주자였다. 임희주가 속한 밴드는 지난해, 활동한 지 십 년 만에 아주 소박한
빛을 보게 되었고, 그 소박한 빛은 멤버들이 가진 각자 다른 성격을 비춰주었다.
임희주는 잘되었으면 하고 시작한 밴드가 잘되고 나서야, 자신이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음을, 자신이 잘되는 일에는 소질이 없음을 깨달은 참이었다. 임희주는 그제야 먼지 쌓인 틴케이스 사탕통에 비밀들이 와글와글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다들 최근에 생긴 반투명이들일 것이었다. 임희주는 치우려던
틴케이스들을 그대로 두었다.
먼지가 너무 쌓였으니 닦기만 하자, 하고 타협을 보려는데도 반투명이들은
난리를 쳤다.
안 돼 안 돼!
닦지도 말라고?
응. 아직 설탕 부스러기가 남았단 말이야. 우린 달콤한 걸 먹고 살아. 네가 흘린 설탕, 시럽,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
과연 비밀은 달콤하구나. 임희주는 어쩔 수 없이 들었던 먼지떨이도
내려놓았다. 새의 깃털로 만든 멋진 먼지떨이였다. 이번에
대청소 하려고 큰맘 먹고 산 건데.
임희주의 비밀 뭉치는 그해 임희주가 아주 초조했다는 증거였다. 지난해
임희주는 대외적으로 아주 빛을 보고 있다고 보여지는 시기를 보냈으나 그뒤로는 처음 안겨지는 부담감들로 끙끙 앓게 되었다. 속은 텅 비고 껍데기만 그럴 듯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그러다가 정말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밑이 깨진 독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임희주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될까봐 겁났다. 방송에 출연하면 바보 같아지는 사람, 말이 그럴듯하면서 삶은 형편없는
사람이 될까봐, 그런 것에 어느새 익숙해져 뻔뻔하게 그 놀이를 즐길까봐 겁났다.
*
보이지 않는 압력, 보이지 않는 시간에 꾹꾹 눌리고 찌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이렇게 생생한데 마음속에 오글거리는 비밀이 보이지 말란 법은 없겠지. 차라리 눈에 보이니
좋았다. 임희주는 비밀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두었다. 심심할
때마다 출석을 부르기도 했다. 저 새끼 뒤졌으면 좋겠다 비밀, 말을
왜 저따위로 해? 비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비밀, 삼 킬로그램만 빠졌으면 좋겠다 비밀, 코 수술 할까 비밀, 아리무라 카스미처럼 생기면 좋겠다 비밀, 잊히고 싶지 않아 비밀, 잊히고 싶어 비밀. 욕먹고 싶지 않아 비밀, 내가 잘못했어 비밀, 네가 잘못했어 비밀, 니네 정말 밉다 비밀, 그래도 좋은데 어떡하지 비밀.
그러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비밀이 보이면 괜히 얄미워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았으나 말랑말랑해 보이는 반투명 비밀은
단단한 방부제처럼 터지지도 짜부라지지도 않았다. 가장 자주 손가락에 눌리는 비밀은 언제나 나 그만두고
싶어 비밀이었다. 자꾸 그 비밀에 손이 갔다.
다디단 비밀과 시간을 보내다보면 괜히 짠 게 먹고 싶어졌다. 감자칩을
와삭와삭 씹으며 생각 없이 유튜브를 볼 때면 비밀들은 조용히 임희주에게서 물러나 틴케이스로 들어갔다. 짠
건 안 먹어? 하고 임희주가 묻자 우르르 들어가던 반투명이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짠 건 거짓말들이 먹어.
비밀은 거짓말이 아니야?
섞일 때도 있지만, 우리는 아니야.
묘하게 자부심이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비밀들이니까 하고 임희주는 생각했다.
임희주는 천천히 반투명이들과 친해졌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만두고
싶어 비밀은 임희주에게 다른 재미있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비밀들을 서로 붙여봐.
어떻게?
사실은 아직도 밴드가 좋아 비밀과 그만두고 싶어 비밀을 붙여두면 임희주가 작곡한, 임희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멜로디가 아주 작게 들렸다. 한껏 집중해야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지만 임희주는 알았다. 서로 팽팽하게 입장이 다른 비밀을 붙여두는데 왜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는지, 그것마저 팽팽한 마음인 것 같아 임희주는 놀라워하며 조금 웃었다.
그러고는 다른 비밀을 붙여보았다. 정해민 서운해 비밀과 그만두고 싶어
비밀을. 그러자 임희주가 가장 좋아하는, 정해민이 작곡한
노래의 멜로디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지. 임희주는 가냘프고
사라질 것 같은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정해민은 밴드의 보컬이자 키보드 연주자였다. 임희주는 멤버들을 모두 좋아했지만, 그중 정해민을 가장 좋아했다. 어쩌면 나의 비밀들이 단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정해민 생각 때문인가? 임희주는
생각했다.
정해민은 온갖 유행하는 간식을 섭렵하는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길거리에
생기는 모든 간식을 품에 안고 연습실로 들어오는 사람. 도넛, 앙버터, 크로플, 젤라또, 약과, 츄러스, 탕후루…… 또
뭐가 있었더라? 간식 사랑꾼답게 정해민에게 겨울에 붕어빵과 군고구마는 클래식이었다.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임희주는 모든 것에 전부 관심을 보이는 정해민이 신기하고 좋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간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전부 좋은 건 아니고 정해민이 간식에 관심이 많은 것이, 오직 정해민의 경우에만 좋았다.
뭔가를 잘 좋아하지 않는 임희주에게 정해민을 좋아하는 일은 드물고 소중했다. 정해민
때문에 그만둔다는 말을 못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밴드를 나오면, 나온다고
말하는 순간 해민이 자기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할까봐. 그런 말은 안 해도 이제 같은 밴드도 아니고
굳이 만날 이유도 없고 그러다가 영영 만나지 않게 될까봐. 그런 건 싫은데. 해민과는 함께이고 싶었다. 해민과 알게 된 지 벌써 십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밴드를 함께한 지도 그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빛을 볼 만한 시간이네. 주변 사람들은 뭐든 십 년 정도 하다보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낸다고 했다. 그게 성공이든 실패든. 그런데
막상 그 결과를 받아들면, 이게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없어져버리는 게 인간인 모양이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더라도 임희주는 그런 인간이었다. 바라던 걸
받아드는 순간 이게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었다고? 하고 의심하는 인간.
해민은 어떤 인간일까. 십 년을 알았는데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십 년 동안 하던 밴드의 영상이 갑자기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맞았다. 인터뷰를 했고 공연 요청을 받았으며 곡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고 믿었으며 유행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속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던 임희주는 그날부터 하루하루 오락가락한 마음에
살았다. 십 년 동안 임희주가 유명해지기만을 바란 건 아니었다. 유명하지
않은 동안에도 꾸준히 해온 일 덕에 음악감독 일과 세션 연주로도 먹고 살 수 있게 된 참이었다. 주목을
받고 싶었느냐고 물으면 그건 여전히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받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 기회는 어긋나게 도착한 것 같았다. 이제는 그저 문제없는 (그러면서 이전보다 약간 나은) 작업물, 크레딧에 적히는 이름, 좋아하는 동료 몇몇의 인정이면 되었고 주목받는
일은 너무…… 두려웠다.
팀에 대한 반응, 팀에 속한 개인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려 인터넷을
자꾸 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멤버들과 모이면 대화의 절반 이상이 댓글 봤어? 로 구성되는 것도. 그리고 나머지는 밈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임희주는 매번 대화 사이사이에 그게 뭐야? 라고 묻는 것으로 끼어드는
일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든 멤버들 중 가장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임희주가 그렇게 물어오면 돌아오는 반응도 매번 비슷했다. 이거 몰라? 그러면 임희주는 속에서 스을쩍, 그러나 뚜렷하게 심술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몰라 몰라 모른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을. 성질을 부리고 싶은 순간이 자꾸 늘어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속이
뒤틀리면 평소에는 다 괜찮았던 동료들의 모든 말버릇 웃음 포인트 손짓 몸짓이 전부 마음에 안 든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희주만의 불편이었고, 동료들의 의지는 굳건했다. 각자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임희주가 보기에는 자신을 뺀 모두가 갑작스러운,
그러나 기다려온 행운에 단순하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나는 그러지 못하지, 하고 임희주는 자주 자책했다. 임희주는 단지 밴드 이름을 자신이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놓지 못하고 있었다. 밴드 이름은 ‘놀
줄 아는 까마귀’로 아주 먼 옛날 언젠가 임희주가 읽고 있던 조류도감에서 까마귀에 대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읽어주자 다들 열광하며 지었던 이름이었다. 밴드 이름 때문만은 아니라, 멤버들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까마귀이고 싶었지만
이제 까마귀는 임희주가 좋아하던 까마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비밀들과 함께일 때 임희주는 오랜만에 평안했다. 시끄러운 머릿속 생각들을
마주하자 의외로 복잡하던 마음이 잠잠해지는 걸 느꼈다. 작은 비밀들은 가벼운 농담으로 해방시키기도 했다.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던 말들. 주로 나 코 수술 하고 싶다, 코 콤플렉스인데. 그런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아직도 외모에 자신이 없니,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사랑해라! 하는 말을 들을까봐 늘 삼켰는데, 아무리 임희주가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였고 콤플렉스는 콤플렉스였다. 비밀들의 존재는 가끔 용기도 줬다. 작업실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 동료를 빤히 째려보는 러닝셔츠를 입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 아저씨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만 쳐다보고 갈 길 가세요. 자기도 담배 피우면서 왜 얘만 나오면
그렇게 띠껍게 쳐다봐요. 자기는 걸어다니면서 뻑뻑 피우더만. 꽁초도
팍팍 던지더만! 얘는 숨어 피우고 꽁초도 잘 버리고 있는데 왜 애 눈치를 주고 그래!
아저씨는 지지 않고 니미 씨발년 니 에미가 그렇게 키우디! 라며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임희주는 두려웠지만,
그 와중에도 아저씨가 하는 욕이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에 좀 신기해했다. 저건 늙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된 일종의 유행어인가? 입에 짝짝 붙는? 언제나
니미 씨발과 니 에미 어쩌구가 호응하여 붙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남자애들도 많이 쓰는
거 보면 세대의 유행어는 아닌 것 같고…… 그런 딴생각을 하느라 뚱한 표정이 되어 있는 임희주를 임희주보다
다섯 살 어린 작업실 동료가 작업실로 끌고 데려왔다.
언니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 임희주는 자신의 사탕통에서 가루를 핥으며 고요히 살고 있는, 담배
피우는 여자들 쳐다보는 아저씨 짜증나 비밀과 좆같이 생긴 것들이 편하게 사네 비밀을 떠올렸다. 사탕통을
조금 더 뒤져보면 쌍스러운 새끼들 내가 욕을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나 비밀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입밖으로
뱉으면, 사탕통에 숨은 그애들은 사라지나? 하는 궁금증 섞인
생각 덕분에 무서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혼자가
되면 낯선 반투명이 하나가 새로 생긴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아까 존나 무서웠다 비밀이었다.
임희주는 남들이 보기에는 혼자인 방안에서 반투명이들에게 그런 속내를 털어놓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뜬구름 잡는 듯 명확하지도 않는 주제에, 얘기하다보면 언젠가 했던
말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술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내적
평화’ 같은 건 모르겠어. 무기력, 불안정, 집착, 혼돈
같은 것 알아도. 근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것들은 죄다
뒤섞여 있어서. 하나하나 골라내기가 뭐해. 그런 걸 다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 아님 신경도 안 쓰고 사는 사람이 있나? 진짜
궁금하다. 진짜 궁금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절거리다가 머쓱해지면 괜히 반투명이들에게 틱틱거렸다.
니네가 아니? 이 작은 사람, 작은
사람들아. 니네가 사람 마음을 아냐고.
그러면 반투명이들은 반투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지.
맞아. 너희는 알지. 내가
모르지.
임희주는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고 무심히 반투명이들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일하는 개미들을 지켜보며 누운 베짱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흥얼흥얼 읖조린 게 시작이었다.
비누 아닌 소금 아닌 녹지 않는 작은 마음 아는 마음 모르는 얼굴 내가 언젠가 했던 말들 잊지 않은 무수한 비밀들
미운 마음이 오래 산다는 걸 알면 너는 어떤 표정 지을까 상냥한 눈매 얌전한 웃음 너는 뭐라고 말할까. 누워서
기타를 이리저리 퉁기며 그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반투명이들은 좋아했다. 자기들 노래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거리며 노래를 듣는 반투명의 작은 사람들을 보고 코로 흥흥 웃고 다시 콧노래를 부르고
하기를 반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