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유튜브가 화제가 되는 시간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도 해제되면서 놀 줄 아는 까마귀는 점점 행사며 공연에
빠짐없이 불려 갔다. 무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환영받는
무대는 처음이라고 해야 하나. 무대에서 해민은 언제나 멋졌다. 길바닥에서도
멋있었는데 말해 뭐하겠나. 임희주는 언제나 해민의 뒷모습을 봤다. 긴
머리칼. 피아노에 앉은 등. 가끔 멜로디언만 멘 채 무대를
뛰어다니는 다리.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뻗는 팔. 해민은
십 년 내내 멋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자꾸만 해민을 좋아하는 마음을, 함께 잘되자고 여러 날 다짐했던 믿음을 갉아먹는 독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제
임희주는 언제나 해민의 등만 볼 때가 많았다.
예전에는 무대가 끝나면 바로 마주앉을 수 있었다. 소주나 맥주를 마시며, 혹은 그 둘을 섞어 마시며 음정이 틀리고 우스운 노래를 부르거나 좋아하는 음악가에 대해 하염없이 얘기하는 새벽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다음날의 컨디션을 위해 빠르게 쉬어야 했다. 아니면 다음 공연을 짜거나. 붙어 있는 시간은 늘어나는데, 말수는 전보다 적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임희주는 그런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가 잘못해서라고
말하기엔 모두가 억울했다. 그들은 유명해진 만큼 바빠졌고 바빠진 만큼 지쳤고 지친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몸이나 정신이나 습관이나 말투 따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꼬투리 잡혀 다시는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는 강박도 은은하게 그들 사이를 지배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서로서로를 감시하는 것
같은 눈치가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충실히 임하는데 너는 안 해? 너는
빠져? 네 사적인 일로? 연습 시간을 조율하거나 못 나온다고
말하는 멤버가 있으면 단체 채팅방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다하고 있었다.
놀 줄 아는 까마귀에게는 규모가 큰 소속사들의 러브콜이 꾸준히 들어왔다. 멤버들은 신중히
회의한 끝에 기획사를 옮기기로 했다. 세 소속사로 좁히고 미팅을 했다.
계약 사항을 확인하고 소속 팀들을 확인했다. 임희주는 어떤 것에도 심드렁했다. 마지막 기획사와 미팅을 한 날, 멤버들은 그 기획사에 마음이 기운
것 같았다. 미팅에 나온 담당자들 말에 따르면 다른 곳들에 비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멤버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해민도 별말은 없었으나 기뻐 보였다. 임희주만 다른 마음인 것 같았다.
임희주는 이상하게 모든 것이 불안한 동시에 넌더리가 났다.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을 선뜻 내미는 사람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건 스스로를 못 믿는 마음에 가까웠다. 뭘 믿고 이래? 하는 마음의 소리가 혀끝까지 차올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임희주는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미팅이 끝나고 돌아갈 때,
기획사 사람들은 멤버들에게 비싼 값의 위스키도 한 병씩 주었다. 연습실로 가서 마셔버리자는
멤버들이 있었으나 임희주는 혼자 빠져나왔다. 누군가가 그런 임희주에게 한마디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른 한 명이 참으라는 듯 그의 어깨를 감쌌다.
좋은 날인데 왜 그래.
그게 해민의 목소리였을까. 해민은 언제나 팀의 중재자 혹은 조율자였다. 그것은 달리 말해 임희주의 편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해민은 늘 조곤조곤 조용하게 이야기했는데 노래할 때만은 시원했다. 임희주는
해민의 탁성을 특히 좋아했다. 해민의 기타, 해민의 목소리. 같은 기타를 쳐도 치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임희주도 기타를 쳤지만
해민이 치는 기타 소리가 훨씬 듣기 좋았다. 해민이 기타를 칠 때만 보이는 몰입감 같은 게 있었다. 그 외의 시간에 해민은 ‘사람을 대할 때’라는 투명한 막을 내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 막이 걷혔다. 사람들은 막이 걷힌 해민에게로 단번에 스며들었다.
임희주는 해민과 단둘이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해민의
속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해민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는 필수로 참석했지만 임희주가 따로
제안하면 그건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해민에게 거절당할 때 임희주는 외로웠다. 임희주가 해민, 오늘 내가 좀 답답해서, 바쁜 거 알지만…… 맥주 마시고 갈래? 하고 고민을 무릅쓴 제안을 오늘은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가서 쉴래, 하는
말로 거절하고 다른 날 밴드 멤버 대부분이 연습 끝나고 한잔하자고 말하면 참석하는 식이었다. 그래 싫겠지. 해민의 입장에서도 항상 의욕 없는 나보다는 힘내는 다른 멤버들과 으쌰으쌰 하며 기운을 내는 게 좋겠지. 혼자서 나름대로 납득을 해보았지만, 시원치는 않았다. 임희주는 해민이 자신을 일부러 피한다고 생각했다. 임희주가 해민에게
느끼는 감정은 서운함이 깊어진 분노였다. 그건 독이었다.
그렇게 서운하고 외로운 밤이면 해민이 노래하는 영상을 보았다. 놀
줄 아는 까마귀 영상이었지만 해민의 모습만 주의 깊게 보았다. 그게 언제든, 슬픔이 무엇으로부터 왔든 해민의 노래를 들으면 위로가 되었는데. 해민에게
위로를 받으려면 좀 멀어져야 했다. 해민의 팬들만큼.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욕심이 나서, 그립기만 해서 해민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썼다. 참 이상하지.
시간이 가면 더 가까워지는 일만 남을 줄 알았는데.
*
반투명이들은 조금씩 커지고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볼
때에는 분명 조금은 말랑해 보이는 테두리였는데. 미움 담당인 반투명이들은 눈에 띄게 단단하고 커져 있었다.
설탕만 먹고 사는 건 아닌가보네.
커지는 건 네 혼잣말 탓이야. 단단해지는 건 네가 쓴 시간 탓이고.
초반과 다름없이 반투명하고 조금 물렁해 보이는 비밀 하나가 지나가듯 뚱겨주었다.
그 무렵 임희주는 아무리 가벼운 연락도 받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희주야 오늘 아빠 생일이야 하고 보낸 카톡은 물론이고 연습하던 동료가 야 왜 이렇게 덥냐 그냥 물에 뛰어들고 싶다 라고 보낸 카톡에도. 임희주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찾는 일거리와 집에 돌아와 비밀들과 보내는 시간뿐이었다. 임희주는 요리도 독서도 운동도 하지 않았다. 저녁은 후다닥 먹고
사탕통을 앞에 두고 엎드렸다. 비밀들과 이야기하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다시 이야기하다가 졸음이
몰려오면 자고, 새벽이면 감기지 않는 눈을 애써 감아가며, 머릿속에서는
비밀들과 나눈 이야기를 복기하거나 다른 버전으로 상상하느라 바빴다. 제때 잠들 수가 없었다.
쌓이면 독이 되는 것은 비밀이 품고 있는 감정들이었다. 서운함이 쌓이면
분노가 되었다. 자신이 팀에서 나간다고 해도 해민이 붙잡지도 말리지도 않을 거라고 상상하면 서운했다. 서운해하면 화가 났다. 임희주가 바라는 것이 팀을 그만하는 건데도
그랬다. 원하는 게 왜 제멋대로인지. 나가고 싶어하면서 붙잡아주길
바라는 이 마음은 뭔데. 임희주는 스스로가 싫었다. 유치하고
짜증스러웠다. 뒤틀리고 꼬인 마음, 소인배 같은 마음으로
스스로도 괴롭히고 십 년 동안 좋았던 주변 사람도 괴롭히는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서 견딜 수 없었다.
비밀이 거짓말과 닮았다면 독은 분노와 닮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임희주는 틴케이스를 열어 비밀들과 마주했다. 너희가 뭐. 있으면
어쩔 건데. 임희주의 분노는 아무것도 못하는 반투명이들을 향해 번졌다.
못난 마음과 달리 오밀조밀 상큼하게도 생긴 비밀들, 그런 비밀들의 무표정을 보다보니 점점
화가 거세어졌다. 내뱉지도 어쩌지도 못한 비밀들이 우글거리는 게 짜증났다. 너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기나 해? 손에 잡히는 대로
비밀들, 반투명이들을 한 움큼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임희주가
살면서 해본 적 없는 난폭한 행동이었다.
먹으면 안 돼!
임희주의 손안에서 반투명이들은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임희주는 손바닥 가득 쥔 비밀들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우둑우둑 씹었다. 비밀들은 입안에 넣으면 녹으면서 터지는 불량식품 사탕처럼 혀와 이를 때리며 터졌다. 아주 약하게, 그러나 분명히 팡팡 터지는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입안을 때리는 아주 작은 진동에 임희주는 속이 시원한 동시에 허무해서 슬펐다.
내 비밀은 무력하구나.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가닿고도 비밀들은 계속해서 소란스럽게
터졌다.
우글거리고 소란한 식도와 위장을 끌어안고 임희주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이상하게 진이 빠지는 것이, 꿈속에서 쉬지 않고 엉엉 운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레 진격의 거인 같은 게 반투명이 민족을 몰살시킨 데 원한을 품은 반투명이들이 자신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았다.
임희주는 침대에 누운 채 뚜껑이 열린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사탕통을 바라봤다. 삼켜지지 않고 살아남은 비밀들은 전보다 위축되어 보였다. 임희주에게
말을 걸지도,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은 채 서로 꼭 붙어 있었다. 임희주는
말없이 사탕통의 뚜껑을 닫아주었다. 미친 폭군처럼 굴었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과하지 않는다고 속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참을 해파리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누워 있는데,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모든 연락을 받지 않던 임희주였지만 할머니 전화는 어쩐지 받고 싶었다. 몸에 힘을 주어 두 톤 정도 올린 힘 있는 목소리를 조금 연습한 뒤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안녕! 뭐 해?
꽃 봐.
무슨 꽃?
주일이가 카네이션 주고 간 거 땅에 심었다.
오……
할머니 팔자가 제일 좋다.
안 더워?
무지 더워.
밖에 있지 말고 거실 시원하게 해놓고 마루에서 꽃 봐.
여기 앉아 있으면 시원해.
다행이네.
콩도 심고 깨도 심고 해야 되는데 귀찮아. 귀찮아서 못하겠다.
콩이랑 깨 심어서 뭐하는데?
콩밥 해 먹고 기름 짜고 그러는데 올해는 귀찮아 안 할려.
그래, 하지 마, 다리
아프고 허리 아파.
가만있으면 안 아파, 하기 싫어서 아프지.
아프지 마.
으응.
할머니 안녕, 나 들어갈게.
들어가.
다음엔 내가 전화할게.
으응, 그려. 손녀 알라뷰. 사랑해.
전화를 끊고 임희주는 할머니가 했던 말을 할머니의 무심하고 흘러가는 듯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해 보았다. 가만있으면 안 아파, 하기 싫어서 아프지. 아무래도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병에 걸렸다면 아무래도 하기
싫음 꾀병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 뭐해? 꽃 봐. 임희주도 가만히 앉아서 꽃이나 보고 싶었다. 손녀 알라뷰. 사랑해. 그 말을 다시 말할 때 으깨져 위장으로 간 이름 모를 비밀
하나가 꿈틀거린 것 같았다. 뱃속이 가득찬 동시에 텅 빈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기분이 좋지 않았다.
*
비밀들을 씹어먹은 임희주는 한동안 늪처럼 지냈다. 느리고, 깊이를 모르겠고, 가만히 두면 아래로 아래로 끌려갔으며, 간혹 속이 부글거렸다. 뱉지 못한 말들, 정리하지 못한 입장들이 늪에 사는 침수 식물처럼 속을 채웠다. 임희주는
편치 않은 속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변비 걸린 마음…… 하고
자조하고 자학했다. 그러게 그걸 왜 삼켜서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토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비밀이 뱉어지는 방법을 찾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작업실에서
밴드 멤버들 전부와 술을 잔뜩 마신 날이었다. 그러니까, 정해민이
먼저 집에 가지 않고 남은 날이었다. 임희주는 맞은편에 앉은 정해민을 의식해 평소 주량을 넘어가도록
술을 마셔댔다. 긴장하는 날이면 꼭 그랬다. 거듭 잔을 채우고,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다. 무슨
술을 몇 잔씩 마셨는지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의미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임희주가 씹어먹고 삼켜서 뱃속에 가라앉은 비밀들을 술에 담그면 살아났다. 임희주는
취했고, 임희주 속에 있던 비밀들은 소주에 적셔져 부서졌던 몸을 다시 붙이고, 맥주의 탄산을 타고 입밖으로 퐁퐁 나갔다. 임희주는 눈이 마주치는
멤버들 하나하나 붙들고 속엣말을 쏟아냈다.
야 너지, 너 그때 카메라 보면서 나 혼냈지, 내가 모를 줄 알아?(김민지 존나 서운해 비밀)
너네는 어쩜 그렇게 카메라가 자연스럽냐, 부러워 죽겠다 진짜(맨날 나만 부적응자야 비밀)
다들 돈 많이 모았어? 빌렸던 거 다 갚고도 남았어?(난 요령도 없는데다 실속도 없어 비밀)
시작할 땐 왜 반대 안 했냐고? 내가 이렇게 알려질 줄 알았냐!(그런 거 수천수만 개인데 해봤자지 뭐 비밀)
등등……
그날 술자리의 대 민폐는 말할 것도 없이 임희주였다. 누군가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쟤 요즘 왜 저러냐고 그동안 복잡해 보여서 참았는데 이제 진짜 못 참아주겠다고
짜증을 냈다. 임희주의 시선에서는 그 둘의 얼굴이 섞여 보였다. 임희주는
성질을 내고 내고 또 내다가 주저앉아 울었다.
나 이제 하기 싫어. 너네도 나 싫어하잖아. 다 알아. 이제 까마귀 안 하고 싶어.
엉망으로 우는 순간에도 임희주가 했던 생각은, 모든 비밀이 다 내던져진
와중에도 해민을 향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해민에게는 할 수 없었다. 목구멍에서 비밀 하나가 턱 걸려 있었다. 정해민, 나한테 요즘 왜 그러냐고 좀 물어봐줘. 네가 나가지 말라고 하면
나 안 나갈게. 계속 할게. 같이 하자고 해줘. 그렇게 말하려다가, 징징거리고 애원하려다가 몇 번이고 꿀꺽 삼킨
스스로를 알았다. 분명 그 말을 해민에게 꼭 하고 싶었는데, 자기를
붙들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몇 번이고 해민에게 하고 싶은 말을 곱씹는 동안 실은 뒤에 붙은 말들이
완전한 진심이 아닌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진심이 아닌데도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 뭘까. 그런 건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눈앞이 까맣게 꺼져가는 순간에도 임희주는 속상했다. 아주
연약한 내장을 철수세미로 설거지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쓰라리고 헐어버리는 듯한 느낌.
*
간질간질하기도, 얼얼하기도 한 비밀들, 그 외의 생각들이 전부 조용해진 건 그대로 잠든 임희주가 다음날 오후에 깨어났을 무렵이었다. 전과 달리 머릿속이 고요했다. 서로 치고받던 생각들이 웬일로 잠잠했다. 임희주는 눈을 끔뻑이며 지난날의 참사를 떠올려보았다. 블랙아웃 된
기억 사이사이에 한숨을 쉬거나 미간이 찌푸려진 동료들의 얼굴이 어슴어슴 떠올랐다.
나는 이제 망했다. 좋게 얘기해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그 지랄을 했으니……
방구석에서 침대를 치며 울고 있던 임희주를 찾아온 건 정해민이었다. 해민은
귤과 죽과 헛개수를 들고 왔다. 아무 말 없이 죽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죽을 떠먹는 임희주를 지켜보던 해민이 물었다.
근데 희주야.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어? 우리 항상 약속했잖아. 등산할 때처럼 서로 힘들면 등 밀어주자고
건배했잖아. 오래오래 같이 하자고.
해민이 물어봐주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었나.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귤이나 주무르며 임희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해민은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임희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을 견디는 해민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 기다리는 사람인 게 아닐까. 기다릴 때도 기다리지 않을
때도 표정이 똑같은 사람. 임희주는 손 안에서 따뜻해진 귤을 까며 말했다.
갑자기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거 같아.
몰랐다고?
응. 나도 제법 구체적으로 내 꿈을 상상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상상이어서 몰랐던 거 같아. 내가 그린 꿈의 장면에 내가 별로
안 어울리는걸. 더구나 내가 그걸 좋아하지도 않는단 걸. 꿈이라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은 아니야. 너 알잖아. 진짜 그렇게 되고
싶었어. 그 길만 있는 줄 알았기도 했고. 그런데, 이상은 뚜렷했는데, 그 뚜렷한 이상에 걸어들어가자니 아, 나 이거 안 좋아하는구나, 깨달았어.
큰 회사에 들어가고, 좋은 악기 들고,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전부 다 나 좋아하고 그러는 거?
응. 나는 사실 큰 회사에서 날 대우해주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말투를
싫어했고, 이상하게 자신만만한 프로듀싱 팀도 별로고, 좋은
악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전부 다 날 좋아해도 오히려 경계만 할 거야. 꿈꾸던 게 슬금슬금 현실이 되어가니까 이제야 알 것 같더라고.
왜 얘길 안 했어?
알게 된 지 나도 얼마 안 됐어. 일이 잘 풀리는 건 맞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적응해보려고 노력하느라 잘 몰랐거든. 어느 날 알게 됐지. 오랫동안
나도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되어본 적이 없어서 내가 그렇게 되는 걸 싫어하는구나
알 기회가 없어서 그런 거였지 뭐야.
진짜 어지럽게 말하네.
근데 뭔 말인지 알겠지?
응.
짧게 대답하는 해민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똑같은 얼굴. 기다릴 때나 기다리지 않을 때나. 물었을 때나 대답을 들었을 때나. 한결같은 얼굴. 임희주는 따뜻한 귤을 반으로 쪼개 정해민에게 건넸다. 정해민은 귤을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임희주는 손끝에 묻은 귤즙을
어느 비밀이 먹으려나,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손끝보다는 눈앞의 해민에게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