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설탕과 독 (마지막)

임희주는 밴드 멤버들에게 술자리에서의 깽판을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밴드를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집에 돌아와서는 언제나 그랬듯, 해민의 영상을, 놀 줄 아는 까마귀가 출연한 모든 영상을 보았다. 무대 영상을 다 보고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자체적으로 찍어 올리던 브이로그 영상도 보았다. 오래오래 보다보니 멤버들 각자의 말버릇을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영상들을 보며 임희주는 여러 가지로 놀랐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이 그 영상 속 까마귀들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재밌네. 저때 다 예뻤네. 어색하고 잘 못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좋네. , 임희주가 유독 놀랐던 것은 정해민 때문이었는데,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해민이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간 그렇게 오래 자주 봤는데. 왜 이제야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팀의 얼굴인 탓에 해민은 각종 무대 인터뷰에서 마이크를 쥐었다. 여기저기서 초대받아 출연한 유튜브 예능에서도 나서서 영화 줄거리나 좋아하는 앨범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 건 자연스레 해민의 몫이었다. 그때 해민은 침착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주어와 서술어를 자주 틀렸고 적절할 때 말을 끊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노래인데, 그렇게 만들었는데, 좋아해주시는데, 하고 아슬아슬하게 말을 이어 갔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시어로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표현해본, 그렇게 작업한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하는 식으로.

현장에서 해민 뒤에 서 있을 때도 그렇고 영상을 이전에 봤을 땐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돌려 보다보니 들렸다. 정해민이 어어, , 하고 말과 말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 다른 소리로 주변의 관심을 돌리거나 끼어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임희주였다. 많이…… 안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임희주는 그런 자신을 보고 조금은 부끄럽고, 또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 좋은 편집점이었는지도? 이상한 자신감이 들었다. 해민의 그런 말하기 습관,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들은 이전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해민은 언제나 자기보다 뛰어나고 못하는 건 없다고, 누구보다 재능이 있고 매력이 있고 순발력이 있으며 그래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없음에도. 임희주는 당연한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언제나처럼. 진심이고 비밀인 반투명이들을 씹어먹은 뒤 이상한 진실의 눈을 뜨게 된 것 같았다. 정해민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임희주가 못하는 걸 하는 사람이었다. 잘하지 못함에도 주어진 역할을 하는 사람. 임희주가 정해민의 단점을 보지 못한 것은 정해민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도 있지만 자신이 못하는 걸 하는 정해민의 모습에만 눈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조금 좋아했다. 언젠가 정해민이 못하는 걸 나는 잘하거나, 아니면 그냥 했겠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어딘가 후련해진 임희주는 영상을 끄고 오디오를 재생시켰다. 악기 소리와 목소리만을 듣고 싶었다. 그간의 음악을 전부 다시 들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침 해가 뜨지도 않았고, 쭉 새벽이었고 새벽이었다. 담담하게 흐르는 대로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래들이 생각보다 좋아서 놀랐다. 마음에 들었다. 그간 놀 줄 아는 까마귀에서 했던 음악들이, 거의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임희주에게 고요한 충격이었다. 질렸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변했다고 애정이 다 소진되었다고 생각할 때에도, 내가 만들었던 것들은 좋구나. 작고 뾰족한 깨달음이 싹텄다. 그것은 반투명했다. 비밀인가? 그런데 임희주 혼자만의 비밀은 아니고 어쩐지 세계의 비밀인 것 같았다. 낯설어서, 자기 것 같지가 않았다.

 

*

 

놀 줄 아는 까마귀는 임희주를 뺀 네 명으로 새로운 기획사와 계약을 했다. 계약을 한 주의 주말에, 임희주의 집에 해민이 닌텐도를 들고 놀러왔다. 임희주는 의연한 표정으로 우리는 지금부터 드라마를 같이 볼 거라고 선언했다. 보면서 먹을 것은 마음대로 시켜봤어, 하며 좌식 테이블에 쌓여 있는 배달 음식들을 보여주었다. 떡볶이, 밀크티, 꽈배기, 핫도그…… 겁에 질린 해민이 물었다.

뭐 얼마나 재밌는 드라만데?

재밌어.

제목이 뭔데?

<꽁트가 시작된다>.

재밌을 것 같네.

고등학교 동창 세 명으로 이루어진 개그 팀이 활동한 지 십 년을 채워가던 어느 날, 해체를 고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야.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

누군데?

아리무라 카스미.

그래.

의구심을 품은 표정으로 정해민은 베개를 안고 침대에 기댔다. 둘은 열 편이나 되는 드라마를 전부 다 보았다. 보다가 훌쩍훌쩍 울게 되는 순간이 비슷했다. 드라마에서 개그 팀은 결국 해체를 선택했다.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해민은 말했다.

그만두는 이야기가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야. 세 명이 너무 잘 어울려서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치.

임희주도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동감했다. 둘은 남은 음식을 느리게 집어 먹으며 드라마의 좋았던 부분을 열띠게 얘기했다. 그러다가 해민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잠들기 전에 소화 시킬 겸 게임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임희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했다. 해민은 들고 온 닌텐도를 능숙하게 노트북에 연결했다.

그리고 둘은 같이 게임을 했다.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손발 맞춰 제 시간에 내놓아야 하는 게임이었다. 째깍째깍 시간 제한 탓에, 그리고 임희주가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우왕좌왕이었지만 나름대로 긴장감이 넘쳤다. 연속으로 일곱 판을 하고 긴장이 풀린 임희주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아아……

그런 임희주를 보고 해민이 웃었다.

그렇게 힘들어?

사실 임희주는 밥만 푸고 야채만 썰었는데. 고기를 볶고 면을 삶고 완성된 음식을 내가는 건 해민이 다 했는데도 임희주는 필사의 집중을 해야 했고 끝난 뒤에는 푸슈슈 늘어지고 말았다.

근데 재밌다.

임희주가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해민도 조이스틱을 내려놓고 꼬물꼬물 임희주 옆에 누웠다.

그치? 재밌는 건 항상 있어. 우리 이제 게임이나 같이 하자. 드라마도 보고. 그리고, 음악 얘기도 하고.

너 이제 바쁠 텐데.

바빠도 놀 시간은 있지.

……그럴까.

희주야, 재미없는 거 억지로 할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해주니 나 초등학생 같네. 너는 좀 대학생 같고.

그러게.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니.

해민이 그렇게 말하며 임희주의 팔을 찰싹 때렸다. 임희주는 팔을 부여잡고 해민을 봤다. 해민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탈퇴빵이야……

해민이 너는……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억지로 하는 거 없어?

억지로 하는 거 있지 왜 없어. 사람들이 웃기다고 하니까 자꾸 웃겨야 하나 싶은 거. 아직 제대로 뜨지도 않았는데 욕먹는 거. 그거 다 검색해서 보면서 안 본 척하는 거. 그런 거 억지로 하지. 근데 억지로 하는 것도 좀 있어야지.

뭐야. 저격하지 마.

나는 할 만해서 하는 거란 얘기야. 걱정하지 마, 임희주.

……

그런데 누구나 할 만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누구나 그 앞에 서야 하는 건 아니니까. 싫다고 하면 못 시키지. 시키면 안 되지. 우리가 미안. 진작에 안 물어봐서. 하지만 알다시피…… 성공과 관심에 너무 목말랐었잖아. 그래서 그랬나봐. 우리는 지금이 좋아. 기회라고 생각해. 솔직히 우리 중에 다른 걸로 먹고 살 만해진 건 희주 너밖에 없잖아.

알아……

희주야, 노래해봐.

무슨 노래?

아무거나. 아니…… 지금 만들고 있는 노래.

없어? 하는 해민에게 임희주는 있어, 하고 대답한 뒤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누워서 기타를 치면서. 가사는 아직 확정 아니야. 부끄러워하며. 비누 아닌 소금 아닌 녹지 않는 작은 마음 아는 마음 모르는 얼굴 내가 언젠가 했던 말들 잊지 않은 무수한 비밀들 실은 알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던 모르는 척했던 그런 걸 다 들킨 얼굴. 괜찮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말로는 하지 못한 바보 같은 마음 그런 비밀 아닌 비밀.

해민과 반투명이들이 함께 임희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정도가 좋아. 임희주는 생각했다.

좋다.

해민은 말했다.

정말 좋아.

그 순간 임희주에 귓가에 낯선 반투명이 하나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네가 나한테 노래 불러주니까 좋아. 네가 만든 새로운 거 듣고 싶었어.

해민의 말과 동시에 임희주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귓속에 고였다. 단단한 것 같았던 반투명이가 눈물에 스르르 녹았다. 비밀은 설탕 같구나. 물에 녹는구나. 귓속에 고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임희주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해민이 왜 울어! 하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걱정됐지만 그대로 있고 싶었다. 달아진 눈물과 함께. 너랑 같이 있는 게 왜 이렇게 좋냐. 그냥 좋아. 나는 네가 없을 때도 네 생각을 해. 종종, 아니 꽤 자주. 내가 팀을 나가면 너랑 더 멀어지겠지. 그게 제일 슬프다. 무서운 것은 그런 것이었다. 해민의 무관심. 해민의 애정 없음. 그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

딱 놀 줄 아는 까마귀 노랜데.

해민이 말했다.

난 이제 놀 줄 몰라. 발 없는 새처럼 일해야지.

놀 줄 아는 게 낫지 않아?

그건 그래…… 그래도 나 혼자 가볼게.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 새도 있겠지.

그런 새가 있을까?

……

근데 너 오목눈이 닮았다. 동글동글한 게.

그러더니 해민은 휴대폰을 들어 오목눈이를 검색했다.

오목눈이 좋네. 오목눈이는 다른 새 무리하고도 섞여 산대. 딱 임희주네.

?

. 어디든 섞여 살아. 혼자 안 살아도 돼. 왜 혼자라고 생각한대?

임희주는 네가 없잖아, 하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건 너무 처량하고, 바보 같으니까. 대신 내내 묻지 못하던 것을 물었다. 귀에 설탕물을 담은 채.

나 나가고도 우리 친구야?

얘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해민이 흘겨봤다. 그제야 임희주 얼굴에 흐른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진짜 이러기 싫었는데. 임희주는 안도하면서도 후회했다. 이런 친구는 진짜 나라도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보자…… 진짜 싫은가. 그건 임희주가 해민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너 나랑 친구야? 나 너한테 친구 맞아? 어떤 친구야? 하고 해민이 물어오는 것.

임희주는 언제나 해민에게 특별한 친구이고 싶었다. 까마귀 중에서도 특별한 까마귀로 생각해주길 바랐다. 아닌 척했지만. 그것도 비밀이었다. 귓속에 고인 눈물이 두 배로 달아졌다.

임희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곡의 후반 가사를 머릿속으로만 적어보았다. 별거 아닌 비밀 누군가에게는 비밀 아닌 비밀 나에게만 중요해서 아주 작아서 그래서 더 비밀인 비밀 그런 비밀도 있다고 해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은 비밀. 그런 문장을 머릿속에 담아두자 가슴이 부푸는 것 같았다.

임희주는 아직 식탁에 봉지째 남아 있는 설탕이 잔뜩 묻은 꽈배기를 생각했다. 이따가 일어나서 먹어야지. 꽈배기를 다 먹은 손을 털면 숨어 있던 비밀들이 오골오골 나와 떨어진 설탕을 나눠 먹고 흡족해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불현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큰소리로 말하고 싶어졌다. 싫은 게 많아도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저녁바람 좋아해! 노을 지는 거 보는 거 좋아해! 겨울 다섯시 반 봄 여섯시 반 여름 일곱시! 좋아해! 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에 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