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행상이 한 이야기가 말입니다, 글쎄 아주 실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왜 이걸 샀을까 싶습니다.
뿌드득. 범재가 알기로도 상도산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디론가 인수되어버리고 남은 건 상도건설뿐이었다. 뿌드득. 건설사에서 잔을 만들지는 않죠. 뿌드득. 하지만 잔, 이라는 것에도 구조가 있습니다. 그것 또한 건설의 종류로 볼 수 있습니다. 뿌드득. 내일 밤에는 더 많은 손님이 올 겁니다. 어디에 오는데요? 나의 집으로요. 나는 오래도록 그렇게 해왔습니다. 나는 꼭 이 잔을 가져가 대접해야 합니다. 함께 건배해야 합니다. 뿌드득. 누가 오는데요? 뿌드득. 피해자 모임입니다. 뿌드득. 피해자면 어떤 피해자? 뿌드득. 사기 피해자 모임입니다. 뿌드득.
두 동강 난 헬멧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털어낸 부영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래, 안타깝지만 이제 상도산업은 없어. 상도건설뿐이라니까? 그러니 목욕탕에 죽치는 짓도 그만하지 그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잔을 사려고 오래 타던 차도 팔아버렸습니다. 나의 베르나. 뭐? 베르나, 나의 1세대 베르나. 할머니 혹시 담배 피우나? 피우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알아보자고. 잡상인이 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상도가 만든 게 아니라 짝퉁일 수도 있잖아. 상자를 완전히 열어젖힌 부영이 잔을 꺼내 들었다. 진짜 크리스털과 모조 크리스털을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어. 서로 부딪쳤을 때 소리가 맑게 울려퍼지는 게 진짜다. 짠, 하고 무겁게 가라앉으면 가짜고. 동의하지? 부영이 묻자 여자도 수긍했다. 술 없어? 없는데요. 범재가 고개를 저었다. 생수라도 줘. 부영과 여자가 생수로 채운 잔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크리스털 잔이 부딪혔다. 짠. 한번 더. 짠. 어때? 이번에도 범재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도 따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 소리는 짠, 하는 것 같다가도 찡, 하는 것처럼 들리고 쨍이나 짜앙, 같은 소리에 가까운 듯도 했다. 우리가 구별하기에는 무리인가봐.
그런데 어떡하지요?
뭘.
찾아올 손님들보다 잔이, 잔들이 모자랍니다.
한 모금씩 돌아가면서 먹어. 돌아가면서 건배하라고.
대꾸한 부영이 생수를 들이켰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여자도 잔을 들어 제 몫의 물을 삼켰다.
그들이 상가 일층으로 올라왔을 때 맞은편 초소에 불이 들어왔다. 나중엔 나선 계단이 있는 건물로 옮길 거예요. 왜? 당신 같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게요. 부영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허공에 팔을 휘휘 저었다. 늙은 여자는 입을 오물거리며 짠짠 찐찐 쨍쨍 짜아앙, 하고 반복했다. 앞서 걷기 시작한 범재의 등을 누군가 푹, 찌르더니 조금 뒤에 한번 더 푹, 찔렀다. 범재 뒤로 바짝 붙은 부영이 틀린 그림 찾기라도 하듯 몰두한 얼굴로 그의 점퍼 여기저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거, 이거랑 이거, 전부 내가 준 거야. 뭘 줬다는 거예요. 여기 도트무늬랑 꽃무늬도 내가 길도에게 가져다준 거야. 이 갈색 수건도. 당신이 길도를 안다고요? 그럼, 알지. 언제부터? 길도 시네마가 생긴 즈음부터.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요. 네가 없을 때 갔으니까. 범재는 목을 한껏 돌려 오른쪽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수건이라고요? 그래, 우리 목욕탕 수건.
훔쳤어요?
뭘.
전부 목욕탕에서 훔친 거냐고요. 훔쳐서 가져다준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점퍼의 견갑골 부근부터 왼쪽 겨드랑이 아래까지 누런 가죽 원단이 붙어 있었다. 범재는 보들보들한 가죽을 쓸어내렸다. 그건 본래 섀미 재킷이었는데 누군가 수건 수거함에 던져둔 것을 부영이 길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펼쳐보니 헤어드라이어 바람을 맞았는지 목깃이 조글조글하게 수축되어 망가진 상태였다. 길도는 이 원단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는데, 정육점 근처에 지나다니는 길고양이와 비슷한 빛깔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고양이가 있었나. 까만 고양이는 보았지만 누런 고양이는 기억에 없는데.
나는 사실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범재 앞으로 다가선 부영이 점퍼 주머니 위쪽의 푸른색 꽃무늬 원단을 찔렀다. 하와이안셔츠와 비슷한 무늬이지만 엄연히 다른 오키나와 스타일로, 가리유시 웨어에 쓰이는 패턴이라고 했다. 처음엔 관광 기념품으로 이 땅을 밟았을 텐데 나중엔 손발을 닦는 데 써버린 거야, 어때? 이게 왜 좋은데요? 부영이랑 닮은 것 같아. 부영이란 곳이 이렇게 생겼어요? 아마 그럴 거야. 아마? 수몰된 지 오래라.
한마디로 이건 쓰레기 점퍼야. 누더기로 만든 점퍼.
범재는 쓰레기 점퍼라는 말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지? 쓰레기라면 쓰레기지. 길도의 바느질 솜씨는 길도가 좋아한다는 누런 고양이가 대신 기운 것처럼 형편없고 원단을 자른 모양새나 바느질 간격 같은 것이 들쭉날쭉했다. 계속해서 짠짠 찐찐 쨍쨍 짜아앙, 하던 여자가 다가와 부영처럼 점퍼를 찔러대며 자신은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했다.
초소의 문을 잡아당긴 부영이 먼저 여자의 등을 밀었다. 여자는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탁자 앞에 앉아 브라운관을 보던 자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낯선 여자를 쳐다보았다. 뒤따라 들어간 부영은 별다른 설명 없이 자미 곁에 앉았다. 그러자 자미도 다시 브라운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헬멧 쪼개졌어, 하는 부영의 말에 그녀의 머리를 한번 살펴볼 뿐이었다.
거기까지 지켜본 범재는 초소 문을 조용히 닫았다. 계정숙은 망루 위에 서 있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머리통이 보였다. 뒤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계정숙의 몸체가 선명해졌다. 그녀는 일정 시간 동안 정면을 바라보다 양 측면과 뒤쪽으로 회전하며 거리를 고루 살폈다. 무엇을 보는 건가. 무엇이 보이는 건가. 계정숙이 어떤 사건들을 찾아 헤매는 건가, 아니면 어떤 사건들이 계정숙에게로 침투하는 건가. 범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정숙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몸을 돌려보았는데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반대편 골목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는 담뱃재로 벽에 네모를 하나 그리고 오목을 두었다. 흰 돌이 이기자 검은 돌이 또다른 네모를 그렸다. 이번에도 흰 돌이 다섯 개의 돌을 먼저 두었다. 게임이 길어지면서 가로와 세로 그리고 대각선으로 뻗은 여러 선들이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것은 얼추 동물이나 도형의 형태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수원에서 얼기설기 잠드는 길도와 아이들이 바로 이런 모습일 것만 같다고 범재는 생각했다. 검은 돌은 그 옆에 조금 더 큰 네모를 그리다 말고 홀로 골목을 벗어났다. 흰 돌이 검은 돌의 뒤를 따라가더니 나란히 걸었다. 범재가 다가가 손가락으로 벽을 훑자 검은 재와 보얀 시멘트 가루가 함께 묻어나왔다.
길도는 과수원에 아직 사람이 많다고 했다. 물론 몇몇은 떠날 채비를 마쳤고 심지어 벌써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은 남아 있는 사람 수가 더 많다고. 돈을 다 모아서 간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갑자기 도망쳐버린 아이도 있었다. 전날 밤부터 길도는 왠지 저 아이가 곧 사라질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어 너 어디 가려고 하는 거지, 내 말이 맞지 하고 물었다고 했다. 길도는 아마 일이 고단해서 더는 못 해먹겠다거나 이곳이 지루해 죽겠고 하루빨리 여기를 뜨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로만 예상했다. 걔 이름이 병근이야. 병근이가 글쎄 이제 다른 과일들도 키워보고 싶다는 거야. 그러니까 얘가 사과를 따고 또 간간이 아직 자라고 있는 사과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지. 정말 놀랍지 않아? 또 남아 있는 애 중에 스턴트맨 출신도 있는데 자기는 역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거야. 아니 물리 말고 음양 다루는 그 역학 말이야. 신기하지? 어떤 점이 그애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길도와 통화하는 동안 범재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예전처럼 뛰지는 못할 것 같았는데 막상 조금씩 속도를 붙이기 시작하니 달리는 것도 꽤 잘되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수화기 너머의 길도가 멀건 목소리로 지금 뭐해? 하고 물었다.
뛰는 중.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또 통화하자.
저기.
응?
사과가 정말 노란색일 수 있나?
그럼, 나는 매일 보는걸.
사과를 좀 보내줘, 노란 사과로 말이야.
그는 한참을 달리다가 정육점 셔터를 올리고 시네마로 들어갔다. 늘 캄캄하다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정말 새까맣구나 게다가 너무 고요하다, 싶으면서도 이걸 조금 느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삼십 분쯤 그렇게 있다가 커튼을 젖히고 미닫이문도 살짝 열었다. 희미하지만 어쨌든 빛이라는 게 보였다. 야전침대에 올라가 몸을 이리저리 굴려보던 범재는 너무 좁다, 좁아 하며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최선을 다해 기어내려가는 제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스크린을 단 벽 쪽에 머리를 대고 발끝은 미닫이문을 향하게 누웠다. 그 상태에서 몸을 빙글빙글 굴려 가로로 누웠다가 다시 세로로 돌려보았다가 대각선으로도 만들어보았다. 나중에 가서는 손과 발을 맞대고 몸을 둥글게 마는 자세까지 해보았지만 영 심심했다. 쉽지 않구나, 역시 테트리스라는 건 여러 막대가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느끼면서 그는 곧 돌아가 공구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김에 여기저기 쌓아도 보고 바닥에 늘어놓은 뒤 이리저리 배치도 해보아야지. 젖힌 커튼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자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셔터 밖으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