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자살 유족 또는 자살 생존자를 만나기로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살이라는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을 만나려는 나의 의도가 구체적이지 않았다. 나는 나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자 했다.
몇 번의 독자와의 만남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한번은 객석에서 누군가가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울기만 했다. 행사가 끝나고 말을 걸자 자신의 동생이 얼마 전에 자살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행사장을 떠나지 않고 그와 그 자리에서 길게 대화했다. 다른 행사에서는 책에 서명을 하는 동안 어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경험을 말해준 사람도 있었다. 용기를 얻었다, 힘을 냈다, 이런 말들이 아니라 작가님도 잘 지내세요, 라는 말을 건네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감을 느꼈고, 출간 후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되었다. 그런 방식의 만남은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읽는 사람이 동질한 경험을 기반으로 만나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생각만 있을 뿐 구체적인 것들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라면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일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인터뷰처럼 채록을 하고 싶진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집필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쓸 때 그 어떤 것도 보태거나 꾸며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듣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나 역시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기관이나 재단, 병원, 성당에 메일을 보내기 위해 주소 목록을 짰다. 자기소개와 작업 의도를 설명한 내용을 준비했다. 몇 번이나 고쳐쓰고 준 그리고 친한 작가들에게 내용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의견까지 반영한 완성본을 만들었지만 쉽사리 전송하지 못했다. 예정보다 미뤄지며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친구의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누나를 떠나보냈다고 했다.
종로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나의 출간작들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예상되지 않았다. 긴장감을 안고 지하철을 탔다. 카페에 들어서자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친구는 대학생 시절 처음 만났던 사이로 전공은 달랐지만 졸업 후에 더 친해져 종종 만났다.
앉아. 주차하고 있대.
나는 의자에 앉아 메모장을 열었다. 질문들을 준비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친구는 소개만 시켜주곤 회사로 들어가보겠다고 말했다.
네 일도 일이지만 언제 한번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그는 친구가 아닌 나를 보고 터벅터벅 걸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친구는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카페를 나갔다.
작가시죠?
그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곤 말했다.
저는 책을 잘 안 읽어요. 읽을 시간도 없고.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말을 준비해 온 건 이 사람이 아닐까. 나는 그의 솔직함에 적잖이 놀랐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제 이야기부터 할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우리는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다시 커피를 마신 뒤 술을 마시러 갔다가 취기가 올라 편의점 앞에서 숙취해소제를 마셨다. 첫차를 타러 지하철역으로 달려가는 그를 쫓아가 가방에 있던 책들을 꺼내 건넸다. 그는 서류 가방에 그것들을 넣으려고 했지만 공간이 부족해 몇 권은 손에 들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갔다. 그와 나는 각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연애는 하는지, 처음 보는 사이라는 것도 잊은 채 두서없는 말들을 꺼냈다. 나는 준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를 만나기 전 생각했던, 소설을 구상하면서 준비한 질문들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역시 묻지 않았다. 다음 약속을 기약하려는 마음도 없이 그 순간에만 집중했다.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집에 가서야 생각났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형식이 떠오른다면 다시 그를 만날 것이다. 아니, 그와 나처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홀로 나중을 기약했다.
그날은 준의 집으로 가지 않고 혼자 사는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기도 했거니와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가 자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어간 집은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색한 동시에 낯설었고, 문을 열자 오래전 선물 받은 난초가 비쩍 메말라 있었다. 난초를 선물한 건 사이가 각별한 시인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주소를 내게 물었다. 생일도 아니고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닌데 왜 보냈느냐고 묻자 난초를 보니 형이 생각났어, 라고 답장이 왔다. 난초의 이름을 알려줬는데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고 미안한 마음에 한동안 난초를 바라봤다. 동봉한 화분이 깨진 채로 도착해 동네 꽃집에서 비싼 화분을 산 기억이 떠올랐다. 술기운이 거의 사라지고 정신이 들어 쓰레기봉투에 난초를 담았다. 발바닥에 뭔가가 자꾸 밟혀서 보니 좁쌀만한 애벌레들이 죽어 있었다. 불을 켜고 방안을 다시 보자 쓰레기통 옆에 묶어둔 봉지 옆으로 죽은 애벌레들이 쌓여 있었다. 지난번에 집에 왔을 때 분명 쓰레기통을 비웠는데, 봉지를 열어 자세히 보니 단팥빵을 먹고 남긴 것이 원인이었다.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집을 쓸고 닦았다.
나는 마치 이 집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당장 집을 정리하고 준과 새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준에게 말하고 싶었다. 준, 같이 살자. 이렇게 내내 살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이젠 정말 같이 살자. 흔히 말하는 시기를 놓친 걸까. 항상 타이밍이 문제라고 하던데. 불을 끄고 누워 잠에 들기 전 휴대폰으로 달력을 봤다. 함께 보낸 계절들이 꿈속으로 미끄러졌다.
누나는 출산한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남자아이였는데 태어난 직후라 누굴 닮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아서 나더러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작가잖아, 삼촌이 지어주면 좋지. 작가와 작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려다가 설명하기 귀찮아 대충 말을 돌렸다.
누나가 병원에 들어가기 이틀 전부터 엄마는 전전긍긍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며 누나를 찾아갔다.
나랑 골격이 비슷해서 애 낳을 때 고생할 거야. 내가 알지.
누나는 엄마가 옆에 있는 게 더 심란하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며칠 치 옷까지 챙겨온 엄마를 말릴 수는 없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마는 누나 곁에 있었다.
애가 목청이 얼마나 크던지. 장군감이야.
엄마의 들뜬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너 태어날 때는 울음소리가 너무 작아서 동네 사람들이 다 걱정했어. 할머니도 울고.
나는 병원이 아닌 시골집에서 태어났는데 동네에서 유명한 산파와 할머니가 나를 받았다. 할머니는 그때 내 엉덩이를 너무 세게 때렸다며 종종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딱 한 번 할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대학생 때 주말마다 경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 하루만 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팀장에게 할머니 장례식에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팀장은 상을 잘 치른 뒤 서류를 가져오라고 말했지만 몇 주가 지나도록 가져가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서류를 위조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결국 팀장에게 찾아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주 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됐고, 육개월 뒤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하던 기차에서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내 탓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백 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병이 없었다. 친척들 중 내가 가장 늦게 도착했는데 고모는 내 손을 잡으며 할머니가 지금까지 나를 기다린 것 같으니 얼른 들어가보라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았고, 친척들은 밥을 먹으러 가보겠다며 병실을 나섰다. 나는 몇 번이고 할머니에게 사과했다. 사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친척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나라도 임종을 지켜서 다행이라고 친척들은 말했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다행이지 않았다. 의사는 할머니가 잠들듯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고, 조문객들은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감싼 말들이 장례식장을 떠다녔다. 나는 부조금을 받는 책상 앞에 앉아 사흘 내내 자리를 지켰다. 다른 친척들이 교대를 하자고 해도 억지를 부렸다. 작은아버지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앞으로 살면서 잘못을 뉘우치라고 말했다.
엄마는 언제쯤 아이를 보러 올 건지 물었다. 누나가 연락하면 그때 날짜를 비워보겠다고 답했다. 사진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인터넷 서점에서 ‘작명법’을 검색했다. 두 권을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삭제했다.
14
어떤 사이냐니?
다른 애들보다 친해 보여.
넌 그 학교에 그런 친구 없어?
학교 밖에선 잘 안 만나.
집에 초대도 안 해?
다이키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엽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손목에 걸친 지샥 시계를 쳐다봤다. 한 시간 뒤 교내 야구부 경기를 참관하는 일정이 있다고 말했다. 엽은 자신도 가야 하는지 물었고 다이키는 인솔 교사의 말을 따라 했다. 도모다치모 잇쇼니. 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 차분하던 다이키는 경기가 시작되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열렬히 응원했다.
근데 너 어디 응원하는 거야?
엽이 묻자 그는 당연히 이 학교를 응원한다며 학교 깃발이 걸린 왼쪽 더그아웃을 가리켰다. 상대 학교 깃발이라고 내가 말하자 다이키는 코를 긁으며 머쓱해했다. 고후공고에는 야구부가 없어서 이런 경기를 직접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타자가 안타를 칠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다른 일본인 학생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엽을 포함한 모교 학생들만 딴짓을 했다. 파울 홈런볼이 관중석으로 날아오다가 담장 뒤로 넘어갔다. 다이키는 말릴 새도 없이 재빨리 달려가서 공을 주워왔다. 다른 일본인 학생들이 몰려갔고 서로 돌아가며 공을 손에 쥐었다. 공은 어떤 의식처럼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다 다이키는 그것을 다른 학생에게 줬다.
오후에는 강당에서 팽이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엽과 다이키에게 팽이 만들기 키트가 주어졌다. 한국과 일본이 합심해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 대회의 목적인 듯했다. 2인 1조라 나는 옆으로 빠졌다. 그들은 한정된 재료를 두고 고심하다가 하마터면 제한 시간을 넘길 뻔했다. 한눈에 봐도 약해 보이는 팽이였는데 어느덧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러다 우승하는 거 아니야?
엽은 결승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 나를 향해 소리쳤다. 학생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이내 함성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엽이 팽이를 던지자 다이키는 주먹을 불끈 쥐며 팽이에 대고 일본어로 소리쳤다. 삼판이승 중 한 경기도 패하지 않고 우승했다.
다이키는 우승 상품이 담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자 학교명이 각인된 컵과 달력, 노트, 연필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엽은 자신은 필요 없으니 전부 가져도 좋다고 다이키에게 말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해 운동장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다이키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마침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는 현이 보였다. 나를 보곤 다가온 그에게 엽과 다이키를 처음 소개했다. 셋을 나란히 두고 봐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들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을 섞으며 운동장을 벗어났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교문을 지날 때 갑자기 웃음이 나왔고 셋은 걸음을 멈추며 뒤로 돌았다.
왜 웃어?
어디 갈까?
……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며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기다렸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 동시에 내가 그들 옆에 서기를, 그들 사이에 섞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홈스테이 마지막날 엽의 집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엽의 어머니는 한식당을 운영하는 지인을 불러 식탁이 넘치게끔 음식을 내놓았다. 다이키는 뭐든 잘 먹었는데 그날은 대화도 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엽의 누나는 여전히 회화 책을 옆에 두긴 했지만 일본어로 대화를 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과일을 먹는 동안 다이키는 자신의 가정사를 고백했다. 중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아버지와 함께 살며 엄마와 여동생은 다른 도시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일 년에 두 번, 다이키와 여동생의 생일에 그들은 도쿄에서 모였다. 패밀리 레스토랑인 사이제리야에서 만나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교환했다. 점원이 눈치를 줄 때까지 드링크 바를 이용한 뒤 노래방에 가거나 오락실에 갔다. 어느 날에는 호텔에 묵은 뒤 다음날까지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막차가 끊기기 전에 헤어진다고 했다. 다이키는 자기 가족의 형태를 의심하지 않았다. 언젠가 헤어지는 게 아쉬워 울적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자 여동생은 다이키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렇게라도 가족이잖아. 그는 그 말을 부적처럼 새기고 있었다.
네 가족은 어때?
다이키는 돌연 나를 향해 질문했다.
서른 살 무렵 문득 다이키가 생각난 적이 있었다. 일주일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다이키는 종종 편지를 보냈다. 관광명소가 찍힌 엽서 뒷면에 근황과 안부가 쓰여 있었다. 나중에는 엽서 대신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언젠가부터 엽은 다이키에게 메일을 쓰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보내던 메일이 두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으로 줄어들다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도쿄에 가기 며칠 전 메일함을 뒤져 메일을 보냈다. 휴면 계정이 되었거나 메일 주소를 바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항공기가 이륙하기 직전 벨트를 맬 때 휴대폰으로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왔다.
기치조지에 올 수 있어?
무사시노시에 위치한 기치조지역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적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처럼 지나간 시간들이 휘몰아쳐 아득해진 기분으로 개찰구를 바라볼 때 다이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고등학생 때 얼굴 그대로 나이가 든 다이키는 내가 다이키, 하고 부르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학교 운동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덧니를 보이며 활짝 웃었고 단골 술집으로 가자며 팔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는 소품 숍이 즐비한 상점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단골 술집에 앉아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늦기 전에 긴자에 있는 숙소로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자기 집에서 아침까지 대화를 나누자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따듯한 사케를 시켰다.
나만 도쿄에 살아. 뿔뿔이 흩어졌어.
도쿄에서 일 년에 두 번 만났다는 그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안 좋은 소식일 것 같았다. 점원이 테이블에 올려둔 도쿠리를 들고 다이키의 잔을 채웠다.
결혼도 했었어. 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비틀거리며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샀다. 다이키의 집은 연립주택 일층이었고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 방바닥에 상을 차린 뒤 해가 뜰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다이키는 잠들기 직전에야 엽은 잘 지내는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