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시가 되자 카페 통유리로 해가 들이친다.
카페 내부는 지나치게 번쩍이고 철제 테이블이 달궈진다.
가신 줄 알았어요. 그렇게 오래 자리 비워두시면 저희가 치우기로 했거든요. 짐을. 네. 손님들 짐을요. 저희 카페 규율이고, 직원들이 어렵게 회의하고 전원 동의한 내용이라. 오십 분 이상 부재중이시면 그건. 저희로서는 가셨다고밖에. 저희가 손님 짐을 보관하는 거지 폐기하는 건 아니거든요. 저만의 독단으로 손님 짐을 만지작거리고 함부로 굴리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 꼭 알아주시고 불쾌해하지 마세요. 가끔은 정말 중요한 물건도 두고 가버리는 손님이 계세요. 사람은 없고 물건은 올려져 있을 때. 빈자리에 대해서 직원 단 한 명의 판단으로는 너무 어렵고. 옆에 동료랑 야, 간 거야? 확실해? 몇 마디 나눠야 하고. 저희 입장에서는 에너지 소비거든요. 손님 표정이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말이 길어졌습니다. 손님 태블릿, 노트, 펜, 그 가방에 잘 챙겨서 넣어두었어요. 살펴보세요.
Y는 카페 사장에게서 검은색 백팩을 받아든다.
사장은 중년의 여자다.
Y는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가 말끔히 치워진 것을 본다.
Y는 아직 카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울 것이다.
Y의 휴가는 6박 7일이다.
혼자 떠나거나 여자친구와 함께 떠날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이제 이 카페에서 모든 것을 정할 것이다.
Y는 새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를 향해 다시 등 돌린다.
사장은 사라지고 처음 보는 여직원이 카운터 너머에 있다.
Y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한다.
Y는 진동벨을 받아들고 크지 않은 홀 안을 둘러본다.
투명 아크릴 의자에서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Y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테이블에 자리잡는다.
Y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확인한다.
카페 사장의 말대로 그의 물건들은 가방 안에 잘 챙겨져 있다.
사장이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다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오십 분이나 자리를 비웠던가. Y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Y는 카페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Y는 가방에서 태블릿과 무선 노트,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다.
Y는 노트를 펼치고 쓴다.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
에너지 소비
확실해? 몇 마디 나눠야 한다
Y는 사장에게 들은 말들을 써보고,
Y는 노트에 몇 가지 표정을 그려본다.
어디야?
여자친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다.
여기 올래? Y는 여자친구에게 메시지와 함께 카페 주소를 보낸다.
Y의 여자친구가 카페에 온다면, 그들은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이다.
진동벨이 울리고 Y가 커피를 가지러 가는 사이 테이블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좁고 뾰족해진다.
Y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 그의 한쪽 뺨에 진한 햇빛이 빗금 그어진다.
카페의 손님은 Y뿐이다.
Y는 남쪽의 섬에서 3박 혹은 4박 머무르고 싶다.
섬에서의 일정 앞과 뒤로는 항구 근처에서 머물 것이다.
Y는 가려는 섬이 최남단인지 아닌지 궁금하다.
Y는 태블릿에서 맵을 켠다. 최남단은 아니다.
Y는 지도를 확대하고 위성 뷰로 변경한다.
섬의 지형이 사납고 물은 깊어 보인다.
어두운 녹색과 남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이 주를 이루고, 돌과 절벽이 검은색과 회색으로 보인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 흰 조형물이 있다.
Y는 노트에 섬의 전경을 스케치해본다.
굵은 선을 몇 번 스치는 것만으로 섬의 거친 절벽이 표현된다.
Y는 섬의 가장 높은 곳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해안가로 가 반나절 헤엄치고 해가 질 때까지 해변에 누워 살을 태울 것이다.
섬에 부는 바람은 미지근하고 살갗은 쓰라릴 것이다.
Y는 카페 통유리로 들이치는 해에 손등과 뺨이 따갑다.
카페 카운터에 선 사람은 가끔 바뀐다. 직원에서 사장으로. 사장에서 직원으로.
Y는 섬에서 가장 얕은 해변을 찾기 위해 맵을 훑는다.
‘위리 해변’이라는 지명을 발견한다.
Y는 엑셀 창을 켜고 ‘위리’를 적는다.
Y는 첫번째 스케줄을 고민한다.
첫번째 식사와 첫번째 숙소.
섬 안의 숙소는 오래된 민박뿐인 것 같다.
식당은 없고 매점이 두 곳 있다.
먹을 거 넉넉히 챙겨 가세요. 그런 내용이 포함된 블로그 글을 읽기도 한다.
Y는 섬에서 먹을 것들로 커피, 맥주, 수박을 떠올린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면, 통조림을 떠올린다.
더 특별한 것을 챙기자면 아이스박스에 냉동된 양갈비를 넣어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굽는 것은 Y의 취향이 아니다.
휴양지에서 바비큐를 즐기는 것은 Y의 여자친구다.
Y는 계속 검색한다.
항구에서 섬까지 소요 시간, 배 시간표, 배를 타는 날의 파고와 풍속 예보.
언제 나타났는지, 카페 사장은 Y의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려둔다.
비스킷 두 조각이다.
음료 한 잔 더 주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앉으셔도 되는데. 사장이 말한다.
아직까지 카페에 손님은 Y뿐이다.
사장은 카운터 너머로 돌아가 직원 옆에 선다.
해가 지고 있는지 카페 내부에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진다.
Y는 유리 밖을 본다. 가로수 잎이 더위에 축축 처져 있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 담장에 능소화가 덩굴져 있고, 역시 축축 처져 있다.
해가 지자,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둘이 카페로 들어온다.
두 남자는 홀의 한가운데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둘 중 한 명의 목소리가 크다.
그건 고점에서 사서 그래.
그건 저점에서 사서 그렇고.
의심을 왜 해. 내가 사랄 때 바로 샀으면 너 지금.
주로 한 명이 웃으면서 말한다.
다른 한 명은 웃으면서 듣는다.
Y는 다시 태블릿을 본다.
위리 해변과 섬의 가파른 골목들.
Y는 위리도의 이미지를 빠르게 넘긴다.
Y는 위리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가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Y는 좀더 정확한 파고 예보를 원한다.
Y는 어느 낚시꾼의 블로그에 접속한다. 낚시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얼마나 울럭거렸는지, 그런 글을 읽는다. 배에서 토하지 않기 위해 이틀을 굶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낚시꾼의 마지막 문장은, 바다는 아무도 모르는 것, 파고 예보는 당일에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의 말미에 바다 소용돌이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다. 좁고 깊어 보인다.
Y는 검색창에 바다 소용돌이를 적어넣고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른 소용돌이들을 본다.
카페 사장은 홀 안을 돌아다니며 테이블마다 작은 초를 얹어둔다.
저녁 일곱시부터는 주류와 안주류를 판매한다고. 사장은 Y에게 다가와 작게 말하고 메뉴판을 건넨다.
사장은 원탁의 두 남자에게도 다가가 같은 멘트를 한다.
원탁의 그들은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한다.
Y의 여자친구는 일곱시 삼십분쯤 카페에 도착한다.
여자친구는 카페 유리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곧장 Y의 테이블 앞에 선다.
일주일 만에 보는 여자친구의 얼굴이다.
좀 까칠해진 것 같다고 Y는 생각한다.
헤어지기 전에 한 번은 보려고 왔어. Y의 여자친구가 말한다.
여자친구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원탁의 두 남자와 카운터 너머의 사장과 직원이 Y를 향해 고개 돌린다.
Y는 여자친구의 심중을 알 수 없다.
아마 반은 진심이고 반은 장난 아닐까.
Y는 심각해지지 않기로 한다.
앉아. 뭐 마실래? Y는 여자친구에게 메뉴판을 건넨다.
여자친구는 대꾸 없이 메뉴판을 받아들고 Y의 맞은편에 앉는다.
여자친구는 위스키 한 잔과 치즈 플레이트를 주문한다.
사장과 여직원은 다른 복장이 되어 카운터 너머에 서 있다.
옷을 바꾼 것이 아니라 검은색 앞치마를 꽉 조여 입었다는 것을, Y는 알아본다.
여자친구는 카운터 사장과 여직원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 Y를 본다.
뭘 보는 거야? 여자친구가 Y에게 묻는다.
옷이 아까랑 달라져서. Y가 대답한다.
사장은 Y의 테이블에 위스키와 치즈를 서빙한다.
제가 수제로 말린 것들이에요. 서비스. 사장은 말린 과일들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올린다.
감사합니다. Y가 말한다.
Y는 말린 체리를 여자친구의 얼굴 앞에 가져간다.
여자친구는 고개를 돌린다.
Y는 자기 입에 말린 체리를 넣는다.
한 번 씹었을 뿐인데 침이 가득 돈다.
체리 과육에서 쌉쌀한 맛이 나기도 한다.
Y는 체리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이토록 오래 생각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