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위리(2)

최신 기술일수록 실제와 가상에 차이가 없어.

내년이면 이 바닥 많이 달라질 거야.

이제 정말 직접 하는 촬영이 의미가 없다는 거야.

사람이 창작한다고 하는 건 이제 어떤 개념이 되는 거지?

 

원탁에 앉은 두 남자의 직업이 촬영감독과 조연출이라는 것을, Y는 알게 된다.

Y는 말린 과일들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원탁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듣는다.

뭐해? 여자친구가 Y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Y는 눈짓으로 홀 한가운데 앉은 남자들을 가리킨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카페 홀의 음악은 느린 재즈로 바뀐다.

사장은 천장에 매입된 조명의 조도를 낮춘다.

사장은 통유리 창으로 가 블라인드를 내린다.

반 열림 상태의 블라인드 사이로 가로수의 초록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 카페에 블라인드가 있었다니. Y는 의아하다.

Y는 일몰 직전에 따가웠던 해를 떠올린다.

 

Y는 여자친구에게 휴가 계획을 묻는다.

여자친구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 잔을 비운다.

여자친구는 위스키를 한 잔 더 주문한다.

정말 헤어지기 전에 한번 보러 온 것일까. Y는 생각한다.

기분이 안 좋아? Y가 여자친구에게 묻는다.

좋아. 여자친구가 대답한다.

헤어지기 전에 한번 보러왔다며. Y가 묻는다.

해본 말이야. 여자친구가 대답한다.

해본 말의 의미. Y는 여자친구의 말이 바다 소용돌이 같다.

Y는 검지를 테이블에 빙글빙글 돌려본다.

 

Y는 태블릿에서 섬의 지도를 켜 여자친구에게 보여준다.

올여름 휴가는 이 섬에서 보낼 생각이라고 말한다.

위리도? 여자친구는 Y에게서 태블릿을 가져간다.

사람이 안 사는 곳 같아. 여자친구가 말한다.

살아. Y가 말한다.

위리도에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뭘 하고 싶은지, 여자친구가 묻는다.

수영. Y가 대답한다.

완전한 휴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Y는 덧붙인다.

완전한 휴가가 뭐야? 여자친구가 묻는다.

뭘까. Y는 고민한다.

완전한 비일상. Y가 대답한다.

여자친구는 피식 웃는다.

나는 완전한 휴가 원하지 않아. 여자친구가 말한다.

그럼 뭘 원하는데? Y가 묻는다.

나는 완전한 비물질이 되고 싶어. 여자친구가 대답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Y가 묻는다.

비물질 몰라? 여자친구가 Y에게 되묻는다.

알지만,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인지.

Y는 자기 노트에 be물질이라고 적는다.

여자친구는 Y의 노트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작은 불에 아지랑이가 보여. Y는 테이블 위의 작은 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린다.

여자친구는 Y의 손바닥, 촛불을 향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촛불의 가장 바깥은 푸르고, 촛불의 가장 중심은 붉다.

여자친구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고, 눈이 좀 멍해 보인다.

테이블 위 마른 과일과 치즈는 아직 반 넘게 남아 있다.

 

원탁의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계속해서 말한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

사람이 만든 것.

사람이 평가하는 걸 더 믿는 경향이.

 

원탁의 두 남자 중 한 명은 여전히 별말이 없다.

Y는 문득 이 카페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친구는 카페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여자친구는 위스키와 촛불, 흐르는 재즈 리듬을 즐기고 있다.

Y는 여자친구에게 나가자고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통유리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고, Y는 창을 향해 고개 돌린다.

여자친구는 두번째 위스키 잔을 다 비운다.

Y는 여자친구에게 가고 싶은 휴가지가 있는지 묻는다.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건 또 어떤 마음인지.

 

그럼 휴가는 나 혼자 다녀올게. Y가 말한다.

여자친구는 대답이 없다.

Y는 메뉴판을 뒤적이다 여자친구가 주문한 것과 같은 위스키를 주문한다.

Y는 이 카페에서 충분히 오래 머물렀지만, 이렇게 하루를, 주말을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Y는 여자친구와 식당이나 또다른 쉴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싶지 않다.

여자친구는 Y의 노트를 자기 앞으로 가져가 낙서를 하고 있다. 꽤 심취한 것 같다.

낙서가 아니라 중요한 메모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뭘 끼적이는지 맞은편에 앉은 Y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 혼자 다녀와. 여자친구가 말한다.

진심일까. 반은 진심이고, 반은 시험삼아 하는 말인 것 같다.

고마워. Y는 대답한다.

뭐가 고마워? 여자친구가 묻는다.

Y는 고마운 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한순간 파열음과 함께 홀 안의 모든 조명이 꺼진다.

유리창 밖 거리의 가로등 역시 일제히 꺼진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은 짧은 비명을 지른다.

Y는 테이블 위의 초를 들어 여자친구에게 가져다댄다.

놀란 얼굴이다.

Y는 여자친구의 옆자리로 옮겨 앉는다.

정전인가봐. Y가 말한다.

어두움 속에서 촛불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사장은 홀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나온다.

테이블마다 놓인 촛불이 커다란 사람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벽과 천장이 홀 안을 걷는 사장의 그림자로 가득하다.

사장은 통유리 창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걷고 밖을 본다.

 

밖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나요? 원탁의 누군가 허공에 대고 묻는다.

비가 아닌 것 같아요. 우박 같아요. 사장이 대답한다.

유리 밖이 번쩍인다.

천둥소리 없이 몇 번 더 창밖이 밝아진다.

 

장 열리면 바로 전력 복구 업체 종목 사. 원탁의 남자가 말한다.

이미 샀어. 원탁의 다른 한 명이 말한다.

 

샀다고?

어. 샀어. 일 년 전에.

얼마나 샀는데?

좀 샀어.

 

원탁에 앉은 두 남자는 어두움 속에서도 대화한다.

오빠도 사. Y의 여자친구가 속삭인다.

나는 주식 안 해. Y가 대답한다.

그럼 오빠는 뭐해? 여자친구가 묻는다.

나는 출퇴근하지. 너 만나고. Y가 대답한다.

Y는 여자친구에게 너는 뭘 하는지 물으려다 만다.

어쩌면 여자친구는 주식이나 코인, 바카라를 할 수도 있고, 적금이나 보험에 관심이 많을 수도 있다.

 

Y는 정전 기사 몇 개를 훑어본다.

정전 속에서 휴대폰 빛이 지나치게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