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불타고 있었다. 시의회와 청소년 정신건강 복지센터의 주최로 국립도시공원에서 열린 청소년 마음 축제에 제4층 악마가 소환되어 그 자리에 모인 청소년들이 모조리 학살됐다. 긴급 소집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특무 기병 2인조 즈와 스는 먼저 지옥으로 잠입했고, 부단장 리지은은 혹시 모를 확전에 미리 도움을 구해두기 위해 제0세계로 향했다. 니키는 학살 현장에 남아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내지르던 비명들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악마의 물리적 살해가 일어난 것은 삼십칠 년 만이었다. 천국과 비동맹 종족들의 중재자가 되는 보상으로 태초 이전의 고대 마법 지식을 열람한 에시이르가 대규모 결계를 창조한 이후 지옥은 지상에서 물질성을 잃게 되었는데 37년 만에 악마가 직접 청소년들 451명을 살해했다. 지옥의 체취가 뇌 속까지 전염될까, 정령의 도움으로 기억을 멈춰둔 시경들이 똑같은 대화 반복하며 쉰 바퀴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양이 너무 많아 아직도 공원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핏물을 밟으며 폴리스라인을 헤치고서 누군가 다가왔다.
—이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야
힘겨운 포옹, 남부 억양의 구부림까지 세련되게 전달되는 목소리, 지금 같은 밤과 어울리는.
—아이들에게 이럴 순 없다고
알리아는 마드리드 수도원에서 파견된 강령술사였다. 니키와 알리아는 ‘샌프란시스코 참사’ 때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임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던 타코벨에서 밤새 하비에르 마리야스의 소설에 대해, 오스발도 람보르기니의 시와 그가 살았던 바르셀로나의 빌라에서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영혼들의 신음에 대해,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영혼이 되어 나타나면 애틋할 거라 그리워하지만 사후의 인간들은 언제나 징그럽고 추하고 악의가 넘쳐난다는 이야기 따위를 나누며 친해졌지만, 보통 강령술사들은 평생 기사단에 의해 추적당하고 구금당했으므로 서로 연락처는 교환하지 않았다.
—몇 시간째 불이 꺼지지 않아
그들은 피 냄새 풍기며 불타오르고 있는 자전거 앞에서,
—불이 아니니까. 너도 소리를 들어보면 알 텐데?
—이상하게 빗소리가 들려. 정령들도 떨고 있고
알리아가 텀블러에 담아온 염소 피로 자전거를 한 바퀴 두르고선 주문을 외자, 그들의 용어로 심령의 층계라 불리는 장소가 열리고 그곳에서 악마에게 내장과 척수가 뽑힌 청소년 하나가 굴러떨어져 나왔다.
—네가 악마를 소환했지?
아이는 아직 셸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몸을 떨고 말 대신 구역질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두 명이 더 있어
정령을 통해 소리의 과거에서, 청소년 세 명이 소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순서대로 손목을 베고 약지를 자른 뒤 절반을 그어낸 혀로 불꽃을 핥는 소리를 들은 니키가 알리아에게 말하자,
—나머지 둘은 안 죽었나본데?
알리아는 살해당한 아이의 입안에 주문을 집어넣어 목소리를 부여하고,
—용서해주세요. 제발.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 저는 그냥 다 장난인 줄만 알았어요
영계의 시간에 의해 중저음이 왜곡되고 울림이 많아지는 발성에 니키는 살짝 멀미를 느끼고,
—의식을 치를 때 이 자전거에 누구의 피를 발라놓은 거지?
정령들은 두려운지 더이상 악마와 관련해서는 아주 조금의 흔적조차 재구축하지 못한 채 도망쳤다.
—이 정도의 악마를 소환하려면 대가가 컸을 텐데, 이 학생들이 어떻게 한 걸까
악마를 소환할 때는 상응하는 무언가의 죽음 그리고 그 애정이 담긴 죽음에 대한 증거가 필수적으로 필요했기에,
—부모를 바쳤을지도 몰라
악마에게 최초로 살해당한 아이. 샌디는 니키와 알리아에게 애원했다. 자기는 구색 맞추기용 인원이었다고. 학교에서도 그 둘과 조금도 친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그들이 자기에게 접근해왔다고. 어차피 셋 다 왕따였으니 별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그들이 그들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를 소환하겠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흥분도 되긴 했지만 아주 믿지는 않았다고,
—걔네는 아자젤을 소환하겠다고 했어요
그게 어떤 악마인지도 몰랐으나, 그동안 창문 밖에 거꾸로 매달거나 SNS로 영상을 퍼트려 괴롭히던 인간들에게 벌을 가하는 상상 하나만으로도 함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나 맹세코 그 악마가 실제로 튀어나와서 공원에 모인 모든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장난감처럼,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너희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자전거에 누군가의 피를 바쳐야 했을 거야
샌디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딜지트 콜이요
—딜지트 콜?
—교내 심리 상담 선생님이에요. 학교에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관심을 줬던 분이시죠. 어젯밤에 그들이 선생님의 안면 가죽을 벗겨왔어요. 그걸 자전거 안장에 올려뒀고요. 나머지 피부 조각들과 머리칼로 자전거를 덕지덕지 감쌌죠
니키는 오랜만에 순수한 구역질을 느꼈다. 사라진 정령들은 악마가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공포를 느낀 걸지도 몰랐다. 불타는 자전거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는 희생당한 선생의 영혼을 정화시켜주려는 정령들의 울음일 수 있었다. 알리아는 딜지트를 찾기 위해 심령의 층계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의 몸이 영구적인 지옥의 불길에 의해 손상을 입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래서 걔네는 어떻게 됐지?
—모르겠어요. 기억나는 건 악마가 저의 내장을 끌고 다니며 다른 아이들을 가지고 놀 때 걔네가 웃고 있었던 것 뿐이에요
거인들이 피눈물을 흘리듯이 451구의 시신들이 토막나 여기저기 걸려 있는 공원에 니키와 알리아는 서 있었다. 나무와 수풀 그리고 벌레들의 경멸어린 시선을 느끼면서. 머리 위로 나뭇가지에서 핏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수백의 영혼들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죽음이 당도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말없이 고개 숙여 정적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때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천 번씩 깨달으면서. 그 무력감, 한 올의 머리카락조차 움직이기 부끄러운 지금 이곳에서 공기를 들이켜고 폐와 심장을 거쳐 다시 숨을 내뱉으며 지속되는 본인들의 존재, 자신들의 역겨운 살아 있음 자체를 이 세계에서 소멸시켜버리고 싶다는 수치심을 품으면서. 저멀리 핏방울이 떨어지는 나무들의 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이에서 광활하고 새하얀 빛이 공원에 내려앉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에시이르가 현현했다.
—기억나?
기울인 어깨 너머 강물이 햇빛의 윤슬로 공중까지 넘쳐나는 강턱의 난간에 앉아 니키는 알리아에게 물었다.
—뭐가?
—2년 전 청소년 축제에서 있었던 일
—뭐?
휴대폰 반대편에서 알리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대답하고,
—아니야 미안해. 내가 다른 사람과 너를 헷갈린 것 같아
니키는 안심하고 가름끈을 대어 읽던 책을 덮었다. 에시이르가 아직 의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그가 기사단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공원의 학살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놓았으니까. 시간이 회전했고 죽은 이들이 소생했으며 투엉과 즈, 그리고 리지은의 비동맹 연합군에 의해 아자젤은 이곳 땅에 발도 붙이지 못했으니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에시이르가 의식을 잃는다면, 그가 그의 표현대로 이 세계에서 없어져버린다면 그가 지워낸 기억들이 모두에게 되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사단 인간이 나에게 연락해도 되는 거야?
—수도원에 먼저 허가받았어. 네가 몇 달째 에시이르의 은퇴식 참석 여부에 답을 안 주고 있으니까
—아하. 가야지 당연히
은퇴식까지 이틀. 폭 좁은 강둑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아슬아슬 옆돌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눈부심 이끌고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 물들이며 조금 더 안부를 이어가다 은퇴식 날 보자는 인사로 통화를 마친 니키는 마저 책을 펼쳐 읽었다. ‘우리는 무너진 극장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을린 정원의 무환자나무들에서 떨어지는 단풍 낙엽의 수를 상상으로 세었다. 41만 7931번째 낙엽까지 세었을 때 시간은 비어 있었고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책 종이 위로 새의 그림자가 지나가, 니키가 고개 들면 물낯의 파고 따라 햇빛이 번쩍이고 니키는 한쪽 눈을 가늘게 감았다 뜨며, 해변에서 모래사장을 파내 다크 엘프의 귀를 찾아낸 리지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거꾸로. 리지은이 손에 쥐고 있던 다크 엘프의 귀를 해변의 모래 아래 파묻고서 그 자리에 머무르며 앉아 있는 표정도. ‘우리’가 다크 엘프와 개 영혼을 칭하는 것이리라 여겨왔는데 귀를 기울이면 책 속에서 세 가지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도시는 병 속에 있다. 유리 안에 갇혀 있는 빛처럼’ 니키는 강 위로 튕겨나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닥쳐 난반사되는 햇빛을 상상했다. 선악의 벽, 섭리의 벽, 조화의 벽, 에시이르라는 유리병.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니키의 손가락이 글자 없는 여백에 닿았을 때 보이지 않는 문장이 들려왔다. ‘낮은 바람이 바닥의 무환자나무 낙엽을 이끌고 회전하고 있었다. 눈높이까지 휘날리게 가벼웠던 움직임이 천천히 회전을 낮춰 바닥에 깔리며 낙엽들로 마법진을 그려내고 문이 나타났다.’
먼저 샤워를 마치고서 담배에 불을 붙인 망드외는 니키를 깨웠다. 베란다 문 열어놓은 부엌에서 저지방 우유와 파니니를 데워 먹은 그들은 옷을 갈아입고 문 열어 집을 나섰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그들은 덜컹거리고 가끔 서로를 마주하고 시선을, 그리고 고개를 함께 돌려 과거처럼 버스 뒷 창가에서 사라지듯 그러나 끝끝내 이어져 따라오는 도시를 지켜보며 대화했다. 로비 구석에 서서 그들은 30분 동안 앱과 씨름하다 겨우겨우 예술가 할인을 받아 미술관 통합 관람권을 구매했지만, 동양화가들로 구성된 기획 전시관에 들어선 지 한 시간도 안 돼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초대도 받지 않은 온 동네의 갤러리 오프닝 파티에 참석해 돌아다니며 하룻밤에 9개의 전시, 57잔의 공짜 술을 마셨던 기록적인 날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단 한 군데도 제대로 들를 체력이 안 된다고 그들은 카페의 중정 테라스에서 흘러내리듯이 앉아 있었다. 번갈아 졸면서, 소박한 화단 뒤로 깨끗한 타일 무늬 담벼락이 둘린 중정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8년 전의 시절을 마치 80년 전의 기억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잠시 말이 멈추고 그들이 동시에 만들어낸 고요가 그들의 피부를 감싸와 그들의 주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육체적으로 느껴질 때, 니키와 망드외는 여전히 서로에게서 아주 조금의 늙음도 찾아내지 못했다.
대형 약국의 가운데 망드외가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대만식 식당에 들렀다. 니키는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 앞에 줄 서며, 가끔 뒤돌아 약국 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 망드외를 살폈다. 언덕 아래로 동네의 야경이 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그들은 비취 잔에 따뜻한 운담 백차를 따라놓고 포옹으로 그들을 반겨주는 서버와 그간의 안부 주고받았다. 약국의 커다란 통유리창 안으로 넋 놓고 서 있는 망드외에게 오후의 맑은 햇빛이 분수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일은 이제 곧 두 사람만의 심각한 대화가 시작될 거라는 신호임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약국 안의 온 사물들이 햇빛에 닿아 온 주위로 번쩍이며 번져오르고 있었다. 요리가 나오기 전에 뒷짐을 지거나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그들은 주크박스 곁을 서성였다. 캐셔의 부름에 니키는 망드외에게 눈을 떼곤 바구니에서 비타민 발포제와 염색약, 트리트먼트를 꺼내 계산했다. 주크박스에 기대 음악을 고르던 두 사람은 옆 테이블에서 한국인들의 한국어가 들려오자 말소리에 귀기울였다. 계산을 마치며 니키는 그저 이대로 계속 끝없이 계산을 하고 싶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면, 빛에 끌려가듯이 망드외가 그 자리에서 증발해 있을 것 같았기에. 니키가 알고 있는 망드외는 사라지고 오로지 갈망에 굶주린 채 서 있을 망드외가 두려웠다. 요리가 나오자 그들은 젓가락을 나눠 굴이 수북이 쌓인 가자면선부터 각자의 앞접시에 덜었다. 니키가 뒤돌았을 때 망드외는 약국에 없었다. 그들은 숟가락에 소룡포를 올려 육즙을 베어먹었고, 내추럴 와인으로 가볍게 입을 헹궈 산뜻한 무게를 더했다. 망드외가 사라진 자리에서 니키는 귀를 기울일 생각도 못하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순간순간 등뒤 또 머리 위 식탁 아래 발목 옆 거의 온 곳에서부터 그들을 가로지르는 예감을 이겨내며 그들은 말을 꺼내기보다 식사에 집중했다. 빛과 함께 망드외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늘에 잠겨가던 니키를 향해 노크 소리 들려와 고개 돌리니 담배를 입에 물고 망드외가 약국 밖에서 웃으며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말에 타 있는 사람 있잖아
—무슨 소리야?
—아까 갤러리에서 봤던 수선화 말이야
망드외는 오른손으로는 턱을 기대고 왼손으론 젓가락 쥐어 접시에 낙서를 그리며, 계속 그 그림이 떠올라. 잎이 새파란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젊은이인지 노인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한 사람이 말에 타 있었어. 그림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림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이미 내가 그림 속에서 무한하게 움직이고 있었어. 그 가녀린 말을 타고 산과 바다를 걸었어. 니키는 망드외가 접시에 그리는 낙서를 보며, 망드외가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리며 연극단을 만들겠다고 말했던 날을 떠올렸다. 망드외는 재활원에서 만난 친구들을 데리고 연극단을 만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원작의 연극을 벌써 다섯 편이나 올렸고, 치카 같은 전문가이자 어른들의 보살핌 덕에 다시 약물 따위에 손대어 구치소나 무덤으로 돌아가게 된 극단원들 또한 아직 없었다.
—매일이 너무 힘들고 우울한데 매일이 아무 성과가 없어. 그냥 성과가 하늘에서 나한테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
망드외는 가끔 있는 그대로의 사실, 본인이 분명하게 성취해낸 사실들은 남김없이 제거하고 그와 똑같은 층위의 사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인 사실들만 긁어모아 왜곡된 현실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벌주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잘 알고 있는 니키는,
—무슨 소리야. 넌 연극을 계속 올리고 있잖아. 최소한 단원들은 네 덕분에 목표한 날짜가 생기고 하루하루 버텨갈 수 있는 거야. 나야말로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이대로 죽으면 지옥에서도 천국에서도 이 새낀 뭐하는 새끼지? 내가 살아 있었다는 것조차 의아해하면서 기록에도 남기질 않을걸
망드외는 웃었지만 여전히 스스로 만들어낸 부정의 연옥에서는 빠져나오지 않고 있었다. 니키는 망드외가 땀을 흘리지는 않는지 동공이 살짝씩 흔들리진 않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망드외에게서 다시 과거처럼 갈망의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으나 혹시 모를, 만분의 일의 확률로 떠오른 만약의 가능성으로부터 운석처럼 닥쳐오는 공포와 슬픔에 오직 믿음으로만 저항하기는 힘겨웠다. 어쩌면. 사랑이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요새 악마와 자고 있어
니키는 말해놓고도 본인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내가 악마라는 뜻이야?
—아니. 은유나 그런 게 아니라 실제 악마를 뜻하는 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전혀 감이 안 와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 한 달 전부터, 네가 잠들면 우리 방에 악마가 찾아오고 나는 악마와 섹스를 해
니키가 자신이 기사단 일원이고 기사단이 무엇인지, 이 세계와 똑같은 규모의 세계가 우리와 동시에 우리와 겹쳐 존재하고 어떻게 나뉘어져 왜 서로를 볼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지, 의지를 앞질러 엎지르듯 고백해버리고만 최근 악마와의 섹스에 대해 체위라든지, 의미라든지 자세한 설명을 고민하고 있을 동안,
—이거 혹시 프러포즈야?
—뭐?
—그런 개소리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해서 내가 정신을 잃고 울거나 여기서 뛰쳐나가기 직전에 갑자기 네 친구들이 턱시도를 처입고 좆같은 아카펠라를 부르며 들이닥치면 그 가운데에서 네가 무릎을 꿇고 까르띠에 반지를 줄 생각인 거냐고
닉은 망드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 좋겠다고, 돌아버릴 정도로 창피하고 민망하겠지만 차라리 그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아니야
—너 혹시 약 해?
니키는 두 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그대로 두 손이 두 눈을 지나 더 깊이 들어서서 뇌를 터트려 죽어버리는 상상을 하다가 그런데 까르띠에 반지는 얼마쯤 하는지 드워프 밀수꾼 몇 명을 구워삶으면 가품이라도 받아올 수 있는지, 가품을 받아올 바에 드워프제 반지가 더 낫지는 않나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것도 아니야
—그럼 왜 다짜고짜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야?
낙서 그리던 접시를 치우고 술잔 너머에서 노려보는 망드외의 눈을 니키는 마주하지 못하고,
—이상한 이야기라는데 진심으로 동의해. 하지만 전부 사실이야
—그 악마가 누군데
—처음에는 서큐버스인 줄 알았는데 그는 하나의 몸에 음순과 음경을 다 지니고 있었어. 서큐버스는 그 둘을 한꺼번에 구현하지는 못하거든, 그의 몸에서 땀처럼 흐르는 피 냄새가 악마의 것이 분명하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어. 창밖의 결계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왜 나에게 왔는지 전혀
니키는 망드외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것인지, 기사단의 조약에 의해 말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다른 테이블들의 접시가 치워지는 소리 들려오고 멀리 쟁반을 들고 오가는 종업원에게서 계피 향이 전해졌다. 말을 아끼며 가만히 니키를 지켜보는 망드외 앞에서,
—분명한 건 내가 마법이나 주술 따위에 걸리지는 않았다는 거야.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 내가 악마와 섹스했던 게 아니라, 그저 악마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내 의지로 악마와 잤어
니키는 끝내 솔직함을 퍼부어 본인만이 자유로워지는 선택을 했고, 니키의 고백 안에 억지로 초대받은 망드외는 별안간 버려지듯 남겨지게 되어 당혹감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갑작스러운 외로움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식어가는 피를 느꼈다.
—그럼 이제 내가 너한테 나보다 그 악마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되는 거야?
버스 불빛 좇아 니키에게서 떠나간 눈빛으로 망드외가 창밖의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니키는 호수를 떠올렸다. 새벽 일찍 재활원을 나와 호숫가 둘레에서 러닝하는 망드외를, 몸에 달라붙는 안개비 소리들을, 둘이 끌어안고서 뒹굴며 샤워부스 안에 물방울만큼 차오르는 신음들을,
—그건 너이기도 해
—내가 악마라는 거야?
—세 눈 고양이가 거꾸로 천장을 걸어들어와 너의 무릎에 기대어 울 때마다, 너는 계약을 한 거야
—계약?
—네가 원하는 환상을 구현하는 대가로 더 많은 지옥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약
망드외가 왜 그런 형상을 구현하고 싶어했는지, 망드외가 니키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불공평한 슬픔이 내려앉은 눈으로 니키는 손가락에 차를 적셔 접시에 원을 그렸다.
—너는 문을 열 수 있어
아마도 유일한 문, 그렇게 너의 꿈속에서 문이 열리면 그들은 문을 지나 원하는 모든 이들의 세계에 나타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며 니키는 망드외가 바라보고 있는 창밖에서 나뭇잎 하나가 구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말라붙어 떨어지는 건조한 소리가 피부에 스며들어 작게 소름이 이는 것이 느껴지고,
—우선 집으로 돌아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니키에게,
—집?
—응. 여기도 곧 문 닫을 시간이야
—그래. 그러자
니키가 계산할 동안 종업원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 망드외는 먼저 나가 담배 피우고,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창밖에서 나무들은 밤을 적시며 새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름이 일었던 낙엽 소리, 하나의 건조한 잎사귀가 땅으로 떨어지고 구겨지는 소리를 몇 번이나 되뇌는 니키가 식당을 나서려 할 때
—늦었어
니키에게 영수증을 건네준 다크 엘프가 말했다.
—언제부터였지?
니키는 레스토랑 위로 서쪽 저 멀리에서부터 하늘을 밀어내며 몰려오고 있는 진동을 느꼈다.
—세계가 합쳐지고 있어
벽이 되어 사라져가는 레스토랑 문 앞에서 그들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지켜봤다. 밤보다 짙은 그늘이 드리우며 나무들이 한 방향으로 깊게 휘어지고,
—우리가 존재하긴 했어?
창밖으로 고룡이 날아가는데 망드외의 꿈속에 갇힌 니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