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방조

7. 방조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내 삶의 기본 자세였다. 이런 태도는 나를 비교적 쉽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겉으로는 아주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늘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은 어떤 대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빠르게 전체를 파악한 뒤에, 그 모든 것을 모른 척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눈치보는 것을 남에게 들키지 않는 거였다. 눈치를 보는 건 집에서 차별당하거나, 홀대받거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문제 없는 집에서 괜찮은 가르침을 받아 반듯하게 자란 아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부모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는 아이처럼 보이길 원했다. 아주 귀하게 자라 눈치가 전혀 없는 아이로 보였으면 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엄마가 학부모 대표나 임원을 맡았으므로 적어도 선생님이나 나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조차도 엄마의 치맛바람을 살뜰한 보살핌이라 믿었다. 경미 이모가 골방에서 혼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불쌍하다고 말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불쌍한 아이라는 걸 몰랐고, 쌍둥 이모가 엄마에게 애한테 신경 좀 쓰라고 소리지르기 전까지 엄마가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엄마가 늦으면 저녁을 굶을 수도 있는 거고, 밤이고 집이 좀 낡아서 무서울 수도 있는 거고, 밥을 혼자 못 차려 먹은 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눈치보는 아이라는 걸 처음 자각한 것은 경미 이모네 집의 밥상머리에서였다. 나에겐 할머니도 이모도 고모도 없었지만 경미 이모가 있었다. 이모는 엄마와 같은 해 결혼해 이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온 것도 이모가 있어서였다. 나는 자매는 없었지만 육 개월 늦게 태어난 친구 주연이와 세 살 어린 가연이가 있었다. 나는 그 집 식구들이 다 좋았다.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깊은 이모, 생긴 건 무서워도 재미있는 이모부, 성격 좋고 나를 잘 챙겨주는 주연이, 악착같고 욕심이 많아도 주연이보다 내 말을 더 잘 듣는 가연이가 있는 그 집이 우리집보다 더 좋았다. 엄마의 수업이 늘어나고 아빠가 나를 돌보지 않게 되면서 나는 이모네 집에 자주 가곤 했다. 밤늦게 데리러 온 엄마와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자고 가겠다고 울고불고 떼를 부려 이모네서 잔 날이 있었다. 나는 자는 척 누워있다가 이모네 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다. ‘애는 애라 그렇다지만, 못 이기는 척 놓고 가는 것 좀 봐. 그렇게 귀찮은 거, 애는 왜 낳았대? 밥만 먹이면 된다더니, 곧 키워달라고 하겠어.’ ‘얘가 안 생겼으면 둘이 결혼까지 했겠어? 애는 무슨 죄야. 당신은 암말 말아.’ ‘엮이지 말아야 할 둘을 엮은 애의 업보지 뭐냐.’ ‘그게 애한테 할 소리야? 그 입 좀 가만히 두라고 했지?’ 나는 내 부모만 부부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고,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나를 키워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체념 속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접시에 쌓인 소시지부침을 집어먹으면서 일 인당 몇 개를 먹을 수 있는지, 몇 개를 더 먹어야 주연이와 가연이보다 더 먹지 않는 건지 몰래 계산했다. 이모부는 내게 눈치 좀 그만 보고 퍽퍽 집어먹으라며 소시지를 밥그릇에 자꾸 얹어주었다. 내가 더 먹게 되면 애들이 기분 나빠할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래서 이 집에 다시 오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걱정이 사라진 자리에 수치심이 들어섰다. 그들보다 더 먹으려고 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덜 먹겠다고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게 주연이와 가연이처럼 평범한 부모 밑에서 세끼 밥을 얻어먹으며 사는 아이들과 나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슬퍼졌다. 그리고 앞으로 눈치보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에 이 이야기를 승재에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길 그 남매도 서로 눈치보는 일이 있었을 거라고, 외동에 부모와 같이 살았던 자기도 눈치를 보며 살았는데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무심하게 답했다. 그 말이 또 뭐라고 나는 위로를 받았고, 그 뒤로 눈치보는 것을 전만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아마도 승재 말처럼 눈치보는 아이들은 많았을 테지만, 나처럼 숨쉬듯 자연스럽게 눈치보는 아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숨기려는 아이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건 사이 나쁜 부모, 친절한 이웃 사이에서 살면서 얻은 능력이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공기를 감지하고 분위기를 파악했다. 내가 다리 뻗을 수 있는 곳과 피해야 하는 곳,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과 적대적인 사람을 금세 판별했다. 그러고 나면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되었고, 발 빠르게 대응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행동 역시 눈치보는 것을 들키는 것 이상으로 부끄러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또한 경미 이모 때문이었다. 
    경미 이모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았다. 둘이 워낙 사이가 좋아 보여 둘을 아는 사람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고, 엄마도 몰랐을 것이며 어쩌면 이모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모가 조사를 쓰는 방식이 남다르다고 느꼈고, 엄마에 대한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가만 듣고 보면 비난이나 험담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모는 내가 어려서 그 뉘앙스를 모를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엄마의 과거 비행에 관한 일들은 이모가 엄마를 칭찬하거나 나를 칭찬하던 중에 흘러나온 것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가 고고장에 삼백 일 갔는지 이백 일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초등학교 시절, 새 반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던 나에게 이모는 말했다. ‘너는 엄마랑 안 닮았구나. 너희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들도 금방 사귀곤 했어. 사람 많은 고고장에 이상한 사람들 천지였는데 엄마가 성격이 좋아 그랬는지 다 친구가 되더라니까. 너희 아빠도 그래서…… 어머, 내가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나는 단번에 세 식구를 모두 처치해버리는 이모의 화술에 놀랐다. 내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아빠도 이상한 사람 중 하나였구나, 이모가 엄마를 싫어해서 나까지 안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말했다. ‘근데 이모, 나는 엄마 말고 이모 닮고 싶어요.’ 이모는 나를 연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기분좋게 하고 싶어서 계속 말을 덧붙였다. ‘난 이모 딸 하고 싶어요. 이모가 제 가족이면 좋겠어요.’ 이모는 왜인지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주아야,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돼. 이모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건 눈치싸움이었다. 이모는 자기가 엄마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이모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 또한 눈치챘다. 내 빤한 눈치와 발 빠른 생존 본능을 이모에게 들켜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두 번 다시는 어떤 것도 들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세상의 일들은 귀신과 같아서 내가 모르는 척하면 나를 그냥 지나치지만, 알은체하는 순간 나에게로 달려든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간파했다. 나는 주변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상황을 빨리 파악했고, 내가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권력 구도를 쉽게 파악했고,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금세 알아챘다. 누군가가 은근하게 미움받고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반장이었던 나에게 선생님이 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어봐도 나는 아주 편리한 방법을 찾았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곧이곧대로 믿고 더는 묻지 않았다. 모르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았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알고도 안한 나쁜 애가 아니라 몰라서 못하는 눈치 없는 애로 알려지는 것이 살기 편했다. 계속 그렇게 살았던 건 모르는 척에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는 못생기고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아이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애가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못생기거나 지저분하지도 않았고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어울리는 무리가 없고, 융통성이 부족했다는 것뿐이다. 나 역시 어울리는 일정한 무리가 없었음에도 그런 취급은 받지 않았는데, 좋은 성적과 학생회라는 타이틀, 엄마의 치맛바람과 선생님들의 비호 때문이었다. 나도 그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동족 혐오 같은 감정이었는데, 그애가 살 궁리를 하느라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누구에게 붙을지 결심하는 것까지 내 눈에 훤히 보였다. 그애가 선택할 사람은 무리가 없는 나인 게 당연했다. 나는 그애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사실은 그애가 나를 선택한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자신과 동족이라는 것을 눈치챈 게 아닐까 싶어 더 불쾌했다. 
    담임은 아침마다 과목을 돌아가며 열 문제씩 쪽지 시험을 보았다. 오답을 종례 시간까지 열 번씩 쓰게 하고 시간 내에 다 하지 못하면 다음날까지 스무 번을 써오게 했다. 많이 틀리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반납해야 했고, 그렇게 써도 다 끝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다보니 매점은 고사하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던 아이들은 꾀를 냈다. 앞뒤로 시험지를 바꿔 채점하곤 했는데, 서로 오답을 정답으로 바꿔주기로 모의했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여덟 개에서 네 개로, 다섯 개에서 두 개로 바꾸는 정도였고 백 점을 만들지는 않아서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쪽지 시험을 거의 틀리지 않았는데, 어느 날 국어 한 문제를 틀린 적이 있었다. 오답을 쓰려면 긴 예문까지 다 베껴야 해서 골치 아팠을 텐데, 뒤에 앉았던 그애가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백 점을 만들어주었다.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어떤 생색도 내지 않고 그저 동그라미를 쳐주었을 뿐이다. 나는 내가 틀린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아이에게 빚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잡기 귀찮다는 이유로 모르는 척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스쳐지나가는 일이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모두의 비양심적인 행각은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나와 그 아이의 암묵적인 공모는 걸리지 않고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그애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양심 고백을 했다. 나를 신뢰했던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냈고, 대표로 나에게만 벌을 주었다. 선생님은 반장이면서 그동안 모르는 척한 것도 모자라 동참까지 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교실 뒤편으로 책상을 가지고 나가 종일 수업하게 되었는데, 선생님들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내 마음은 원망과 미움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너만 양심 있어?’ 사과하겠다고 나를 밖으로 불러낸 그애에게 먼저 소리를 질렀다. 그애는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더 듣지 않고 악담을 늘어놓았다. 다른 애들이 그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친구가 없는 건지, 남들에게 그애가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행동이 역겨운지, 듣고는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부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반 아이들이 앞과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들에 내 생각을 더해서 상처를 더 크게 입힐 수 있도록 고안해 낸 무기였다. 
    그때까지 선생님들은 나를 눈치는 없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아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은 나를 공부 외에는 관심 없고 허술한 데가 있는 무해한 아이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이후 선생님들은 나를 믿고 몰래 시켰던 일들, 예를 들자면 주관식 문제 채점이나 상장에 수상자 이름을 쓰는 일을 더는 맡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가 마치 자기들을 공격했던 것처럼 나를 경계했고, 그애보다 나를 더 싫어했다. 나는 그 모든 일이 그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눈치 없는 멍청이처럼 굴면서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한 나를 사건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 그동안 애써 만든 이미지에 커다란 흠집을 낸 그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애는 잊을 만하면 내 책상 서랍 안에 편지와 빵이나 과자를 넣어두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편지를 펴보지도 않고 보란 듯, 그러나 조용하게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그애에게 감정이입을 해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데다 뒤끝도 긴 냉혈한으로 취급했다. 나는 그애가 명백한 피해자처럼 보이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점수를 고쳤을 때, 아니면 손을 들어 자백했을 때부터 계획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애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친하게 지내고 싶은 아이를 찾았던 게 아니라 자기를 대신할 희생양을 찾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것을 깨닫고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애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그애가 내 학창시절을 망친 장본인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악행 일기를 쓰려고 했을 때, 의외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 아이에게 악을 쓰던 나, 휴지통에 크림빵을 던지던 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애가 점수를 고쳐주었을 때 나는 귀찮아서 모르는 척했던 게 아니라, 나에게 득이 되는 일이어서, 나쁜 일을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핑곗거리를 만들어줘서 음흉하게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애가 나와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월감을 느꼈던 것과 그애가 친구가 없고 평판이 나쁜 아이라 그렇게 심하게 대했다는 것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양심 없고 어리석은 아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을 통해 제 이득을 위해 모르는 척하다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고, 더는 그렇게 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된통 당한 것이 남의 탓이라고만 생각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모르는 척하는 게 무슨 대단한 삶의 전략이라도 되는 양 계속 그렇게 살았다. 그뒤로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나쁜 일들이 그저 개별적인 사건이라고만 생각했지, 내 모르는 척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삶의 기본 자세는 좀처럼 변하지 않아서 미래를 좌우하는 일 앞에서도 진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엄마와 아빠가 별거를 시작할 때, 아빠는 나를 데려가고 싶어했고, 엄마는 나를 아빠와 함께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고 싶어했다. 아빠는 아주 먼 지방으로 가 좋은 집을 사서 내 공부방과 침실을 따로 만들어주고, 거실에는 피아노를 놔줄 계획이라고 했다. 휴일에는 둘이 바다도 가고 등산도 갈 거고, 유원지나 극장에도 자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림 없이 엄마를 선택했다. 아빠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디를 가든 아빠는 나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굵고 거친 손으로 늘 내 머리를 묶어주었고, 치실질도 해주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그게 아빠가 내게 준 최대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세 잊어버릴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를 온전히 사랑해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엄마를 철석같이 믿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보면 엄마에게 죄책감이라도 생겨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지 않는 나를 귀찮아하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은 거냐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엄마도 아빠가 나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 선택이 의아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늘 하던 말을 가져와 아빠를 혹독하게 평가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아빠를 따라갔다가 나도 대학을 못 갈까봐 그랬다. 그리고 아빠가 막노동으로 나를 대학까지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못 미더워서 그랬다. 아빠가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법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지껄이자 그제야 엄마는 내가 남은 이유를 납득했다. 
    내 예상처럼 아빠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빠가 사는 지역에서 서울까지 오는 화물차를 운전하며 나를 자주 보러왔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들러 반찬을 해주고 용돈을 주었다. 내가 낡은 집에서 혼자 지내다시피 하는 게 마음이 쓰였던 아빠는 새로 싱크대를 놓아주고, 욕조가 있는 입식 화장실을 새로 만들어주었다. 골방에도 벽지를 새로 바르고 커다란 쿠션을 넣어주었다. 아빠는 공사를 하는 일주일 동안 나와 함께 지내면서 놀이동산과 극장도 함께 갔다. 중학생씩이나 된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아빠가 떠나고 없을까 두려워서 매일 밤 내일은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빠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고, 아빠가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복하고서야 잠이 들곤 했다. 아빠가 머무는 동안 엄마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엄마는 적어도 별거 기간에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적은 없었는데, 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남자만 만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친구들과 여행을 간 것 같다고 변명하는 나에게 아빠는, 그런 건 상관없지만 내가 혼자 있는 게 마음 아프다며 지금이라도 함께 내려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전학 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아빠는 풀이 죽은 채로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마를 속이기 위해 말했던 아빠를 따라가지 않은 이유를 전해들었던 게 분명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 말을 전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빠는 내 고등학교 입학식 전날 새벽, 블랙 아이스로 인한 추돌 사고로 사망했다. 집으로 올라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맞은 사람처럼 울다가 기절했다. 누가 보면 엄청나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대단한 연기였다. 빈소에서 지인들을 맞이할 때마다 엄마가 실신하는 통에 나는 엄마마저 잘못될까 걱정하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장례가 끝남과 동시에 엄마의 슬픔도 끝났다. 금세 평정심을 찾은 엄마는 아빠가 남긴 보험금과, 아빠 집의 전세금을 챙겼다. 아빠가 살던 집의 짐은 모두 처분해버려 유품은 집에 벗어놓고 간 실내복과 슬리퍼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매일 캄캄한 골방에서 아빠의 옷을 덮고 누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빠를 따라갔더라면 지금쯤 아빠는 방에서 자고 있었겠지, 내일 아침에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갈 수도 있었겠지, 내가 없었더라면 아빠가 새벽에 화물차를 모는 일은 없었겠지, 그러면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겠지, 내가 없었으면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지 않았겠지, 둘이 싸울 일도 없고, 이혼할 일도 없었겠지, 내가 없었으면 이런 선택을 했던 나도 없었겠지……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은 늘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없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이었다. 나의 아둔함과 죄책감은 이 비극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했던 선택의 끔찍한 대가라는 사실을 또 간과하게 만들었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것과 같은 원인으로 스물아홉 차례의 경미한 사고가, 삼백 번의 징후가 선행된다는 통계적 법칙이 있다. 내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가장 큰 사고만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둔하게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매번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그게 마치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고인 것처럼 느끼곤 했고, 그 원인이 대부분 모르는 척으로 일관하는 내 삶의 자세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곤 했다. 그런 내가 불행을 피하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엄마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면서도 다시 내 삶으로 다시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어야 했는데, 내 욕심이 앞을 못 보게 했다. 나는 마흔이 넘어 유재를 낳았다. 늦게 얻은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 일을 잠시 쉬어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나의 빈 자리는 예상보다 컸다. 남편은 학부모와 수강생의 컴플레인과 강사들의 고충을 처리하는데 서툴렀다. 나를 만나기 전 남편의 학원이 망해가던 것이 그런 이유였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수강생이 줄어들고 강사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자 다시 출근하지 않을 수 없어졌다.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맡길 곳을 찾다보니 막막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영아 전담 어린이집이 있어도 자리가 나지 않았고, 아이 돌보미를 구하려 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갓난아기를 맡기려니 불안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몸 하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연로했고, 시누이는 아이를 둘 키우고 있어 맡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혈연으로 엮인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나는 엄마보다 남이 나을지 엄마가 나은 건지 한참 고민했다. 뉴스에서는 어린이집, 아이 돌보미들의 학대에 관한 보도가 흘러나왔고, 내 경험상으로도 가족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남은 오죽할까 싶은 마음이 들어 차라리 엄마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집을 떠난 뒤로 엄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나는 마흔 살이 넘어 엄마와 재회했다. 집을 나오고 처음으로 집에 전화했는데, 놀랍게도 엄마가 받았다. 엄마는 같이 살던 남자의 삼시 세끼를 챙겨주는 것도 병시중을 드는 것도 싫어서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엄마는 대뜸 내게 언제 집을 나간 거냐고, 연락을 이렇게 안 하고 살 수 있는 거냐고, 죽은 줄 알았다며 화를 냈다. 엄마는 남자와 헤어지면 집에 잠깐 들어와 살다가 남자가 생기면 다시 나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 돌아와보니 내가 없어서 여행 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다음에 왔을 때 집에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는 걸 보고서야 내가 나간 걸 알고 걱정했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왜 찾지 않았느냐고, 실종 신고라도 하지 않았냐고 캐묻지 않았다. 경찰서나 동사무소만 가도 내 행방을 찾을 수 있는데 왜 모른 척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내가 없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냐고 빈정대지도 않았다. 아이를 봐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를 끊게 될까봐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힌 뒤, 아무 자초지종도 말하지 않고 다짜고짜 아이를 봐줄 수 있냐고 물었다. 굽신거리며 물어봤다가는 의기양양해져 나를 휘두르려 할 게 뻔하기에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말했다. ‘봐줄 거면 만나서 이야기해요. 못 봐주면 다른 데 맡기면 되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키워본 적이 없어 자신은 없었을 텐데도 손녀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컸는지 내 제안을 쭈뼛거리며 승낙했다.
    처음 본 자신에게 아장아장 걸어와 안기는 유재를 만난 순간, 엄마는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고 했다. 나의 눈과 엄마의 입술과 아빠의 눈썹이 다 들어있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지나간 시절, 어리고 젊고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 한꺼번에 떠올렸다. 엄마는 그 얼굴과 마주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고, 남은 인생을 유재에게 헌신하리라 결심했다고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엄마가 헌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이고, 결심을 지키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만큼은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놀랍게도 엄마는 유재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아이에게서 눈을 떼는 법이 없었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와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했고, 좋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데리고 갔다.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젊은 엄마들과 사귀었고, 집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어린이집이 끝나면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노는 유재를 지켜보느라 발등이 새카맣게 타곤 했다. 기운이 달려 커피와 자양강장제를 입에 달고 지냈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새벽에 수영을 하고, 밤에는 조깅을 했다. 아이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온 집안의 물건에 영어 단어 카드를 붙여놓고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줄넘기도 가르치고 훌라후프도 가르쳤다.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아이로 키우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보여서 그러지 말라고 하자, 그냥 아이가 좋아하는 걸 시키는 거라고, 유재는 자기를 닮아 뭐든 열심히 한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엄마는 육아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는 사람처럼 매일 즐거워 보였다. 엄마는 그 나이가 되어서야 희생이 뭔지 알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유재에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대가 없이 내주면서도 고맙고,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난 그런 엄마의 말을 다 믿지 않았고 유재를 키우는 게 엄마의 새로운 쾌락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헌신적인 할머니 역할에 심취한 배우같다고 생각했지만, 애만 잘 봐주면 문제없다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엄마가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신을 지워야 하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흐려지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 있던 엄마 이름 세 글자는 유재 외할머니라는 호칭에 가려졌다. 엄마는 유재에게 외할머니가 아니라 서울 할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엄마는 젊은 애기 엄마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했지만, 그저 잘난 척하는 노인네일 뿐이었다. 엄마가 벤치에 앉아 얼마나 딸과 사위 자랑을 했는지, 다른 엄마들이 우리집 소식을 다 알고 있을 지경이었다. 나는 엄마가 뭐라든 그냥 두었는데, 엄마는 애기 엄마들에게 배척받겠지만 엄마의 포장술 덕에 내가 멀쩡한 가정에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처럼 보일 터였고, 그런 내 딸인 유재 또한 특별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내가 엄마를 불러들인 이유도 이런 무의식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것이 해명된 셈이었다. 결혼식에 부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엄마와 아이를 계기로 화해했다는 정도로 알게 돼 다행이었다. 남편은 엄마가 사랑이 많고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그런 엄마를 똑 닮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그게 비난인 것처럼 들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색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몰래 술을 마셨다. 싱크대 안쪽에 숨겨놓고 밤마다 마시는 걸 알았는데, 얼마나 먹겠나 싶어 모르는 척했다. 나에게 한 번 들켰을 때, 자기가 힘들고 우울해서 한잔 마셔봤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애 핑계 대고 마시려거든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엄마가 아이를 떠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나는 아이를 빌미삼아 엄마의 기분을 뒤집어 놓곤 했다. 감정을 섞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단 한 문장이면 그만이었다.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실 대안도 없고 자신도 없으면서도, 이제 돌아가라고, 이제 내가 키우면 된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했다. 엄마는 술을 끊지 못하고 매일 몰래 마시면서도 그게 아니라고, 힘들고 우울한 게, 유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손사래치며 변명했다. 자기 인생이 너무 후회스럽고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유재와 함께 지내는 지금이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자기는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렸던 나에게 못할 짓을 하며 살았다고, 그럼에도 잘 커줘서 고맙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취중진담을 빙자한 술주정을 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인지 알 수도 없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아서 못 들은 척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엄마의 헌신이 아주 낯설었고, 혼자 남는 게 싫어서 내 앞에서만 이러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도 나는 엄마를 믿어보기로 했고, 술을 조금 마시는 것 정도는 모르는 척했다. 잠들기 전, 소주 두 잔 정도 마시곤 했기에 아이를 돌보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 덕택에 육아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었고,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자잘한 문제나 교육에 관해서도 엄마에게 맡겨두고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만큼 나는 일에 몰두해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아이의 옷이나 액세서리같은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거나, 엄마들만 가입 가능한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아이를 위해 직접 할 것이 별로 없었다. 아이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고, 함께 자주 여행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때 나는 싱크대 속의 술병을 확인했어야 했다. 재활용 쓰레기로 소주병이 몇 개가 나가는지 확인해야 했다. 엄마가 밤에라도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마시는 걸 아는 순간 떠나보냈어야 했다. 엄마에게서 미리 유재를 빼앗아버렸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엄마가 유재의 손을 잡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엄마를 내 삶으로 다시 불러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떠나온 그 순간 관계를 끊었어야 했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유재를 키웠어야 했다. 학원이 주춤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유재가 없는 세상에서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든 건,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그냥 둔 나의 방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