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경박

9. 경박
    그는 경박한 인간이었다. 그가 수요모임에 참여하고, 일기를 쓰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생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과묵한 편이었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고민도 생각도 많은 편이라 자신이 진중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가 수요모임에 참여했던 것도 쉽게 결정한 게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주아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그는 문밖을 나서기 힘들 정도로 쇠약한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주아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그녀는 매서운 인상과 씩씩한 말투 때문에 처음부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착하게 생겼더라면 온갖 이상한 사람들이 달라붙어 괴롭혔을 거라며, 생긴 게 방패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방패를 무력화시키는 호락호락함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쉬웠다. 쉽다는 말이 나쁘게 들릴 수 있겠으나 그에게는 그게 미덕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인정이 많았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녔다. 사람의 눈은 다 비슷한 건지 이미 주아의 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당연하게 밥을 얻어먹고, 쉽게 노트를 빌리고, 일상적으로 타이핑을 부탁하고도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한테 쉽게 대문을 열어주지 마. 처음에는 호의를 고마워하고 굽신거리며 마당에 발을 들이지만, 곧 마루에 들여보내 달라하고, 결국 안방을 내주지 않으면 욕을 하고 떠나는 게 인간들 아니겠어? 동아리 애들 봐라. 나중엔 네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주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웃었다. ‘걔들이 그랬던가? 아무래도 난 이번 생에선 안 될 것 같다. 혼자인 게 더 싫어서.’ 그는 속 터지는 소리를 하는 그녀를 쥐어박고 싶어졌으나, 그래서 자기도 그녀의 집에 있을 수 있는 거겠다 싶어 같이 웃고 말았다. 그녀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은 자기가 유일했으니 실은 자신이 가장 이상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무섭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의 무례를 감당할 수 있는 씩씩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상한 사람들이 붙어 있어도 웃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난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녀를 가득 채웠던 생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녀는 집과 한몸이 된 것처럼 퇴락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야위다못해 투명해 보였고, 생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분명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하다못해 무엇을 먹고사는 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제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사는 어른이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옛날에는 진심으로 그녀가 이렇게 살기를 바랐으나, 막상 닫혀 있는 문 바깥에 있고 보니 함부로 열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던 여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나니 다음 날도 그렇게 지내보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고 싶다 한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아 허락도 없이 머물게 되었다. 집을 정리하겠다는 핑계로 몇 번 들렀을 때 그는 대문 밖에서 그녀가 내지르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단순히 끙끙 앓는 소리는 아니었고 비명이나 통곡도 아니었고, 중얼거리는 말에 그 모든 것을 섞은 듯한 소리였다. 그는 대문 너머로 그녀가 거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소리지르는 것을 보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웅크린 그녀는 우는 것처럼 몸을 들썩거리다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허둥대던 그가 구급차를 부르려 할 때쯤 그녀는 땀 범벅이 된 채로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급체한 것 같다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금세 멀쩡해진 것 같아 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같은 광경을 다시 목격했다. 집을 정리하다가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를 대고 작은 방에서 처음 자게 된 날이었다. 새벽이 되어도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간신히 잠이 든 그는 그녀가 내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거실에 엎드려 누운 그녀는 며칠 전과 같은 자세로 온몸을 뒤틀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급체가 아니라 다른 병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이 지나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고, 자주 이러다가 괜찮아지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더 캐묻지도 못했다. 
    주방에는 음식을 해 먹거나 사다 먹은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생활의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유가 먹지 않아서인가 싶었다. 그는 매일 죽을 사 들고 집을 찾았다. 먹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억지로 먹이자 처음에는 두 숟가락을 겨우 삼키고 그 이상을 게워냈다. 그래도 다음날은 토하지 않았고, 그다음 날은 조금 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을 다시 본 적이 없지만, 언제 다시 그럴지 몰라 불안했다. 그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가는 것도 아닌데, 갈 때마다 그녀가 자고 있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그는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아직 부모를 잃어보지 않아서 그 고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그녀도 자신처럼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유가 어떻든 그녀가 걱정스러워 혼자 둘 수 없었고,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은근슬쩍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 보일러가 고장 나서, 빨리 짐을 치워야 해서, 이것까지 정리하고 가면 너무 늦어서…… 자기가 생각해도 허술한 핑계였지만 그녀는 따져 묻지 않았다. 같이 지내면서 그가 짐을 치우는 시간보다 그녀에게 밥을 먹이고, 거실이나 마당에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녀가 아픈 건 안 된 일이지만, 그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괜히 집을 치우겠다고 온 집안을 풀썩거리며 헤집은 것을 후회했다. 그가 거실 장 밑에 들어가 있던 어머니의 휴대폰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모임에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조용한 날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수요모임도 악행일기도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악행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부모를 떠올렸고, 부모의 자식으로 살면서 자기가 한 행동들 또한 모두 악행으로 수렴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걸 어디에 말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게다가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적이 있어 글재주를 뽐내보고도 싶었다. 그녀는 그에게 왜 그 모임에 참여하려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도 물어보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참여하던 모임이라는 사실만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돕는 일이라면 얼마든 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모임에 처음 참여했던 날, 강의실에는 열댓 명의 신입 참가자가 있었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을 위해 만든 재단에서 주최하는 모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무거운 마음으로 갔는데, 다들 생각했던 것보다 표정이 밝아 그는 당황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그와 그녀를 부부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억지로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행이었다. 가장 먼저 그가 발표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귀를 기울였다. 글재주가 참 좋으시네요, 혹시 작가세요? 처음인데도 떨지 않으시네요, 라며 한마디씩 칭찬했다. 그리고 다들 자신의 미숙한 글이 어떻게 읽힐지 몰라 긴장하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발표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도취되어 있었다. 다들 작은 잘못에 대해 조심스럽게 쓰거나 악행도 아닌 일을 악행이라고 우겨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악행이 아닌 걸 악행이라고 쓰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선하다는 걸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닌지 의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일기 쓰기와 발표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는 글쓰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 참가자의 일기를 들으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참가자의 일기는 자식이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한 일에 대한 거였다. 우산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일, 아픈 날에도 학교를 보냈던 일, 소풍 도시락에 싫어하는 볶음밥을 넣어준 일, 일하느라 시간을 내주지 못한 일, 혼자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게 만든 일을 후회했다. 결국 그것들이 모여 아들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이야기였다.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탄식과 흐느낌이 점차 늘어가더니 일기가 끝날 때는 모두가 울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런 글이 일종의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자식의 죽음까지 말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어쩌면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글을 쓴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음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녀의 죽음에 관한 건 물론이고 사실이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할 정도의 악행에 대한 일기를 썼다. 한 명씩 발표할 때마다 강의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재로 딸과 사위, 쌍둥이 손녀를 한꺼번에 잃은 참가자의 일기는 겨우 눈물을 참고 있던 사람들까지 울렸다. 입이 험했던 그녀가 딸에게 했던 욕들, 딱 너 같은 새끼들 낳아서 고생 좀 해봐라, 정신을 그렇게 팔다가는 집 다 태워먹는다, 이런 마음에도 없이 입에서 줄줄 새어나온 말들이 자기도 모르게 딸을 저주했다는 일기를 그녀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다음 차례인 그는 발표를 망설였다. 그들은 마음과 몸을 깊이 후벼파서 착유하듯 일기를 뽑아 올렸지만, 그의 일기는 깃털처럼 가볍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울다가 진정한 사람들이 글을 잘 쓰는 그의 일기를 듣고 싶다며 부추기는 통에 결국 그는 일기를 발표했다. 사람들의 훌쩍임이 멎고,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그는 강의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그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그녀에게 모임에 참여한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마지막에 무슨 일을 했는지, 혹시 그게 죽음과 연관이 있는 건지 궁금해서 찾아간 거라고 했다. 부동산 업자는 그녀의 어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어머니도 자녀의 죽음을 겪어서 여기에 오게 된 거 아니겠냐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는 자신도 그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던 적이 많았기에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는 뭐가 어찌 됐건 앞으로 발표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임에 가는 것도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 자리에 부부 행세를 하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악행이라고 하며 그녀에게 모임에 가는 것을 그만두자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면서 이제 자기 혼자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는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모임에 나가 그들의 마음을 흉내내는 것은 그야말로 큰 악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머니를 잃긴 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녀가 그곳에서 일기를 발표한다는 건 죄를 짓는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다음 모임에서 주아는 기어이 일기를 발표했다. 너무나 차갑고 참혹한 일기여서 사람들은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야기가 너무 생생해서 정말 자식을 잃고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고 키운 엄마들에게서 보이는 말투와 태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꾸며내서 쓰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발표한 그녀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그녀가 어째서 거짓 일기까지 쓰면서 모임에 참여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왜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 그가 함께해주겠다고 그녀를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다 자기 잘못 같아 후회스러웠다. 제 딴에는 깊이 고민한 결과가 이런 거였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경박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생의 절반을 살고서야 깨달았다. 모든 걸 늦게 깨닫곤 했던 것도 경박하기 때문이었으며, 삶의 모든 행동이 경박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그 경박함이 그녀를 여러 번 괴롭혔다는 것도 깨달았다.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여름을 나는 동안 그는 집과 연락을 끊었다. 집에서 아무리 호출을 해도 답신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찾아 학교에 갔지만, 과방에서 지낸다고 했던 그를 찾을 수 없었고 그를 잘 아는 사람도 한 명 만나지 못했다. 그와 얼굴만 아는 동기에게 그가 수업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과방에도 들르지 않는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준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돌아오지 않으면 등록금을 내주지 않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이미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았고, 등록금이 없으면 군대에 가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흥신소까지 동원해 그가 있는 곳을 찾았다. 순진한 아들이 여자와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한 그들은 아들을 만나러 그 집을 찾아갔다. 그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과 인연을 끊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온 건 태어나 처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순진하고 착한 아들이 자기 의지로 그럴 리는 없을 것이고, 여자의 꼬임에 넘어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아의 뒷조사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 부모도 없이 혼자 살면서 남자를 끌어들이는 여자애의 내력 따위는 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외출한 사이에 주아만 남아 있던 집에 찾아와 한 차례 난동을 부리고 갔다. 주아는 그에게 어머니에게서 받은 두터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돈다발이 여러 묶음 들어 있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너 진짜 귀한 집 아들이었구나. 너무 화를 내시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일단 그냥 받았어. 돌려드리고 진실을 말씀드려.’ 그의 어머니는 그녀가 재산을 노리고 그를 꼬여 냈다고 생각했다. ‘너 같은 하층민 여자애의 욕심을 나도 잘 알아. 이만큼 주면 헤어질 수 있지? 승재 돌려보내고 다시 만나지 마.’ 이런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헤어지니? 아니, 하층민이라니, 너무 웃기잖아. 재벌 놀이를 하시는 것도 아니고……’ 불쾌할 법한 상황인데도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머쓱하게 따라 웃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잘 몰랐다. 함께 노을을 보며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가, 그녀가 일찍 들어오면 금세 귀찮아졌고, 선풍기를 틀고 나란히 누우면 안고 싶어졌다가, 아침이면 퉁퉁 부은 얼굴이 보기 싫어 짜증이 났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세상에 자신 같은 사람이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 곧 자기혐오와 동족 혐오로 이어졌다. 그는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둘의 관계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둘은 조금 친한 집주인과 세입자 관계일 뿐이라고 느꼈다. 그러니 어머니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가 알 바도 아니었고, 그녀가 그저 똥 밟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돈을 그녀와 함께 써버리면 미안한 마음이 좀 사라질 것 같았는데 정작 돈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그녀에게 자기 부모를 비난하고, 당장 돈을 돌려줬다면 좋았을테지만, 그는 새털처럼 가벼운 인간이라 그랬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 돈을 가지고 있다가 그녀에게 월세며 공과금 명목으로 야금야금 건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당하게 계속 머물며 벽화를 그리러 다닐 수 있었는지 모른다. 
겨울이 되고 벽화 작업을 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미술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리고 난 뒤에야 그는 살아가는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주아도 장학금을 놓친데다가 열 손실이 심한 집에 겨우내 엄청나게 나올 난방비를 비축해야 했기에 그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일하는 기간은 미술관 소장품 전을 하는 한 달간이었는데, 급여가 센 편이어서 미술관 직원인 선배가 동아리 후배들로 자리를 채웠고 덩달아 주아도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일은 들은 바대로 너무 쉬웠다. 전시장 입구에서 표를 확인하거나 전시장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관람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지켜보는 일이었다. 실내는 따뜻했고, 좋은 음악과 향기가 있어 더없이 좋았는데 점심식사를 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미술관 인근에는 식당이 없어 짧은 점심시간 동안 나갔다 오기도 힘들었고, 맛도 없는 구내식당은 아르바이트생의 일당의 삼 분의 일이나 되는 가격이라 돈이 아까웠다. 그는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자고 했으나 다들 엥겔계수가 높아지는 게 싫다며 간단한 도시락을 가져오기로 했다. 그러나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 관람객 출입 금지 구역의 벤치를 찾아가 오들오들 떨면서 차가워진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경비원은 학생들에게 경비원과 미화원이 사용하는 휴게 공간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경비원과 미화원은 손자 손녀뻘의 대학생들을 기특하게 여겼다. 어린 그들이 아침 일찍 돈을 벌러 나오는 것도 대견했고, 낯가림 없이 밝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예뻤다. 휴게 공간은 건물 외부에 간이로 붙여 놓은 임시 건물이었다. 그곳의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 세상 어디보다도 깔끔하고 현대적인 미술관에 그런 남루한 공간이 숨어 있으리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방 한쪽에는 청소도구함이 놓여 있었고, 반대편에는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대리석 외벽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로 인해 난로 없이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 전기난로 앞에 둘러앉아 샌드위치나 김밥을 먹으며 떠들었다. 경비원이 컵라면과 믹스 커피도 나눠주었다. 오전 청소를 끝낸 미화원이 함께 앉아 간식을 나눠주고 언 손을 녹이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승재는 그 공간의 모두와 이질감을 느꼈다. 거기가 아니었다면 평생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공간 자체가 너무 불편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휴게 공간에서 밥을 먹고 떠드는 동안 자리를 피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며칠 지난 뒤 여자 후배도 승재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녀도 그의 집과 같은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고, 불편한 느낌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후배도 시간만 나면 그 방에 찾아가는 주아의 지나친 붙임성이 싫고, 삭막한 방 벽에 벽화를 좀 그려드리라고 말하는 그녀의 오지랖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후배는 주아의 집에서부터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했고, 승재가 그녀와 사귄다고 해서 같은 부류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이 둘을 엮어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오해받는 상황이 진저리 처지게 싫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동네 사람들의 냄새나는 이부자리를 기억했다. 주아가 좋았던 게 아니라 그녀의 집이 좋았던 거고, 그건 그게 그의 노스탤지어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더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둘이 남루를 덮고 있는 꼴을 남에게 보여준 것 같았고, 그녀와 시궁창에서 뒹구는 꼴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엇다. 그는 뒤틀린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그녀의 변변치 못한 집이, 그녀가 태어난 뒤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낡은 가재도구가, 어디서 그런 옷을 주워다 입었는지 모를 그녀의 행색이 갑자기 모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아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집에 따로 귀가하기 시작했고, 집에 가서도 춥다는 핑계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 일찍 잠을 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후배를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지하철에서 내려 아무 계획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아의 집은 너무 추웠고, 앞으로 더 심해질 일만 남은 경제적 압박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계속 그곳에 살다가는 그의 어머니가 말했듯 하층민이 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미술관에 출근한 주아가 왜 귀가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말했다. ‘미술관이랑 집이 가까워서 들어갔어. 아주 들어간 거야.’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려보려 해도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단 한 문장뿐이다. ‘학교랑 우리집이 가깝다는 말처럼 참 좋은 핑계구나.’ 그는 자신의 짐과 가방을 주아의 집에 그대로 둔 채 그녀와의 관계를 흐지부지 마무리했다. 그는 봄이 되면서 입대했고, 제대한 후에는 주아를 아는 사람이 학교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그녀에게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그는 그때 주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때는 그의 생각에 빠져 그럴 여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와 보니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수요모임에 가서야 자신이 평균적인 인간들과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는 평생 남의 눈을 의식하며 가볍게 그럴싸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았던 인간이고, 깊이 사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쉽게 왔다 쉽게 떠나는 경박한 인간이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쳐버리고 뒤늦게 깨닫는 인간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래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녀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그게 첫사랑이었는지 이미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학교와 주아의 집이 가까워서 머문 것처럼, 그가 자기 집을 오가며 정리하기 싫어 그녀의 곁에 머무는 거라고 오해할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 마음은 청소를 제 손으로 해본 적 없는 그를 마치 전문가라도 되는 양 부지런을 떨게 하고, 엄마 새처럼 그녀의 입에 밥을 넣어주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세탁기 작동법을 익히게 했다. 그는 잘못 살아온 인생을 그녀와 함께 다시 살아내고 싶었다. 이것만은 절대 가벼운 생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