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랑
집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처음에 재건축하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집을 매수해 재건축하려고 했던 건 아내 때문이었다. 이 지역의 건물을 가지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던 걸 기억하고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는 이 지역이 몰라보게 개발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부모에게 싼 집들을 사두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업 사원이었고, 어머니는 공무원으로 착실한 사람들이었는데 학군이 좋은 우리 동네에 뒤늦게 정착하느라 여유 자금이 없었다. 그들은 부동산 투자를 좋지 않게 생각했고, 자녀에게 투자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딸의 어학연수와 아들의 유학 때문에 가지고 있던 집을 팔고 전세를 전전했다. 자녀의 입시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 동네에서 혼사까지 치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결혼을 하려면 그 동네에서 결혼 상대를 만나야만 한다고 했다는데, 나 같은 남자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대로 우리는 사는 곳이 멀지 않다는 이유로 가까워진 뒤,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내 부모는 우리에게 옆 단지의 아파트를 사주었고, 그것은 아내 부모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들은 내가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봐도 성실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텐데 아파트를 해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에 들어 했다.
아내는 고가의 아파트를 공동명의로 보유하게 되었음에도 대학 시절 아주 싸게 매수할 수 있었던 이 동네의 주택을 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곤 했다. 학교 앞이 번화가가 되었을 때, 열차의 운행이 중지되었을 때, 이 지역은 철길로 인해 점점 슬럼화되어갈 뿐 오를 가망이 없어 보였는데도 아내는 그때가 투자의 최적기라며 저렴한 매물을 사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사법고시 준비중이었고, 그녀는 삼 년 차 은행원이었기에 세가 나오지 않는 집을 사둘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부모에게 돈을 빌려 투자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투자할 가치가 없는 땅이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들만이라도 투자하기를 권유했지만, 그들은 지금 가진 재산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욕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굴었다. 젊어서부터 너무 돈을 밝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자신들의 재산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될 텐데, 언제 될지도 모르는 재개발 따위에 신경을 쓰면서 인생을 낭비할 거냐며 며느리를 질책했다. 그들의 삶을 알고 있는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며느리가 마냥 사근사근한 줄만 알았지, 자기들처럼 욕심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워했다. 그들은 허허벌판만 봐도 불길처럼 일어나던 자신들의 위험한 탐욕을 기억한 것이 분명했다. 머지않아 아내가 직업이 없는 나를 무시하고 자기들까지 업신여기게 될 거라며, 나에게 희망도 없는 고시를 집어치우고 취직을 하라며 종용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시원찮은 놈이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없는 집 딸을 데리고 오는 게 나았을 거라고 한탄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이 가난한 며느리의 친정으로 흘러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는지 그래도 먹고는 사는 집 자식이라 돈이 안 새어나가는 게 다행이라고 고쳐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정쩡한 집안의 애들이 얼마나 욕심 사납고 악착같은지 겁을 주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기들이 힘들여 모은 재산을 홀딱 다 뺏길 테니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매달 말일 저녁마다 우리를 집으로 불러 아내가 받는 월급의 세 배가 되는 생활비를 전달하곤 했다. 계좌이체를 하지 않고 현금을 직접 건넨 이유는 증여세 탈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내의 기를 죽이고 고분고분하게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내는 고작 이십대 중반이라 순진했던 데다가, 시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나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에 필요 이상으로 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마음을 잊게 할 정도로 아내를 심하게 부렸다. 자신들이 주는 돈의 값어치만큼은 괴롭혀주겠다는 듯이 신혼집의 청소 상태를 간섭하고, 식단의 부실함을 질책했다. 직장에 눈치가 보일 정도로 시시콜콜한 일로 전화했고, 갖가지 핑계로 매일 집에 들르게 해 쓸데없는 일을 시켰다. 제철 식재료를 대량 구입해 나누거나 장롱 정리, 냉장고 청소 같은 것들을 시켰다. 모임을 집에서 하면서 아내가 월차를 내 상을 차려 손님을 맞게 했고, 병원에 가는 날이면 꼭 며느리의 수행을 받고자 했다. 그들은 나의 공부할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며 아내만을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단 한 순간이었다. 이미 절여 놓은 배추가 도착했는데 도우미가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으니 당장 와달라는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갔던 아내는 백 포기가 넘는 김장을 거의 혼자 하다시피 했다. 집에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던 아내는 축축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생리가 시작된 줄 알았던 그녀는 출혈과 통증이 계속되자 병원에 갔다가 유산했음을 알게 되었다. 임신 6주 차였다. 아이를 잃고 나서야 아이를 가졌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왔다 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이미 흘려버린 애를 어떻게 하겠냐고, 자기는 승재 뒤로 생긴 애들을 다 지워버리고도 잘 살아왔다는 시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혐오를,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아이를 잃었다고 비난하는 시아버지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던 내가 과연 자신을 사랑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다며 화를 내고 울었다. 나는 아내를 위로하긴 했지만,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겨우 착상된 직후인 태아가 진짜 사람이라는 생각도, 내 자식이라는 실감도 들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아내는 내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더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시댁에 가지 않았다. 나만 둘 사이를 오가며 가능한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을 지어내곤 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계속 울리는 전화기를 보면 아내는 짜증을 부렸고, 부모도 아무 연락 없는 며느리에게 노여움을 느끼며 내가 시원찮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며 몰아세웠다. 그래도 내가 무시당할까봐 그랬던 건지 그때까지는 생활비를 계속 지원했다. 그러나 두번째 임신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생활비 지원을 멈췄다. 당장 수입이 끊긴 며느리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곧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거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친정 부모가 증여해준 오피스텔 임대 수입이 있었고, 모아둔 돈도 있어 괜찮았다. 우리는 철마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고, 최저가를 확인하고 물건을 구매했고, 마감 세일을 이용해 장을 봐야 했지만, 적당한 생활 유지는 가능했다.
나는 아내를 믿고 계속 똑같이 살았다. 아이가 생겼지만 다른 직업을 가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희망 없는 한량이라는 것을 모르고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책임감 없는 인간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살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었는데, 계속 그렇게 살다보니 나중에는 노력해봐도 열심히 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린 적도 있고, 밴드를 한 적도 있고, 소설을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장비를 갖추거나 수업을 등록하고 나면 금방 시들해져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한 것도 없이 그만두곤 했다. 하지만 나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혼을 앞두고 내가 사법고시를 보겠다고 했을 때 내 부모는 내가 그제야 기나길었던 한량 짓을 멈추고 제자리를 찾아간 거라고 안도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판검사가 되어 못 배운 졸부라고 은근히 멸시당했던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주리라 믿었다. 나 자신도 곧 시험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으나 아내만은 내가 공부를 하려는 게 아니라 책을 쌓아둔 채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낼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런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가 꼭 고시를 통과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감을 느끼게 될 거라는 기대를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대는 머지않아 무너졌다.
우리는 아들을 무사히 낳았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지만 우리라고 한 것은 아들을 낳는 순간까지, 낳은 후에도 내내 그녀의 신경질과 짜증,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냈기 때문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일차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어느 해는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으면서도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부모는 유치원에 간 손자가 직업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다고 흉잡힐까봐 걱정스러워 나에게 카페를 차려주며 이제 곧 없어진다는 고시는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마치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생활에 굴복한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공부를 그만두었다. 아내는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내 표정이 우스꽝스러우리만큼 비장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정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사랑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사랑과 함께 배려심도 잃었다. 아내는 카페를 성실하게 운영하지 않는 나를 비난할 뿐 돕지는 않았고, 매출과 상관없이 무슨 수를 써서든 생활비와 아이의 교육비를 꼬박꼬박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아내는 오피스텔을 판 종잣돈으로 갭 투자를 시작했다. 대출이 잘 나오는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해 재개발 지역의 빌라를 사두었다. 호재로 이득을 본 그녀는 다시 상급지의 아파트를 매입해 지속적인 임대 수입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된 뒤에야 아내는 나를 보고 겨우 웃으며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일 뿐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인생에서 나를 서서히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내는 아들이 6학년이 되던 해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조기 유학을 반대했지만, 애초에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가세해 이 나라를 떠나는 순간 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협박했으나 아내는 개의치 않았다.
혼자 남게 된 나는 내심 홀가분했다. 카페에 나가지 않고 직원들에게 맡겨두어도 잔소리할 사람도 없었고, 종일 멍하게 있어도 한심하게 생각할 사람이 없어 편안했다. 부모와 아내 사이에 끼어 곤란해할 필요도 없었고, 아들을 매주 부모에게 데리고 가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않아도 됐다. 나는 결혼 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나 부모는 나를 편히 두지 않았다. 이제 카페 임대료를 받아야겠다며 매출을 올리라고 종용했고, 내 무능함 때문에 자신들이 어디에서도 대접을 못 받는 거라고 비난하며 대성통곡했다. 둘을 당장 들어오게 하지 않으면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협박했으나, 나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양반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내에게 말을 전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났다면 그래도 견딜 만했을 텐데, 부모는 나를 아내처럼 불러댔다. 카페에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영업에 별 지장없다는 걸 알기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렀다. 그들은 택시를 이용하는 걸 싫어해서 장 보러 지척에 있는 백화점에 가더라도 아들이 모시기를 원했고, 친구들 모임에 갈 때도 아들이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데리고 오기를 바랐다. 사람을 쓰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잘 나타나지 않았고, 가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부모의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부모는 이참에 내가 이혼하고 자신들을 봉양해줄 온순한 며느리를 새로 들이기를 바랐다. 아직 새 가정을 꾸리기에 늦지 않은 나이라며 주변의 여자들을 호명하며 만나보기를 부추겼다. 그들은 그 여자들을 며느리 자리에 대입해보며 효부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그들은 아들보다 무능하고 가진 게 없는 며느리를 들이는 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그 낡고 더러운 집에 살던 애였다면 감지덕지하면서 자기들에게 헌신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가끔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동호회에 가입해 여가를 즐기기도 했지만, 그것도 금세 질렸다. 여자들은 금방 선을 넘어와 애인이라도 되는 양 행세했고, 남자들은 여러 가지 세속적인 기준으로 서열 정리를 하려고 했다. 모두 내가 돈을 쓰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공허한 관계들이었다. 그래도 아무 책임이 따르지 않는 관계라 질리면 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관계들이 지겨워질 때면 아내와 아들이 궁금해졌으나 시차 때문에 쉽게 통화하기 어려웠다. 가끔 아빠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으로 훌쩍 떠났다. 처음에 그곳에서 오래 지내지 못했던 것은 나인데, 나중에는 아내와 아들이 나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들이 자라는 동안 그곳에 간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아들은 대학에 갔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내는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직장을 새로 얻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들어온다고 할까봐 걱정스러웠는데, 이제는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연로한 부모님은 나를 점점 더 찾았다. 가사 도우미들에게 귀금속과 그릇, 식재료를 도난당한 뒤로 의심이 커져 남을 집에 들이지 못하게 됐다. 그들을 돌볼 사람은 세상천지에 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를 밤낮으로 불러댔다. 청소와 빨래, 장 보는 것부터 쓰레기 버리는 일까지 내가 다 해야 했고, 입에 맞는 음식들을 찾아 사 날라야 했다. 그들은 합가해 함께 살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부모님은 사람을 구해 쓸 것이고, 봉양할 사람이 없는 삶에 적응할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신봉했던 돈이 다 해결해줄 것이므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나 그리 갈까?” 아내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뭐야? 아예 들어오겠다는 건 아니지? 그냥 하는 소리지?” 내가 카페를 정리하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가져가겠다고 하자, 아내는 그제야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냥 거기 있어. 당신이 오면 넓은 집을 구해야 하고 생활비도 많이 들 거야. 우리 수입이 생각처럼 많지 않아. 당신은 여기서 일자리를 구하는게 불가능해. 뭘 해도 카페보다 많이 벌지도 못할 거야. 카페 정리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왜 그래? 그냥 유지하면서 매달 조금씩이라도 보내줘.” 나는 아내의 임대 수입만 해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가 무능한 나와 사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가는 것에 실패했으니, 들어오게라도 해야겠다 싶어 머리를 굴려봐도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가지지 못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다가 이 지역의 건물을 생각해 냈다. 오랜 세월 눈독 들였지만 결코 갖지 못했던 이 지역의 신축 건물이 자기 것이 된다면 안 들어오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내 고충을 덜어낼 방법은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집을 사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내를 위한 재건축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리모델링을 선택했다. 그 마음은 이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주아를 알아보기 전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해 주아와 함께 지내면서 확고해졌다. 나는 마루에 앉아 담장의 벽에 그려진 벽화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 좋았다. 오래전 시간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과 뼈대만을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 하기로 했다. 집뿐만 아니라 내 삶도 리모델링할 생각이었다. 그간 잘못 살아온 삶을 뜯어고쳐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내가 나가지 않는다면 아내가 굳이 귀국해 함께 살게 될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고, 내가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하면 부모님도 말릴 길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양쪽 모두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기 충분한 기회였다. 거기에 주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함되어 있다기보다, 리모델링의 처음이자 시작이었다.
주아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도, 용기가 없는 나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냥 물어보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을까 두려워서였다. 어디가 아픈 거냐,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아이가 죽었다는 일기가 사실이냐, 결혼을 진짜 해보기나 한 거냐,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느냐, 한마디만 꺼내도 이런 질문이 줄줄 따라 나올 것 같아 빨리 짐을 정리하자고만 간신히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이 없는 것을 주아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왜 집에 가지도 않고 이러고 있는 건지 묻거나 이제 돌아가라고 하거나 이제는 혼자 있고 싶다고 할까봐, 나는 잊을 만하면 짐을 언제까지 정리하겠냐, 계약서를 언제 쓰겠냐, 이런 말로 주의를 돌리곤 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일기 쓰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더해 주아에게 질문할 기회를 찾기 위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주아는 일기에 몰두하면서 잠을 잘 자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다가 방을 뒹구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그녀가 아프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그녀가 고통 때문에 푸닥거리를 할 때만 나는 그녀를 안을 수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좀 아쉬웠다. 나는 그녀가 일기에 집착하는 것도, 그 모임에 가는 것 자체도 싫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에 공감하는 그녀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애초에 그 모임이 께름칙했다.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며 치유하는 과정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악행을 쓰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악행을 약점 삼아 착취하려는 개수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너무 허술해서 아무 의심 없이 자기 악행을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써나갔다. 나로서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다들 너도나도 발표하지 못해 점점 안달이 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에 깊이 빠져 눈물을 글썽이고 분노하는 것을 보고 있을 뿐 동화되지는 못했다. 자식을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생각해봤는데, 나도 6주 차에 자식을 잃은 아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왜 슬프지 않은 걸까, 왜 분노하지 않는 걸까, 왜 자책하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뭔가 결여된 사람 같았다. 얼마나 슬픔과 분노가 크면 다른 사람을 저주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렇게 믿어 의심하지 않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나는 그들과 너무 다른 존재라는 생각에 미치자 재개발 지역에 혼자 남았던 유년처럼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주아에게 내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곧 다가올 것이며, 이 집에 덜렁 혼자 남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이제부터 너와 함께 사는 것처럼,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멋대가리 없는 한 문장만 툭 굴러떨어졌다.
“이 집 리모델링 하기로 했다.”
주아는 얼른 짐을 정리해달라는 이야기로 들었는지, 급하면 짐은 그냥 버려도 되고, 원하는 시기에 맞춰 나가줄 수 있다고 말했다. 갈 데가 있냐고 묻자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집이 있는 거냐고 묻자, 그녀는 집이 없어 보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가정이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가 다른 도시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녀가 일기를 썼을 때, 가정도 아이도 없이 쓴 가짜 일기라고 생각했기에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일기에 등장한 유재가 진짜 그녀의 딸인지, 살아 있는 존재는 맞는지 궁금했다. 그걸 그녀에게 직접 묻는 건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녀가 딸이 아홉 살이라고 가볍게 말을 꺼냈다. 딸의 이름을 말한 뒤부터 쉴새없이 아이의 사소한 것을 자랑하고, 더 사소한 것을 흉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의 일기가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누구와도 연락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녀에게 남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아이를 키워본 사람 특유의 말투와 행동이 보이지 않아 아이가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주아는 남편과 헤어지는 중이며, 딸을 자기 손으로 키우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거라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이미 다 끝장나버린 가정이라해도 내가 유뷰남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되었는데 비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을 리모델링 해 그녀와 함께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삶에 유재를 끼워넣어 그녀를 유혹했다.
“마루는 마당이랑 통하게 열어두고, 마당에는 식물이 가득한 정원을 만들 거야. 그리고 벽화는 셋이 함께 새로 그리자. 이층으로 증축해서 유재 방을 따로 빼주면 좋을 것 같아. 산책로가 내려다보여 정말 좋을 거야.”
그녀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거절의 의미인 것 같아 간절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행복하고 싶어.”
“그동안 불행했니?”
“너랑 헤어지고 단 한 순간도 행복해보질 못했어. 유일하게 행복했던 때가 우리가 여기서 함께 지낸 여름이었어. 이제 다시 찾고 싶어.”
“왜 그렇게 살았어. 잘 살았어야지.”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저주라는 게 진짜 있는 것 같아. 나한테 아내와 아들이 있어. 둘 다 미국으로 떠나고 가정은 다 부서졌어. 우리 부모님도 엉망진창이고. 나는 이게 아내의 저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도 아이를 잃었거든. 6주밖에 되지 않아 성별도 몰라. 불행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아. 아내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 아마 나를 가장 많이 원망했을 거야.”
주아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나도 그랬어.”
그 말이 무엇에 관한 공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주아가 내 마음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아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도 가정이 부서진 처지인 게 분명하여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런 마음이 죄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 마음에 이름을 지어보니 사랑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