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기 (1)
승재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며 둘을 묶었을 때, 주아는 당혹스러웠다. 승재가 한 말은 마음 상태의 유사성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주아에게는 ‘하층민’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의 어머니가 독처럼 뱉어놓은 그 말은 헛웃음을 짓게 하고 금세 사라진 줄 알았으나, 주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숨어 있다가 언뜻언뜻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 말은 주아가 수시로 자신의 삶을 허름하다고 느끼게 했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하층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황이 좋을 때는 하층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도록 만들었다.
주아는 이미 오래전에 그 단어에서 놓여났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승재의 말을 들은 순간, 그 수치스러운 단어가 다시 살아나 그와 자신을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없는 존재로 나누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그녀는 부모가 제공한 자원으로 순탄한 삶을 살아온 그와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산전수전을 겪고 자수성가한 자신이 같이 분류되는 것이 불쾌했다. 게다가 그가 그녀와 짝이 되기 위해 기껏 찾아낸 것이 사랑을 못 받고 자라 단단하지 못하다는 공통점이라니, 그리고 그것이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콕 집어 ‘우리 같은 사람’이라니, 그녀는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
주아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은 마음의 경도가 얼마나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녀가 받은 것은 조건부에 쉽사리 거둬지는 불안정한 사랑 일색이었으므로,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녀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안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실은 그게 어떤 상태인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모욕 앞에서 의연하게 굴고, 수치심은 웃음으로 덮고, 아무것도 필요 없는 척, 괜찮은 척하며 자신의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면 쉴새없이 흔들리고 쉽게 허물어지는 마음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은 먼저 드러내서 들킬 여지를 없애버렸다. 외롭고 무섭다고,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해버리고, 잃기 전에 떠나버리겠다고 말하고 나면 그건 약점이 아닌 것으로 변했다. 진짜 약한 것은 철저히 숨기고, 덜 약한 것을 먼저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녀는 단단한 사람을 가장하며 살았다. 그녀는 그것을 노력이라 생각했고, 계속 그렇게 살다보면 진짜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한순간에 그녀를 추락시켰고,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주아는 승재의 눈에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지 못해 불안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보였을 거라는 사실에 좌절했다. 의연한 척하는 자신의 행동들이 그에게는 얼마나 가짜 같아 보였을까 싶어 부끄러웠다. 그녀는 경미 이모 부부에게 눈치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 느꼈던 것, 일기장에 쓴 거짓말을 들켰을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기분에 휩싸였다. 주아는 승재가 그렇게 좋은 덕목을 가진 아내를 버려두고서 어떻게 자신 같은 여자, 그러니까, 아내 같은 사람을 흉내나 내고 있는 여자와 미래를 도모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아는 그의 아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큰일이 닥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 혼자서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만약 그랬다면 유재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누구도 저주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가족이 완전히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노력으로는 불가능했고, 적어도 다시 태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으므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맞겠다. 주아는 그의 아내가 가진 것을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자 화가 났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것이 억울했고,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주아는 그런 감정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편안한 얼굴의 여자애들, 갑작스러운 사고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조용히 대응하는 애들, 기쁜 일 앞에서도 호들갑 떨며 웃지 않는 애들, 학생 식당에서 여유 있게 혼자 밥 먹는 애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애들, 욕먹는 것도 어떤 소문도 두려워하지 않는 애들을 보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던 감정이었다. 주아는 그 애들에게 놀라 자빠지지 않고서는 못 배길 일이 터지기를, 혼자 밥 먹기 힘들어 같이 먹을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기를, 혼자 다니지 못해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분란이 일어나 호되게 당해보기를, 앞날이 두려워질 만큼 제대로 욕먹어보고, 손쓸 수 없는 소문에 휩싸여보기를 바랐다. 그런 일 앞에서도 과연 그런 여유로운 얼굴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얼굴로 무너지게 될지 궁금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분 나쁘고 무서운 마음을 그녀는 오래 붙잡아두지 않고 빨리 흘려버렸다. 그저 지나가는 생각뿐이었으므로, 그녀는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아는 이런 마음 때문에 남편을 그의 옛 연인에게서 빼앗은 것인지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해왔지만, 이 마음의 정체를 알게 되자 장담할 수 없었다. 남편이나 옛 연인 모두 내성적이고 안정적인 사람들이어서 팔 년간 지속되었던 둘의 연애는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주아는 옛 연인을 직접 본 적이 없었는데, 오래 일한 강사들이나, 실장, 미화원 같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녀의 외모 때문에 호감을 더 크게 가지는 것 같았다. 뽀얗고 주름도 잡티도 없는 피부, 살짝만 웃어도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과 역삼각형으로 크게 벌어지는 입술은 그녀를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남편은 자신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자랑처럼 가끔 했다. 연인의 인내심과 이해심이 큰 까닭에 오랜 세월 다툼 없이 지낼 수 있었고, 둘이 서두르지 않고 우유부단한 면이 닮았기에 오랫동안 결혼을 미룬 채로 연인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주아도 금세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주아는 오랜만에 익숙하고도 나쁜 감정에 휩싸였다. 주아는 그녀의 초승달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를, 그 입술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오기를, 그녀의 평온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 감정을 빨리 흘려버렸어야 했는데 주아는 그러지 못하고 정말 그녀에게서 안정과 평온을 빼앗아버렸다.
주아는 이런 감정이 명백하게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애써 외면해왔다. 전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것들은 없었던 감정으로 치부했고, 후자처럼 행동해버린 것은 다른 감정으로 치환해버렸다. 주아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려 한 것은 자신이 엄마를 닮아 빼앗기기보다 빼앗기가 낫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지게 된 건가 싶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서 분리하면 자신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으므로 가끔 고개를 드는 그런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재빨리 지워버리곤 했다. 주아는 자신의 나쁜 면이 엄마를 꼭 닮아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오해였다. 엄마는 그런 이상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소유욕 때문에 빼앗는 사람이었다. 주아가 닮은 건 엄마가 아니라 사실 경미 이모였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