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걷다가 전봇대에 걸려 있는 거울과 마주친다. 세로로 긴 타원형의 거울 한가운데 헝겊으로 만들어진 듯한 인형 이미지가 프린트되어 있는데, 빛이 다 바래 온통 푸른색뿐이다. 거울은 바람이 불 때마다 전봇대에 기대어진 채 양옆으로 흔들린다. 너는 날이 갑작스럽게 쌀쌀해졌다는 걸 깨닫는다. 걸치고 나온 자켓을 움키듯 끌어안으며, 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무심코 본다. 너의 모습 위로 인형은 웃고 있다. 아까도 웃고 있었던가, 저 인형이? 너는 거울에 비친 너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지는 걸 본다. 역시 거울 같은 건 없는 편이 낫다. 그때 너의 등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반사되어 보인다. 네가 몸을 돌리자 그의 존재가 너의 눈에 담긴다. 그는 꼿꼿한 허리를 가진 노인이다. 베스트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한 손으로 두꺼운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백발의 남자. 그가 너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꼭 이리 오라고 하는 것 같다. 네가 그쪽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옮기자 남자는 웃는다. 마치 너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헬로, 아임 게이브.
네가 앞에 서자 그는 손을 들어올리며, 누가 들어도 짧은 영어로 말한다. 너는 손을 내저으며 일본어로 말한다.
일본어로 말씀하세요. 조금은 할 줄 알아요.
그러나 그는 반복한다.
아임 게이브, 앤 유?
너는 잠깐 망설이다가 생각나는 아무 이름을 말한다.
아임 수잔.
그 순간 너는 수잔이 된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잠시 들어왔다가 가.
그렇게 말한 게이브가 등 뒤에 있던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가게 안에 고여 있던 공기가 너의 몸으로 쏟아진다. 게이브는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너는 약간 망설이며 뒤따른다. 그곳에는 커다란 맥주잔 모형이랄지 슬롯머신이나 당구대 따위가 있고, 그 위로는 저마다 다른 두께의 먼지가 소복이 앉아 있다. 여긴 가게다. 뭐 하는 가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이브는 안쪽에 마련된 낡은 소파에 앉아 파이프를 뒤적이고, 너는 찬찬히 걸음을 옮긴다. 너는 모형 카우보이가 달린 게임기와 나무로 만든 포도 조각이 주렁주렁 달린 조명 앞에 놓인 라탄 의자에 앉는다.
여기, 중고품 가게인가요?
게이브는 파이프를 빠는 데에 열중하느라 대답하지 않고, 너는 게이브가 무슨 생각으로 너를 불러들였는지 잘 모르겠다. 게이브는 한 모금을 빨아 희뿌연 연기를 뱉어내고 이번엔 일본어로 답한다.
맞아, 빈티지 가게지.
멋지네요.
게이브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의 희고 짧은 수염들이 그의 미소와 함께 들썩이며 춤추듯 움직인다. 게이브는 다시 파이프를 한 모금 빤다. 너는 파이프를 해본 적은 없지만 게이브가 들이마시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담배 생각이 난다.
맛있나요?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가지고 있어?
너는 고개를 끄덕이고, 게이브는 너를 향해 손바닥을 가볍게 들어 보인다. 너는 사양하지 않고 가방을 뒤적여 담배를 찾는다. 네가 주머니 안쪽 깊숙한 곳으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 네 무릎에 있던 가방이 엎어지고, 너의 가방에서 칼이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낸다. 너는 깜짝 놀라 순간 몸을 뒤로 무른다. 칼은 바닥에 널브러지고, 단번에 좁은 공간이 불길한 기운으로 차오른다.
안 돼!
게이브가 그렇게 외쳐 너는 더 놀란다. 게이브는 허리를 숙이고, 번뜩이며 빛나는 칼 옆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휘젓는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칼이 아닌 무언가를. 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사이 게이브는 몸을 세워 너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댄다. 둥글게 모은 손을, 너의 입가에. 뭐지? 네가 눈을 깜빡이자 게이브가 말한다.
마셔.
마셔요? 뭘요?
마시라니까. 마시는 척을 해.
그러면서 게이브는 입술을 모아 뭔가를 마시는 듯한 소리를 내 보인다. 홉, 호롭. 게이브의 입술 사이로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아니, 공기라고 부를 수는 없는 무언가가. 너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흉내낸다. 너의 입속으로도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홉, 호롭. 그러자 게이브가 손을 거둔다.
잘했어. 이제 괜찮아. 수잔.
게이브는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은 뒤, 허리를 숙여 너의 칼을 줍는다. 게이브는 칼자루를 쥔 채 바라본다.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너는 얼떨떨하게 묻는다. 게이브는 아주 조심스럽게, 너에게 건네며 말한다.
안전하다는 뜻이야. 수잔의 그것 말이지.
네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자 게이브는 너의 한가운데, 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을 가리키며 말한다.
몰라? 영혼. 유어 소울.
너는 칼을 받아 무릎 위에 내려놓는다. 얇은 옷자락을 통해 칼의 낮은 온도가 느껴진다. 너는 담배를 겨우 꺼내 불을 붙이고, 게이브는 다리를 꼬아 앉는다.
어떤 사람은 아홉 개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 그건 말이지, 놀라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거야.
게이브는 손끝을 모으더니 허공을 꼬집는 시늉을 한다. 게이브가 손끝을 달싹인다.
다시 주워 삼키지 않으면 바보가 돼버려.
게이브는 웃으며 이어나간다. 이 땅에서는 영혼을 마부이라 부른다고. 입으로 마부이가 빠져나올 때면 누군가 주워주어야 한다고.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방금 너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던, 그러나 이제는 게이브가 주워준, 다시 들이마신 그것에 대해. 너와 게이브는 동시에 연기를 빨아 들이켜고, 그런 뒤, 후우. 너와 게이브의 숨이 좁은 가게 안을 퍼져나간다. 너는 게이브를 바라본다. 게이브의 눈동자는 푸른색도 검은색도 아닌,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바다의 색깔이다. 게이브에게는 몇 개의 영혼이 있을까. 장난하듯 말한다.
게이브 씨는 영혼을 볼 수 있어요?
게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럼, 난 볼 수 있어.
너는 오호, 하고 웃는다.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말하다니. 게이브의 표정은 제법 진지하다.
나는 수많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걸 본 적도 있어.
게이브는 말한다. 절벽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죽은 일이 있었다고. 많은 사람이 바다를 향해 스스로의 몸을 집어던지던 때가 있었다고. 게이브는 그것을 말하면서 몸을 실제로 들썩인다. 앉은 의자가 삐걱거릴 정도로. 스스로의 몸을 내동댕이칠 것처럼. 그러다 게이브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그러니까, 팔십 년 전이로군. 게이브는 네가 못 알아들을까봐 손가락으로 숫자를 그려 보인다. 게이브는 느리게 말한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아주 많이 죽었다고.
한낮의 오후였지. 아주 맑은 날이었어.
게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파이프를 입에 문다. 그런 뒤 손을 펼친다. 게이브의 양손은 무릎에서부터 춤을 추듯 느리게 느리게, 마치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위로 위로, 오른다.
수십 개의 영혼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돌아가는 거야.
손은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간다. 춤추듯 흔들리는 손가락 끝. 춤추듯 흔들리는 영혼들. 돌아가는 영혼들. 그 이야기를 듣던 너는 어느 순간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체온으로 따뜻해진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너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는다. 눈꺼풀 아래에서도 게이브의 손끝은 여전히 흔들리며 움직인다. 너는 담배를 다 태우고 칼을 다시 가방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게이브는 잠깐 작은 책상 서랍을 뒤적이더니, 너에게 작은 종이를 내민다. 투명한 종이에 푸른 글씨로 인쇄되어 있는 GABE.
일본식 이름이 아니네요.
응. 나는 하프니까. 아메라시안이야.
게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는 내지인이 아닌 것이다.
너는 가게의 문을 열고 나온다. 그런 뒤 몇 걸음 못 가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국제거리를 마주하고 평행하게 흐르는 강물의 소리. 강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는 걸 너는 깨닫는다. 너는 곧 알던 길로 접어든다. 너는 종아리가 바짝 땅겨오는 걸 느끼지만 구두를 말리지 않는다.
무거운 잠으로부터 깨어난다. 한시 십이분. 너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잠들었다. 칙칙한 조명 아래서 몸을 일으킨 뒤 페트병에 담긴 물을 들이켠다. 연인에게서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다. 걱정했겠지. 그러나 너는 전화하지 않는다. 너 대신 잠이 연인의 걱정과 불안을 잠재워주기를 기대한다. 문득 허기가 느껴진다. 너는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술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너는 뭐라도 사 오기로 한다.
걷는다. 이곳에 와서 밤에 움직이는 건 처음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새삼 놀란다. 너는 너와 연인이 함께 지내는 집에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밤에는 한 시간에 한 차례씩 깬 적도 많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연인이 누운 침대로부터 빠져나와 밤에 산책하던 날이 많았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너는 걷는다. 허기를 품은 채로 걷는 일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다. 너는 편의점 몇 개를 지나친다. 꺼진 간판과 닫힌 문들이 늘어진 국제거리를 지나쳐 골목에서 꺾자 강이 나타난다. 강물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물결이 흐르는 대로 반짝인다. 그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강을 따라 걷는다. 길을 밝히는 것은 가로등과 그 곁에 놓인 자판기뿐이다. 너는 멜론 주스를 뽑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걷는다. 불어오는 바람이 너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이전에도 바람을 맞으면서 피우는 담배를 좋아했는데. 한동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너는 한 개비를 전부 빨아 들이마신 뒤 다음 개비를 꺼낸다. 자꾸만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영영 걸을 수도 있을 것처럼.
그러다 어느 순간에 다다라, 소리가 온다. 소리가 너에게 온다. 소리가 가장 먼저 온다는 걸 너는 그제야 깨닫는다. 옅지만 확실하게 들려오는 것. 멀리까지 밀려났다가 다시 다가오고, 다시 밀려나다 다가오는 소리. 인식한 다음 순간 바람에 실려 풍기는 짭짤한 기운을 느낀다. 바다가 너의 몸 근처에 있다.
너는 작고 좁은 바다에 다다른다. 바닷가에는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들이 있다.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들 네댓 명이 연을 날리고 있다. 검은 하늘 위로 빨간색 연들이 날아다닌다. 너는 그 연을 계속 바라보면서, 천천히 바다 쪽을 향해 걸어간다. 바다 앞에 다다랐을 때, 너는 고개를 숙인 채로 너의 운동화를 스칠 듯 밀려들어오고 밀려나가는 바닷물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운동화의 앞코가 살짝 젖는다. 운동화가 간지러워한다. 너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본다. 문득 너는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에 놀라 돌아본다. 그리고 너는 하늘을 찢을 듯 단숨에 날아가는 불덩어리를 본다. 그건 폭죽이다. 그때 너의 딸꾹질이 시작된다. 너는 몸통을 단단히 조여 빨리 멈춰보려고 하지만 딸꾹질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너는 너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그것을 의식한다. 그것. 네가 뱉어내는 순간 넘실넘실 바다 너머로 사라져버릴. 너는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고,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저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너는 모른다. 너는 검은 바다의 짠 기운과 소리를, 공기를 온몸 가득 흡수시키며, 아직 세상에 네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생각을, 아주 새삼스럽게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옆방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멈춘다. 너는 여자를 본다. 혼비백산이 된 채 엉망으로 울고 있는 여자의 흰 얼굴을. 당황한 너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서 있다. 여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여자는 해명하듯 말한다.
내 사랑이 죽었어요. 방금 죽었어요. 사고를 당했어요.
여자는 울며 너에게 말한다. 말할 기회를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한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 것만 같지만, 그 순간 무언가에 목덜미를 붙잡힌 사람처럼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자는 자신의 짐을 이끌고, 거대한 울음을 이끌고 간다. 여자의 희었을 살갗은 얼룩덜룩 붉어져 있다. 누군가가 멋대로 주무른 것처럼.
여자가 떠나고, 너는 복도에 남겨진다. 여자가 쓰던 방의 문은 열려 있다. 너는 그 방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를 참을 수 없다.
너는 들어간다. 네가 묵는 방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되는 구조를 지닌 방으로. 여자가 두고 간 방에서 너는 정리되지 않은 베드를 본다. 핏자국이 물든 이불을 본다. 한입 베어문 흔적이 있는 샌드위치와, 카펫 위로 엎질러진 요거트와, 투명한 유리잔, 잔에 남은 약간의 물, 그리고 여자의 둥근 입술 자국을 본다. 너는 입술 자국 위에 입술을 겹친 채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가볍게. 너는 본다. 한 짝 남은 회색 장갑을, 바닥에 널부러진 빨간색 팬티를. 너는 왼손에 한 마디 정도 크게 늘어난 회색 장갑 한 짝을 낀다. 여자의 손과 너의 손이 겹쳐진다. 너는 오른손으로 여자의 팬티를 들어 자세히 바라본다. 너는 그것이 너의 몸에 맞을지 생각하며 사이즈를 가늠한다. 그러던 너는 마침내 흰 수건 더미 위에 남겨진 그것을 마주한다. 그것. 그것은 여자가 두고 간 것이다. 여자가 두고 간 수많은 것 중 하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두고 가면 안 되었던. 여자는 어쩌면 조만간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너는 손을 모아 투명한 그것을 손바닥 위로 올린다. 오목해진 손바닥으로 그것을 숨기듯 꼭 쥔다. 겨울날 내린 눈을 꼭꼭 모아 움키듯. 주먹밥을 동글게 빚어내듯. 그것은 너의 손바닥 안에 담겨 있고 가만하며 아직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다. 너는 모은 손을 펼쳐 그것을 다시 본다. 그것이 눈을 뜨고 너를 올려다본다. 너는 그것을 한쪽 손끝으로 조심히 잡아 올린 후 입을 벌리고 입안 깊숙한 곳으로 그것을 떨어트린다. 너는 그것을 꿀꺽 삼킨다. 너에게로 들어간 그것이 너의 쇄골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너는 침을 삼킨다. 그런 뒤 너는 방을 향하여 산뜻하고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제 여자의 방을 빠져나올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