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긴 휴가 (2)

잘 자라는 인사로 통화를 종료한 후에도 너는 곧장 잠들지 않는다. 유칼립투스 배스솔트를 푼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너는 연인이 가진 장점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연인은 차분하고 담백한 사람이다. 연인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너에게 다정하다. 그는 너를 안정적으로 사랑하고, 적어도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지는, 지금의 너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잘못됐다고. 너는 지루해도 너무 지루하고, 이 지루함은 시련이나 슬픔보다 더 크고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향긋한 목욕물은 어느새 미지근해진다.

욕실에서 벗어난 너는 침대 위에 올려진 식도 상자를 바라보다가, 포장을 벗겨낸다. 식도는 등이 둥글고 날 면은 얇다. 너는 돌고래를 떠올린다. 돌고래처럼 매끈하고 아름다운 식도. 너는 촉촉하게 젖은 손끝으로 칼자루를 쥔다. 칼을 천천히 돌려본다. 단면에 히비스커스의 붉은빛이 드리웠다가 금세 사라진다. 너는 곧 식도를 허공에 겨눈다. 허공을 긋는다. 허공을 찌른다. 너는 이번엔 날이 아래로 가게 바꿔 잡는다. 너는 침대나 소파 따위를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시늉을 한다. 칼은 생각보다 묵직하고, 무언가 정말로 찌르려면 온몸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허리를 굽혀 내리찍듯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무언가를 정말로 난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복도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밖이 소란하다. 전날 밤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다. 너는 식도를 쥔 채 문을 향해 다가간다. 너는 잠깐 생각한다. 칼을 든 채로 문을 열면 여자는 놀랄까. 놀라서 자빠져버릴까. 그러면 너는 그 칼을 휘두를까. 그때 순간 너의 마음이 칼에 대한 알 수 없는 애착으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마음이 욱신 아파올 정도다. 너는 식도를 꼭 쥔다. 복도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웃음소리가 위태롭게 고음으로 치닫는다. 너는 가방에 식도를 넣는다. 식도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듯이 쏙 들어간다. 식도는 가방의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번뜩이는 짐승의 눈처럼 빛난다. 너는 식도를 의식하면서 문을 노려본다. 문 바깥에 서 있는, 아마도 벽에 머리를 기댄 상태일 여자를 노려본다. 너는 서둘러 침대 곁에 던져놓았던 귀마개를 집어든다.

 

새벽녘부터 두 시간에 한 번씩 연달아 깨어났지만 너는 계속 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너의 지루함은 압도적으로 무겁고 네가 잠들어 있다고 해서 어디 가지 않으니까. 네가 정말로 일어난 건 오전 아홉시. 연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직 안 일어났구나?

연인은 상쾌한 목소리다. 날 치워버리고 그렇게 맑은 목소리를 내다니. 너는 연인이 괘씸하다. 곁에 있었다면 깨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토요일이다. 애인의 휴일.

오늘은 바다를 보러 가는 거 어때?

갑자기 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일 거야. 내가 검색해봤는걸.

너의 연인은 곧 메신저로 호텔에서 가깝다는 바다의 좌표를 보내온다. 절벽이 해안을 감싼 형태다. 너는 기지개를 펴며 건성으로 대꾸한다.

응, 그래.

이십 분 정도 걸으면 나온대.

너는 심드렁하다.

생각해볼게.

생각만 해보지 말고. 좋잖아, 바다?

바다에 대해서라면 너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바다는 커다란 물일뿐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어쨌든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잠이 달아나긴 한다. 다정하고 무른, 무엇도 벨 수 없을 것 같은 연인의 목소리. 네가 가끔 연인을 날카롭게 겨눌 때에도 연인은 춤추는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너는 단어로 만들어진 칼자루를 움켰다가도 자주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커튼을 걷자 맞은편 건물 벽면의 회색빛이 시야를 채운다.

 

너는 마스크팩을 붙인 채로 침대에 엎어져 눕는다. 침대는 푹신하지 않지만 너의 허리를 그럭저럭 받쳐준다. 그냥 이대로 호텔에 머무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계속 반수면상태에 취해 있다가, 잠이 더 이상 오지 않으면 편의점 음식과 술을 끝없이 들이켤 수도 있을 것이다. 호텔은 그러라고 있는 곳이니까. 그러나 너는 이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햇빛 한 자락 들지 않고, 눈을 아프게 하는 흰색의 형광등 조명이 쏟아지는 방. 게다가 가로로 길쭉한 거울이 여전히 너의 머리맡을 둘러싼 채로 있다. 거울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너를 거슬리게 한다. 너는 너의 방에 거울을 초대한 적이 없다. 형광등도, 창밖의 맞은편 건물도 마찬가지다. 방의 초라함이 너의 권태를 배가시킨다. 너는 짜증스럽게 팩을 떼어내 벽면으로 집어던진다. 축축한 팩 쪼가리는 벽에 붙었다가 축 흘러내리고, 너는 한숨을 쉬곤 그걸 주우러 일어난다.

그나저나 너의 연인은 왜 이렇게 들뜬 걸까. 너는 연인이 오늘 뭘 했는지, 뭘 할 예정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런 것은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연인이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뭘 먹고 뭘 보고 뭘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너는 피부에 선크림을 바르며 오늘 입을 원피스를 고른다. 크림색 천 위로 팬지들이 프린트되어 있는 여름 원피스는 네가 아끼는 옷 중 하나다. 그 위로는 도톰한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스타킹과 프릴이 달린 검은 양말도 잊지 않는다. 너는 마지막으로 앞코가 사각형처럼 보이는 고동색 구두를 신는다. 너는 신경 써서 입는다. 너를 더욱 너답게 보이게 하니까. 구두가 너의 발등을 조심스럽게 짓누른다. 확인하듯이.

 

너는 국제거리를 빠져나온 뒤에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너는 오늘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가려고 하지만, 네가 신은 구두가 너의 길을 막는다. 구두는 네가 가고 싶은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어하고, 구두들의 습성이 으레 그렇듯,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이런저런 곳으로 당당하게 이끈다. 너는 끌려가듯이 걷는다. 괜히 구두를 챙겨왔다는 생각을 하고, 당장에라도 칼을 꺼내들어 협박하고 싶지만 구두가 칼을 두려워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럼 너의 칼은 어떤 쓸모가 있나. 구두는 고집이 세고 아름다운 형태를 가졌으며 고운 소리를 낸다.

너는 하는 수 없이 구글 맵을 켠다. 잠깐 구두를 신은 오른발을 왼발 뒤꿈치로 막아 세운 뒤 자리에 멈추어 선다. 적당한 카페를 찾아내려고 한다. 시장에 가까우면서도 너무 바쁘지 않고 또 소란하지도 않을 만한 카페. 작은 규모에 손님이 하나도 없고, 가게 주인이 졸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너는 가까스로 너의 위치에서 그런대로 가까이에 있는 킷사텐 하나를 찾아낸다. 이름이 돌고래인 킷사텐을.

 

킷사텐으로 향하는 길은 어지럽다. 시장에 난 골목골목을 돌아가야 한다. 너는 고래 이빨 기념품 상점과 산호 기념품 상점을 지나친다. 조금 더 외진 골목으로 들어간다. 너는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는 빈티지 숍과 타코라이스 노점, 포타마* 노점과 그 앞에 서서 밥을 먹는 여행객 무리, 민예품 상점을 지나친다. 너는 너무 많은 것으로 인해 어지러움을 느끼고, 이건 너의 템포가 아닌데, 너의 구두는 계속해서 걷고 있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히 난다. 그러나 편의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에 너는 절망한다. 그러다 너는 간판과 마주친다. 담배タバコ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간판. 너는 구두를 있는 힘껏 당겨와 가게 앞에 선다. 가게는 아주 작고, 얼굴이 갈색빛으로 그을린 큰 몸집의 아저씨가 그 안에 꽉 들어차 있다.

* 김과 밥, 스팸류의 햄 통조림, 달걀부침을 넣어 샌드위치의 형태로 만든 오키나와 음식.

 

하나 주세요. 하이라이트 초록색.

그게……?

네?

그게…… 몇 번?

아저씨는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안쪽을 향해 연기를 내뱉은 뒤에, 궁금하다는 얼굴로 느릿하게 돌아 너를 보고 묻는다. 그의 손에는 오리온 작은 캔이 들려 있다. 아차, 번호. 아저씨와 너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담배에 맞는 번호를 찾아 불러야 하지만 이 담배 가게에는 담배가 많아도 너무 많다. 너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너는 한참의 씨름 끝에 번호를 찾아낸다. 하이라이트 초록색의 번호는 332. 아저씨는 332번 담배를 꺼내 준다.

하나? 그걸로 되겠어?

아저씨는 손을 덜덜 떨면서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너는 인상을 쓰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보인다. 너는 그가 내민 담뱃갑 두 개를 낚아채듯 받아든다. 하이라이트 팩을 감싼 비닐을 벗겨내자 매운 멘톨 향이 올라온다. 그가 육각형의 성냥갑에서 꺼낸 성냥으로 불을 대준다. 너는 한 모금 빨면서 구두코를 가판대로 가져가 툭 찬다. 구두가 발을 조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정하라고 윽박지르듯 중얼대며 숨을 뱉어낸다. 그때 그의 입꼬리가 싱긋 올라간다.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 어디서 왔어?

한국이요.

아아, 한국?

너의 불퉁한 대답에 아저씨는 빙글빙글 웃으며 답한다. 한국이면 서울? 아니면 다른 곳? 요즘 고생이 많네. 그는 웃으며 이어간다.

한국에도 오키나와 같은 섬이 있지?

글쎄, 제주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그는 웃으며 너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보기 좋은 밀크초콜릿 빛깔의 피부나 부리부리한 눈매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보통의 일본인과는 다르게 생겼다. 너는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다.

왜. 좀 신기하게 생겼나?

너는 잠깐 움찔한다. 그가 마음을 읽은 걸까? 네가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자 그는 이어간다.

원래 우치난추들은 그래.

우치난추?

오키나와인이라는 뜻이지. 내지인, 그러니까, 본토 사람들이랑은 좀 달라.

내지인이라 부르네. 너는 곱씹으며 구두코를 가판대에 조금 세게 걷어차고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원피스 자락을 정리하곤 고개를 숙인 채 신경질적으로 구글 맵을 켜려고 하는데, 얼마 못 가 스마트폰의 전원이 꺼진다. 순간 그것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싶다. 너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를 보고 묻는다.

돌고래 어디 있어요?

에. 갑자기 웬 돌고래? 추라우미 수족관?

그는 뜬금없다는 듯 되묻는다. 네가 아니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돌고래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입으로, 끽끽대는 소리를 낸다. 너는 네가 들은 소리가 정말 그가 낸 소리가 맞는지를 순간 의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아저씨는 웃는다. 그는 너와 장난하고 싶어한다.

아뇨, 돌고래라는 이름의 킷사텐 말이에요. 이 근처에 있는.

싱겁네.

구두가 잠깐 성화를 부리고, 너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구두코를 바닥에 몇 차례 내리찍는다. 그때 그가 휘파람을 분다. 너는 고개를 든다. 그가 네 어깨 너머를 가리켜 보인다. 너는 몸을 돌려본다. 맞은편 골목으로 접어드는 가게 앞, 돌고래 모양 입간판이 놓여 있다.

 

킷사텐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다. 창가에 붙은 작은 테이블에서는 여자아이가 샌드위치 세트를 먹고 있다. 너는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거운 블렌드 커피를 주문한다. 너는 머리를 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구두를 잠깐이라도 벗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에서 다른 신발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그 신발이 너의 말을 잘 들을까. 너는 한숨을 내쉰 뒤, 갓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네가 바른 립스틱 자국이 찻잔에 둥글게 남는다. 가게 주인은 안쪽 소파 자리에 앉은 채 레터 나이프로 편지봉투를 뜯고 있다. 그때 너는 이곳의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디서 물이 흐르고 있지? 너는 두리번거리다가 곧 가게 입구에 있는 작은 웅덩이를 발견한다.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웅덩이. 너는 잠깐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간다. 평평한 벽면 일부가 안쪽으로 깊고 움푹하게 패여 있고, 그 안에 물이 찰랑찰랑 차 있다. 수위도 제법 되어 발을 넣으면 발목까지 잠길 것 같다. 웅덩이의 가장 안쪽에는 둥글고 작은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물은 그곳에서 둥근 모양으로 규칙적인 퐁퐁퐁 소리를 내며 솟는다. 너는 그 모양을 유심히 지켜본다. 분수 위에는 오래된 흑백사진 세 장이 붙어 있다. 해안가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너는 그 아래 누군가 펜으로 적어놓은 작은 글씨를 읽는다. 이토만, 나의 영원한 고향에서.

그러다가 안쪽에서 너를 바라보는 카페 주인과 눈이 마주친다. 주인은 웃어 보인다. 너도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은 뒤 자리로 돌아온다. 핸드폰은 꺼져 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헤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또 한숨이 나오지만, 바로 다음 순간 너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너에게는 칼이 있으니까. 너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그러나 커피는 너를 깨우지 않고, 생각은 자꾸만 묽어진다. 한 모금 더 들이켰지만 별 소용이 없다.

 

잘 주무셨어요?

네가 엎드린 몸을 뒤척이며 눈꺼풀을 치켜들었을 때, 카페 주인은 옆에 앉은 채 자연스럽게 네게 말을 붙여온다. 너는 멋쩍게 웃어 보인 후 벽면 시계를 확인한다. 두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 있다. 이렇게 단잠을 자다니. 온몸은 잠으로 느슨하게 이완된 상태고, 기분은 나아졌다. 주인은 흐릿한 웃음을 짓는다. 꼭 유령 같다.

커피값을 치른 후 나온 너는 담배를 한 대 피운다. 해는 기울어 있다. 너는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호텔은 어디에 있을까. 너는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어디로 가야 좋을지 알기가 어렵다. 너는 일단 걸어보기로 한다. 성질이 조금 가라앉은 구두와 함께. 시장을 벗어나 골목 사이로 들어서자 처음 보는 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