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여기 상점들 이름이 참 야성적인 데가 있네

여기 상점들 이름이 참 야성적인 데가 있네.”

동네가 좀 그렇죠?”

철제 계단을 뒤따라 오른 해란씨가 답했다. 테이블에는 붉은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주석 잔에 하이볼이 담겨 나왔다. 나는 해란씨에게 구권을 보여주었다. 역시 처음 보는 물건이라고 했다.

이런 귀한 물건은 집에 두고 다니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해란씨에게 그건 돈이라기보다는 당근에서 거래하는 앤티크 소품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는 항상 앞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왜요?”

복수하려고요.”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만원으로 복수를 하겠다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말 무모한 싸움 아닌가. 하이볼 잔 속 얼음을 흔드는 조중균씨 얼굴에는 단번에 읽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분노를 곱씹는 듯도 하고 오랜 회한에 갇혀 있는 듯도 한 표정. 그러다 술이 들어가자 얼굴에 홍조가 번지면서 미묘한 체념과 평온이 돌았다. 치즈나 마시멜로를 양쪽으로 당기면 늘어나고 늘어나다가 축 끊어지는 것처럼. 조중균씨 뒤로 드리워진 페르시아풍 커튼, 사프란을 뿌린 과일 안주, 어두컴컴한 가게를 밝히는 샹들리에와 테이블 램프가 어우러져 분위기는 뭔가 긴긴 고백이 나올 것처럼 으슥했다.

 

대학에 입학하며 상경한 조중균씨에게 1980년대 서울은 무용(無用)의 도시였다. 필요 없음, 소용없음. 기숙사에 짐을 풀고 몇 번 수업을 나가자마자 조중균씨는 폐결핵에 걸렸다. 너무 아파 불주사라고 불리는 비시지(BCG)까지 두 차례 예방접종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서울에서 그건 무용했다. 과 수석으로 입학한 덕분에 면제받은 한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 입소 기회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이 비활동성 폐결핵, 결핵균마저 무용한 상태임이 밝혀졌는데도 조중균씨는 휴학과 기숙사 퇴소를 권유받았다. 말이 권유이지 통지에 가까웠다. 이대로 속초로 돌아간다면 어머니의 한숨은 수북한 명태 양만큼이나 쌓일 것이었다. 조중균씨는 어떻게 해서든 서울에 남기로 했으나 지낼 곳을 찾는 일은 물론 여의치 않았다. 그때 형수라는 동기가 손을 내밀었다. 둘은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My Funny Valentine)>이 흘러나오는 녹두다방에서 처음으로 마주앉았다. 평소에는 인사 정도나 하던 사이였다.

그래, 갈 곳이 없다고?”

형수가 입술에 담배를 살짝 문 채로 물었다. 모두가 새로 출시된 에 열광하는 마당에 형수는 특이하게도 길고 가느다란 장미를 피우고 있었다. 스무 살의 조중균씨는 따뜻한 인삼차로 목을 적시며 찾고 있어라고 답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거리며 기침이 나올 성싶으면 얼른 차를 마셨다.

폐결핵이라 들여주는 집이 없을 텐데……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지금은 여인숙에서 지내고 있지만 기침이 오래가자 사장도 감기가 낫지를 않네?” 하고 아침마다 의아한 눈길을 주기 시작했으니까.

비활동성이라 옮는 그런 거는 크퀙퀙퀙퀙퀙……

조중균씨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을 하자 다방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형수는 얼굴을 외로 빼고 담배 연기를 후뱉었다. 바로 저 연기 때문에 기침이 더 나는지 모른다 생각하고도 조중균씨는 담배 좀 꺼달라는 말을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나는 요즘 알베르또 모라비아를 읽어.”

앞에서 기침을 하든 말든 형수는 자기 얘기만 계속했다. 다방 종업원이 와서 따뜻한 물 좀 더 드려요? 하고 물었다.

겐찮아요.”

알베르또 모라비아도 결핵을 앓았거든.”

그 말에 눈이 동그래진 종업원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조중균씨는 이제 그만 형수가 닥쳤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나는 그런 거 아니야하고 항변했다. 하지만 형수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결핵과 파시즘이다. 둘 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라비아의 말이지.”

형수는 그 이탈리아 작가가 아홉 살 때 결핵에 걸려 요양원을 전전하며 정규교육도 마치지 못했지만 병상에서 방대한 서적을 섭렵한 덕분에 뛰어난 작가가 되었다는 얘기를 한참 늘어놓고 나서야 조중균씨가 기다리던 말을 들려주었다. 요는 암자에서 지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아는 선배가 들어가 있는데 주지 스님이 인자하고 삼시 세끼 건강한 밥이 제공되며 무엇보다 서울 안이라 오가기 편하다고 설명했다.

시골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깡시골로 돌아가긴 그렇잖아.”

지방이라는 이유로 속초를 깡시골로 치부하다니. 조금만 도심을 벗어나도 여전히 닭치고 과수 농사 짓는 서울은 그럼 뭐가 그리 잘났나 싶었지만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었다. 매일 밤 술 취한 투숙객이 세상을 저주하고 어느 방에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들리며 노름판이 밤새도록 계속되는 여인숙보다는 나을 테니까. 조중균씨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옷깃을 꼭 여미며 다방을 나왔다. 형수는 서클 모임이 있다며 학교로 향했다.

꼭 읽고 있는 책 때문이 아니라 겉으로만 보면 결핵을 앓는 사람은 조중균씨가 아니라 형수였다. 작고 깡마른 체격에 얼굴이 구름처럼 하얬다. 서울 사람은 소독약 물을 마셔서 피부가 허옇다던데, 그런 풍문이 꽤 설득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형수는 옥스퍼드셔츠에 체크무늬 나팔바지를 즐겨 입었고, 그건 무채색 계열의 옷차림이 주를 이루던 80년대 중반의 캠퍼스에서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형수는 그런 차림으로 시위를 나갔다.

여인숙으로 돌아와 짐을 싸다가 조중균씨는 문득 믿을 수 있나?’ 하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형수는 언더였다. 언더 서클의 멤버로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었다. 믿을 수 있나? 조중균씨는 솔도 장미도 아닌 거북선 담배를 꺼내 자기도 모르게 불을 붙이며 고민했다. 일단 친절하게 밥과 술을 사주며 조직 재생산에 힘쓰는 그런 접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북선의 독한 연기는 얼마 못 가 조중균씨에게 자지러질 듯한 기침을 안겨주었다.

뒤질라면 빨리 뒤져…… 나 사는 것도 심난해 죽겠는데 댁 죽어가는 소리까지 들어야겠냐구…… 씨팔……

어느 방에서 나는 거친 항의를 들으며 조중균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침을 겨우 잠재웠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싸면서 창 너머로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는 선술집 간판을 바라다보았다. 그 붉고 새파란 네온사인은 근처 꽃나무들을 폭력적일 정도로 싸구려 가짜처럼 만들고 있었다. 믿을 수 있나? 하나 대안도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명태살이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면.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형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짐을 다 싸고 밀린 숙박료까지 지불했던 조중균씨는 여인숙 사장에게 사정사정해 며칠을 더 버텼다. 사장은 들어올 사람이 정해졌다며 난색을 표하다가 울상을 짓는 조중균씨를 보고는 창고로 쓰던 방을 내주었다. 5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방은 추웠다. 휴대폰 따위가 있을 리 없는 그 시대에 연락할 방법은 학과 게시판이나 학생회실, 서점, 다방 등에 메모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조중균씨는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 그곳들을 죽 돌며 연락 바람-조중균이라고 적었다. 시위가 없는 날이었는데도 하늘은 흐리고, 페퍼 포그라도 터진 것처럼 대기에는 매운 기가 있었다.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정작 어디로 연락하라고 적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중균씨는 연락 바람-조중균(제비여인숙 085-2333)’이라고 고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러자 학생이 여인숙에 살고 있다고 하면 교수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들었다. 잠시나마 속초 천재로 불렸던 장학생과 제비여인숙은, 반민중, 반민족, 파쇼 정권을 타도하는 대자보 옆이라도 공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또다시 순례를 시작했다.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더더욱 쇠해진 몸을 이끌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인문대 야외 게시판 앞에서 조중균이라는 이름을 볼펜으로 지우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