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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너’ ‘고대휘’, 혹은 ‘휘’라고 부르고 가끔은 ‘아흐, 인간아!’ 하고 소리쳐 불러 세우기도 한다. 우리가 처음 통성명한 초겨울의 음악회 날로부터 여섯 달이 지나, 가끔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봄이다. 우리는 고대휘의 친누나 고민진의 집에 들어와 산다. 고민진과 고민진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함이삭과 함께 넷이서 두 달째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고 있다. 집은 오래된 주택가 외진 골목 끝에 자리잡은 독채로, 옆집에 각각 노부부와 주말부부가 거주해 주변이 대체로 조용하다. 오후 한시에서 세시 사이에 치즈 태비 길고양이가 담장 위에 앉아 해를 쐬다 가는 넓고 낡은 집. 밖에서 보면 새파란 페인트칠을 한 철문 틈새로 장미나무 몇 그루가 설핏설핏 보이는 집. 고민진이 잘 수리해서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내놓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있으나 실은 지난 육 년간 부동산중개업소에 내놓은 적이 없는, 갈수록 고칠 곳이 속속 더 드러나는 집. 나는 이곳에서 예전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던 높은 톤의 목소리로 가볍고 빠르게 말한다. “마트에서 사 구짜리 멀티탭 사오는 거 잊어버리지 마.” “삼거리 오션빌딩에서 상수도관 교체 공사했대. 첫물은 꼭 이 분간 흘려보내.” “장미나무 이파리에 금색 애벌레가 있어. 와서 봐, 정말로 금색이야!” 고대휘와 나는 이 집에 든 이래 어쩌면 ‘이 가정에 없는 것 하나씩 채워넣기’라는 과제를 암묵적으로 수행하는 중이다. 이를테면 종종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른다. 우선 내가 용량이 큰 전기주전자와 유기농 차 세트를 사들인다. 넷이서 저녁마다 목련차나 구기자차를 우려내 나누어 마시기 시작한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고대휘가 저녁 티타임에 우리가 둘러앉게끔 되는 거실 소파를 좀 보기 좋게 만들어보겠다고 나선다. 오래된 얼룩을 말끔히 제거하고 난 뒤에 오염 물질이 잘 스미지 않는 기능성 베이지색 극세사 천을 사다가 그 위에 깔아둔다. 잔잔한 갈색 체크무늬가 있는 실내용 슬리퍼 네 켤레를 마련하고, 칸막이가 삭아 약간 부스러져내린 나무 신발장도 새것으로 교체한다. 오, 한결 말끔해졌네!, 하고 서로 뿌듯한 미소를 나눌 때쯤엔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연식이 오래된 냉장고가 딱딱딱, 달그락 딱, 하는 비정상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무거운 구형 청소기도 배터리 수명이 다 되어 갑자기 전원 버튼의 불빛이 완전히 나가버린다. 고대휘와 나는 가전 매장 두 군데에서 받아온 카탈로그를 방바닥에 펼쳐놓고서 기본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이 깔끔해 보이는 제품 서너 개를 골라 짧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중 두 개의 모델명 위에 분홍색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친다.
나는 부수고 버리고 닦아내고 새로 채워넣는 일들이 성가시지 않다.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고대휘는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남자여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곧잘 들려줄 줄도 안다. 그러면서도 이런 안정감과 활력이 다른 것으로, 이를테면 상한 우유나 젖은 골판지 같은 것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감상에 젖는다고, 울고 싶어진다고도 말한다. 그는 울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제로 잘 울지는 않는다.
어느 밤에는 그의 잠꼬대 소리가 드높아 나도 깨고 그도 깨어난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잠이 달아나버렸기에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고대휘가 낮부터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던 말이라면서 그걸 끄집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내 생각엔, 자기랑 나랑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맞아?”
그가 캄캄한 천장을 향해 정자세로 반듯하게 누워 내 대답을 기다린다.
“나 원 참.”
내가 웃으니 그도 조금은 따라 웃지만, 다시 “자기 생각은?” 하고 묻는다.
“내 생각도 그래.”
“좀더 이야기해줘봐.”
“너는 귀여워. 귀여운 사람이야. 너랑 있을 때 불편했던 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그는 자기는 늠름한 남자라 전혀 귀엽지가 않다고, 내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그때부터 자기의 거친 진면목이 드러날 거라고 장담한다. 자기의 귀여웠던 시절이 오래전에 있기는 했지만 그게 너무 한참 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으라는 듯이 어릴 적 이야기 한 도막을 꺼내놓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제 딴에는 애정어린 칭찬을 들었다고 생각하여 부응하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나는 아주 작았어. 별명이 밤톨이, 콩알, 죄다 그런 거였으니까 지금처럼 키가 크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 근데 고등학교 첫 여름방학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키가 계속 쑥쑥 크더라고. 어머니의 신장이 컸다는 사실을 나한테 말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누나도 아버지도 아담하니까 나는 나도 그럴 줄로만 알았지. 하여간 내가 이삭이만큼이나 조그마할 때……”
고대휘는 어렸을 적에 동네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필사적으로 도망친 적이 있는데, 하필 도망쳐 간 데가 강가여서 빗물에 불어난 강에 빠져 죽을 뻔했다고 한다.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 이유가 딱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전두엽이 문제였지 않을까 하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고도.
“사춘기 애들이 가끔 미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잖아. 그게 전두엽이 아직 덜 발달해서 그런 거라고 어느 책에선가 봤어. 근데 그때는 나도 전두엽이 완성형이 아니니 모든 게 전적으로 내 문제라는 식으로 미쳐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 나는 이렇게 힘없이 도망치다가 맞아 죽겠구나,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
“하지만 넌 살아서 날 만나지.”
나는 그가 떠올린 불어난 강의 이미지 앞에 되도록 나를 반듯하니 세워두려는 마음에 서둘러 끼어든다. 내가 대화중에 상대의 말을 가로채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그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그렇지” 하고 대꾸하고는 또 사이를 둔다. 그러다 다시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근데 그 전에 묘욱이라는 형을 만나지.”
묘욱은 고대휘가 다니던 초등학교 바로 옆 중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살 소년의 이름이다. 이름처럼 성격도 욱하는 데가 있고, 주먹이 글러브를 낀 것처럼 크고 두툼하며, 눈매가 매섭게 째져 있어서 주먹을 쥔 채로 상대를 째려보기만 해도 상대가 저절로 맥을 못 추게 되어버리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나오는 상남자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과장하긴. 중2가?”
“정말이야. 그랬다니까. 중학교 2학년생 함묘욱이 초등학교 4학년생 나를 구했어. 내가 그때 어땠느냐면, 애들이 발로 차면 힘없이 픽 쓰러지고, 넘어진 자리에서는 누가 뱉은 침을 맞고, 머리칼도 마구 쥐어뜯겨가며 시름시름 앓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욱이 형이 ‘야! 뭐냐?’ 하고 큰소리치며 나타난 거지. 턱턱 걸어와 날 내려다보며 이름이 뭐냐고 묻고 말이야. 내가 바닥에 웅크려 누운 채로 낑낑대면서 ‘고대휘요’, 하니까 형이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려 발끝으로 쓱싹쓱싹 비벼대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러는 거야. ‘얘들아, 고대휘 건드리지 마라. 너희들 다음번에 나한테 또 걸리면 내가 몇 배로 갚아줄 거야. 뭘 상상하든 각오를 아주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걸.’ 형이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그냥 짝다리를 한 번 짚었다 떼면서 그렇게 말한 게 전부인데, 애들이 넋이 나가서 흐물대다 내빼더라. 각오라는 단어를 그때부터 내가 참 좋아해. 자기는?”
“나, 뭐?”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단어 하나로 말해줘봐. 자기는 긴말을 잘 안 하니까 더 조를 수는 없지.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럼 난 고대휘.”
“에이. 구렁이 담 넘어가기냐.”
“귀여운 게 최고지. 귀여우면 끝이야.”
“순진하다는 말 같아. 물정 모른다는.”
“것보다는, 척하는 사람은 아냐. 모르는 거 아는 척하진 않잖아.”
“아. 자기는 그런 게 불편한가.”
“편하지 않지. 뻔한 게 하나 없던데. 세상, 물정, 사람, 다.”
“그야 그렇지. 또 다 변하고.”
“귀여운 게 귀하지.”
“자기는 그렇구나. 그래,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잘 자.”
“너도 잘 자.”
그 밤에 나는 짝다리를 짚고서 각오에 대해서 말하는 열다섯 해의 함묘욱을 조금 그리워해 보기로 작정한다. 고대휘 속의 작은 고대휘 때문이다. 유년의 일화들은 좋든 나쁘든 간에 먼 초원의 역사 같다. 자유롭고 외로운 유목민의 발자취를 지닌. 풀냄새를 맡을 때처럼 싱그러운 감각이 머리맡에, 코끝에, 가슴 언저리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것도 같다. 좋은 냄새가 꿈속까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