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3. 아눅의 명상

계속해서 나는 아눅을 본다. 내가 아눅을 보는 것은 아눅을 명상하는 일이다. 
여름 거주지에서. 밤에 비가 내렸고, 유리창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동이 터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젖은 이파리들과 새의 깃털, 동물의 털과 발자국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천장 유리창을 거의 뒤덮고 있어서 집안이 밤과 마찬가지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창밖에는 늙고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다. 바람 속에서 그들은 거인처럼 술렁인다. 그들은 두 팔을 허공으로 치켜들고 천천히 흔든다. 거기 아눅이 있는 것을 나는 안다. 창을 절반쯤 위로 들어 열고 아눅의 일부 혹은 그의 흔적을 본다. 아눅의 일부 혹은 흔적을 호흡한다. 하루의 첫 호흡은 언제나 반복되는 최초의 호흡이다. 호흡하는 나는 천천히 흔들린다. 화살에 맞은 듯 나는 흔들린다. 지상의 안개 때문에 아눅의 발은 보이지 않는다. 아눅은 고개를 돌렸거나 숙인 자세이다. 아눅은 외면하는 시선이다. 아눅의 머리 위로 화살에 맞은 아침의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다. 회색 안개 까마귀의 깃털 사이로 언듯 아눅의 눈동자를 본 것도 같다. 아눅의 눈동자는 색채가 없다. 혹은 모든 색채를 가졌다. 간혹 아눅은 차가운 불처럼 펄럭인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혹은, 내가 펄럭인다고 생각한 건 단지 새가 떨어뜨려놓고 간 눈동자 모양의 깃털일 뿐이다. 어느 쪽이든, 아눅은 거기 있다. 내가 아눅을―어떤 형태로든―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느낌의 수면 아래에서 느끼고 산다. 아침의 불그스름한 빛이 산 위로 떠오른다. 나는 아눅의 명상을 계속한다.
책상 위에는 달력 겸용 메모지가 놓여 있다. 오늘자 메모지를 열자 단 한 글자, ‘아눅’이라고 적혀 있다. 오늘 아눅에게 가야 한다는 걸까 아니면 아눅이 올 거라는 뜻일까. 언제 그 메모를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진짜 내 필체인지조차 나는 모른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혹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가. 누군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가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농부가 마지막 풀베기를 마친 들판에는 안개가 번져간다. 지상에서 가까운 대기에는 싱싱하고 진한 풀냄새, 멀리 산 아래에는 농가가 불타며 회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죽은 산비둘기 한 마리가 가시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다. 느린 호흡과 평온. 고요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들. 
아눅은 내 영혼의 가장 가까운 궤도를 회전하는 달이며, 달이 바다를 끌어당기듯 나를 끌어당기지만 달과 바다가 그렇듯이 결코 닿지는 않는다. 아눅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아눅에게 편지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은 단 한 번도 그에게 편지한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눅을 떠나지도 않는다. 한 번도 그를 떠난 적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눅은 내가 닿지 않으면서 떠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아눅을 생각함으로, 나는 아눅을 본다. 내가 봄을 통해서, 아눅이 거기 있다. 예를 들자면 아눅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 이외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침엽수 구릉이다. 내게 특별한 몇몇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연초록 이끼에 덮인 그 가문비나무 숲을 나는 아눅이라고 부른다. 동시에 아눅은 나의 토템이며, 내 이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이다. 어쩌면 아눅은 그 자신보다도 그림자로 더욱 많은 것을 발휘한다. 내 말은, 아눅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늘 어두운 집안은 하루종일 전등을 켜놓아야만 하고, 특히 요즘과 같은 겨울에는 빛이 더욱 희박하다는 의미이다. 오, 나는 딱히 겨울뿐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어둑한 여름 거주지 오두막에 산다. 
원래 곡물 창고였던 여름 거주지는 창이 작고, 거기다 창 바로 가까이에 커다란 포플러와 자작나무들이 서 있다. 나뭇잎들의 뒷면엔 부드러운 솜털이 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한 빛의 뒷면이 작은 양철조각처럼 팔락이며 반짝인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빛을 들이기 위해서 창밖 나무들을 베어내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말로 더 많은 빛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그들은 내게 물었고 나는 그 무엇도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설사 그것이 빛이라 할지라도. 내가 끝내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톱을 든 사람들은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 나무들은 여전히 서 있다. 여름 거주지는 원래 방앗간의 곡물 창고로 사용하던 헛간인데 절반을 주거용으로 개조했으므로 오두막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작고 비좁았지만, 나 자신이 작기 때문에 더 큰 집은 불필요했다. 사다리로 올라가는 다락방에는 낡은 잡동사니와 책들이 천장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한구석을 치우고 잠자리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다락방 천창을 통해서 달빛이, 불완전한 붓자국처럼 희미하게 떠 있는 자작나무들의 흰 빛이 내 위로 덮인다. 객관적으로 이 집은 편안하거나 아늑하지 않다. 하지만 이 집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편안하고 아늑하기도 하다. 이 집에서 나는 아눅을 생각하면서 산다. 간혹 내가 왜 이 집을 떠나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떠나지 않는다. 나는 아눅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을 간직한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또한 나는 아눅이란 이름을 가진 양치기 개 한 마리를 멀리서 알고 있다. 태어난 지 이 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 강아지가 내게 생일 선물로 주어졌다. 내가 개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확히는 개의 이름을 지어줄 권리를 선물받은 것이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아마도 개는 이제 더이상 강아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테고, 게다가 운이 나쁘다면 그사이 늑대에게 물려 죽었거나 아니면 주인과 함께 고산지대에서 사고를 당해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 개가 아눅이라고 불린 건 개의 주인이 바로 아눅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개의 이름을 지은 장본인은 바로 나다. 북슬북슬한 검은 털로 덮인 강아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눅과 무척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인상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인상에 불과했지만, 그 자리에서 즉시 ‘아눅’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개는 아눅이 되었다. 가장 최초로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 이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두번째 단어는 안 된다. 개는 뉴펀들랜드 종과 레온베르거 종의 잡종이라고 들었으나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아마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 다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명칭이고 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탓이다. 게다가 원래 나는 개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편이다.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고, 아눅 이전에는 개를 가진 사람과 가까운 관계였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개벼룩에 극심한 알레르기가 있었다. 어떤 알레르기 반응을 실제로 겪은 건 아니고 단지 자신이 부모로부터 들은 대로, 아니 자신의 부모에게서 들었다고 상상하는 대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개벼룩 알레르기를 물려받았다는 맹목적인 믿음하에 개를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혹은 가까이 다가가거나 심지어 시선을 마주치는 일조차 금지당한 채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야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내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는데, 개벼룩 알레르기는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내가 그녀를 떠난 이후에도 기억에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거짓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거짓말을 무조건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므로 어머니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처음 내게 건네진 아눅은 이미 털이 북슬북슬하게 덮였으나 이제 겨우 눈을 뜬 아직 한참 어린 강아지였고, 장차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지 나로서는 당연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개를 처음 본 순간, 특별한 근거 없이 그것이 티벳 개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나는 티벳 불교에 대해서 모르는 것만큼이나 티벳 개에 대해서도 모른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한 번도 개와 특별한 관계였던 적이 없고, 티벳 개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막연하게, 티벳 개는 크고, 검고, 털이 길고, 생각에 잠긴 나이든 사람을 연상시키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티벳 개에게 검은 양복을 입히고 검은 안경과 검은 펠트 모자를 씌운 다음 냅킨을 양복 단춧구멍에 꽂아 식당 의자에 앉혀놓으면 다른 손님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옆 테이블의 손님이 바로 나라면 그 말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상한 기미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심지어 옆 테이블에 앉은 아눅에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식당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만큼 용감한 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조차 극히 드물지만 말이다. 어쩌다 식당에 가게 된다면 주문을 마치고 앉아서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검은 옷을 입은 티벳 개처럼 느낄 것이다. 나는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안경과 검은 펠트 모자를 썼다.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고 떠나자 나는 냅킨을 양복 단춧구멍에 꽂는다. 
만약 아눅이 아니었다면 나는 티벳 개를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눅이 티벳 개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내 말은, 아눅과 단 한 번의 짧은 만남, 그리고 아눅을 티벳 개로 잘못 인식한 경험은 이후 내가 몇 번인가 실제로 진짜 티벳 개와 마주치게 되도록 영향을 미친, 선취된 비전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단 한 번도 티벳 개와 함께 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옆 차선에서 달리는 자동차에서 불쑥 고개를 차창 밖으로 내민 한 마리 티벳 개와 거의 코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극적인 순간이 있었다. 티벳 개가 탄 자동차는 나를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나는 그것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로 아눅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조만간 아눅을 만나게 되리라는 예언의 사건이었을까. 어쨌든 내 근거 없는 망상은 아눅을 티벳 개로 각인시켰고, 이후로 만약 티벳 개에 대해서 듣거나 해변에서 우연히 티벳 개를 데린 산책자와 마주치게 된다면(실제로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드물게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이다) 나는 즉시 아눅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눅을 채 알아보기도 전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아눅이 너무도 큰 개가 되어 있고, 내 머리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아눅의 키가 크며, 또 적어도 쉰 살은 먹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버린 까닭이다. 나는 아직 쉰 살이 된 개를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우리가 헤어져 있던 세월을 숫자로만 계산해보면, 개가 사람과 같은 속도로 나이들어간다면 아눅이 그 정도로 나이를 먹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길고 검은 털을 가진 티벳 개를, 그것도 개의 나이로 쉰 살이나 먹어 거의 유령이 되다시피 한 유령 개를, 어린 강아지일 때 잠시 보았을 뿐 일생 동안 만나지 못한, 내가 이름을 지어주긴 했으나 분명 내 개가 아니며 내 이름은 더더욱 아닌, 뿐만 아니라 함께 살지도 않았으며 단 한 번도 산책을 데리고 나간 적도 없고 쓰다듬어준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아주 멀리서라도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는, 그런 개를 단번에 다시 알아볼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걸까. 나는 달라이라마에 대해서 모르는 것만큼이나 티벳 개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무지하다. 예를 들어 내가 티벳 개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이라면: 티벳 개는 죽지 않는다, 단지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아눅의 말이었던가?)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개 데린 해변의 산책자는 검은 모자 아래 그늘진 얼굴을 가졌다. 나는 그를 모른다. 아니 아눅에게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를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아눅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오래전 어린 개를 내게 데려와 이름을 주게 만든 아눅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눅이 개 산책을 위해 고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산 아래 농부의 집에서 머물렀고, 아눅이 내게로 왔다. 아눅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기를 원할 때면 나는 언제든지 기차를 타고 농부의 집으로 가서 며칠 머물 수 있었고 종종 그렇게 했다. 그렇다고 하여 아눅이 매번 산 아래로 내려올 수는 없었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얼마 전 산에서 강아지가 태어났다고 했다. 그는 커다란 낡은 배낭에 강아지를 넣어왔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선물이란 어린 개를 위해 내가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고 곧장 개를 다시 배낭에 넣어 산으로 데리고 갔다. 아마도 그것이 아눅이 내게 뭔가를 선물한 유일한 사건일 것이다. 아눅은 겨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산에서 살았다. 아눅이란 이름 이외에 내가 개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다. 이름을 지어준 이후로 개의 소식을 듣지도 못했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개의 품종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라디오에서 아눅의 실종 소식을 들었다. 티벳 개 아눅 역시 그날 이후 양치기 오두막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날 이후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나는 아눅과 함께 산에서 살지 않았다. 개가 아니라 개를 데리고 왔던 아눅을 말하는 것이다. 아눅뿐 아니라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 살지 않았다. 단지 산 아래 농부의 집에서 그를 기다렸을 뿐이다. 매년 산에 눈이 쌓이기 전에 아눅은 산에서 내려왔고 양과 염소들을 산 아래 겨울 축사에 넣었다. 그리고 농부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가축들의 겨울나기 준비를 도왔다. 눈이 내릴 무렵 나는 기차를 타고 산 아래 농부의 집으로 갔다. 농부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고 있으면, 어느 날 지팡이를 들고 자작나무 껍질 모자를 쓴 아눅이 수백 마리의 양과 염소들과 함께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무리와 함께 있었다. 나는 산 아래서 멀리서 들려오는 아눅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한동안 농부의 집에 머물며 가축들의 겨울나기를 도울 것이다. 내가 아눅과 함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종종 떠오르는 이 질문을 제외하면 나는 아눅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질문이 없다. 
그날 그렇게 아눅이 개와 함께 산으로 가버린 뒤, 나는 개뿐 아니라 아눅 또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는 아눅에게 개 아눅의 안부에 대해서 물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를 모른다. 나는 단 한 번도 개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후로 아눅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내 안의 아눅을 잠재우고만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역시 잠들어야만 했다. 잠들기 위해서 긴 자장가를 썼다. 아니, 내게 들려오기 시작한 말없는 자장가를 말로 번역했다. 어느 날 우연히 유이스트섬의 북쪽 해변에서 덩치 큰 검은 티벳 개를 만나기 전까지는, 티벳 개로 잘못 알고 있었던 티벳 개 아눅, 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아눅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에 대한 명상이 내 삶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이고 그의 이름은 곧 나의 토템이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나는 아눅이―가문비나무 숲을 말하는 것이다―아주 조금씩, 결코 눈치챌  수 없는 느린 속도로 매일 밤 한 걸음씩, 결코 두 걸음이 아니라 오직 한 걸음씩,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처음 이곳 여름 거주지 오두막에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눅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눅은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오두막 창밖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단지 어느 날 내가 아눅을 보게 되었고, 그게 시작이자 완성이었다. 그 어떤 뚜렷한 계기도 없이, 나는 그 최초의 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눅이 항상 여기 있었으며, 내 삶은 오직 그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종류의 봄을 갖고 있노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 것이 곧 세계이며 전체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화가가 거기 속할 것이다. 그래서 화가에게는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하다. 화가는 항상 보고 있으며, 오직 그가 바로 이 순간 보는 것을 통해서 그는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 내가 아눅을 보게 된 이후로 우리에게 과거는 없었고 미래는 무의미했다. 나는 아눅이 보는 나이며 아눅은 내가 보는 아눅이었다. 이제는 창을 열기만 하면, 아니 심지어 창을 열지 않아도 아눅의 메마르고 뻣뻣한 피부와 머리카락, 신발 바닥에 두터운 층으로 달라붙은 이끼를 느낄 정도이다. 나는 내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잠든 아눅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숨은 내가 아직 아눅을 모르던 시간에도 아눅을 호흡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아눅으로 인해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난다는 느낌을 갖는다. 내 부모의 의지도 자연의 의지도 아닌, 아눅을 만나고자 하는 내 의지로 나는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났다는 건 사실일까. 누구에게도 물을 사람이 없다. 단지: 태초에 말이 있었다, 아눅을 들이마셔라. 그리하여 나는 호흡을 시작했다. 나는 아눅이 되어버린 아눅, 아눅과 구분되지 않는 아눅이다. 누군가 북쪽 해변에서 아눅, 하고 이름을 부른다면, 나는 마치 내 이름을 들은 것처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눅을 대신하여 나는 아눅이 된다. 
모래 언덕 뒤에서 티벳 개가 짖는다. 나는 아눅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아눅. 어느 순간 호흡이 멎는다면, 그건 내가 아눅을 생각하기를 잠시 멈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길지 않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나는 아눅을 명상한다. 나는 아눅을 명상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눅을 보기를, 아눅과 함께 있기를, 그리하여 스스로 아눅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내가 아눅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내 자연이다. 하지만 모든 자연은 태양이 이미 종말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이기도 하다. 
아침, 화덕 위의 커다란 솥에서 물이 끓기 시작한다. 나는 내 작은 자연의 종말을 개의치 않으면서, 차가운 우유와 꿀이 든 단지를 식탁에 차린다. 그가 돌아왔다. 그가 문 앞에서 청어 뼈 문양이 든 회색 외투의 눈을 턴다. 먼 나라의 냄새가 난다. 

기억과 동시에 망각이 나를 둘러싸고 나와 함께 산다. 나는 매일 책과 그림의 회랑을 산책한다.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 장소는 나로부터 너무도 까마득하게 멀리 있어서, 이제 나는 그것들을 더할 수 없이 낯설게 느낀다. 내가 산책하는 회랑은 원래 곡물 창고로 사용했으나 방앗간이 운영을 멈춘 후로 나무판자로 서가를 만들고 책과 그림을 모아둔 먼지투성이 헛간이다. 나는 매일 아침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그림 위에 씌워둔 흰 천의 먼지를 털고 마룻바닥을 청소한다. 이 집 헛간의 책과 그림은 오래전 이곳에서 살았던 체룹의 형제의 흔적이다. 나는 그의 그림들을 좋아하여 오래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좋아하는 초록 시리즈 그림 하나는 여름 거주지의 벽에 걸어두기도 했다. 무명 화가였던 그는 자신의 갤러리스트를 갖지 못했고 친한 친구들이 구입해준 걸 제외하면 그림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내가 사는 여름 거주지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가 내 거주권을 인정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내 거주권이 묶여 있으므로 여름 거주지를 다시 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계속해서 산다. 여기 온 이후로 이곳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왔을 때 체룹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혹은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아예 처음부터 그는 여기에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멕시코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날짜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그가 말한 대로 나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 지쳐서 붓을 집어던지고 떠나버리는 일을 열두 번 반복해도 충분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므로 그가 정말로 멕시코에서 돌아와 여기 머물다 떠났는지, 아니면 멕시코 체류가 예상과 다르게 길어지게 된 건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여행지에서 내게 단 한 번도 편지나 엽서를 쓰지 않았다. 팔 년 전, 아니 구 년이던가, 나는 마지막으로 체룹의 집으로 가서 내 짐을 가지고 나왔다. 가득찬 우편함을 비웠다. 그가 내게 보낸 우편물은 없었다. 그의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 최종적으로 열쇠를 우편함에 넣었다. 텅 빈 우편함 안으로 열쇠가 떨어지던 소리. 결정적인 작별의 소리는 우편함 내부에서 반사되고 증폭되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나긴 메아리로 울렸다. 
체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그가 태어났다고 하는 고향집 여름 거주지에서 산다. 아마도 체룹은 아직 멕시코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내게 말한 것과 달리 그는 아예 멕시코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건 어떤 종류의 작별일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 나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갑자기 번개에 맞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먼지떨이와 걸레를 손에 든 채로 의아해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있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내가 이곳에 체류한 후로 나를 찾아온 사람은, 내가 찾아간 사람과 마찬가지로 단 한 명도 없었다. 살고 있는 집과 마찬가지로 내가 돌보는 책과 그림 중 내게 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만약 여름 거주지의 주인이나 은행이 이곳 농가와 여름 거주지에 대해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리한 사업 모델을 마침내 찾아낸다면, 그들은 이곳으로 와서 무슨 명분을 대서라도 나를 쫓아내버릴 테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지 않았고, 어쩌면, 영영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체룹의 농가는 기차역이나 고속도로, 큰 도시와 아주 멀리 떨어진, 정말로 외딴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양복을 입은 은행원과 공증인과 법률 전문가들이 여름 거주지를 찾아오는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면, 나는 내가 들고 왔던 가방을 다시 들고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미는 서류를 자세히 읽어보는 법도 없이 나는 서명을 할 것이고, 질문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나는 관심이 없다. 나는 손익계산에 서툴고 그것을 매우 귀찮아한다. 나는 예민하지도 까다롭지도 않으며, 무엇보다도 나는 질문이 없다. 그것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또한 나는 평화라고 부를 것이다. 
체룹에게는 이 집이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집이었다. 네게도 최초의 집이 있었는지, 체룹의 이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집이나 고향은 기억의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반드시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누구나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장소이다. 네게도 최초의 집이 있었는지. 어린 시절 나는 커다란 정원이 있는 옛날식 낡은 집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이야기 속 그 집을 나는 최초의 집이라고 믿었다. 내가 믿기 시작하자 기억이 되살아났다. 혹은 탄생했다. 나는 회상한다. 대문 바로 옆 큰 포플러나무 아래 변소가 있고 부엌에는 이 빠진 사기 사발 안에서 촛불이 펄럭이며 타오른다. 촛불이 놓인 까치발 선반 위 벽에는 오랫동안 형성된 그을음 자국이 크게 번져 있다. 촛불은 거인처럼 느리고 흐릿한 그림자를 만든다. 촛불은 깊고 우묵한 우물에 반사된다. 저녁식사에는 무쇠 팬에 구운 달걀 프라이가 나왔다. 부엌 창 옆 닭장에서 가져온 달걀이다. 밤이면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장작 아궁이에서 덥힌 물로 목욕을 했다. 비가 내리면 정원에는 흙색 두꺼비가 뛰어다녔다. 내가 아는 모든 자연스러운 땅은 개미와 지렁이와 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그 집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고 어린아이 시기를 벗어나자 그 집은 더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어떤 궁극의 순간 이후, 어린아이는 부모의 집을 최초의 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건 어린아이의 최초의 비밀이다. 하지만 부모 역시 아이와 관련하여 마찬가지의 비밀을 갖는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최초의 집을 잃었다. 나는 추방되었다. 내가 처음 체룹에게 끌린 것은 그가 내게 최초의 집에 대해서 물었기 때문이다. (“네게도 최초의 집이 있었는지.”) 집은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너무도 늦게 발견했다고 대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은 곧 상실이 되었노라고. 어머니는 나를 그 집에 버리고 싶어했다고. 아마도 어머니는 정말로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반면에 체룹은 오래전에 최초의 집을 스스로 떠나온 자였다. 게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두 번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다음이었다. (“만약 내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건 내가 죽기 전은 결코 아니겠지.”) 체룹은 마음속 깊이 자신을 추방자라고 느낀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자신은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형제와 누이로부터 추방된 자라고 했다.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룹은 나와 달리 최초의 집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그럼으로써 그는 최초의 집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글은 근본적으로 최초의 집에 대한 것이라고 체룹은 말했다. 더욱 과격하게 말하자면, 최초의 집이 없는 자는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통해서 얻는다. 나는 집을 모르듯이, 종종 나는 내가 쓰게 될 다음 문장을 모른다. 내 글은 스스로를 모르는 채로 이어진다. 인간이 스스로를 모르면서 늙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초의 집을 잃은 이후로, 다음에 내가 어디에 있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나는 일생을 살았다. 내 글쓰기는 내가 거쳐온 임시 글쓰기-거주지의 모습과 닮았다. 나는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얻는다. 그것을 나는 평화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