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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일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 집에 온 것인데도 긴장이 되었다. 이사 후 첫 방문이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올까 하다가 그냥 편한 복장을 하기로 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어머니고 아들이니까. 아들이 집에 오는데 정장 차림으로 오면 이상하지 않나.
이연의 단독주택에 들어서자마자 준일은 집 전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완만한 이등변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지붕에서 시작해 나지막한 일층 건물을 지나 좁은 마당의 몇 그루 관목들까지를 눈으로 스캔했다. 옥탑방이나 반지하방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월세를 줄 공간이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연이 혼자 살게 된 이후 이사를 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오래된 단독주택일 줄은 몰랐다. 평수를 줄이더라도 더 번듯한 집일 줄 알았는데.
준일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들어와본 적이 없었다.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대학에 간 후에는 기숙사를 거쳐 오피스텔 원룸에 살았으니까. 아, 비슷한 곳은 가보았구나. 희가 살던 자취방. 희는 마당이 있는 다세대주택의 옥탑에 살았다. 옥탑이라고 해도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독립된 출입 계단이 있었고 옥탑치고는 원룸 공간이 제법 나왔으며 창밖 시야도 트여 있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곳에서 희는 준일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준일은 희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준일이 희의 흰 몸을 쓰다듬고 희가 준일의 성기를 쥐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희는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준일은 그런 희가 좋았다. 좋았지. 좋았지만.
희는 준일을 떠났다. 희가 결별을 선언했을 때 준일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덤덤한 성격의 희에게 동화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준일은 생각했다. 서로 그리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은 준일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준일이 예견하지 못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밤, 희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카톡도 문자도 아니고 전화였다. 잠깐 근황을 나누다가 희가 물었다. 넌…… 네 아버지를 사랑했니. 희가 희답게 스트레이트하게 물었을 때 준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웠으니까. 이런 질문은 상상한 적이 없으니까. 준일은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하면 침묵을 한다. 그건 난관을 대하는 준일의 본능이었다. 난관을 회피하기 위한 본능인지도 모른다. 잠시 기다리던 희는 알겠다고, 잘 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끝이었다. 희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다시는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준일은 알았다.
그래도 과일 정도는 사들고 가야겠다고 준일은 생각했다. 과일 상자를 들고 계산을 하려다가, 성철에게서 핀잔을 들었던 옛일이 기억났다. 아니 이건 너무 무성의한 것 아니냐. 넌 네 어머니가 사과랑 키위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모르지. 가족에게 관심을 가져라, 관심을, 엉? 성철은 가볍게 웃으며 장난치듯 말했지만, 듣는 준일에게는 가볍지 않았고 장난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라고, ‘가족’이라고 강조한 것도 준일의 입을 막았다. 그때 옆에 있던 이연이 성철의 어깨를 툭 치고는 사과 상자를 뒤 베란다로 들고 갔는데, 그 뒷모습이 오래 남았다.
준일은 빈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마당에 들어서서는 집을 한번 훑어본 뒤 천천히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준일은 이 모든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딱히 있을 리가.
“차 마실래?”
이연이 다기에 뜨거운 물을 따르는 모양을 준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김이 올라오는 차를 준일 앞에 놓았다. 우롱차야. 향도 향이지만 뒷맛을 느끼면 좋아. 그렇게 말하는 이연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희가 떠올랐다. 자꾸 둘이 연결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준일은 생각했다. 오래전, 이연은 희에 대해 대학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평했다. 행동이나 말하는 게 젊었을 때 자신을 닮았다는 얘기였다. 준일은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이연의 젊은 시절을 본 적이 없으므로 뭐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준일은 우롱차니 보이차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커피의 원산지가 에티오피아인지 케냐인지 하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해산물에 레드와인을 마시든 스테이크에 화이트와인을 마시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이가 좀 있다는 거야 느낄 수 있지만 굳이 그걸 나누어 구분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믹스커피도 좋은데 뭘. 성철도 그렇게 말하곤 했지만, 준일은 성철처럼 소맥을 마시지는 않았다. 준일은 늘 맥주만 마셨다.
성철과 이연이 자신을 노마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다. 희와 맥주를 마시다가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 이후 꽤 오랜 고민 끝에 이름을 준일로 바꾸고…… 이 모든 과정이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 그게 좋았다. 성철과 이연은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뭘 선택하고 결정해본 적이 없다고 준일은 느끼고 있었다. 아빠는 네가 선택하는 것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성철은 늘 그렇게 말했지만 그러고 난 뒤에는 곧 자신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물론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하에. 그래서 노마는 대안학교에 갔고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으며 검정고시를 보았다. 애초에 재혼을 할 때도 성철은 이연과 친해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노마에게 따로 소개를 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 네 엄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소년 노마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에서 미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학위를 땄다는 설명은 나중에 들었다. 얼마 후 교양대학의 비정년트랙 교수가 되었다는 말도 들었지만, 교양대학이니 비정년트랙이니 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연과 같이 살게 된 후 노마가 반항을 한 것은 아니다. 이연은 무심한 듯 다정했고 노마의 생활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더이상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지 않았고,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지도 않았다. 이연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서 갔다. 우리, 친해져야지. 이연은 그렇게 말했다. 다정한 말 같기도 하고 일종의 압력 같기도 해서 노마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연을 ‘엄마’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라는 단어를 아예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불러야 할 때는 그렇게 불렀다. 노마가 거부감을 느낀 것은 이연보다는 성철이었다. 성철은 화가이자 평론가라는 폼나는 직업을 갖고 있었고 아는 것이 많았고 늘 옳은 말을 했다. 노마가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고 걱정을 했는데, 그런 걱정을 성철은 노마 앞에서 했다. 노마는 가만히 있었다. 노마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말수가 많지 않았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 이력이 나 있었다.
희를 처음 만난 건 수능을 본 이후였다. 희가 피비 브리저스나 빌리 아일리시를 매력적으로 부르고 에티오피아와 케냐 커피의 맛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 구로사와 기요시와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 대해 들뜬 표정으로 말할 때, 노마는 희가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배를 피우는 희의 손가락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노마는 희를 따라 담배를 피웠고 대학에 갔고 학과를 선택했다. 수능 점수가 꽤 많이 남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네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게 마음에 들어. 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준일은 반려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육식을 아예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반려견을 들였다가 한 달도 안 돼 죽은 뒤 그렇게 되었다. 해산물은 먹는 거지? 그런 걸 페스코라고 해. 희가 설명했다. 페스코든 락토오보든 그런 것은 준일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준일은 희와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희의 옥탑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언젠가부터—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성철이 세상을 뜨던 그 무렵, 전염병이 돌기 전이 아니었을까—희는 준일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준일은 그렇게 느꼈다.
희는 매사에 명료한 기준을 갖고 있었고, 준일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복잡하고 다단한 것이어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손쉽게 단정할 수 없게 된다고 이연은 말한 적이 있다. 이연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입에 올렸을 때, 희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실천도 하지 않지. 입으로만 섬세하니까. 희는 그렇게 평했고, 준일은 입을 다물었다.
희를 이연에게 데려간 적이 있었다. 이연이 희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준일은 직감으로 알았다. 희 역시 이연에게 깍듯했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는 깍듯하지 않았다.
“그분, 친엄마 아니고 계모라고 했지?”
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랑 다르네. 낌새가 어딘지 명예남성 같고.”
그때 준일은 명예남성이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