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살 편경이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난제가 물풍선처럼 박혀 있었다. 첫번째 난제는 버튼에 관한 것이다. 수중에 현금 이억원이 떨어지는 버튼.
간편하지만 가볍지 않은 버튼. 이것을 누른다면 삶이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좋은 일이 일어날지 나쁜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둘 다 일어나겠지만, 그것들을 합한 값이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일지 장담할 수 없다.
두번째 난제는 베드로와 유다에 관한 것으로, 난제보다는 질문에 가깝다. 신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답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사소한 의문이다. 그러나 편경이는 학생 때 이후로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갈 생각이 없는 사람인 탓에 이 질문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다. 베드로는 천국에 가고 유다는 지옥에 갔을까?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목숨을 버렸다. 베드로는 예수가 죽어갈 때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사람들 안 보는 데 가서 엉엉 울었다.
울면 끝인가?
내가 신이었다면 유다를 더 예뻐했을 거야. 배신자의 대명사로 쓰이게끔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야. 악의는 유다 쪽에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목숨을 걸었다. 그 정도로 관계에 성의가 있었고 책임을 다했다. 자신의 부덕함을 스스로 얼마나 수치스러워하며 혐오하는지, 얼마나 미안해하며 뉘우치는지 가능한 한 최대로 표현했다. 반면 베드로는 어땠나. 그렇게 예수를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그 말이 진실이라면 모르는 척은 하지 말았어야지. 모르는 척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지. 최소한 자기가 외쳤던 사랑과 비슷한 정도로.
예수와 유다가 목숨을 마주 걸었던 밤에 베드로는 삶을 위해 도망쳤다. 자기 삶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예수에게 인정받는 삶. 죽은 예수는 따라가지 않는 삶. 나중에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해 돌아오자 주님, 내 마음 알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 알지요? 충분히 호소하고 용서받아서 결국에는 천국에 간 걸까? 정말이라면 야무지다.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 베드로야. 편경이는 냉소를 참을 수 없었다.
예배와 성경이 교과목으로 들어가 있는 고등학교에서 편경이의 신성모독은 꽤나 인기를 끄는 편이었다. 급식을 많이 먹어 교복 치마가 잠기지 않는 날에 ‘어머나, 지금 내 상태 마리아. 동정녀인데 임신해버렸다. 어쩐지 생리가 안 터지더라니……’ 너스레를 떨기만 해도 아이들은 와장창 폭소했다. 동아리 활동으로 선교부를 선택한 것도 반쯤은 개그 레퍼런스를 늘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말이 선교지, 선교부는 강당 예배 인도 때 쓸 악기를 갖춘 단체로 사실상 미션스쿨이 용인하는 밴드부였다. 부원이 되면 방음벽이 설치된 동아리방을 자습실로 활용하는 혜택을 누릴 수도 있었다.
첫 모의고사 등급표가 나오던 날 편경이는 아, 지금 내 상태 가룟 유다 직전, 그냥 가룟 유다 할란다, 소리치며 동아리방 문을 열어젖혔다. 같은 반 친구 도희가 있는 줄로 알았지만 도희는 없고, 몇 번 스쳐가며 얼굴만 봤던 남자애가 앰프 위에 앉아 단어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운동부 애들처럼 몸집이 크고 눈이 순한 애였다. 그애는 까맣고 두꺼운 안경테 위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가룟 유다 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편경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자살하고 싶다는 뜻이야.
남자애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말을 도대체 왜 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오민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오민이의 표정이 별 희한한 애 다 본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편경이는 이후 오민이와 가까워지게 된 상황을 잘 납득할 수가 없었다. 떠올려보면 막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기엔 애매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반이 달랐고 신앙심이 유난하지도 않았으며 딱히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니까. 둘이 함께 한 게 있다면 공부일 텐데 그마저도 편경이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방과후 동아리방에 책걸상을 끌고 들어가 교과서든 문제집이든 펼쳐두고, 담요 아래로 다리를 떨며 딴생각을 하다 시들해지면 오민이의 등을 쳐다봤다. 쟤는 그새 살이 쪘을까, 아니면 체격이 자란 걸까. 셔츠가 꽉 끼어 둔해 보이는 등을 향해 지우개 가루를 던지며 놀기도 했다. 그러든 말든 오민이는 끄떡없이 앉아만 있다가 열시 오 분 전이 되면 자리를 칼같이 정리했다. 그리고 편경이를 돌아보았다.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편경이는 그 행동이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좋은 감정이 있다 한들 그것이 순수하게 오민이를 향한다고는 느낄 수 없었다. 늦은 밤에 이십 분쯤 걸어야 나오는 아파트 단지까지 같이 갈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사람이 여자애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쁘지 않은 또래 남자애라는 게 은근히 기분좋은 정도였다. 오민이는 자기 집이 어디인지는 한사코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듯 편경이의 집 앞까지 함께 걸어간 뒤 손을 흔들 뿐이었다. 내일 보자. 오민이의 목소리를 두고 돌아서면 켜지던 공용 현관 센서등. 편경이는 그 시절을 그렇게 추억했다.
너 오민이 기다리지.
간혹 도희가 키득거리며 야간자율학습에 끼어들었다. 이건 백 퍼센트 썸이야, 내 말 믿어. 도희가 책 귀퉁이에 볼펜으로 하트를 그렸고 편경이는 그 낙서 위로 수정 테이프를 박박 눌러댔다. 돌았냐? 아니라고. 오민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또 격렬하게 반박했다. 도희는 아홉시 반이 되면 살금살금 일어났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편경이의 어깨를 때리고 사라졌다. 얼굴이 벌게질 만큼 신이 난 도희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편경이는 알지 못했다. 기대하기에도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오민이도 그럴 것이라고, 편경이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날이 언제쯤이었을까, 몇 학년 때였는지도 희미해진 그 여름. 오민이와 인사한 뒤 공용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복도에 설치된 센서등을 하나씩 밝혀가며, 붐비는 날벌레를 피해 걷다가…… 편경이는 복도 끝까지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에 주차된 차들과 얄팍한 가로수 너머로 사라지는 오민이를 눈으로 좇았다. 오민이는 유난히 천천히 걷고 있었다. 왼발, 또 오른발, 무게중심을 번갈아 옮기며, 어떤 순간 속에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멀어져갔다.
그 시절에는 은근해지지 못한 미적지근함이 있었다. 헤어지려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도 있다는 무덤덤한 기운 같은 게. 그 기운을 타고 오민이는 서울 노량진의 재수종합학원으로 가버렸다. 아주 가버렸다. 그리고 칠 년도 더 지나 다시 편경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수험생인 채로.
“메디컬 준비하고 있어. 유지만 잘하면 올해는 될 것 같아.”
안경테가 달라졌지만 숱 많은 눈썹과 단단한 체격만큼은 그대로인 채로, 오민이는 칠 년 전보다 말을 많이 했다. 어깨에 힘도 제법 주었다. 학원생들 사이에서 6월 모의고사 몇 등을 했다는 이야기, 도중에 잠깐 바람이 들어 공대생이 될 뻔한 이야기, 군대에서 약학과 예비번호를 받았는데 결국 안 빠지더라는 이야기를 편경이는 잠자코 들었다. 그랬구나, 잘했다, 힘들었겠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다가 무심코 입을 뗐다. 그럼 이번 선거 때,
“너는 왕동순 안 뽑았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은 의대 정원 늘리는 거 싫어하잖아.”
편경아,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냐.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데. 오민이는 펄쩍 뛰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왕동순 그 사람, 그래 보여도 똑똑한 사람이야. 너 옥스퍼드대학이 세계 몇 위인지 알아?
*
일요일 오후 편경이는 빨래건조대 옆에 요가 매트를 깔고 누워 있었다. 복층 구조의 원룸은 누워서 올려다볼 때가 가장 그럴듯했다. 그럴듯하다기보다는, 보증금 이천에 월세 칠십에 관리비 십오라는 계약 조건이 약간 납득될 것 같아 보였다. 그래, 그래도 이 집은 나은 편이야. 천장도 높고 공간 분리도 되고 치안도 괜찮고 벌레도 안 나오지. 비록 빨래건조대를 펴고 나면 팔다리를 쭉 펼칠 수 없지만. 관에 들어간 자세로 매트 위에 갇혀야 하지만.
내일 출근하면 누군가는 주말에 뭐 했냐고 묻겠지. 고등학교 동창 만났어요, 그러면 남자인지 묻겠지. 네, 남자요, 그러면 어떤 사이인지를 궁금해하겠지. 그 순간 사무실 사람들은 전부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미향월드에서 재미 볼 이슈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제일이다. 정말 왜 이렇게 됐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편경이는 비속어를 읊조리며 허공에 다리를 휘둘렀다.
시작은 순전히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도 있었다. 도심의 원룸촌과 인접해 있으면서 구내식당도 갖춘 미향월드는 로망을 이루기에 참 알맞아 보였다. 편경이는 도희를 꼬셔 무작정 상경했다. 두 사람은 바나나 장식과 원숭이 귀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쓰고 미향월드의 입구와 출구에 서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하염없이 흔들었다. 퇴근 후에는 함께 맥주를 마셨고, 모텔을 개조한 것 같은 단기 임대 숙소의 벽에 파스 붙인 다리 넷을 나란히 올렸다.
서울 사람들은 이런 것 먹나봐. 이런 데 가나봐. 앞장서서 홍대, 한남, 압구정을 휘젓고 다니던 도희는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고픈 마음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마침 근로계약이 자연스럽게 만료될 무렵이었다. 미향월드의 모든 아르바이트생은 십일 개월만 일하는 조건으로 입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상 일하려면 관리자의 추천을 거쳐 사무실에서 면접을 봐야 했다.
“코 묻은 퇴직금 아껴서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퇴사 면담을 한 날 도희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지금은 사라진 호텔 지하의 한 클럽 테이블에서. 도희와 편경이가 거금을 내고 잡은 소파석에 남자들이 여럿 걸터앉아 말을 붙이다 갔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서른다섯은 넘었을 것 같은 남자, 머리가 긴 남자, 문신이 많은 남자, 겨드랑이에 털이 수북한 남자, 광택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 인이어를 끼고 근무중이었던 남자……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를 닭벼슬처럼 손질한 외국인 남자 한 명이 유독 편경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저기 봐. 내 친구가 너에게 돔페리뇽을 주고 싶대.”
외국인은 편경이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소파 바로 위 반층 정도 높이에 돌출된 발코니가 있었다. 그곳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샴페인을 따고 있었다.
어쩔 새도 없이 한순간에 거품이 주르륵 터져나왔다. 남자는 사전에 협의된 양 샴페인 병을 난간에 내밀었다. 일어나, 일어나, 외국인이 편경이의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편경이는 어색하게 몸을 일으켜 소파 위로 올라갔다. 입을 열자 돔페리뇽이라는 술이 입속을 찢어발길 듯 쏟아졌다.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빛이 번개 치듯 눈앞을 치고 지나갔을 때에도 그저 조명이겠거니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맨베스트의 회원들은 한동안 무슨 글을 쓰든지 간에 최상단에 똑같은 사진을 걸어놓곤 했다. ‘공무원보다 공기업이 낫냐’ ‘광화문 뺑이 칠 시간에 노오력을 해야 하는 이유 팩트로 정리한다’ ‘새벽 경쟁전 이 정도면 몇타치’ 같은 제목 중 어느 것을 누르더라도 가장 먼저 그 사진이 떴다. 어리고 멍청해 보이는 여자의 사진.
잇몸을 드러낸 외국 남자에게 손목이 잡힌 채,
눈두덩이를 판다처럼 검게 물들이고,
부글부글한 술거품을 턱과 가슴에 뚝뚝 달고 있는,
어리고 멍청해 보이는 여자가 쏟아지는 술을 받아먹는 사진.
맨 처음 사진을 올린 사람이 누구였을까? 누구인지 알아낸다고 한들 무엇을 따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 박힌 클럽 로고로 미루어 보아 확실하게 책임을 물을 만한 상대는 우선 클럽 경영진이었다. 하지만 편경이가 사진을 발견한 시점에 이미 그 클럽은 초상권 침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불미스러운 문제를 일으켜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쩌면 불미스럽기로 유명한 장소의 현장감을 지닌 사진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냈으려나.
뭐가 되었든 편경이는 허수아비였다. 사진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얹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편경이와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맨베스트에 글을 쓰거나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최종 학력을 인증해야 했는데, 닉네임 옆에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또는 재학중인지가 표기되는 시스템 탓에 그 안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빤한 특정성을 갖추게 되어 있었다. 편경이 또래들이 그곳에 풀어놓는 삶의 면면, NCS니 토플 과외니 총여학생회 폐지니 하는 토픽들을 편경이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클럽에서 여자와 놀아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서, 먼 나라에나 있을 법한 희귀 생물을 보고 새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노아의 방주(미향월드에서는 동물원을 이렇게 불렀다) 고객들처럼, 큰 악의 없이 편경이의 사진을 사용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들 중에 킹동순이 있었다. 킹동순은 비교적 점잖고 날카로운 글을 쓰는 회원이었는데 언쟁을 잘하기로는 정평이 나 있었다. 가장 추천 수가 많은 글 제목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였다. 이순신, 안중근, 그 외에도 편경이가 잘 모르는 인물들을 모아서 킹동순은 긴 논설을 썼다. 마지막에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구국의 영웅은 위험을 감수하며 총칼을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총칼에 위협당한 사실을 강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죠. 약자성을 내세울 때 위인이 되는 기형적인 시대는 곧 종결될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편경이의 삶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환호를 받았다. 닉네임 옆에 나란히 붙은 University of Oxford가 신뢰를 보증하는 수표처럼 느껴졌다. 게시판 짤방으로 붙는 편경이의 초상은 무엇을 보증했으려나?
아마도 친근감이지 않았을까. 소속감이라거나.
정말로 선거에 출마한 그가 청년층, 그중에서도 이십대 남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을 때 편경이는 돈을 받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빚쟁이처럼 굴고 싶었다.
미향월드에 남아 계속 일하기를 선택한 데에는 변호사 수임료를 모아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편경이는 이를 악물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잘 지냈다. 어느 정도 여유 자금이 생겼을 때는 맨베스트고 나발이고 사느라 바빠 어떤 성가신 일도 인생에 추가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휴일과 월급을 아껴 쌍꺼풀 수술도 하고, 불이 나면 다 허물어질 것 같던 단기 임대 방도 탈출하고, 중국어 학원에 요가 학원도 등록하면서 모서리가 닳은 사회인이 되어갔다. 나쁜 일은 빨리 잊었고 좋은 일은 SNS에 써서 오래 남겼다.
이제 편경이는 원숭이 머리띠를 쓰고 손을 흔드는 정도의 간단한 업무는 하지 않았다. 미향월드 사무실에서 프리미엄 투어 예약을 관리하면서 가끔 현장에 나가 가이드를 했다. 프리미엄 투어는 중국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기획된 상품이었지만 유튜버나 돈 많은 한국인에게도 수요가 있었다. 투어를 신청하면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은 마차와 가이드, 레스토랑 식사권과 간식, 줄을 서지 않고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는 권한, 그 밖의 요구사항을 입력할 수 있는 단말기였다. 리클라이너가 시공된 붉은색 마차에는 나귀 모형이 달려 있었다. 편경이는 휴대전화처럼 생긴 가이드용 단말기로 나귀의 경로를 조종하며 미향월드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이따금 단말기로 전송되는 고객들의 요청을 확인하며 융통성 있게 경로를 변경하기도 했다.
“이거, 당나귀 아니에요?”
고객들은 종종 마차를 이끄는 동물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의아해했다. 나귀입니다, 상냥하게 설명해도 그거나 그거나요, 받아치며 불쾌해하기도 했다. 나귀는 말보다 작고 귀엽게 생겼기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고객들을 아주 약간, 무해하게 우롱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편경이는 제가 만든 거 아닌데요, 저도 이 녀석들이 말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답니다, 이런 질문 안 받아도 되게끔……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기 때문이지요. 전장에 나서는 왕은 말을 탑니다. 하지만 미향월드에 전쟁은 없습니다. 오로지 평화, 평화입니다. 우리 고객들은 왕이지만 이곳에 전쟁은 없습니다. 명심하세요. 그리고 오늘 하루도 힘을 내세요. 저처럼 웃어보세요. 웃으면 늙지 않습니다. 늙지 않으면 죽지도 않습니다. 미향월드에서 저는 영원히 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권대표는 이렇게 연설했다. 그 내용을 잘 이해해서 고객들에게 전달해주었더라면 뭐가 달랐을까. 뭐가 되었든 편경이는 권대표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비단 편경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말을 인용하거나 되풀이하는 일은 꺼림칙했다.
권대표는 본래 수상하리만큼 정정한 팔순 노인이었다. 세간에는 동안의 대명사이자 미향월드의 마스코트로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 TV 광고에서 그는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추로스를 먹다가 아이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바이킹을 탔다. 노약자가 이용할 수 없는 초고속 급경사 롤러코스터를 타겠다는 걸 겨우겨우 말려가며 촬영했다는 후문도 따라붙었다.
편경이가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인기가 좋았다. 잊을 만하면 방송국 카메라를 달고 들어와 사격, 다트 게임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게임 실력이 꽤 괜찮았기에 인형이나 스마트 워치 같은 상품을 곧잘 따냈다. 그것들은 그날 미향월드의 아르바이트생 중 누군가에게 선물로 돌아갔다. 어느 날 권대표는 종일 서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오만원 지폐를 꺼내 편경이와 도희에게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들끼리는 이 랜덤 이벤트를 ‘신사임당 쇼’라고 불렀다.
“오늘의 신사임당 쇼에 당첨되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저 할아버지, 돈이 얼마나 많을까? 사무실 직원들은 달마다 받는대. 한 달에 한 번씩 전 직원 불러서 훈화하고 지폐 다발 꺼내서 한 장씩 그냥 돌린대. 미쳤지. 제발 우리 할아버지였으면.”
그날 편경이는 마냥 신나서 떠들었다. 앞날을 몰랐기 때문에. 오 년쯤 뒤 그 훈화라는 것이 어떤 양상으로 삶에 침투하게 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은 제가 비밀스러운 저속노화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저는 주름 펴는 보톡스 한 번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육체의 건강은 정신의 건강으로부터 옵니다. 오늘부터 여기 미향월드 직원들은 영양제, 건강 보조제, 다 끊으십시오. 그런 것에 의존해서는 뇌가 엔도르핀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엔도르핀은 자연 치유의 힘입니다. 신께서 인간에게 심어준 마법의 씨앗입니다. 여러분도 하늘나라 출신 마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저처럼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수면제? 정신과 약? 최악입니다. 다이어트 약? 필요 없습니다. 영혼이 신실해지면 살 빠지고 예뻐집니다. 거짓말 같죠? 대형 교회에 가면 미스코리아 자매들이 수두룩합니다.”
오만원.
“지난 주말 동성애 축제에 참여해 눈물로 기도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남녀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운이자 불행입니다. 참 불행한 시대고, 불운한 세대입니다. 비탄스러운 것은 동시대의 문화가 불행을 선동하고 있다, 이겁니다. 테레비를 틀면 남자와 남자가 연애하는 드라마가 나옵니다. 신이 맺어준 배우자 앞에서 교만한 자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쉽게 헤어집니다. 아이도 낳지 않습니다. 순리를 거스르고 육신을 더럽히며 사는 삶을 옳다고 주장합니다. 모두 사탄의 문화 통치입니다. 미향월드는 회복의 성전으로서 이 시대의 참된 엔터테인먼트를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십만원.
사무실 소속이라면 매달 첫번째 월요일마다 조례에 참석해야 했다. 육층짜리 건물 구석구석에서 바퀴벌레처럼 숨어 일하던 직원들은 월요일 아침이면 미향월드 입구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불 꺼진 매표소 앞에서 음악을 틀고 간단한 체조를 했다. 그리고 권대표가 나타나 어서 말을 시작하고 끝내주기를 기다렸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사람이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저를 계속해서 쳐다보는데, 마치 따라오라는 듯 쳐다보는데, 저는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고, 아직 할일이 남았다고 기도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인생에도 숙제가 있습니다. 아니, 사명입니다. 신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나라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쳐들어올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십오만원?
아이를 낳아 북방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설교한 그날은 달랑 지폐 한 장 얹어주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조례를 마친 권대표는 사무실의 정규직 중 이십대 여자들을 차례차례 호명했다.
“여러분은 저와 함께 사명을 짊어진 영웅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서른 살 전에 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새 생명을 잉태한다면 포상금을 드리겠습니다. 일억? 너무 적죠. 이억 드리겠습니다. 서른 살 전까지입니다. 오늘 이렇게 전 직원 앞에서 맹세합니다. 제 말이 농담 같습니까? 임수지씨, 어디 계시지요. 손 들어보세요.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농담하지 않죠? 그렇죠?”
이름 불린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편경이는 그녀의 앳된 이마, 가늘게 뜬 잔머리, 둥그스름하게 솟은 복부 아래 원피스 주름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주목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몸 상태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수지씨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다음날에도. 병가와 출산 휴가를 붙여 신청했다가 그조차 취소하고 퇴사를 이야기하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안과 관련해서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말들이 떠돌았으나 한 가지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권대표는 농담하지 않았다.
퇴직원을 작성하러 온 수지씨는 건강한 모습이었고 임박한 비행편을 끊어 도망이라도 치려는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주목이 자연스럽게 분산되었다.
편경이가 소속된 고객지원팀에서라면 이십대 여직원은 오직 편경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