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오민과 편경(마지막)

*

 

가슴께까지 자란 풀이 일렁인다. 편경이는 들판에 웅크려 있다. 풀들이 고급 침구처럼 사락사락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팔과 어깨가 뻐근하다. 무슨 짐이라도 오래 진 기분이다. 아니, 편경이의 두 손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검고 무거운 무엇을 간절히 붙들고 있다.

아마도 총을.

진짜 총이 맞을까? 편경이는 확신할 수 없다. 총에 대해서라면 아는 게 없다. 미향월드의 게임장 벽에 진열된 장난감 총밖에 만져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장난감이 맞던가? 그곳 총알들은 선물을 가져다줬다. 운이 좋거나 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미향월드에는 오로지 평화뿐이다.

그런데 지금 편경이는 덜덜 떨고 있다. 요구사항이 빗발치는 손님을 데리고 처음 프리미엄 투어에 나섰던 날처럼. 자신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던 가이드용 단말기처럼.

단말기가 진동한다. 편경이는 잠에서 깬다. 오민이가 떠난 호텔 침대에 자신이 누워 있다. 손에 쥐어진 것은 단말기다. 단말기구나, 그래, 단말기였어. 그런데 어째서 단말기지? 편경이는 진동하는 단말기를 확인한다. 프리미엄 투어 고객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메시지가? 아니, 그것은 난제다. 내용은 이렇다.

여기가 어디게?

미향월드에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편경이는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고 불 꺼진 미향월드로 뛰어간다. 직원용 출입 카드로 닫힌 문을 연다. 마법의 성을 지나, 회전목마를 지나, 스낵 카도 지나고 노아의 방주도 지나니 저멀리 마차가 보인다. 빨간 코와 뿔을 단 나귀도 보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차에 누군가 타고 있다. 산타클로스다.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주위에 빨간 자루를 두둑하게 싣고 편경이를 기다리는 산타클로스. 자세히 보니 권대표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쓴 권대표가 편경이에게 손을 흔든다.

안녕, 편경씨! 나는 신이에요. 당신에게 선물을 주러 왔지요.”

권대표는 중국인 관광객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자루 하나를 툭툭 친다. 자루의 입구에 동여매진 금색 끈을 어서 풀어보라고 손짓한다. 편경이는 뻣뻣하게 팔을 내밀어 끈에 손을 댄다. 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자루는 기다렸다는 듯, 공기가 꺼진 풍선 인형처럼 무너져내린다. 안에 든 것은 오민이다. 붉은 와인을 뒤집어쓴 오민이가 눈을 감고 웅크려 있다.

아니에요, 오민이는 제가 바란 선물이 아니에요. 편경이는 두 손을 내젓는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제스처 같다. 권대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번째 자루를 끌어다놓는다.

안녕, 편경씨! 나는 신이에요. 당신에게 선물을 주러 왔지요.”

태엽을 다시 감은 듯 똑같이 말하고 웃는 권대표 앞에서 편경이는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처음처럼 두번째 자루의 끈을 잡아당긴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왕동순이다. 왕동순의 얼굴에 흐르는 붉은 액체는 술이 아니다. 편경이는 비명을 지른다.

교란종을 처치했나요? 당신은 자연 생태계의 영웅입니다.”

권대표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편경이의 비명을 압도한다. 편경이는 귀를 막고 정신없이 악을 지른다. 아니에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는 피해자예요. 저는 힘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총을 쏠 줄 몰라요. 저는 저 사람에게 당했어요. 제 이십대는 망가졌어요. 저는 불행한 사람이에요. 미친듯이 불행한 사람이라고요.

불행한 사람.

권대표는 웃다 말고 가만히 그 말을 되뇌어본다. 그리고 늘어진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편경이를 바라본다.

여기는 미향월드인데도요?”

권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속상한 일을 맞닥뜨린 어린아이처럼 잔뜩 무너진다. 이윽고 권대표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편경이는 할말을 잃고 산타 복장의 노인이 주름진 손등을 들어올려 뺨을 닦는 모습을 지켜본다.

미향월드에서의 시간이 불행했어요?”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떻게 불행만을 논하겠는가. 갑자기 돈을 주겠다는 할아버지가 있고 기분을 돌봐주는 연인이 있는데. 아니, 이제는 있었다고 말해야 하나?

과거의 일은 아무래도 대단치 않다. 지나가다 새똥을 맞은 일을 하염없이 곱씹으며 사는 인간으로 남을 수는 없다. 편경이에게 트라우마와 자존심쯤은 이미 옛날부터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남아 있다.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감각이.

그 감각을 어느 정도 불행으로 이해했지만, 지금 이 할아버지 앞에서 있는 그대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든다. 부모에게 유년 시절이 불행했다고 토로해 상처를 주는 행위와 비슷하지 않을까. 권대표는 미향월드를 정말 사랑하니까. 편경이도 그 사실을 안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예뻐하면서,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노인의 모습을 기억한다.

자긍심, 아니면 자부심. 당신처럼 저도 그런 것을 갖고 싶었어요. 여기에 처음 발을 들였던 때라면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저도 미향월드를 참 좋아했는데, 어른이 되어 추로스와 구슬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마음껏 먹는 게 소원이던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어쩌면 행복했어요. 우리는 똑같이 어리고 멍청한 취급을 받았어요. 같은 옷을 입고 재미없는 신발을 신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운이 좋든 나쁘든 거기서 거기인 교실을 나눠 썼어요. 모든 걸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고 잘하면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남자애가 있었고요. 걔는 참 착했고 모범생이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사랑이 뭔가요? 저도 사랑 하고 싶어요.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이나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게 세상이든 사람이든 신이든 뭐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을 논하는 파렴치함을 감내할 정도로 사랑해보고 싶다고요.

모든 것은 내 작품이에요. 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었지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가까스로 눈물을 멈춘 권대표가 허리를 펴고 몸을 돌려 자루들을 뒤적거린다. 남은 자루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편경이가 상상하기도 전에 손을 내민다.

야근하느라 고생이 많아요.”

손끝에 달린 것은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폐다. 편경이는 고개를 젓는다. 필요 없어요. 한 번은 이렇게 거절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거든요. 필요 없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권대표는 지폐를 떨군다. 나귀들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더이상 가짜 나귀가 아니다. 어쩌면 나귀도 아니다. 빨간 코와 뿔을 단 알 수 없는 짐승들, 이름 붙이기 나름인 짐승들이 발을 구르며 권대표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땅에 떨어진 오만원짜리 지폐는 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맞혀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편경이는 잠에서 깬다. 오민이가 떠난 호텔 침대에 자신이 누워 있다. 편경이는 휴대전화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 수신된 문자를 읽고, 포털에 접속해 사회면 뉴스 속보를 본다. 붉은 액체가 어지럽게 튄 바닥을 내려다보며 머리 옆쪽에 손을 짚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편경이의 머릿속에서 물풍선 같은 게 터진다. 정수리에서부터 뒷목을 거쳐 척추를 타고 오한이 흘러간다. 춥다. 아주 많이 춥다. 편경이는 그제야 자신의 등이 흠뻑 젖어 있음을 상기하고 또 어제 너무 하얀 코트를 입고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부고]

 

당사 대표이사 권베드로 회장께서 금일 별세하셨습니다.

임직원 여러분께서는 고인의 뜻을 기리며 함께 애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장례 절차를 준비중이며 세부 일정은 추후 안내드리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향월드 비서실

 

*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게 꿈같아.”

기차역까지 마중나온 도희가 편경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잠시 그대로 등을 토닥이는 도희의 손바닥이 뼈 깊숙한 데를 울리는 것 같아서, 편경이는 터지려는 눈물을 웃음으로 눌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향으로 내려간 도희가 결혼 소식을 전해왔을 때로부터. 그때 편경이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축하 메시지 한 통도 보내지 않았다.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는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편경이는 그래야 한다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희를 만날 타이밍이었다. 이제야 때가 왔다고도 표현할 수 있으려나. 편경이는 장례식장에서 맥주를 한 캔 비우고 단기 임대 방 시절 수입 맥주를 살 돈도 아까워하던 도희를 떠올렸는데, 그 흐름은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시에 이제야 도희를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필연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네모난 간판.”

편경이는 차량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도희가 자기 차를 모는구나. 어느덧 저 돈가스 체인점이 여기까지 내려왔구나. 못 보던 아파트도, 대형 마트와 근린공원도 들어섰구나.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었던 살기 좋은 도시라는 슬로건에 어울릴 법한 장면들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기억 속 풍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편경이는 반가움을 느꼈다. 풀과 모래 먼지가 많은 장소 특유의 냄새에. 도희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해지는 마음에.

주말이라 오빠가 집에 있는데 괜찮아? 불편하면 내쫓을게.”

, 완전 괜찮아. 소개시켜줘. 궁금하다, 네 남편.”

운전하는 동안 도희는 상기된 얼굴로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편경이도 건너 건너 아는 고향 친구가 소개해준 남편은 남들보다 나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품이 착하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도희에게 잘해준다고 했다. 그거면 됐지, 그거면 됐어, 완전 일등 신랑감이야, 편경이는 너스레를 떨면서 박수를 쳤다.

도희가 이룬 가정은 기차역에서 차로 십 분 정도 가면 나오는 베드타운에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밤색 티셔츠 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흰 강아지가 편경이를 보고 요란하게 짖었다. 눈동자 위로 긴 털을 곱게 빗어 묶은 모양새며 잇몸을 드러내는 기세를 마주하니 이유 없이 안심이 되었다.

도희와 편경이가 부엌 식탁에 앉아 회포를 푸는 동안 도희의 남편은 강아지에게 간식 캔을 떠 먹였다. 손잡이에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티스푼을 집어온 남편에게 도희는 안 된다고, 강아지용 숟가락을 찾아오라고 타박을 놓았다. 예쁜 숟가락 쓰면 기분좋잖아, 장난스레 항의하는 남편에게 도희가 잇몸을 드러냈다.

그랬구나, 잘했다, 힘들었겠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뒤로 넘어갈 듯 웃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며 되묻기도 하던 도희가 조용해진 건 남편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 뒤였다. 도희는 가만히 식탁을 내려다보다가 그 위로 손을 내밀었다. 편경아, 손 이리 줘봐. 한 손으로는 편경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편경이의 손등을 문지르면서 도희는 오래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도희야, 나 괜찮아.”

그때 그 일 있고 나서……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

네가 내 결혼식 안 온 거, 나는 당연히,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식탁 유리 위로 도희의 눈물이 툭 불거졌다. 눈물방울은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야아, 하지 마. 편경이는 손을 빼서 유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문질렀다. 마구 문질렀다. 더러워, 너나 하지 마, 속눈썹이 젖은 도희가 편경이의 손을 밀치며 픽 웃었다.

, 울지 마. 그건 내가 속이 좁았던 거야. 내가, 내가 미안하지.”

네가 연락하기 전에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나도 질투심이 남아 있었나봐. 미향월드 사람들이 너만 예뻐했잖아. 너는 재계약도 하고 정직원도 했잖아.”

? 질투할 게 없어서 뺑이 치는 직장인을 질투하냐? 너 진짜 웃긴다.”

미간을 찡그린 편경이 앞에서 도희는 삐질삐질 울먹였다. 그런 게 있어. 넌 모른다, . 너같은 애는 몰라. 너 진짜 멋있고 지독한 년이야. 넌 어딜 가도 잘 먹고 잘살 거야. 그렇게 말하는 도희가 너무나 잘 먹고 잘살아 보여서 편경이는 자꾸 웃음이 났다.

멋있고 지독한 건 자기면서, 미친 것. 어떻게 사랑을 했냐? 요즘 같은 때에 사랑에 성공한 게 보통 일이냐? 헛웃음이 지나가자 단전에서 느린 미소가 올라왔다. 얼마나 오랜만인지 알 수도 없는 진짜 미소.

부엌 쪽창으로 들어온 길고 노란 빛이 보였다. 잠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종류의 빛이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오민아, 사실은 나도 너랑 살고 싶었어. 식탁과 티브이를 놓을 수 있고 베란다에서 빨래를 말릴 수 있고 방이 두 개쯤 되는 그런 집에서. 주말이면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고 맛있는 밥집이나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너는 어디 대학이든, 거기가 대학이든 아니든 어느 곳으로든 가서 너의 일을 하고, 나도 내 일을 하고…… 그러다가 외출복을 벗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면, 그런 우리를 받아주는 집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느끼면서, 서로를 발견해주는 서로에게 고마워하면서, 걱정도 하고 잔소리도 하고 입맞춤도 하면서, 우리들의 이십대가 얼마나 만신창이였는지 더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기억하지도 않으면서…… 당장은 잘해줄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그런 미래가 가능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어.

억 소리 나는 돈이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고, 잘 모르는 사람도 죽일 듯이 비웃고 미워하게 되는 이런 세상에서 있잖아, 나는 우리가 잘 만나서 행복해지는 일쯤은 소설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

 

일요일 저녁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는 빈 좌석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편경이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의식적으로 숨을 쉬었다. 콧구멍이 내는 쌕, 쌕 소리에 집중하면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게 느껴졌다. 살아 있을 뿐인 기계.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동물. 인간을 설명하는 말은 그런 것으로 충분할지도 몰랐다. 짝짓기를 하고 무리 생활을 하고 약한 것을 잡아먹으며 살다가 마찬가지로 약한 것을 만들어 돌보기도 하는 그런……

세계의 아주 조그만 부품.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잊고 싶었는데, 저멀리 앞쪽에서 베드로야!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아기띠를 두르고 허리를 숙이며 승객들에게 쿠키와 스펀지 귀마개를 나누어주던 여자였다. 여자가 비틀거리며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남자아이는 목표물을 맞히기라도 하듯 편경이 옆자리의 남자에게 몸을 던져 안겼다.

베드로, 뛰지 말랬지.”

아빠랑 있을래.”

남자가 편경이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안아올렸다. 아이의 다리 끝에서 대롱거리는 조그만 운동화가 편경이의 허벅지를 스쳤다. 편경이는 최대한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창가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몸부림을 치는 아이의 발에 허벅지를 차였다. 그건 꼭 지금이야, 말을 꺼내, 하고 편경이를 채근하는 우연의 몸짓으로 느껴졌다.

편경이가 고개를 돌려 남자 쪽을 보았을 때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니다, 이제 편경이가 듣고 싶은 건 사과의 말이 아니다.

베드로를 좋아하세요?”

?”

베드로는 어떤 인물이에요?”

남자는 편경이의 시선을 피했다. 정적이 지나갔다. 그 말의 진의가 시비 거는 게 아니라는 믿음, 이 여자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단순하게 질문을 던졌을 뿐이라는 믿음, 이 상황도 신이 내린 전도의 기회일지 모른다는 믿음으로 남자가 다시 눈을 마주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쪽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남자는 아기 울음소리를 덮어쓰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사람이지요. 다혈질이고요. 넘어진 다음에 다시 일어나는 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남자의 얼굴에 경건한 그늘이 스쳤다. 편경이는 외국어 문장을 청해하는 기분 속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다혈질인 사람들이 서로를 밀쳐 넘어뜨리면서 죽자고 싸우는데, 모두가 강해서 아무도 죽지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며 영원히 살아 싸우는 격투 게임의 한 장면 같은 것을 상상했다.

베드로들로 가득찬 세상.

그런 것을 예뻐할 수 있고 그런 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요. 거의 신이 아닐까요. 그러나 편경이는 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히는 신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입장을 함부로 헤아리기 꺼림칙해졌다.

그런 신 같은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신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무엇, 어쩌면 영웅?

우리 시대의 영웅?

우리 시대의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능한 정치인일 수도 있고 그를 총으로 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매국노일 수도 있고 애국자일 수도 있겠지요. 어디선가는 그들을 신처럼 떠받들겠지요.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부활한 듯이.

하지만 정말 신을 닮은 인간이 있다면 그는 허허실실 용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일 것이다. 신은 지구의 너무도 많은 단면을 천국의 비유로 허락해버리니까. 아무거나 다 천국이라고 주워섬겨도, 설령 천국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해도, 내 귀여운 피조물들아, 사랑한단다, 말하며 눙치고 말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편경이는 하찮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졌다.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다가 인간처럼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만에 하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아주 인간적으로 해버려야지.

난 위인이 아니야.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남자로 태어나도, 부자로 태어나도, 공부를 잘했어도, 신념이 있어도.

불쌍해 보여.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보여. 불행하다고 취급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난 순순히 불행해지지 않을 거야. 사랑을 해낼 거야. 물론 순순히 하지는 않을 거야.

이 마음은 순수한 반목이 아니다. 부족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닿을 수 없는 것에 쉽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어졌으니까. 못 하는 것을 안 한다고 말하게끔 만들어졌으니까. 못 하는 것을 못 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기분은 비참하다.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편경이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선물을 줄 사람도 마음을 줄 사람도, 횡재수를 상상하며 뒤척이는 밤과 감정 쓰레기통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충만하고 안전한 종교가 되어주지 못했다. 편경이는 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을 위한 기도 같은 것을 했다. 가닿을 수 없이 먼 천국을 상상했다.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