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는 승차권을 보았다.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맞는지 확인했다. 모르는 여자가 도희의 자리에서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한껏 위로 꺾은 채였다. 그래서 여자의 얼굴이 잘 보였다. 도희 또래로 보였는데, 잠든 표정이 아이 같았다. 입을 지나치게 크게 벌리고 있었다. 팔과 다리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였다. 기차는 출발했다. 창밖의 풍경이 점점 빠르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도희는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여자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인지 여자의 얼굴만 물끄러미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잠에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들이 차례차례 스쳐갔다. 그때 그 사람은 깨어 있을 때의 표정과 똑같이 미간을 찡그린 채 잠을 잤다. 그때 그 사람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 사람은 아픈 사람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도희는 그 사람들이 적어둔 적도 없는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도희는 고개를 돌려 열차 칸에 빈자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살폈다. 한산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드문드문 몇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음 역에서 승차할 사람들이 예약해둔 자리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도희는 다른 자리에 앉는 일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기차를 타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가족은 이삼 년에 한 번씩만 얼굴을 보았다. 친구들과는 오래전에 연락이 끊어졌다. 기차를 타야 할 때에는 미리 좌석을 예약했다. 좌석을 구매하지 못할 만큼, 빈자리를 찾아 앉아야 할 만큼 다급하게 기차에 타야 할 이유들이 도희에게서 사라진 것이다. 자신의 자리로부터 몇 열 뒤 복도 쪽 자리에 앉기로 도희는 결정했다. 그 자리에 앉으려 했을 때, 그 옆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노수녀가 말을 걸었다.
“여기예요?”
본인의 자리가 맞느냐는 질문이었다.
“여기는 아닌데요.”
도희는 말끝을 흐렸다. 노수녀는 손바닥으로 좌석을 두드리며 앉으라고 했다. 사실은 자기도 이 자리가 아니라고, 복도 쪽 자리를 예약했는데 창가에 계속 앉아 있고 싶어서 물어보았다고 했다.
“나 여기 앉아도 되죠?”
노수녀가 물었다. 그럼요, 라고 도희는 답했다. 노수녀는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헤드쿠션에 머리를 기댄 채 도희는 몇 열 앞에 있는 자신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좌석 바깥으로 한쪽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복도에 팔 하나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기차가 덜컹댈 때마다 팔이 흔들렸다. 좌석 바깥으로 튀어나온 채 흔들리는 팔을 지금처럼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기차였다. 밤기차를 타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바다에 가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도희의 아빠는 대중교통을 선호하지 않았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았다. 명절에 아빠의 차를 타고 친척집에 가거나 휴가철에 교외로 반나절의 피서를 다녀오는 정도가 다였다. 창밖은 어두웠고 불빛들이 휙휙 지나갔다. 아빠의 차에 탔을 때 보았던 밤의 불빛들과 다를 것 없었는데도 도희에게는 그 불빛들이 특별해 보였다. 창에 코를 눌러 박고 싶어졌다. 열차 칸의 문을 열고 나가보고 싶어졌다. 연결 통로에서는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더욱 잘 들릴 거였다. 기차가 코너를 돌 때 아코디언처럼 연결 통로의 한쪽 면이 늘어나고 반대쪽 면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갑자기 창밖의 어둠이 너무 새까맣게 느껴졌다. 불빛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불빛이 사람을 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설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도희는 놀랐다. 도희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엄마를 쳐다봤다. 계모임을 함께 하는 동네 사람들과 한라산에 오르겠다며 작년에 사두었던 등산 바지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때 산에 다녀온 뒤 엄마는 비가 내리고 몹시 추웠으며 예상보다 훨씬 고생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능성 옷을 입고 간 덕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힘들었다고 했다. 종범이 엄마는 면으로 된 후드 점퍼를 입고 왔더라니까. 젖으면 면이 또 얼마나 무거워져. 한라산의 칼바람을 막을 정도로 엄마의 옷은 보온성이 뛰어났다. 그때와 같은 한여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는 왜 하필 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왔을까. 엄마의 앞머리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썹에 고이고 있었다. 두 뺨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입술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바람막이 점퍼를 벗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아직은. 도희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희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입을 한껏 벌린 채 자다가 깨어났을 때,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한번 더 자리를 옮긴 후에야 도희는 이 기차에 자신들의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덕에 아코디언 연결 통로를 볼 수 있었다. 연결 통로는 어두컴컴했다. 다음 칸과 이어지는 발판은 객실의 통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덜컹거렸다. 철로로부터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 위에 서 있는 건 짜릿했다. 도희는 꾸준히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의 표정이 여전히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몇 번인가는 화장실에 가겠다며 연결 통로에 들어갔다. 혼자 웃으며 발판 위를 오락가락거리다가 표정을 지우고 객차로 돌아갔다. 그러나 눈앞에서 간식 카트가 지나갔을 때는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 도희는 포장지에 싸인 햄버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는 그것을 사주었다. 슈퍼마켓에서는 어림도 없던 관용이었다. 도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스를 티셔츠에 뚝뚝 흘려가며 햄버거를 먹다가 자신이 어떤 이유로 기차에 탔는지를 기억해냈다. 곤죽이 된 햄버거를 입안에 물고만 있었다. 그 여행 내내 도희는 그랬다. 덮쳐오는 걱정 때문에 두려워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상황을 잊고 들떠버렸다. 정동진역에서 거대한 모래시계를 보았을 때에도, 해변에서 언덕 꼭대기에 여객선 모양의 호텔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도희는 엄청나다며 감탄을 내뱉었다. 엄마와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일출을 보았다. 오전이 되자 해변은 피서를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희는 바다에 뛰어들어 첨벙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되뇌었는데, 엄마가 오색 파라솔을 대여해줬다. 도희는 파라솔 아래에 앉아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모래시계에서 흐르는 모래처럼 조금씩 땅에 모래를 떨어뜨렸다. 땅에 있는 모래는 모래색이었으나 떨어지는 모래는 여러 색으로 반짝였다. 한참 동안 그 반짝임을 보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볼 때마다 도희는 다시 두려워졌다. 엄마는 파라솔을 보고 있었다. 녹슨 우산살 사이로 여름의 빛이 쏟아지는 걸 보고 있었다. 엄마는 바람막이 점퍼를 벗었다. 손부채질을 했다. 표정도 차분해져갔다. 오후에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도희와 함께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까지 했다. 시원하다, 좋다.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더이상 망설임에 사로잡힌 표정이 아니었다. 도희는 그게 무서웠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도희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연결 통로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움직임이 소중한 무언가를 깨뜨릴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기차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열차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며 엄마는 빈자리를 찾아냈다. 먼저 도희를 앉혔다. 엄마는 다른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도희는 엄마가 앉아 있는 자리만을 주시했다. 헤드쿠션 위로 볼록 튀어나온 엄마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엄마의 한쪽 팔이 복도 쪽으로 툭 떨어졌다. 도희는 엄마를 불렀다. 미동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엄마가 맡아준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희는 엄마를 향해 걸었다.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서. 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동안 보았던 어떤 표정보다도 도희는 그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니터에서 열차 내 금지행위에 대한 안내가 나오고 있었다. 기차에 모니터가 설치된 것이 언제였는지 도희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검표기가 사라진 것이 언제인지, 객차에 간식 카트가 돌아다니지 않게 된 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와 탔던 무궁화호 야간열차는 폐지되었다. 도희의 기억에 무궁화호는 다양한 객차를 보유한 열차였다. 상대적으로 사용자가 적었던 통일호와 비둘기호가 무궁화호로 흡수되었고, 노후된 새마을호의 일부도 무궁화호가 되었다. 열차마다 외관이 다른 것은 물론 실내도 다양하게 개조되어 운행됐다. 식당차는 물론이고 바둑 객차나 침대 객차, PC방 객차가 있는 열차도 있었다. 도희는 PC방 객차가 있는 열차에 탑승해본 적이 있었다. 2000년 1월 1일이었다.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도희의 가족은 기차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아빠가 먼저 나서서 일을 추진했다. 아빠는 PC방 객차를 타고 싶어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동시에 Y2K 버그가 발생했는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차에서 가족들이 서로에게 새천년을 맞이하는 이메일을 보내자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버트레인이라는 이름과 달리 PC방 객차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도희 혼자 스타크래프트를 실컷 했다. 2004년에 KTX가 개통되면서 무궁화호의 이색 객차들은 폐지 수순을 밟았다. 우등이었던 무궁화호는 완행열차가 되었다. 그때 도희는 열여덟 살이었다.